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말고, 일어나라 https://youtu.be/LYaFO8ZcAs0?si=nI5W_X_nCkqt5p_K
(2024.07.14. 주일 낮 예배)
본문 말씀 : 누가복음 7:11-17
주제 :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겁먹지 말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굳세게 살아가자.
1. 죽음
오늘도 상당히 더운 날씨가 될 것 같습니다. 올해는 엄청나게 더울 것이라고 하는데, 내일이 초복입니다. 이제부터 덥다는 이야기지요. 더위를 조심하십시오. 하루 이틀 반짝 덥다고 해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더위가 계속될 때, 그때가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누가복음을 생각해 볼건데,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백부장의 병든 종을 살리셨고, 이번주에는 가난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오늘날에는 병이 들어도 병원엘 가면 왠만하면 다 고침을 받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가는 것도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옛날에는 병원에 가는 것도 어려웠지만 간다고 해도 의술이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으니까 쉽게 고침을 받을 수 없었고 병이 들었다하면 죽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병이 지금보다 훨씬 무서웠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병든자를 고쳐주시고, 심지어 죽은 자까지 다시 살려주셨으니까 사람들은 당장 예수님을 ‘큰 선지자’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아로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 봐주기를 기대하면서 그런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기적의 행보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점점 더 깊이가 심해지고 있어요. 그런 기적은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무덤에서의 부활로 절정에 달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기적도 메시야로 알려지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간절한 바램으로 보아주셔야 합니다.
2. 예수님은 누구신가?
백부장의 종을 살리고 난 뒤, 예수님은 나인이라는 성으로 가셨습니다. 그때 가난한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는데 그 장례행렬을 만났습니다. 성경에는 그냥 과부의 외아들이라고 했지만 과부라면 거의 100%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과부라고 했어요. 가난한 과부는 의지할 곳이 없어요. 외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과부의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었으니까 이 과부는 이제 그야말로 소망을 기대할 곳이 전혀 없었어요. 그 과부의 심정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고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말로만 울지말라고 해서는 안되지요. 예수님은 다시 죽은 아들을 보고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셨는데 그 말대로 그 죽은 아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그 어머니에게 주었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당장 ‘큰 선지자가 일어나셨다.’ 라고 외쳤고, 그 소문이 온 유대에 두루 퍼졌습니다.
그 다음에 당장 어떤 말씀이 나오는가? 보세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에게 ‘오실 그이가 당신이십니까?’ 이렇게 물어요. 그러자 예수님은 ‘못 걷는 자들이 걷고, 맹인이 보고,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는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은 다른 사람은 할 수 없고, 오직 메시야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고 내가 바로 메시야다.’ 이렇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이시다.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울지말라.
그런데요. 예수님은 그 과부에게 ‘울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라도 슬피우는 과부에게 울지말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과부에게 울지 않게 할 형편을 만들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있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느냐?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면서 세 번 죽은 사람을 살려주셨습니다. 첫째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셨습니다. 두 번째는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셨고, 세번째로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셨어요.
그런데요. 죽은 시간을 한 번 비교해 보십시다. 첫째, 야이로의 딸은 금방 죽었습니다. 시체가 방에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살려주셨어요. 그런데 두 번째 과부의 아들은 죽은 지 적어도 하루가 지났어요. 사람들이 죽은 아이를 메고 무덤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죽으면 하루 정도 지나서 장례를 치룹니다. 오래 둘 수가 없어요. 장례행렬을 주님께서 만났으니까 적어도 하루 정도 지났는데 그 죽은 아이에게 일어나라 해서 일으켜 세우십니다. 세번째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는데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지 적어도 4일은 지났습니다. 예수께서 무덤 문을 열어라 하시니까 이미 죽은 지 4일이 지나서 벌써 썪어서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덤을 향하여 나오너라고 하셨고 그 말씀을 듣고 죽은 나사로가 걸어나왔습니다.
금방 죽은 자도 살리셨고, 하루 지난 죽은 자도 살리셨고, 4일이나 지나서 이미 냄새가 나는 사람도 살리셨어요. 이 정도면 우리가 금방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어딘가에 가서 살고 있어요.
우리는 흔히 죽었다고 하면 끝났다고 생각하지요. 없어져 버렸다. 소멸되었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요. 이 사람들은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닙니다. 없어져 버렸다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를 때 ‘있어라.’ 이렇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마치 천지 창조 하듯이 빛이 있으라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부를 때는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단지 어딘가 우리들이 보지 못하는 곳으로 간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울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지 그 사람은 어딘가에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울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우는 이유는 이제 다시 만날 희망이 없으니까 우는 것 아닙니까? 다시 만날 희망이 있는 사람은 울지 않습니다. 아들이나 딸이 미국이나 어디로 유학을 보내시면 우십니까? 울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어떤 희망이 사라졌다고 해서 울지 마십시오. 우리가 소망하던 것은 결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가져올 수 있고,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4. 일어나라.
예수님은 죽은 청년을 향해서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청년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지만 사실은 과부를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과부는 모든 것을 그의 아들에게 걸었을 것입니다. 아들이 장성하면 그는 다시 재산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남편의 유산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 아들이 아들이 아니라 아들은 희망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그 아들이 죽자 과부는 그 모든 희망과 가능성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슬피 울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과부에게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죽은 자를 다시 불러올 수 있는 분이라면 그 과부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과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일어나서 희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5. 잊어버림
그런데요.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왜 이 가르침대로 따르지 못할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곳에 집중해서 정말 잊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들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신 세 사건을 살펴보십시다. 첫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다시 살아난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에 다 실려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원래 다른 복음에 실려있는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요한도 그것을 알고 있었는데 다른 복음에 있으니까 빼버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 가난한 과부의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난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있어요.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만 있습니다.
왜 다른 복음에는 없을까?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정통한 이유는 시간이 오래 지났기 때문에 각자 복음서를 쓴 사람이 그 사건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왜 모든 복음서 저자들이 다 기억하고 있었을까? 그 아이는 아버지가 회당장이라는 높은 관리입니다. 원래 높은 사람의 가족에 관한 일은 잘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지금도 대통령의 부인이 가방을 하나 받으면 그것은 두고두고 기억합니다. 잘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당장의 딸이 죽은 것은 시간이 오래 지나도 사람들이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가난한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은 그 사건이 아무리 대단한 사건이었어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나사로도 그곳이 베다니인데 베다니는 예루살렘 인근에 있는 못사는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어쩌면 나병에 걸렸던 사람들이 사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그곳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었던 사건들은 금방 잊어버립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가 하면, 힘 있는 관리의 딸에게 일어났던 이야기는 오랫동안 기억하는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사고 방식입니다.
이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힘을 내라고 주시는 주님의 말씀도 잊어버리고 조금만 힘든 일이 생겨도 굳세게 힘차게 살아가지 못하고 주저앉고 낙심하고 울고 징징거리며 사는 것입니다.
6. 울지 말고, 일어서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울지말고, 일어서라. 울지 말고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분명히 근거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고 해서 시도 때도 없이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 속 저 깊은 곳에 주님의 말씀을 깊이 간직하고 사십시오. 조용한 시간에 그 말씀을 한 번씩 음미하면서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힘든 일,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그 말씀이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해 가셔서 울지 않게 하시고 징징거리지 않게 하시고, 어려움 가운데서 다시 일어서게 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