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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묘행무주 원문보기 글쓴이: 묘하
제27강 불수불탐분, 위의적정분/설우스님
불수불탐분입니다. 본문 한 번 읽어 보도록 하입시다. 『수보리여 보살이 항하의 모래수만큼 많은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한다고 하면 또 어떤 사람이 모든 법이 무아임을 알아 인욕을 성취한다고 하면 그러면 이 두 사람의 보살의 공덕은 그러면은 이 보살의 공덕은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더 뛰어나다. 수보리야 모든 보살들은 복덕을 누리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누리지 않습니까? 수보리야 보살은 지은 복덕에 탐욕을 내거나 집착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복덕을 누리지 않는다』고 설한 것이다.
오늘 이 28분을 정신을 차리고 잘 들으셔야 되. 아주 중요한 법이이오. 또 이런 말씀들은 금강경 초기에 선현기청분에서 그 수보리가 부처님께 부처님이시여 보살은 그 마음을 어떻게 항복 받아야 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러야 됩니까? 이런 질문도 하셨고. 또 사분의 모행무주분에서 보면은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 중생, 수자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무주상 보시를 한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의 복덕과 공덕은 저 허공을 동서남북을 가량할 수가 없다 이 말이죠. 허공에 동서남북을 우리가 가늠할 수가 없잖아요? 끝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와 같이 그 복덕과 공덕이 무한하다. 이런 말씀이거든요. 그 말씀을 오늘 여기 구체적으로 이렇게 더 깊게 말씀하시는 거요. 그래서 우리가 불수라는 말을 잘 이해를 해야 되 (아니 不불, 받을 受수)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야. 그러면 무엇을 받지 않는다고 그럴까? 그것 참 복덕을 주는데 복덕을 안받는다 하면 그것 좀 문제가 되잖아. 그렇죠? 그런데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는다는 거요. 왜 받지 않을까?
보살이 받지 않는다 하는 복덕은 우리가 세간에서 말하는 뭔가 이루어야 되겠고, 뭔가 성취해야 되겠고, 무엇인가 우리가 자꾸 탐진치 욕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세간 복덕을 말하는 거에요. 세간 복덕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항상 미워하는 마음과 싫어하는 마음과 질투하는 마음과 그러한 시비속에서 모은 복덕이기 때문에 그 복덕은 아무리 많아도, 그 복덕 속에 들어앉아 있어도 또 우리는 모으기를 그렇게 모으고, 그런 심성을 가지고 했기 때문에 또 미워하는 생각이 생기고 자기 스스로 상처받는 마음도 생기고 그러면서 괴로움과 고통이 생기고 그런 마음으로 모았기 때문에 또 중생의 업이 형성이 되었고, 중생의 업이 굳어 졌기 때문에 그 업으로 인해서 우리는 또 윤회를 해야 되고, 또, 윤회를 하니까 괴롭고 고통스러워지는 거요. 그렇죠?
그런 것을 뭐라 그러냐 하면은 세간의 유루복이다 그러는 거요. 세간의 유루라는 말은 (있을 有, 샐 漏루) 그럼 마치 비유를 하면은 소쿠리에 물을 담아 놓으면은 어떻게 되냐 하면은 점차적으로 빠지겠죠. 아무리 많은 물이 들어와도 세월이 가면 빠지잖아요. 그래서 그걸 유루복이라 그러고, 마치 하늘에 활을 쏘면은 올라가는 기운이 다하면 활이 도로 떨어지잖아. 그래서 그것은 다 뭐냐 하면은 마음이 텅 비어서 아주 공공적적하고
그렇게 그 무한한 지혜의 공덕을 가지고 시비라든지 탐진치라든지 이런 마음의 생멸심을 벗어나서 모은 복덕이 아니고 항상 시비속에서 탐욕속에서 그리고 분별속에서 생멸심을 가지고 모은 복은 글쎄 이 육신이 있을 때, 그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편리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지는 몰라도. 그 마음의 업성은 그 마음의 변화는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육신은 조금 즐겁겠지만도 마음의 업을 멸해주고 변화시켜 주는 공덕이 없기 때문에 보살은 정법을 아는 보살이고 정견이 선 보살이기 때문에 그런 세상에 유루복은 나는 받지를 않는다. 왜 받지 않을까?
