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말씀(2023. 6.18) 말씀 / 누가복음 18:35-43
변화하고 성장하라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제 봄이 지나고 본격 여름이 시작된 듯 무덥습니다. 온 세상이 신록이고 여기저기 꽃 축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수국이 볼만합니다. 저는 한국에 살면서 사계절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하나도 변화되지 않고 똑같은 모양 똑같은 형태를 유지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어쩌면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도 모르고, 우리의 생각도 멈추고, 훌륭한 시인들도 많이 나오지 않을 것이고, 정말 따분하고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연도 사람도 변해야 합니다. 날마다 달라져야 합니다. 생각도 참신하게 달라지고 말도 바뀌고, 태도로 달라지고... 변해야 보는 사람도 즐겁고 행복합니다. 변하지 않고 달라지지 않으면 서로 갑갑하고 힘듭니다. 날씨가 무더워진다 할지라도 배움의 열정이 식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책도 많이 읽고, 성경 말씀도 열심히 묵상하고, 달라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톰 피터(Tom Peter)라는 분이 쓴 「최고를 찾아서」(In Search of Excellence)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미국에서 가장 잘 운영되는 43개 기업들을 보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발간된 후 2년밖에 안 된 시점에서 30%가 넘는 43개 기업 중에 14개 기업이 재정적으로 대단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비즈니스 위크지가 그 이유를 분석한 결과는 '변화에 대한 반응과 응수의 실패'라고 밝혔습니다. 다시 말하면 현상유지, 현실 안주가 실패의 원인 이었다는 것입니다. 켄 블랑카드(Ken Blancard)라는 교수는 '사람은 선천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한다' - 변화에 대한 호기심은 있으나, 즉 변화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그 변화를 두려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지식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둘째, 자세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셋째, 행동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넷째, 조직의 변화를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현상유지, 현실 안주가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고 공부하게 될 ‘나를 향해 걷는 열걸음’ 이란 책 내용 중에 데미안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는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고자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남의 것이 아닌 원초적인 자기 것을 붙들고 산다는 뜻인데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이유는 생각하고 숙고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수고가 따른 다는 것입니다. 게으름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싫어해서 자기 것을 개발해서 창조 해 내는 것보다 남이 해놓은 것을 수입해서 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습관화 되면 자기는 성장할 시간이 멈추고 도태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안주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서 있으면 안고 싶고, 안아 있으면 눞고 싶고,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면 그대로 더 눕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을 허용하면 나태해집니다. 아직도 가야할 길의 저자 스카펙은 사랑의 반대말은 게으름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의지적 노력으로 끊임없이 게으름이 우리의 성장을 가로막는 엔트로피의 힘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학생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그런데 어떻게 하면 부지런히 일어날 수 있을까요? 방법이 없습니다. 박차고 일어나면 됩니다. 방법이 아니라 게으름을 박차고 일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청년 시절부터 새벽을 깨우며 부지런 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을 많이 하였습니다. 게으름이 나를 무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저절로 일어나기 때문에 게으름과 싸우지는 않습니다. 어떻든 우리는 성장하고 잘전하는 사람이 되려면 안일과 게으름의 투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엔트로피 힘에 의해서 생각도 삶도 정체되고 무너져내리게 됩니다. 핍박은 없어도 이런 게으름 때문에 우리 영혼이 곤고와 고통을 당합니다. 물론 삶의 질도 떨어집니다. 현실 안주, 현상유지는 기독교의 정신도 아니고, 성경적 인생 철학도 아닙니다. 성경은 끊임없는 도전과 성장을 말하고 있고, 일하기 싫은 사람은 밥도 먹지 말라는 말도 있고,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라(히 10:39)는 말도 있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라(엡 4:13)는 말도 있습니다. 또 디모데 전서 4:15절에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또 누가복음 2:52절을 보면 "예수는 그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자라고 변하고 성장하셨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는 것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보기도 좋습니다. 만일에 아이가 태어나서 1년이 되고 2년이 되고 3년이 되는데 말도 안 하고, 뒤집고 기도 일어서는 과정이 없으면 어떻겠습니까? 근심이 밀려올 것입니다. 그런데 백일 된 녀석이 웃고, 옹알 되고, 꼼작꼼작하면 얼마나 이쁘고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서울에 사는 엘리사벳이 한번 씩 주아의 성장 사진을 보내옵니다. 저번에는 애통하느 자는 복이 있나니 큐티 말씀에 답글을 달면서 ‘애통하는 주아’라고 하며 일어나 애쓰는 주아의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왜 애 통해? 똥 쌋어?“ 그랬더니 ㅋㅋ 아니라면서 성장하느라고 몸부림친답니다. 그래서 ”너도 성장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어?“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나 자기는 잠사 멈추고 있답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도 성장하려고 몸부림치는데 멈추면 안돼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이렇게 모든 동물이나 식물이나 살아있는 것은 변하고 성장하게 만드셨습니다. 창조물은 그렇게 끊임없이 변하고 성장해 가야 정상입니다. 그것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보증입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의식 갖고 배우려는 마음입니다. 예수님도 내게 오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성장 발전 변화에 중요한 것은 배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밥 잘 먹고 세월이 간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엔트로피의 흘러내리는 힘은 저절로 되지만 성장 발전 진화는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리고 일어서서 한 걸음 앞으로 내 디뎌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 년 수가 10년 20년이 문제가 아닙니다. 집사 장로가 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성경을 많이 알아도 삶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년 수와 경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 히브리서 5: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때가 되면 마땅히 선생이 되어 모든 면에서 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의 될 시기에도 성장하지 못하면 덕이 안 되고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하지 않으면 본인도 힘듭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많은 잡음만 일어나고 세상 한탄만 하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문제입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세상에 좋은 본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소경 거지가 나옵니다. 이 사람에게서 우리는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그의 인생은 구걸하는 인생입니다. 빌어먹는 밑바닦 인생입니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보통 사람처럼 살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의 사람입니다. 