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전라남도 함평 출생...본명은 박기평 1976년 서울 선린상고(야간부)를 졸업한 후 섬유, 금속 노동자로 일함. 1984년 버스회사에 입사하여 견습정비공으로 일하던 중 첫 시집 <노동의 새벽>발간. 얼굴없는 노동자 시인으로 알려지기 시작. 1985년 결성된 서울노동운동연합에서 활동. 1989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의 결성을 주도. 1993년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 발간. 1997년 명상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발간.
박노해 시인 ( 시모음 )
뱃속이 환한 사람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는 눈빛이 맑아서만은 아냐 네 뱃속에는 늘 흰구름이 유유히 흘러가는게 보이기 때문이야 흰 뱃속에서 우러나온 네 생각이 참 맑아서 네 분노가 참 순수해서 네 생활이 참 간소해서 욕심마저 참 아름다운 욕심이어서 내 뱃속에 숨은 것들이 그만 부끄러워지는 환한 뱃속이 늘 흰구름인 사람아
진달래
겨울을 뚫고 왔다 우리는 봄의 전위
꽃샘 추위에 얼어 떨어져도 봄날 철쭉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 외로운 겨울 산천에 봄불 내 주고 시들기 위해 왔다
나 온몸으로 겨울 표적되어 오직 쓰러지기 위해 붉게 왔다
내 등뒤에 꽃피어 오는 너를 위하여
썩으러 가는 길
열 여섯 애띤 얼굴로 공장문을 들어선지 5년 세월을 밤낮으로 기계에 매달려 잘 먹지도 잘 놀지도 남은 것 하나 없이 설운 기름밥에 몸부림 하던 그대가 싸나이로 태어나서 이제 군대를 가는구나 한참 좋은 청춘을 썩으러 가는구나
굵은 눈물 흘리며 떠나가는 그대에게 이 못난 선배는 줄 것이 없다 쓴 소주 이별잔 밖에는 줄 것이 없다 하지만 그대는 썩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푸른 제복에 갇힌 3년 세월 어느 하루도 헛되이 버릴 수 없는 고귀한 삶이다
그대는 군에서도 열심히 살아라 행정반이나 편안한 보직을 탐내지 말고 동료들 속에서도 열외 치지 말아라 똑같이 군복입고 똑같이 짬밥먹고 똑같이 땀흘리는 군대생활 속에서도 많이 배우고 가진 놈들의 치사한 처세 앞에 오직 성실성과 부지런한 노동으로만 당당하게 인정을 받아라
빗지루 한 번 더 들고 식기 한 개 더 닦고 작업할 땐 열심으로 까라며 까고 뽑으라면 뽑고 요령피우지 말고 적극적으로 살아라 고참들의 횡포나 윗동기의 한따까리가 억울할지 몰라도 혼자서만 헛고생한다고 회의할지 몰라도 세월 가면 그대로 고참이 되는 것 차라리 저임금에 노동을 팔며 갈수록 늘어나는 잔업에 바둥치는 이놈의 사회보단 평등하게 돌고도는 군대생활이 오히려 공평하고 깨끗하지 않으냐 그 속에서 비굴을 넘어선 인종을 배우고 공동을 위해 다 함께 땀흘리는 참된 노동을 배워라
몸으로 움직이는 실천적 사랑과 궂은 일 마다 않는 희생정신으로 그대는 좋은 벗을 찾고 만들어라 돈과 학벌과 빽줄로 판가름나는 사회속에서 똑같이 쓰라린 상처 입은 벗들끼리 오직 성실과 부지런한 노동만이 진실하고 소중한 가치임을 온 몸으로 일깨워 끈끈한 협동속에 하나가 되는 또다른 그대 좋은 벗들을 얻어라