세간의 유루복 보다는 출세간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지혜의 공덕을 나는 성취하기 위해서 그렇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은 복덕과 공덕의 차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정리 하시면 되는 거라. 그래서 보살이 받는 복은 무슨 복이냐 하면은 공덕성에 참 무루복을 받는 거에요. 무루라고 하면은 아까는 유루하고 반대되는 단어죠? 개념이. 그러니까 무루라는 것은 (없을 無, 샐 漏루)니까 통 세지를 않는다 이 말이지. 왜 통 세지를 않을까? 그 무루에 지위에 들어가는 사람은 모든 하는 행위 무위법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요.
중생심에서 할 때는 유위법을 하면서 유위법을 해서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유루복을 짓게 되는 것이고. 보살은 무위법을 하면서 무루복을 짓는다는 거야. 그러면 무위법은 어떤 것이 무위법인가? 무위법은 항상 제가 말씀 드리지만은 모든 것을 다 연생연멸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법을 잘 관찰해서 생활자체가 부처님이 가르키신 연기적인 입장에서 연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연기의 그 법이 자기하고 하나가 이루어져 생활자체가 항상 연기적인 생활을 한다는 거요. 여러분들도 금강경을 배우면서 아 이제는 연기법에 대해서 좀 알겠습니다.
이리 생각도 드시고, 스님은 항상 연생연멸을 말씀하셨다 이런 생각도 하시고. 그래요 화가 좀 나다가도 스님말씀하신대로 연생연멸이구나 하면 화를 좀 가라앉힐 수도 있구요. 여러분 나름대로 짐작하는 바가 있죠.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들이 안다고 해도 연기의 세계를 조금 이해하는 것뿐이지. 여러분들이 연기화 된 것은 아니에요. 연기를 안다고 한다는 것은 연기의 세계가 여기 있고, 나는 나의 세계가 따로 있는 거에요.
저 연기의 세계를 나는 이해하고 분석해서 아는 것이지. 그 아는 것은 자기의 그 마음에 업성을 변화 시켰고, 습관을 변화 시켰고, 모든 마음의 작용이 작용으로 인해서 상처받고 그런 그 법력을 못 얻고, 그냥 연기법이 따로 있고, 내 업은 내 업대로 따로 있고, 선비가 사서삼경을 거꾸로 외우고 바로 외우고 다 외워도 서자서요 아자아라. 글은 글이고 나는 나다. 이런 입장에 놓여 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이 금강경을 자꾸 자꾸 여러분들이 독경하는 것은 연기법과 금강경에서 가르키는 마음의 공적한 것을 여러분들이 대승의 깊은 뜻을 들어서 이해하는 정도로서 여러분들이 되면은 상당히 많이 공부가 된 거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해야 할 몫이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은 생활 속에서 그대로 연기적인 삶을 살 수 있게끔 실천수행이 되야 그때 비로서 연기적인 실천생활수행이 될 때는 자기가 항상 행복하고 평화롭고 마음에 시비가 없고 동요가 없고 인격적으로 그렇게 원만해지고 아주 지혜로워 지거든요. 그렇게 되면은 여러분들이 비로서 금강경에서 말하는 수지독송을 한 사람이다 그러는 거요. 그리고 저는 연기법을 아는 사람이다 이렇게 인정해 줄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그렇죠?
그래서 보살은 그러한 법을 닦는 것을 그것을 무위법이라 그래요. 연기법을 무위법이라 그래요. 그래서 그 연기법을 제가 저번 주에 공가중이라 그래서 연기중도를 잘 말씀을 드렸죠? 그 연기중도를 여러분들이 잘 알고 그대로 일상생활에서 실천을 잘 하고 공부하는 것을 그것을 무위법이라 그래. 함이 없이 잘 한다. 함이 없이 잘 한다는 거는 스스로 자기 마음에 시비와 동요되고 그리고 상처받고 그런 게 없이 편안하게 잘 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무위법이라 그러고.
그렇게 마음의 공덕을 갖추면은 절대 번뇌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밖으로 탐진치가 완전히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샐 것이 없어요. 오로지 진심 부처님의 법신만 있기 때문에 샐게 없다 이 말이죠. 그렇죠? 그래서 유루복이라는 것은 삼계의 복이라. 그 삼계라 그러면 욕계, 색계, 무색계잖아. 그래서 이 욕색무색계는 항상 윤회를 못 벗어나고 다소 복을 많이 지어서 행복한 거 같아도 그거는 영원한 복은 아니다는 것이죠.
