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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회 (再會)
내가할줄 아는것중에서 굳이 하나를 들라면 붓글씨 쓰는 것이있다
그렇다고 해서 어디에 내놓을 만한 대가大家의 글씨는 커녕 누구에게 훈수할만한 그런 글씨도 못된다
안고수비眼高手卑라는 말이 이르듯 눈만 잔뜩 높았지 쓰는데는 재주가 없으니 붓을들면 마음과는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손과 마음이 평행선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
훌륭한 스승을 모시고 처음부터 차분하게 기초부터 제대로 전수를 받지 못하고 건둥건둥 재주를 부린것이 마치 부실공사가 연상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 써왔다
어려서 2년여간 험하고 지루한 산고개길을 두개나 넘나들며 먼 종친댁 어르신으로부터 한문수학을 한것이 사회생활하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이 된것은 사실이다
고등학교때 한문시간이였다 주제가 파문波紋이였다
선생님은 칠판에 파문波汶이라고 적으며 수水자에 대하여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설명하고 계실때 나는 쪽지에 파문波紋이라고 적어 아무도 모르게 슬며시 선생님의 책상에 올려 놓았다
- 내가 문紋자를 汶자로 잘못알았네요 파문은 물결이기 때문에 무늬문紋자가 맞아요
선생님은 나를 보시드니 빙그시 웃으시며 자연스럽게 정정하시였다
수년간이나 한문수학을 했던 이유로 고등학교 한문에는 나에게 별다른 흥미를 주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한문선생님은 나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뿐만 아니라 학교도서실에서 일하게 된것도 어쩌면 한문선생님이 계서서 가능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배우려고 했고 배우기위해 노력했고 배우고저 정성을 다하였다
퇴직하고 나이들어 마땅히 할것이 없으면 서당이나 서실을 차리고 자라나는 청소년이나 시간이 없어 배우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부족하지만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천자문도 명심보감도 소학이나 맹자 뿐만 아니라 사자성어도 그리고 틈틈히 시간이 날때마다 일상생활에 쓸수있는 간편한 서식들을 두루두루 살피어 왔으며 한자급수시험도 최고등급까지 올려놓았다
단순히 서예를 떠나 실생활에서 무엇이 필요한것일가 하고 연구도 많이 한적도 있다
남을 가르친다는것은 단순히 수학공식이나 술술 외우는 식으로 적당히 가르치고 수고비를 챙기려는 얄팍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게 나의 뜻이며 진정 가르치는 자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경사이구經師易求이나 인사난득人師難得이라는 말이있다
글을 가르치는 스승은 만나기 쉬워도 인간됨을 가르치는 스승은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시속時俗의 탓이랄가
예의와 도덕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꼭 시속이나 아니면 교육의 부실함을 탓할것만은 아닌것 같다 젊은이들 사이에도 조금도 흠잡을데 없는 예절바르고 훌륭한 사람이 얼마던지 있지 않은가
혹자는 자신이 알고있는 작은것을 양념삼아 두고두고 울겨먹으려는 아주잘못된 생각을 하는이가 있는데 이것은 남을 가르치려는 이가 가질바 태도가 아니다
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이란 명언이 있다 눈쌓인 들길을 걸을때 어지러히 걷지말라 오늘 내가 가는길은 후일 다른사람들이 따라가는 이정표가 된다는 말로 이는 앞서가는이의 막중한 책임을 제시한 글로 뒤에 따르는 이의 사표師表가 되라는 말이기도 하다