걸진 웃음 속에 모험과 호기를 펼치고 유격과 행군과 한따까리 속에 깡다구를 기르고 명령의 진위를 분별하여 행하는 용기와 쫄따구를 감싸 주는 포용력을 넓혀라 시간나면 읽고 생각하고 반성하며 열심히 학습하거라 달빛 쏟아지는 적막한 초소 아래서 분단의 비극을 깊이 깊이 새기거라
그대는 울면서 군대 3년을 썩으러 가는구나 썩어 다시 꽃망울로 돌아올 날까지 열심히 썩어라
이 못난 선배도 그대도 벗들도 눈부신 꽃망울로 피어나 온 세상을 환히 뒤흔들 때까지 우리 모두 함께 열심히 썩자 그리하여 달궈지고 다듬어진 틈실한 일꾼으로 노동과 실천과 협동성이 생활속에 배인 좋은 벗들과 함께 빛나는 얼굴로 우리 품에 돌아오라
눈물을 닦아라 노동자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열심히 열심히 잘 썩어야 한다
천생연분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이뻐서가 아니다 젖은 손이 애처로와서가 아니다 이쁜 걸로야 TV 탈렌트 따를 수 없고 새련미로야 종로거리 여자들 견줄 수 없고 고상하고 귀티나는 지성미로야 여대생년들
쳐다볼 수도 없겠지 잠자리에서 끝내주는 것은 588 여성동지
발뒤꿈치도 안차고 써비스로야 식모보단 못하지 음식솜씨 꽃꽂이야 학원강사 따르것나 그래도 나는 당신이 오지게 좋다 살아 볼수록 이 세상에서 당신이 최고이고 겁나게 겁나게 좋드라
내가 동료들과 술망태가 되어 와도 며칠씩 자정 넘어 동료집을 전전해도 건강걱정 일격려에 다시 기운이 솟고 결혼 후 3년 넘게 그 흔한 쎄일샤쓰 하나 못사도 짜장면 외식 한번 못하고 로숀 하나로 1년 넘게 써도 항상 새순처럼 웃는 당신이 좋소
토요일이면 당신이 무데기로 동료들을 몰고와 피곤해 지친 나는 주방장이 되어도 요즘 들어 빨래, 연탄갈이, 김치까지 내 몫이 되어도 나는 당신만 있으면 째지게 좋소
조금만 나태하거나 불성실하면 가차없이 비판하는 진짜 겁나는 당신 좌절하고 지치면 따스한 포옹으로 생명력을 일깨 세우는 당신 나는 쬐끄만 그 몸 어디에서 그 큰 사랑이, 끝없는 생명력이 나오는가
곤히 잠든 당신의 가슴을 열어 보다 멍청하게 웃는다
못배우고 멍든 공순이와 공돌이로 슬픔과 절망의 밑바닥을 일어서 만난 당신과 나는 천생연분 저임금과 장시간노동과 억압 속에 시들은 빛나는 대한민국 노동자의 숙명을 당신과 나는 사랑으로 까부수고 밤하늘 별처럼 흐르는 시내처럼 들의 꽃처럼 소곤소곤 평화롭게 살아갈 날을 위하여 우린 결말도 못보고 눈감을지 몰라 저 거친 발굽 아래 무섭게 소용돌이쳐 오는 탁류 속에 비명조차 못지르고 휩쓸려갈지도 몰라 그래도 우린 기쁨으로 산다 이 길을 그래도 나는 당신이 눈물나게 좋다 여보야
도중에 깨진다 해오 우리 속에 살아나 죽음의 역사를 넘어서서 이른 봄마다 당신은 개나리 나는 진달래로 삼천리 방방곡곡 흐드러지게 피어나 봄바람에 입맞추며 옛얘기 나누며 일찌기 일 끝내고 쌍쌍이 산에 와서 진달래 개나리 꺾어 물고 푸성귀 같은 웃음 터뜨리는 젊은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며 그윽한 눈물로 지자 여보야 나는 당신이 좋다 듬직한 동지며 연인인 당신을 이세상에서 젤 사랑한다 나는 당신이 미치게 미치게 좋다
새벽별
새벽 찬물로 얼굴을 씻고 나니 창살 너머 겨울나무 가지 사이에 이마를 탁 치며 웃는 환한 별 하나
오 새벽별이네!