금생에 잠깐 스쳐가는 복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영원한 복은 뭐죠? 보살이 짓는 무위법으로 얻는 무루의 마음의 변화를 부처의 마음을 일으킨 공덕성을 갖춘 무루복이다 이 말씀입니다. 그것을 보살은 성취하는 것이지. 이 유위법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차이점을 말하면 그거 보다는 이 보살의 무위법이 상당히 공덕이 복덕이 크다. 이 말이거든요. 그렇게 이해하면 되겠죠. 그러면 받지 않는다 그래서 불 수라 그랬고. 그 다음에 불탐이라 그랬잖아. 그렇죠? 탐하지 않는다 이 말이거든. 탐착하지 않는다.
누가 탐착하지 않을까? 유위법으로 인해서 유루복을 닦는 그 부처님의 정법과 그 마음의 공덕장을 장엄할 수 있는 그런 법이 아니고 세상에서 말하는 비교되는 거. 저거보다는 나는 재산이 많고. 저 사람보다는 나는 더 큰 차를 타고, 저 사람보다는 나는 더 좋은 명품을 입었고, 저 사람보다는 내가 더 위치가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모든 것이 더 수준이 높다. 이렇게 계속 차별하면서 서로 대조하면서 분별하면서 하는 그런 사람들은 예를 들자면은 뭔가를 계속 탐착하죠. 계속 탐착하는 거라. 왜 탐착하는냐?
그러한 입장에서 사는 사람은 그것이 영원하지 못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자꾸 붙들려고 그러는 거요. 붙들면서 그거를 가지고 하니까. 무엇이든지 그런 탐진치로 인해서 생기는 것을 자꾸 자기화 만들고 붙들고 탐착하는 거요. 그런데 보살은 그것을 탐착하지 않는다는 거요. 왜 탐착하지 않느냐 하면은 아무리 그거는 탐착해본들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영원한 공덕장을 하기 때문에 밖으로 허덕이지를 않는 거에요. 그래서 탐착하지를 않는다 그러는 거에요.
그래서 이런 것을 잘 알아서 연기적인 삶을 살고 부처님이 가르치신 그 공가중이라는 중도 연기의 입장에서 잘 일상생활을 하는 것을 뭐라 그러냐 하면은 불수삼매라고도 그래요. 또 (아니 不, 받을 受수) 받음이 없는 삼매를 한다. 받음이 없는 삼매를 한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여기에 여러분들이 보면은 보살은 그 일체법이 무아인 것을 알아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많은 인욕을 성취했다 그랬거든. 인욕을 성취 했다 그러거든.
이 경지가 보살이 이런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뭐라 그러냐 하면은요? 마음에 경계를 당해서 티끌만큼도 시비 동요, 상처받고 이렇게 마음이 움직이는 게 없는 것을 부동지를 얻었다 그러는 거요. 부동지. 그 이 부동지를 얻은것을 뭐라 그러냐 하면은 무생법인이라 그래. 이 경지를. 무생법인 할 때 인자를 도장 인자를 쓰는데 여기서는 무슨 인자를 쓰느냐 하면은 참을 인자를 써 놨잖아.
그러면 보살이 처음에는 법을 모르고, 재물에나 명예나 또, 이성간에 색욕이나, 이 오욕락이죠? 이 오욕락을 모르고 계속 받아 들이려 하고 탐착하고 그렇게 계속 사는 거에요. 그렇게 계속 오욕락을 자기 스스로 자꾸 쌓으려고 애를 쓰다가 계속 하다 보면은 그게 무상한줄을 아는 거에요. 법을 자꾸 듣다 보면은 무상해 지는 거라. 무상해 지는데 그러면 보살의 보살행을 닦아야 되겠고, 보살의 그 무위법을 닦아야 되겠다 생각하고서는 그걸 할려고 그러면은 처음에 그게 잘 안되는거라. 안됩니다. 그게.
그래서 경계가 오면은 욕심이 또 업이 발동을 해서 그 경계에 속거든요? 시비를 하다가도 막 화를 내서 시비를 하다가 중단하지. 내가 해서는 안 된다는 거 처음부터 고요한 경계에 들어가면 보살이 경계가 되는데. 그만 그 경계에 그만 매여서 한 참 휘말려 가다가. 아이고 내가 정신 차려야지. 보살의 무위법을 닦아야 되지 하면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참아야 되는 거야. 참아야 되는 것이 처음에는 많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하면서 참는 거에요.