뒤에 따르는이는 앞서가는이의 뒤퉁수나 발자욱만 보고 따라가는 경향이 있으니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다 앞서가는 이의 잘못된 발자욱을 따르다 보면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애 엉뚱하게도 잘못된 선택을 하게된다 가르치는 이들은 자신의 결점이 없는지 다시한번 돌아다 보며 숙고해야 한다
밖에서는 이슬비가 대지를 촉촉히 적시고 있다
싸구려 여인숙을 찾은것은 비가 오는 관계로 해서 무전여행의 활동이 좁아지면서 가능한한 최소한의 경비라도 절감하려는 생각에서 돌아다니다가 골목속의 여인숙을 찾은것인데 생각보다도 훨씬 불결하고 주위가 어수선하며 기분이 나쁘고 싸구려 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싼게 비지떡]이다라는 말이 있다
옛날 선비들이 과거보러가는 산마루 고개 언덕길에는 허름한 주막이 있었는데 주막집 주모는 선비가 묵고 떠나갈때에는 작은 보따리 한개씩 주었는데 그속에는 주먹만한 비지떡 두덩어리가 들어있었다
당시만 해도 어렵게 사는 시골선비는 노잣돈마저 없는터에 한양까지 가려면 굶기가 일수였다
- 보따리속에 싼게 무어요 - 선비가 물었다
- 예 그속에 싼게 비지떡입니다 부디 성공하세요 - 주막집 주모는 비지떡 싼 보따리와 함께 덕담을 건넸다
그래서 싼게 비지떡이란 말이 변하여 싸구려로 된것이다 싼게 바로 비지떡이다
싼게 비지떡이란 말은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싼게 비지떡이란 사실을 체험한것같다
하지만 어쩌랴 하룻밤 지내면 또다시 구름길 바람길 따라 떠날것이어늘 이 또한 훗날의 이야깃거리가 아닐가
내가 쓰는방은 하나의 방을 쪼개어 둘로 만들고 하나의 천정은 마주뚫여 한개의 전구를 같이 쓰게 되여있다
절전하려는 주인의 입장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 했을것이다
어느쪽이든 먼저 잠들고저 하면 전구를 슬며시 벽너머로 밀어넘기는 기상천하의 공간이다
벽과벽 사이는 책바침같은 얇은 합판위에 마분지馬糞紙로 바른 칸막이로 되어있어 말이 벽이지 작은 숨소리마저 걸러지지 않은채 샐틈없이 들려온다
옆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것같아 신경이 곤두선다
생각하기 따라서는 틀림없이 불륜일것이라고 엉뚱한 생각이든다
우람하게 생긴 사나이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쥐구멍으로 들어가는 가녀린 소녀의 목소리가 교차된다
고양이란 놈이 쥐새끼를 물어다놓고 재롱을 보고있는것은 아닐가
아님 늙은여우가 토끼새끼 물어다 놓고 못된짓 시키며 스스로 만족해 하는것은 아닐가
몸은 천근만근 피곤한데 눈은 말동말동하고 머리는 지끈지끈 아프며 자리는 눅눅한데다가 몸은 근질근질하여 좀처럼 잠을 이룰수가 없다
이리뒤척 저리뒤척 밤새도록 잠을 자는둥 마는둥 겨우날이 새는가 싶어 자던이불도 멋대로 팽개친채 슬며시 거리로 나왔다
여전히 부슬비가 추적추적 기분나뿔만큼 내린다
여인숙을 나오며 문간에 세워저있는 커다란 새우산을 허락도 없이 가지고 나온것이 그나마 다행이라지만 마음만은 죄지은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주인을 불렀지만 늦게서야 잠이 들었는지 기척이 없어 양심으로는 께름찍하지만 그냥들고 나왔다
비가 그치면 반드시 다시 가저다 주고 사과하리라
아무리 욕심이라지만 거추장스러운 우산도 비가 개고나면 나에게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아직은 이른 아침인데 누군가가 낡고 살이 듬성듬성 빠진 작은 우산에 의지한채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다
이른아침에 어딜그리 부지런히 가고 있을가
가까이 다가오는 우산속에는 이십대의 아름다운 아가씨다
슬며시 다가가 말없이 커다란 우산을 씌워주자 깜짝놀란 아가씨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선다
다소곳한 모습은 한눈에 보아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아주 낯익은듯한 순박한 느낌을준다
- 부담스러울것 없어요 우산이 낡아 옷이 조금 젖어있네요 -
별다른 말없이 한참을 걷다가 큰길로 접어드는 갈림길이 나오자 아가씨가 주춤한다
- 잘왔어요 고마워요 저는 오른쪽으로 가는데요 -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얼굴을 숙인채 우산밖으로 나간다
