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여간 효자가 아니어서 추석이나 설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제 식구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와서 명절을 보내고 올라가곤 했었답니다 우아한 며느리와 공주같은 손녀 딸을 볼 때마다 노부부는 동네 사람들에게 늘 으쓱대는 기분을 느끼곤 하였지요. 아들 내외는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아버님 어머님 시골에서 이렇게 고생하지 마시고 저희와 함께 서울로 가시지요.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라고 말했답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아니다. 우리같은 늙은이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서울이 다 무에야. 그냥 이렇게 살다가 고향땅에 묻힐란다" 하고 사양했더랍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노부부는 언젠가는 서울의 강남에 있는 아파트에서 아들 덕택에 호사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흐뭇해 했더랍니다. 그러다가 노 부부 중 아내가 먼저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상을 치르는 내내 아들 내외가 어찌나 애통하게 엉엉우는지 동네사람들도 모두 가슴이 찡하였답니다. 초상을 치르고 나자 아들 내외는 또다시 간곡하게 청 하였답니다.
"아버님, 이제 어머님도 가시었으니 어쩌시렵니까? 고향집 정리하시고 서울로 올라가시어 저희와 함께 사시도록 하시지요.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할멈도 떠나간 이제, 그도 그럴것이다 싶어 노인은 몇 날을 생각타 결심을 하였답니다. 논밭과 야산등…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갔답니다. 가산을 정리한 돈은 아들 내외에게 주어 32평아파트에서 42평 아파트로 옮기고 노인의 서울생활은 처음엔 그런대로 평안하였답니다. 그즈음 아들은 과장에서 부장으로 승진할 때도 되었고, 회사일이 워낙 바쁘기도 하였으므로 매일을 새벽에 출근하였다가 밤12시가 넘어서야 퇴근 하는 일과가 몇 달이고 계속되고 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들이 모처럼 일찍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보니 집안이 썰렁하니 비어 있더래요. 다들 어디 갔나? 하던 차에 식탁위에 있는아내의 메모를 보았더래요. 메모에.. - 여보 우린 모처럼 외식하러 나가요. 식사 안하고 퇴근하였다면 전기밥솥에 밥있고 냉장고 뒤져 반찬찾아 드세요. 좀 늦을지도 몰라요- 가족을 기다리는 동안 냉장고 속을 뒤져 맥주를 찾아서 마시고 있자니 현관쪽이 시끌해지며 나갔던 식구들이 돌아오는 기척을 느꼈습니다. 아, 그런데 들어오는 걸 보니 아내와 딸 둘만 보이는게 아니겠어요? "왜 둘 만이지?" "둘 만이라니? 요기 밍키도 있잖아?
아내는 강아지를 남편의 눈앞에 들어 보이며 활짝 웃었습니다.
"아니, 아버님은?" "오잉? 아버님 집에 안계셔? 어디 노인정이라도 가셔서 놀고 계신가?" "아버님이 매일 이렇게 늦게 들어오시나?" 남편이 약간 걱정스런 얼굴로 묻자 "웅, 으응…" 아내는 더듬거렸습니다.. 사실 아내는 평소에 노인이 몇 시에 나가서 몇 시에 들어오는지 도통 생각이 안납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노인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노인이 들어오실 때까지 자지않고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서재의 책상앞에 앉았습니다. 아내는 벌써 잠들었나 봅니다. 그때 아들은 책상 한 켠에 정성들여 접혀진 쪽지를 발견하였습니다. 볼펜으로 꾸~욱 꾹 눌러 쓴 글씨… 무슨 한이라도 맺힌듯이 종이가 찢어지도록 꾹꾹 눌러 쓴 글씨… 아버지의 필적이 틀림없었습니다. 잘있거라 3번아, 6번은 간다...
자정도 넘어 밤은 깊어만 갑니다. 노인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아들은 머리를 쥐어짜고 생각에 잠깁니다. "잘 있거라 3번아, 6번은 간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이 시간까지 아버지가 귀가 안 하신걸 보면 가출하신 것이 틀림 없는 것 같은데...