선행을 한다든지 또 많은 우리가 적선을 한다든지. 공덕을 짓기 위해서 많은 보시 나눔을 하잖아요? 이런 것도 우리고 처음에는 잘 안 되요. 인색함이 업이 발동을 하기 때문에. 인색한 업을 참아야 될 거 아니에요. 그걸 자꾸 참다 보면은 참는 것이 나중에는 딱 자리가 잡히면은 참는 바도 없이 참는 경지에 들어가기 때문에, 처음에는 많이 참아야 되기 때문에, 인욕을 성취한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요.
그래서 보살은 이 불수삼매라 할 때, 삼매는 어떤 경계가 와도 생활하는데 마음에 경계가 일어났든지, 밖의 경계가 들어왔든지 어쨌든 모든 경계를 볼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도 그 본성 바탕이 공하다는 것을 보는 것을 삼매라 그래요. 밖에서 들어오는 경계도, 밖의 경계를 보면서도 그 경계가 다 공하는 것을, 법이 다 공하다는 것을 보는 것을 삼매라고 그러는 거요. 그래서 보살은 삼매의 경지에 들어가면은 여기서 인무아가 되고, 법무아가 되는 거에요. 여기 지금 그랬잖아. 보살은 모든 무아의 공덕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을 성취했다 하거든?
그러면 무아는 뭘 말하냐 하면은 인무아가 되고 법무아가 되야 되는거에요. 인무아가 뭘까요? 인무아라 하면은 이 모든 색상을 인무아라 할 수 있는 거에요. 그렇죠? 우리가 사람이 무엇이냐? 이렇게 물었을 때 오온이라 그러잖아요. 오온이 무엇이냐? 색수상행식이라 그러잖아요. 그렇죠? 색은 이 물질을 말하는 것이거든? 그래서 보살은 이 몸뚱이를 보든지 어떤 형상을 보면은 그 물질이 본래 공 하다는 것을 아는 거에요.
그래서 물질이 공한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물질이 공한 것을 알면은 절대 그 물질에 속지를 안하고 절대 그 물질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에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은 집착하지 않는다 이 말이에요. 어떻게 안 받아 들여. 다 우리가 오고가는 삶인데. 그렇죠?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말은 금강경에서 한 말은 그 물질 세계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인무아가 되는 거에요. 그렇죠? 인무아가 되고.
또 법무아가 되려 하면은 사람이라고 말할 때 물질적인 원소가 모인 색상으로서 몸뚱이가 있지만도 그 몸뚱이에 일어나는 정신작용이 있잖아. 그렇죠? 수상행식. 느낌과 또 그 인식하는 거와 그리고 또 판단하는 거와 그리고 분별하고. 이게 다 수상행식이잖아. 이 수상행식을 불가에서는 법이라 그래. 그런데 그 법도 받아 들이지 않는다 이 말이거든. 법도 받아 들이지 않는다는 말은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왜 법에도 집착하지 않을까? 그 법이 본래 자기 성품이 그 영원불변성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공한 줄을 알기 때문에 받아 들이지 않는다는 거요. 여러분들이 지금 마음에 수상행식이 어떤 느낌이 일어 났잖아요. 감정이 일어 났다 이 말이오. 어떤 감성적으로 감정이 일어 났잖아. 그 일어난 것이 경계로 인해서 일어 났기 때문에 경계가 지나가면 그 감성도 그냥 가라앉는거에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바람이 불면은 대 밭에 대나무가 바람이 오기 때문에 소리를 내지. 바람이 고요해 지면 대밭이 소리를 냅니까? 안내죠. 마음도 그렇다 이 말이오. 왜 그럴까? 모든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생멸심들은 그것이 실체성이 없고 그것이 텅 빈 공성이기 때문에 그래서 공한 줄을 알기 때문에 그 경계가 사라지면 바로 이 보살의 공성을 알면은 마음도 바로 경계 따라서 고요해 진다 이 말이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다 이렇게 이야기 한 것도 반야바라밀이라는 이야기를 하니까 반야바라밀이라는 또 어떤 법의 세계가 있고 반야바라밀이라는 마음의 세계가 있다고 집착을 하면은 그것이 하나의 업으로 굳어지고 형성이 되기 때문에 반야 바라밀도 알고 보면은 실체성이 없이 그것이 텅 비어 있는 공성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고 그러는 거에요.
