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얼어 있었다
수십마리 양이 밟고 지나가도 깨지지 않을 만큼
튼튼히
언 채
무언가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건 어지간해선 깨지지 않았고
겨울 내내 얼어 있었다
많은 것이 그 위를 걸어 지나갔다
나도 걸어갔고 너는 벌써 어젠가 그저께 이미
얼어 있었을 때 맑았던 하늘이
녹아서도 맑진 않고
그러나 아무리 더러운 하늘도
얼어 있을 땐 무조건 맑다
하늘은 얼어 있었고
라디오에선 마감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잠드는 데 필요한 공간은 다들
이만큼이 전부
말끝마다 욕뿐이던 입들 다
하얗게 얼어붙었다
입만 열면 얼음이 언다
하얀 종이는
맑은 종이
낡고 맑은 종이 울린다
꿈을 한자 한자씩 써넣으면 울리는 종이
손바닥을 갖다 대면
손바닥이 달라붙고
발바닥을 갖다 되면
발바닥이 쩍쩍 달라붙는
종이, 종이 한장만큼의 공감만 있으면 된다
그거면 죽은 내가 들어가기
충분해
우린 겨우 이 정도밖엔 안 된다
안 되지만
죽어라 짓밟고 발아래 가둬도
기를 쓰고 비집고 나오는 그것
그것만 있으면 된다
그것만 있으면 오늘 밤도 어떻게든
건너가지겠지
[하얀 사슴 연못],창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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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종이 / 황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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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9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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