거기다 소경으로 더이상 인생의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악 조건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운명적으로 여기며 자신의 형편에 안주하며 살 수 있었슨다. 보통은 대게 다 그렇게 체념하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지는 달랐습니다.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는데 돈을 벌어 먹고 사는데 머물지 않았습니다. 구걸하여 먹고 사는 현상유지,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머물면 평생 거지 인생이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 소경 거지는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절호의 기회로 여겼습니다.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거지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왜 그렇겠습니까? 비록 소경이지만 정말 사람답게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간청 소리를 들으시고, 머물러 서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41) 소경거지는 분명히 말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동정 받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고 분명히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는 거지였지만 삶의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돈보다 보는 것! 예수님께서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는 곧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는 일어나 주님을 경배했습니다. 43절에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그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비록 소경 거지이지만 성숙한 믿음으로 일어서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좋은 영향을 주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멋지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인생을 살려면 끝없이 도전하여 변하고 성장해 가야 합니다. 아무리 현재 문제가 없고, 모든 일이 형통하고 좋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더 변하고 발전해 가야 합니다. 이렇게 조금만이라도 변화를 느낄 때 우리 자신도 세상도 살맛나게 됩니다. 반대로 자족감과 현상유지 현실 안 주에 머물러 버리면 권태가 오고 재미가 없어집니다. 마침내는 있는 것도 다 빼앗기도 퇴보하는 인생이 됩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그대로 땅에 묻어두었던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현상 유지는 얼마나 악 한 일인가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이 문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변화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 것으로만 안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원만 받고 구원만 유지하고 있지, 구원받은 후에 삶의 성숙까지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벧후1:4~8을 보면 우리의 믿음이 보배로운 믿음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성장해가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제시 합니다.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단지 믿는다는데 머물지 말고 믿음을 바탕으로 계속 성장해 가라는 것입니다. 믿음에-덕에, 덕- 지식, 지식에-절제, 절제에-인내, 인내에-경건. 겅건에-형제우애, 형제우애에- 사랑. 그런데 여기를 보면 '이러므로 더욱 힘써'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던지 힘써야 변하고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장도 마찬가지로 힘을 써야 합니다. 한 말씀 더 들으려고 노력하고, 그 뜻이 무엇인가 알려고 노력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계속 자라고 성숙해져서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이 달라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만이 힘을 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을 선도하며 줄 것이 있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속성입니다. 유명한 안소니 멜로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청년 시절에는 세계를 변화시켜 주십사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중년이 되어서는 내 이웃을 변화시켜 주십사고 기도를 드렸다. 70이 된 오늘은 난 오직 하나 '하나님이여, 나를 변화시켜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저와 여러분들도 이렇게 변화를 위한 기도 제목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돈을 많이 쓰고 이사를 하고, 좋은 집에 살아도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달라지는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달라지만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상대방이 달라지고, 자녀가 달라지고, 사회가 달라지고, 초막집도 궁궐 같고, 남편이 왕 같고, 아내는 왕비 같아 집니다. 오스카 와일드가 쓴 우화적 단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시고 은혜를 베푸셨는데, 하루는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시고자 몸소 방문하셨습니다. 어떤 곳에 갔더니 말도 못하며 늘어진 주정뱅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주정뱅이가 되었나?"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원래 절름발이에다 거지였소, 그 때에는 손만 내밀면 얻어먹을 수도 있어서 편했지요, 아 그런데 두 발이 다 성하고 보니 아무도 안 도와줍디다. 스스로 벌어먹고 살다보니 힘들어서 술을 먹게 되어 주정뱅이가 됐지요." 또 한 곳에 가니까 아주 추한 창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시 본 것 같아서 "너는 어떻게 이렇듯 비참해졌느냐?" 그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본래 창녀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게 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그리고 새 사람이 되었지요. 하지만 막상 새 사람이 되어서 깨끗이 살아보니까 너무도 따분하고, 재미도 없고, 행복도 없고, 영 진저리가 나서 도대체 살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 다시 창녀가 되어 지내다보니 이 꼴이 되었지요, 뭐" 또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 가보니 불량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치고 받는 깡패지요.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이렇게 되었나?"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본래 장님이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제 눈을 뜨게 해주셨지요. 그 때는 너무도 감사했지요. 하지만 막상 눈을 뜨고 보니 세상이 어떻게나 더러운지 몰라요. 못된 놈들도 많고, 부조리한 것도 많고, 내 신경을 건드려 화나게 하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 어쩌다 보니 그만 깡패가 됐습니다.“ 이 이야기는 은혜를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지만 계속해서 변화하지 않고 진보하지 않을 때 결국 이렇게 엔트로피 힘에 의홰 퇴보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변하고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하고 굳어지기 쉽습니다. 여러분 노인들을 보십시오. 누구든 노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인의 특성을 보면 생각도 사고도 변하지 않습니다. 바꾸고 변화시키기 어렵습니다. 모든 것이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인들은 앞을 보지 못합니다. 옛날에는 잘했는데... 옛 날에는 좋았는데 ..나도 왕년에는 한가닥했는데... 과거의 인생을 삽니다. 늙으면 안 됩니다. 성숙하게 익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나이가 들어도 주목처럼 멋지게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단 한가지 조건 배우움을 멈추지 않는 자다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 우리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변하고 달라지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성숙과 퇴보입니다. 두 가지의 차이점 성숙은 반드시 자기 희생적 노력이 있어야 하고, 퇴보는 안일하면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퇴보가 아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변화 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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