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
https://youtu.be/MC7jz1T8JjU
마태복음 7:7-12
2020년 5월 24일 주일낮 11시
인도설교 선형수 목사
주은혜 교회 진천
서로 인사합니다 반갑고 고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는 분이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와 섭리의 돌보심으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신다. 성자 하나님은 십자가 구속의 은혜와 중보의 기도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신다. 성령 하나님은 감동과 깨달음과 인도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신다.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은 우주의 운동, 천체, 작은 참새까지도 붙드시고, 양육하시고, 돌보시는 영원한 통치자요 보호자이시다.”(칼빈, 기독교 강요 1권, 성문,385-387). 운명이나 우연은 없다. “성경의 가르침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운명이나 우연과 상반되는 것이다.”(칼빈, 386-87). 세상 만사가 우연히 일어난다는 생각은 어느 시대에나 널리 받아들여진 것이고, 지금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러나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마10:30). 만사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계획에 의해 주관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의 순환이나 날씨의 변동도 하나님의 섭리로 운영된다(칼빈, 388-89). 신자는 운명이나 우연을 믿어서도 안되고 영향을 받아서도 안된다.
성도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기 인생을 바꾸어 가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는 위로가 있다.
요한복음 5:17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개역). 태초부터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일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각 사람과 자연과 모든 것을 주관한다. 자동차, 비행기, 배의 사건 사고도 하나님의 섭리아래 일어난다. 자식을 낳는자, 자식이 없는자도 하나님의 섭리아래 있다(칼빈, 402-403). 그렇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할일이 없는가? 아니다. 인간의 성실함, 게으름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 우리의 경험으로 성실한 사람이 게으른 사람보다 잘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 성경(잠언24:30-34)도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을 칭찬한다.
마7:11절은 오해가 많은 구절이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개역)을 우리 사람들 중에 악한 부모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안다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은 “악한 너희도 너희 자식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아는데”(허성갑)라는 뜻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준으로 보면, 혹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모두 악한 부모라는 뜻이다.
인간은 모두 악하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문은 “이러한 위로의 기쁨 안에 살고 죽기 위하여 당신을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그 답은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 알아야 한다. 둘째, 모든 나의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내가 구원받는가? 셋째, 그러한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께 내가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가?
인간은 죄와 비참함 가운데 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죄아래 있다. 의인은 없다. 우리가 죄가 없다하면 우리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로마서 3:9-10; 요한1서 1:10).
우리는 육신의 부모로서 자식에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 애를 쓴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으로 보면, 혹은 하나님의 수준에서 볼때 우리는 악하고 비참한 상태에 있다.
자녀들에게 우리는 일관된 기준을 갖고 한결같이 대하지 못한다. 부모로서 불쾌하거나 언짢거나 슬프거나 화가 나면 그 표정, 말투, 태도, 행동이 자녀에게 전달된다. 부부가 서로 다툴 때 자녀는 방 한 구석에서 숨을 죽여가며 흐느낄 수 있다. 자녀를 위한다면서 자녀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다.
부모는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 물론 하루하루 성실하게 사는 부모는 자녀에게 그런 성실한 삶을 닮고 이어 가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앞일을 미리 볼 수 없다는 것은 인간된 부모의 연약함과 한계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은 “삶과 죽음 속에서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
답은,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살아 있어도, 죽어도, 몸과 영혼이 나의 신실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는 그의 귀중한 피로 모든 나의 죄의 값을 갚아 주셨다. 모든 마귀의 권세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셨다.
하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 카락 한 올도 떨어질 수 없다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신다.
나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주신다. 지금부터 기쁘게 기꺼이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부모는 자녀 양육에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구할수 있고 하나님의 주시는 지혜로 자녀를 양육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경험하는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의 주시는 위로를 함께 경험하게 할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가 누구인지 안다. 하나님을 알아야 우상 숭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성경은 우상 숭배는 헛것이라고 말한다(렘 2:5).
자녀, 가족, 돈, 명예, 권력, 지식, 쾌락, 직장, 사업,...... 이런 것들이 우상이 될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해 내는 일을 ‘위로’라고 표현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다(눅 2:25).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참 위로자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죄의 종은 죄를 주인으로 모신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자유자가 되게 하셨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위로자, 인도자가 되신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함께 우리와 나의 위로자가 되신다.
고린도후서 1:3-5에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서 죄와 싸우는 복음 전파를 온전히 감당하기 원했다.
모든 신자는 평생동안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얻고 사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살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한다. 다윗은 시편 25편에서 어릴 때 혹은 젊을 때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다. 우리는 어릴 때, 젊을 때, 혹은 지금 살아가면서 생각, 말, 행동으로 잘못을 범하거니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우리는 허물과 죄에 민감하고 그러한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의 위로를 지속적으로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
위로와 반대 되는 것은 죄와 비참이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하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비참해졌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지 못하고 우상을 섬겼다. 그래서 앗수르와 바벨론에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서 이방 땅에서 학대받으며 살아야 했다.
시편 137편은 이방 나라 포로로 살아가는 비참한 모습을 그린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 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불순종하여 나라가 망하고 이방땅 포로 생활의 설움과 비참함과 시온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위로 즉 구원을 선포한다.
이사야 40:1-2에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끝났으니, 하나님의 위로 즉 구원을 기다리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2:25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만백성의 위로자가 되신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고 말씀과 율법에 불순종하면 죄와 비참에 빠지는 것이다.
마가복음 7:21-22에 예수님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는 인간은 그런 비참함과 죄가운데 있게 된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는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주시고, 찾게 하시고, 열리게 하신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문은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답은
그리스도는 마태복음 22장에서 우리에게 요약하여 가르치신다.
너의 하나님을 네 마음을 다해, 네 영혼을 다해, 너의 정신을 다해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라.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강령이라.
마태복음 7:12의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것을 ‘황금률’이라 한다.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과 연계된다.
하나님을 온 마음과 영혼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문은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지킬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
답은
아닙니다
나에게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안의 죄는 무섭고 비참한 것이다.
갈라디아서 5:13-16에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말한다. 성령을 따라 살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회는 율법을 이루고 성부, 성자, 성령의 교제와 위로와 구원을 누리며 사는 사회이다. 서로 물고 먹으며 함께 망하는 사회는 이리나 늑대처럼 서로 싸우는 짐승과 같은 사회이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위로를 따라 살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율법을 이루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