그래서 반야심경에 三世諸佛삼세제불이. 三世諸佛삼세제불이라 하면 과거현재미래, 三世諸佛삼세제불이잖아요? 이 삼세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법에 의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그러잖아. 그렇죠? 그러면은 반야바라밀법에 의지했다 하니까 반야바라밀법이 뭐가 있다고 집착하면은 그게 또 하나의 병이되는거에요. 반야바라밀법은 텅 빈 마음에서 탐진치 일체 번뇌가 없이 마음이 공적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그 경계 따라서 지혜롭게 지혜를 잘 쓰는 것을 그냥 반야바라밀의 지혜작용일 뿐이지.
그 반야바라밀이라는 또 법이 하나 만들어서 틀을 짜면은 안 된다는 거요. 그래서 그 반야바라밀법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한 실체가 없고 텅 빈 법으로서 얻은 것이 뭐냐 하냐 하면은 아뇩다라 삼먁삼보리거든. 그러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반야바라밀의 텅 빈 공성으로서 얻어지는 지혜이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본래 틀을 짜서 만들어진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고 그것도 텅 비었다는 거요.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텅 빈 줄 알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사람이 결국은 반야바라밀법이 어떻다는 것을 안다는거요. 그래서 반야심경에는 삼세제불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는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사람은 반야바라밀법이 본래 모든 정해진 법이 없이, 틀이 짜여진 것도 없고, 그냥 그때 그때 지혜롭게 아주 집착 없이 그냥 자비롭게, 아주 대자대비로 중생을 위해서 오직 그때그때 쓰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다. 이렇게 반야심경에 이야기 한 거에요. 이해가 갑니까? 네.
그래서 그런 것을 잘 생활화 하고 자기화 된 거를 뭐라 그러냐 하면은 그것을 不修三昧불수삼매라고 그런다. 또 금강경을 하다 보면은 不修三昧불수삼매도 말씀 드리고. 不受不施불수불시라는 말이 있어요. 不受不施불수불시. 받지 않는다 하는 거거든. 처음에 여기도 불수라는 말을 했잖아요. 받지 않는다고 그렇죠? 그러면 받지 않는 다는 말은 우리의 본래 청정한 자성자리에는 일체 탐진치라든지, 이런 형상이나, 업상이나, 법상이나, 이런 것을 도저히 받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일체 받지 않는다. 그 받지 않는 자리를 다른 말로 뭐라고 하죠? 그거를 법신불의 공덕장이라 그러는 거요. 법신불을 제가 다른 말로 비유해서 이 허공에 무엇과도 같다 그랬죠? 전류와도 같다 그랬잖아. 전류는 전기는 분명히 있는데 보려면 볼 수는 없죠. 우리에게 자성 청정한 법신불이 있는데, 보려고 하면은 볼 수는 없어요. 그거는 경계가 왔을 때 이 마음에 그 지혜의 문이 열린 사람은 경계가 왔을 때, 그 경계를 잘 지혜롭게 잘 대하는 거에요. 그게 법신불의 작용이거든?
그 작용을 다른 말로는 뭐라 그러죠? 형상으로 잘 드러내고 잘 처리하는 거를 화신불이라 그러는 거요. 그리고 그 화신불이 법신불의 역할을 잘 할 수 있게끔 복덕과 공덕을 잘 갖춘 것을 뭐라 그러죠? 그거를 보신불이라 그러는 거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잘 아셔야 되. 이거를 잘 아시는 보살은 일상생활 속에서 중생들에게 다 베풀고, 또 중생들에게 오직 자비로서 그 수준에 맞춰서, 그 경계에 맞춰서 아주 남을 배려하고, 그저 남을 항상 우선적으로 먼저 이해해 줄려고 하는 거.
이런 생활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뭣과도 같으냐 하면은 선가에서는 조도와 같다 그래요. (새 鳥조, 길 道도) 새가 날라가는 거와 같이 마음 용심을 잘 쓴다. 그러는 거요. 새가 날라가는 거 같이 마음 용심을 잘 쓴다는 거는 우리 본 성품이 허공과 같다 그랬잖아. 그렇죠? 그러니까 새가 그 허공을 자유자재로 휘젓고 돌아다녀도 그 허공 바탕을 더럽히거나 상처내거나 어지럽히거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 말이오. 우리 마음 바탕을 조금도 상처 내거나 괴롭히거나 고통스럽게 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거요.