어둔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온다고 가장 먼저 떠올라 새벽별
아니네!
뭇 별들이 지쳐 돌아간 뒤에도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는 별 끝까지 돌아가지 않는 별이 새벽별이네
새벽별은 가장 먼저 뜨는 찬란한 별이 아니네 가장 나중까지 어둠 속에 남아 있는 바보 같은 바보 같은 별 그래서 진정으로 앞서가는 별 희망의 별이라네
지금 모든 별들이 하나 둘 흩어지고 사라지고 돌아가는 때 우리 희망의 새벽별은 기다림에 울다 지쳐 잠든 이들이 쉬었다 새벽길 나설 때까지 시대의 밤하늘을 성성하게 지키다 새벽 붉은 햇덩이에 손 건네주고 소리없이 소리없이 사라지느니
앞이 캄캄한 언 하늘에 시린 첫마음 빛내며 떨고 있는 바보 같은 바보 같은 사람아 눈물나게 아름다운 그대
오 새벽별이네!
조업재개
못난 놈들 부끄러운 놈들만 나왔구나 부석부석 술 덜 깬 얼굴 무겁게 수그리고 괜시리 서먹서먹 바쁜 듯이 눈길 피하며 애꿎은 담배들만 뻑뻑 피는구나 아직 덜 지워진 스프레이 구호가 부끄럽구나
하 그래도 다들 안 죽고 출근했구나 이까짓 공장뺑이 때려친다며 이참에 출세한 놈 잘나간 놈 하나 없이 작업복 차림 그대로 다들 기어나왔구나 감옥 가고 입원하고 수배 붙은 놈들만 빼놓고선, 미칠 일이지
헛헛 씨팔 우리 다시 일하자 우리가 가면 어딜 가겄냐 드럽고 치사한 패잔병들 아니냐 묵고 살아야만 하는 생존의 포로들 아니냐 안 죽고 안찍히고 안 짤릴라문 힘 죽이고 다시 일해야 쓴다 아 얼마나 목메이게 우리 외쳤느냐 노동자는 투사 아니면 임금노예라꼬
자 담배 한대 도고 니도 한대 묵어라 우리 고개 쳐들자 점심밥도 많이 묵으라 함마질 땅땅 용접불도 쎄게 쎄게 조지라 억울하고 눈물 터지는 조업재개다 이제 또다시 저 쌔빠지는 실적경쟁 철야특근으로 원상복귀다 열받치는 면담각서 징계회부 정신교육 자본에 군기 팍 잡히는 거다
그래 좋다 우리들 조업재개 - 쓰라린 패배의 노동을 한다 억장 터지는 배신의 노동을 한다 그러나 우리들, 임금노예 아니면 투사, 착착 조여드는 이 부끄러움 이 굴욕과 수치의 노동이 있는 한 우리는 결국 또다시 투쟁재개다
거룩한 사랑
성(聖)은 피(血)와 능(能)이다.