처음으로 아가씨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예쁜 목소리에 잠시 황홀해진다
예쁜 목소리다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예쁘고 목소리도 예쁘고 인사하는 행동 또한 예쁘다
- 아 예 ! 저도 오른쪽으로 갑니다 어려워하지 마새요 -
또 얼마를 갔을가 큰길가에 어느 조그마한 꽃가게 앞에 도착하자 아가씨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 덕분에 비맞지않고 와서 고마워요 여기는 저희 사촌오빠와 올케가 하는 미장원이고 꽃집이예요 -
뒤돌아 서려는 순간 검은 하늘에서 갑자기 바람과 함께 소나기가 쏟아저 내린다
- 어쩌죠 우선 잠시라도 가게로 들어 오셔서 비를 피하세요 -
가게안에 들어가니 먼지 한점없이 깔끔한것이 주인의 성격과 정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넓은가게안은 질서정연하게 활짝핀 꽃들이 나를 반기는듯 무리지어 피어있다
수건을 찾아 건네주던 아가씨는 또다시 나를 빤히 바라본다
- 왜 얼굴에 무엇이라도 묻어있나요 ? -
- 아니 저 ? 혹시 동심회를 아세요? - 아가씨가 정색을 하며 묻는다
- 오라 ! 맞아요 김은희씨군요 어쩐지 처음부터 은희씨를 닮은 사람도 있구나 하고 혹시나 물어보고 싶었는데 역시 은희씨네요 -
- 어마 어떻게 제이름을 지금까지 잊지않고 기억하고 계셔요 - 동그란 눈을 뜨며 깜짝 놀란다
- 예뻣죠 ! 아주 예뻣죠 ! 너무나 예뻣던 기억이 있어서 ! -
인생하처불상봉人生何處不相逢이라드니 여기서 이리 만니게 될줄이야 이 또한 우연히 아닐수 없다
동심문학동인회同心文學同人會
고등학교 2학년때 3학년 선배들이 만든 문학 동아리이다
내가 쓴글이 학교 교지에 자주 오르는것을 보고 선배가 찾아와 강력히 추천하여 동심회를 찾았다
서울 시내 남녀 고등학생으로 주축이된 동심회는 회원수가 삼십여명이 넘었다
회보를 내려고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워낙이 경제사정이 열악하여 제대로된 책자 한번도 내지못하고 유야무야 하다가 결국은 동심회모임으로 만족해야했다
그래도 동심회 회원중에는 세월이 지나며 소설가나 시인 그리고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는 얼굴들이 더러 있었다
그당시 얼굴을 가리다 시피하고 맨 뒷자리에 앉았던 김은희 여학생을 나는 똑똑히기억하고 있다
수줍음 잘타고 말수가 적은 은희는 언제나 뒷전에 앉아 있었다
갸름한 얼굴의 양볼엔 보일듯 말듯 보조개가 예쁘다고 생각은 했지만 나역시 활달하지 못하여 선배들의 뒤에서 뒷전만을 지키고 말한미디 건네지 못했다
이따금 살며시 웃는 얼굴은 언제나 밝고 애띠고 산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줍음 잘타던 옛날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건만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은 밝고 명랑해진것 같다
- 다시 만날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은희는 옛날의 단발머리 소녀로 돌아간듯 역시 말이없다
야속스런 비는 여전히 그칠기미가 보이지 않아 또다시 허름한 여인숙으로 발걸음을 돌리지 않을수없다
아~니 차라리 다시가서 우산을 돌려주며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하여야겠다
날씨탓도 있겠지만 마음이 어수선 하다보니 여인숙 침구조차 기분 나쁘리만큼 축축하고 불결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 일없이 천정을 바라보며 축축한 이불에 기대여 누어있노라니 귀중한 하루가 몹시 아깝고 아쉽다
흔히 타임 이즈 몬니 (Time is money) 라고 시간은 돈이라는 말을 자주쓴다
그러나 대개는 돈은 아낄줄 알면서 시간은 엉뚱하게 허비하면서도 아까운줄을 모른다
기분도 달랠겸 잠시 꿈처럼 만났던 은희 생각을 하면서 시름을 달랜다
예뻣다 아주 많이 예뻣다 예나 이제나 조금도 변함없이 예쁘다 아니 더 예뻐진것같다
동심회 여자회원중에서도 가장 어려보이고 말이 별로 없었다
점심은 짜장면으로 때우고 동네 만화방을 찾아가 한나절을 보냈다