한데…왜, 왜, 왜…??? 아들은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평소에 햇볕이 잘 드는 방이 아니어서 그런지 자정 넘은 오밤중이긴 하지만 왠지 우중충하다는 느낌이 드는 방이었습니다. 이쪽 벽에서 저쪽 벽으로 빨랫줄이 쳐져 있었습니다. 빨랫 줄에는 팬티 두 장과 런닝셔츠 두 벌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마 아버지 것이겠지요. 방 한켠에는 어린 딸의 옷장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어린 딸이 이제 그만 지겨워한다고 옷장을 더 예쁜 것으로 바꿔주고 나서 아마 이 헌옷장을 아버지 몫으로 돌린 모양입니다. 옷장 위에는 어머니의 사진이 놓여있습니다. 참으로 착하디 착한 얼굴입니다. 상치를 때 영정으로 사용하던 사진입니다. 방구석에 소반이 있었습니다. 소반 위에는 멸치 볶음, 쇠고기 장조림, 신 김치등이 뚜껑있는 보시기가 몇 개 있었고 마시다가 반 병 정도 비어있는 소주병이 있었습니다.
아아~~, 아버지… 아들도 있고, 며느리도 있고, 손녀딸도 있는데 아버지는 그 동안 이 골방에서 홀로 식사를 하시고 계셨던가요? 아아~~, 아버지… 며느리도 있고 세탁기도 있는데… 아버지는 팬티와 런닝을 손수빨고 이 방에서 손수 말리고 계셨던가요…? 아들은 무언가 자신의 가슴을 후벼파고 싶은 자책감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날이 부옇게 밝아오자 아들은 아파트 주변을 샅샅이 뒤지며 혹시나 노인이 어디선가 밤을 지새운 흔적이 있는가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파출소에 가서는 노인의 가출을 신고하였습니다. 고향에 이장 어른에게도 전화를 걸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종적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3번아 잘있거라! 6번은 간다…!
이 암호를 우선 풀어야 아버님을 찾을 수 있을 것같은 마음에 아들은 조바심을 쳤습니다 직장동료, 상사…대학동창등…. 현명하다는 사람은 다 찾아 이 암호를 풀려고 노력했으나 아무도 그 암호를 푸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몇 날 며 칠이 지났습니다. 아들은 이제 부장 진급이고 뭐고 아무 생각없고… 오로지 아버님 생각만 하였습니다. 어느날 저녁… 술 한 잔에 애잔한 마음을 달래고 퇴근하는 길이었습니다. 자네 김아무개 영감 자제가 아니던가? 아파트 입구에서 어떤 영감님이 아들을 불러 세웠습니다. 아, 예…그런데 어르신은 누구십니까? 웅, 난 김영감 친굴세… 근데 요즘 왜 김영감이 안뵈네? 그리구 자넨 왜 그리 안색이 안좋은가? 그래서 아들은 약간 창피하긴 했지만 아버지께서 가출한 얘기를 간단히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감님에게 이제는 유서가 되다시피한 그 암호문을 내밀며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물어 보았습니다. 영감님은 그 쪽지를 한동안 보더니 돌려주며 말했습니다
그리고 김영감 자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6번이라 하고는 한숨짓곤 하였지….. 그렇게 쉬운것도 자네는 풀지 못하나? 에잉…" 아 흐흐흐흑… 아들은 그만 눈물을 주루루룩 흘리고 말았습니다. 아, 아버지 죄송합니다…. 어찌 아버지가 6번입니까… 1번, 아니 0번 이지요… 돌아서는 아들의 등 뒤로 영감님이 한 마디 했습니다. 고향엔 면목없고 창피해서 아니 가셨을 거여.. 집 근처에도 없을거고.. 내일부터 서울역 지하철부터 찾아보자구... 내 함께 가줌세.....
아버지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몇 번입니까..?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아버지 여러분 ... 당신은 몇 번이며 당신의 아버지는 몇 번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