어린 시절 방학 때마다 서울서 고학하던 형님이 허약해져 내려오면 어머님은 애지중지 길러온 암탉을 잡으셨다 성호를 그은 뒤 손수 닭 모가지를 비틀고 칼로 피를 묻혀가며 맛난 닭죽을 끓이셨다 나는 칼질하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떨면서 침을 꼴각이면서 그 살생을 지켜보았다
서울 달동네 단칸방 시절에 우리는 김치를 담가 먹을 여유가 없었다 막일 다녀오신 어머님은 지친 그 몸으로 시장에 나가 잠깐 야채를 다듬어주고 시래깃감을 얻어와 김치를 담고 국을 끓였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퍼런 배추 겉잎으로 만든 것보다 더 맛있는 김치와 국을 맛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어머님의 삶에서 눈물로 배웠다
사랑은 자기 손으로 피를 묻혀 보살펴야 한다는 걸
사랑은 가진 것이 없어도 무능해서는 안 된다는 걸
사랑은 자신의 피와 능과 눈물만큼 거룩한 거라는 걸
하늘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 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 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시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대대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것지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 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못다 한 정
깊은 산중에 산막을 치고 우람한 나무들을 우직끈 찍어 넘겨 강물에 떠내려보내는 산꾼들은 뗏목 위에 산딸기, 머루, 꽃들을 얹는다 저 그리운 사람마을 누군가에게
강가에 우는 그대여 기다림에 울다 지친 그대여
이 장강에 쓰러져 흐르는 뗏목같은 생목숨 위에 얹힌 달고 고운 꽃송이 받으라 거친 일생에 못다 한 못다 한 정 받으라
아직과 이미 사이
'아직'에 절망할 때 '이미'를 보아 문제 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굽혀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민들레처럼
일주일의 단식 끝에 덥수룩한 수염 초췌한 몰골로 파란 수의에 검정고무신을 끌고 어질어질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굴비처럼 줄줄이 엮인 잡범들 사이에서
"박노해씨 힘내십시오" 어느 도적놈인지 조직폭력배인지 노란 민들레 한 송이 묶인 내 손에 살짝이 쥐어주며 환한 꽃인사로 스쳐갑니다
철커덩, 어둑한 감치방에 넣어져 노란 민들레꽃을 코에도 볼에도 대어보고 눈에도 입에도 맞춰보며 흠흠 포근한 새봄을 애무한 민들레꽃 한 송이로 환하게 번져오는 생명의 향기에 취하여 아…… 산다는 것은 정녕 아름다운 것이야
그러다가 문득 내가 무엇이길래 긴장된 마음으로 자세를 바로잡고 민들레꽃을 바라 봅니다 어디선가 묶인 손으로 이 꽃을 꺾어 정성껏 품에 안고 내 손에까지 쥐어준 그 분의 애정과 속뜻을 정신 차려 내 삶에 새깁니다
민들레처럼 살아야 합니다 차라리 발길에 짓밟힐지언정 노리개꽃으로 살지 맙시다 흰 백합 진한 장미의 화려함보다 흔하고 너른 꽃 속에서 자연스레 빛나는 우리 들꽃의 자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빛나지는 않아도 조금도 쓸쓸하지 않고 봄비 뿌리면 그 비를 마시고 바람 불면 맨살 부대끼며 새 눈과 흙무더기 들풀과 어우러져 모두 다 봄의 주체로 서로를 빛나게 하는 민들레의 소박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요 논두렁이건 무너진 뚝방이건 폐유에 절은 공장 화단 모퉁이 쇠창살 너머 후미진 마당까지 그 어느 험난한 생존의 땅 위에서건 끈질긴 생명력으로 당당하게 피어나는 민들레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우리는 보호막 하나 없어도 좋습니다 말하는 것 깨지는 것도 피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피어나야 할 곳에 거침없이 피어나 온몸으로 부딪히며 봄을 부르는 현장의 민들레 그 치열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자신에게 단 한번 주어진 시절 자신이 아니면 꽃피울 수 없는 거칠은 그 자리에 정직하게 피어나 성심껏 피어나 기꺼이 밟히고 으깨지고 또 일어서며 피를 말리고 살을 말려 봄을 진군하다가 마침내 바람찬 허공중에 수천수백의 꽃씨로 장렬하게 산화하는 아 민들레 민들레 그 민들레의 투혼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새야 새야