그러니까 이런 것을 잘 아는 것을 보살이 짓는 일체 무아법을 알아서 일체인욕법을 성취해서 보살은 이러한 그 무위법의 무루공덕을 성취했기 때문에 그 정법을 몰랐을 때 탐착하고 집착하고 업을 형성시키는 그런 유위법의 무루법은 보살은 탐착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뭐라 했습니까? 밑에 보면은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물었어요.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누리지 않습니까?
그 좋은 복덕을. 세상사람들은 복덕을 마구 쌓으려고 그냥 다른 사람 가슴에 상처도 주고, 본의 아니게 아픔도 주고, 남의 눈에 눈물도 내고요. 그러면서 그러잖아요. 그런데 보살이 볼 때는 그게, 열심히 살고 우리가 복덕을 짓고 우리가 공덕을 짓지만 자기 스스로 자기 복덕이 텅 비어있는 공의 이치를 알고 해야 된다는 것이지. 모르고 하면은 그 복덕을 짓는다는 그 자체가 복이 오히려 자기를 해친다 이 말이오.
그래서 잣나비가 무엇과 같으냐 하면은 불빛을 찾아갈 때는 잣나비가 다른 잣나비보다도 내가 먼저 가야겠다고 눈에 열불을 세워 가면서 쫓아 가거든요. 그래서 밤새도록 그 앞에서 허우적거리거든요. 좋다고. 재미있다고. 즐겁다고. 오욕락이 그렇다 이 말이오. 그런데 새벽에 가보면 그 잣나비가 다 떨어져 죽어있잖아. 보살은 그 이치를 안다는 거요.
그래서 보살은 이렇게 모든 복을 성취하고 공덕을 성취하고 이렇게 하면서도 그것이 본래 텅 빈 것인 줄 알아서 집착을 안 하기 때문에 그 복덕과 그 많은 복을 자꾸 무주상 보시를 해요. 자꾸 나눠 주는 거야. 그 나눠주는 것이 처음에는 힘들고 자기 인색함 때문에 힘들잖아요. 그런데 자꾸 인욕하면서 참으면서 그걸 자꾸 성취하는 거에요. 그래 보살은 그런 이치를 알기 때문에 유루의 복덕은 내가 탐착하거나 집착하거나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거요.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의 가장 사랑하는 누가 있죠? 라후라, 아들이 하나 있었잖아요. 그래서 그 부처님이 그 라후라를 잘 가르쳐야 되겠다 싶어서 그래서 부처님 10대 제자 중에서 지혜가 아주 뛰어난 누구? 사리불이죠. 사리불에게 그대가 저 어린 라후라를 잘 가르쳤으면 좋겠다 그런 거에요. 예. 제가 좀 가르치겠습니다. 그래서 라후라를 데리고 어디를 갔느냐 하면은 저 시중에 나가서 절에서 필요한 양식이나 필요한 것을 화주를 동냥을 해서 북태산처럼 짊어지고 오는데, 누구에게 짊어지게 했냐 하면은 라후라에게 짊어지게 했어요.
그래 어린 나이에 라후라가 그 북태산을 짊어지니까 그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땀을 뻘뻘 흘리는 거요. 그런데 라후라가 생각하기를 내가 이렇게 북태산 같은 짐을 짊어지고 힘들지만 내 부친이 누구냐? 석가모니 부처님 아니시냐? 석가모니 부처님이 참 대자대비 하신 분의 내가 그런 모든 그 피와 살을 이어받은 내가 자손인데 나는 공부를 해서 석가모니 부처님보다도 아버지보다도 더 훌륭한 보살이 되야 되겠다.
이리 생각을 하면서 내가 이 짐을 짊어지고 고통스럽지만 이 인욕속에서 보살의 공덕을 내가 지어서 일체중생을 끝없이 끝없이 끝없는 일체중생을 내가 다 법을 가르치고, 공덕을 짓게끔 만들고, 보살행을 해야 되겠다 하고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짊어지고 가는 거요. 가니까. 조금 가니까. 사리불이 아이고 그 짊이 대단히 무겁겠습니다. 이리 내 놓으세요. 제가 짊어 지고 가야 되겠습니다. 하고는 사리불이 그 짐을 짊어진 거에요.