오후 늦게는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이 햇빛이 반짝이고 있다
- 정말 나오셨네요 -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아침 입었던 옷이 아닌 산듯한 코발트 부라우스에 목에는 자줏빛 스카푸를 두르고 있다
낯선 조용한 가로수 길을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무전여행 이야기를 꺼내자 신기하기라도 한듯 바싹 다가오는 은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딘지 모르는 길을 한참이나 걷다보니 커다란 연못이 앞을 막는다
낮에내린 빗방울이 연잎위에서 구슬지어 대롱대롱 구르고 고운 연꽃이 우리를 반기며 배시시 웃는것 같다
애연설愛蓮說에 있는말이 떠오른다
비록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잎과 꽃이 더러움에 물들지 아니하고 향기로우며 꽃잎은 아름답고 잎의 모양이 둥글어 마음을 편안하게하고 행복하게하며 줄기는 연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잘 꺾이지 아니함은 곧은 마음을 의미하며 연꿈은 길조라는 밀이 있드시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중국의 주렴계는 연꽃을 그리도 사랑하여 애연설을 썼다
도연명은 국화를 사랑했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이들은 대부분이 목단을 사랑했지만 연꽃을 유별하게 사랑했던 주렴계의 높은 인품을 연꽃을 바라보며 생각해본다
자줏빛 스카푸를 날리는 연꽃닮은 여인 김은희
연못건너 보이는 조그만 호수마을의 조그만 집에는 나이가 많이드신 부모님이 계시다고한다
서울에서 s여고를 나와 취업하려는 딸을 한사코 말린 엄하신 아버지 때문에 시골고향으로 내려왔다
집 가까이에서 사촌처럼 꽃집이나 미장원을 하자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랐다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도 했고 지금은 부지런히 꽃가게 수업을 받고 있다고 한다
뒤늦게 겨우가진 외동딸 하나를 또다시 객지에서 혼자 고생하게 할수없다는 부모님의 뜻을 따랐다
마침 사촌이 아이들 교육문제로 서울에 가게를 구하여 나갈 예정이어서 인수할때까지 열심히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 참한 사위와 같이 살면서 외손주 재롱을 보는것이 부모님의 바램이라고한다
- 기다리면 반드시 좋은일이 있을 것입니다 빌어 드리겠슴니다 -
- 언제든지 시간이 있으시면 잊지말고 들려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
뒤돌아보니 은희의 등뒤로 쌍무지개가 연못에 뿌리내리고 있다
코발트 부라우스 자줏빛 스카프에
긴머리 이마아래 보일듯 얇은미소
양뺨의 볼우물엔 연꽃향 고여있고
매끈한 종아리가 노을에 눈부시다
연잎위로 고여있는 대롱대롱 빗방울은
넘칠듯이 엉켜있는 구슬같은 아름다움
가슴속에 숨어있는 잊지못할 그리움들
하루종일 내리든비 석양이야 아는구나
오늘저녁 가로수길 가도가도 제자리고
말이없이 걸어간들 오가는정 왜없으리
세월가면 오늘일도 그리움의 추억인걸
가지마오 미소띄며 흔드는손 못잊으리
만날때 보다는 헤어질때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
앞모습의 아름다운 모습보다는 뒷모습에서 따뜻하게 느끼는 사람이 되자
잠시만나 헤어지드라도 오래오래 기억속에 지워지지 않는 사람이 되자
헤여지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것 같으면서도 어디서이든 언제이든 만나는것이 인생사이다
그래서 옛 성현께서 그리 말씀 하신것이 아닌가 싶다
범사凡事에 유인정留人情이면 후래後來에 호상견好相見이라
다시는 만나지 않을것 처럼 냉정하지 말고 모든일에 정을 남겨 두라는것이다
사노라면 힘든일도 많겠지마는 감사하여야 할일이 많음을 느낀다
헤어저 축축한 여인숙으로 돌아오는길이 왜이리 멀고 초라하며 낯설기만 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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