좁다란 네면 벽이
좁기도 하고 넓기도 하다
침침한 무덤속인가
아득한 우주속인가 사방인가
적막한 마음에 창살 틈에 밥알 놓으니
산새가 날아와 지저귀며 물어간다
낭낭한 새울음에 방 안이 금새 환해지는 듯
문득 노래 끊겨 귀를 세워 기다려도
먹을 것 없는 창살 가에 새소리는 다시 없구나
새야 새야
너도 외롭고 나도 쓸쓸한다
잊은듯 한번쯤 와서 맑은 노래 들려주렴
밥알이야 있건 없건 찾아와 주는 건 하늘 마음이고
먹을 긋 없다고 오지 않는 건 무엇의 마음이랴
새야 새야
너 외롭지 않으면 찾지 않아도 좋다
나 혼자라도 괜찮아
슬프면 슬픈대로 놓아두고
쓸쓸하면 쓸쓸한대로 말없이 산다
찾아오는 마음 떠나가는 마음
이마음 저마음 모두
하늘 뜻 숨어 계시는 하늘 마음이려니
첫마음
한번은 다 바치고 다시 겨울나무로 서있는 벗들에게
저마다 지닌 상처 깊은 곳에 맑은 빛이 숨어 있다
첫마음을 잃지 말자
그리고 성공하자 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 첫마음으로
겨울 더 깊어라
겨울 새벽 냉수 마찰중인 문득 만져진 내 여윈 어깨죽지 날이 갈수록 붉고 푸르다 검은 피멍이다
고된 벽 속의 묵언 정진 길 서둘지 말고 쉬지도 말라 쫓기는 삶 돌이켜 쫓아라 서슬 푸르게 후려치던 내 마음의 준비 자욱들
검게 굳어진 살 넘어 언 땅 깊이 검고 굳은 씨앗들의 뜨거운 떨림돌 떨림돌
겨울 더 깊어라
바람 잘 날 없어라
바람 잘 날 없어라 내 생의 길에 온 둥치가 흔들리고 뿌리마다 사무치고
아-- 언제나 그치나. 한고비 넘으면 또 한고비 너무 힘들다 너무 아프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싸워야 하나
바람 잘 날 없어라 울지마. 살아있다는 것이다. 오늘 이 아픔 속에 외로움 속에
푸르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다 시
희망 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체로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랑의 침묵
너에게도 세월이 지났구나 꽃들은 어둠 속에 소리 없이 지고
내 사랑하는 것들은 말이 없고 내 사랑하는 여자도 말이 없고 나는 너무 많은 사랑은 하다가 쓰러져 흰 눈 쓴 겨울 사내로 말이 없고
깊은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르듯 진실로 사랑하는 가슴은 너무 많은 말과 너무 많은 사연과 너무 많은 눈물이 있어 사랑은 말없이 흘러가는 것
그래도 꼭 한마디 품고 가야할 말이 있어 나 이렇게 새벽 강가에서 사랑의 침묵을 듣고 있을 뿐
강물은 자신이 가는 길을 안다
강물은 흐른다 굽이 치며 흐른다
동북아의 바람은 불어 풀잎과 나무는 강물 따라 달린다
붉은 해가 뜨고 붉은 해가 지고 강물은 자신의 깊이를 알고 있다
자신의 숨겨진 고요와 자신의 가슴속 폭포와 자신이 흘러온 땀과 눈물을 안다
저녁 강에 달이 뜨고 별들이 건너 간다
강물은 흐른다 강물은 자신이 사라질 것을 안다
강은 강을 만나고 마침내 바다를 만나지만 그러나 강은 강, 강물은 자신이 가는 길을 안다
긴 눈물
바그다드를 떠나는 날 오늘도 총소리는 울리고 검은 연기는 타 오르는데 늦은 비가 내린다
머리 위에도 얼굴 위에도 무너진 건물더미에도 굵은 빗방울은 떨어지는데
나는 보았다 처음으로 티그리스 강이 우는 것을
사람들은 처음으로 전쟁의 얼굴 위에 차갑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스스로의 노동과 한 숨과 뼈 빠지는 나날로 씻고 치우고 일으켜 세워야 할 미래의 삶의 무게를 생각하는 듯 침잠한 표정으로 빗속을 걷는다
전쟁으로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자들은 하루 하루가 전쟁이지만 바그다드는 마지막 늦비를 맞으며 전쟁의 두터운 먼지를 씻고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본다
바그다드를 떠나는 날 나는 보았다 처음으로 티그리스 강이 우는 것을 이라크의 가슴에 흐르는 긴 눈물을
풍경
내가 지나온 풍경은 늘 초라하고 그늘 지고 거칠었다. 그것이 나의 슬픔이었다.