사리불이 짊어지고 가니까. 라후라가 뒤에 따라가면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짐을 안 지고 가니까 편안하니 좋거든. 야~ 아까 그 내가 참 보살행을 한다는 것은 짐을 짊어지고 가는 것처럼 힘든 수행이고, 힘든 생활인데. 그냥 내가 내 마음 열반에 들어서 내 스스로 조용하니 자락을 느끼면서 소승의 법으로서 열반에 공적하게 번뇌망상 없이 조용하니 평화롭게 사는 것도 좋겠다 이리 생각을 하는 거에요. 뒤에 따라가면서.
그래 조금 가니까 사리불이 짐을 내려놓으면서 이놈아 짐 이거 네가 져라. 그러거든. 조금 전만해도 아이고 무겁겠습니다 하고 그러 더만 말투가 영 달라 져버리거든. 그래서 라후라가 사리불에게 아니 스님, 아까는 점잖게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요번엔 왜 그러십니까? 그러니까. 이 놈아, 아까는 네가 보살의 큰 원을 세워 보살공덕장을 네가 그 성취하려고, 그 세세생생토록 일체 중생들을 부처님의 법을 전법하고, 그 교화하고 ,그런 원을 세웠기 때문에 나는 지금 아라한이지 않느냐? 아라한 보다도 훨씬 높은 사람이 누구냐? 그는 보살이라는 거요. 보살.
보살은 아라한보다도 훨씬 경지가 높은 사람이잖아. 그렇죠? 그러니까 이놈아 내가 아라한인데 어떻게 보살에게 짐을 지 수가 있느냐? 내가 짊어지고 가야지. 그래서 자기가 짐을 짊어지고 가는데 뒤에 따라오면서 아라한 소승의 생각을 가지거든. 그러니까 아라한으로 말할거 같으면 이 놈아, 내가 네 보다는 훨씬 선배고 훌륭하지. 이놈아 네가 짐을 져야지. 그러면서 짐을 덤썩 두고 가는 거요.
그와 같이 우리는 이 부처님의 법을 해도 항상 보살의 법을 배워야 되고, 보살심을 가져야 되고, 보살행을 해야 된다는 거요. 이런 것들이 다 뭐냐 하면은 여러분들이 법을 들어도 이 머리로 불법을 배우려 하지 마라는 거요. 내가. 머리불교 된 사람들은 법문을 들으러 가면 오늘은 어제 안 들었던 새로운 말을 하는 것 있으면 내가 들어 챙겨야 되겠다. 이 생각을 하고, 마음으로 법을 듣는 사람은 항상 그 깊은 심지의 뜻을 자꾸 받아 들여서 내 마음에 실천하지 못하는 이 마음을 자꾸 변화 시켜서 업을 멸하려고 하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서 보살의 원을 성취하려고 하는 그런 생각으로 법문을 듣는데.
머리 불교를 자꾸 하는 사람은 어제와 똑 같은 얘기를 하는구나. 아이고 오늘은 시간 소비했구나. 이리 생각을 하는 거요. 자꾸 뭔가를 새로운 언어와 단어 이런 것만 생각하지, 자기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서 그 업장을 멸하려고 하는 그런 큰 깊은 신심의 보살의 공덕을 발심하려고 하는 생각이 없다 이 말이야. 그렇게 하면은 안 된다는 거요. 그러죠?
그래서 오늘은 짧으니까 29품을 한 번 더 나가 봅시다. 29품에 보면은 뭐라 했느냐 하면은 『수보리여. 어떤 사람이 여래는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며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 사람은 내가 설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라는 것은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오고 감이 없기 때문에 여래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렇죠?
그러면 여기서 여래라는 말을 우리가 잘 이해를 해야 됩니다. 제가 조금 전에 뭐라고 했습니까? 세간에 우리가 물질적으로 풍부한 것을 누리기 위해서 마음을 많이 탁하게 쓰고, 또 마음을 많이 업을 많이 지었잖아 그죠? 그 업을 많이 지은 그 마음은 본래 나하고 친한 마음이 아니었어요. 내가 속아서 어리석어서 그 탐진치라는 마음을 내가 친해진 거거든.
그런면 그것은 보살의 원을 가지면 탐진치의 지금 친하고 있는 마음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건 냉정하게 보내야 되겠죠. 딱 보내야 되겠죠. 칼로 끊듯이 탁 끊어야 되겠죠. 그럼 누구하고 또 친해집니까? 우리 본래 아주 보살의 여래의 마음과 친해지는 거요. 그렇죠? 여래의 마음과 친해지는 거라. 그래서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은 익은 것은 뭐라 한다? 익은 것은 설게 만들고, 선 것은 익게 만든다 그러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익은 것은 탐진치, 그 우리 업보, 그 업성, 이런 것을 설게 만들라 이 말이야. 좀 보내라. 고만 친해라 이 말이야. 그리고 여태까지 친하지 아니하고 저 멀리 외롭게 던져 놨던 우리 본래 여래성 있잖아. 공덕성, 그 마음. 그거 좀 친해라 이 말이야. 설익은 것을 좀 익게 만들라 이 말이거든. 그러면 여기서 여래라는 것은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랬잖아. 그럼 여래라는 말을 잘 개념을 정리 해야 되. 여래는 여여하다고 해서 여래라 그러는 거요.
여여한것이 뭐였죠? 아까 말씀 드렸듯이 불수삼매라든지, 불수불탐이라든지. 이런 말씀을 다 아까 드렸죠? 그러한 보살의 그 마음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경계에 따라 속아서 집착으로 인해서 마음에 상처 주는 우리 마음에 생멸심을 일으켰는데. 그건 내가 본래 친한 것이 아니고, 보내야 되고, 보내고 나면은 그 본래 바탕은 아주 무심해, 맑고 밝은 그런 마음이 드러나 보이는 거요.
드러나 보이는데. 그러한 드러나 보이는 것이 여여하다 그럽니다. 그럼 그 여여한 것은 드러나되 드러나는 바가 없이 드러나는 거에요. 또 아주 밝되. 밝은 바가 없이 밝은 거에요. 또 지혜롭되 지혜로운 바가 없이 지혜롭다는 거요. 그거를 여여하다 그러는 거요. 그러면 왜 지혜롭되 지혜로운 바가 없고, 밝되 밝은 바가 없고, 드러나되 드러난 바가 없다 하느냐 하면은. 일체 모든 내가 탐착하고, 집착하고, 애착하는 그런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냥 자유롭게 일어나고 자유롭게 한다는 거요.
그래서 여래는 사실은 저 어디에서 오고 가는 것이 아니고. 본래 완벽하게 본래 완전하게 나의 청정한 자성의 공덕이 그렇게 다 갖추어져 있는 거요. 있는데 이것을 비유를 하자면 마치 저 하늘의 달은 둥그렇게 지혜의 달이 있는데. 물에 달이 뜨는 물이 있고, 달이 안 뜨는 물이 있죠. 달이 뜨지 않는 물은 왜 안 뜰까요? 흐려서 그렇잖아. 흐린 것은 다 뭐죠? 세상의 유위법과 유루복으로 인한 것이고, 그리고 탐진치고 그렇죠? 오욕락에 집착된 것이구요.
그러면 그 찌꺼기 들이 많아서 물이 흐리잖아. 그러면 달이 못 드러나는 거요. 달이 없는 것이지. 그런데 그런 것들이 다 무상하고 공하고 비었다는 것을 알면은 그 찌꺼기가 없잖아요. 없으면 달이 둥실 뜨죠. 그러니까 달이 뜨고 안 뜨고는 나에게 부처가 보이고 안 보이고는 내 마음이 중생심 일 때는 부처가 물에 달이 숨어 버리듯이. 내가 그런 집착을 일으키면은 마음의 상처를 일으키면은 부처가 안보이는거에요. 여래가 안 보인다 이 말이오.
그런데 그런 것이 다 없어지면 청정해 지면 여래가 보이죠. 그래서 중생은 어리석으면은 여래가 오고 간다고 이야기를 하고, 지혜가 밝은 부처의 눈으로 보면은 여래는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야. 스스로 번뇌망상으로 인해서 보고 못보고 자기에게 달렸다 이 말이오. 알겠습니까? 그래서 여래는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다. 여래를 오고 간다 하면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니라.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요. 오늘 법문은 여기에서 정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불 하입시다.
출처 :진불선원 () 선불교대학 원문보기▶ 글쓴이 : 법흥(法興)
첫댓글 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_()_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