더 슬픈 것은 내 마음이 나도 모르게 내가 서 있는 풍경을 조금씩 닮아 가는 거였다.
지금 내가 서 있는 풍경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 없이 거칠고 가파르고 초라하리라.
1957년 전라남도 함평 출생...본명은 박기평 1976년 서울 선린상고(야간부)를 졸업한 후 섬유, 금속 노동자로 일함. 1984년 버스회사에 입사하여 견습정비공으로 일하던 중 첫 시집 <노동의 새벽>발간. 얼굴없는 노동자 시인으로 알려지기 시작. 1985년 결성된 서울노동운동연합에서 활동. 1989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의 결성을 주도. 1993년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 발간. 1997년 명상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발간.
박노해 시인 ( 시모음 )
뱃속이 환한 사람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는 눈빛이 맑아서만은 아냐 네 뱃속에는 늘 흰구름이 유유히 흘러가는게 보이기 때문이야 흰 뱃속에서 우러나온 네 생각이 참 맑아서 네 분노가 참 순수해서 네 생활이 참 간소해서 욕심마저 참 아름다운 욕심이어서 내 뱃속에 숨은 것들이 그만 부끄러워지는 환한 뱃속이 늘 흰구름인 사람아
진달래
겨울을 뚫고 왔다 우리는 봄의 전위
꽃샘 추위에 얼어 떨어져도 봄날 철쭉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 외로운 겨울 산천에 봄불 내 주고 시들기 위해 왔다
나 온몸으로 겨울 표적되어 오직 쓰러지기 위해 붉게 왔다
내 등뒤에 꽃피어 오는 너를 위하여
썩으러 가는 길
열 여섯 애띤 얼굴로 공장문을 들어선지 5년 세월을 밤낮으로 기계에 매달려 잘 먹지도 잘 놀지도 남은 것 하나 없이 설운 기름밥에 몸부림 하던 그대가 싸나이로 태어나서 이제 군대를 가는구나 한참 좋은 청춘을 썩으러 가는구나
굵은 눈물 흘리며 떠나가는 그대에게 이 못난 선배는 줄 것이 없다 쓴 소주 이별잔 밖에는 줄 것이 없다 하지만 그대는 썩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푸른 제복에 갇힌 3년 세월 어느 하루도 헛되이 버릴 수 없는 고귀한 삶이다
그대는 군에서도 열심히 살아라 행정반이나 편안한 보직을 탐내지 말고 동료들 속에서도 열외 치지 말아라 똑같이 군복입고 똑같이 짬밥먹고 똑같이 땀흘리는 군대생활 속에서도 많이 배우고 가진 놈들의 치사한 처세 앞에 오직 성실성과 부지런한 노동으로만 당당하게 인정을 받아라
빗지루 한 번 더 들고 식기 한 개 더 닦고 작업할 땐 열심으로 까라며 까고 뽑으라면 뽑고 요령피우지 말고 적극적으로 살아라 고참들의 횡포나 윗동기의 한따까리가 억울할지 몰라도 혼자서만 헛고생한다고 회의할지 몰라도 세월 가면 그대로 고참이 되는 것 차라리 저임금에 노동을 팔며 갈수록 늘어나는 잔업에 바둥치는 이놈의 사회보단 평등하게 돌고도는 군대생활이 오히려 공평하고 깨끗하지 않으냐 그 속에서 비굴을 넘어선 인종을 배우고 공동을 위해 다 함께 땀흘리는 참된 노동을 배워라
몸으로 움직이는 실천적 사랑과 궂은 일 마다 않는 희생정신으로 그대는 좋은 벗을 찾고 만들어라 돈과 학벌과 빽줄로 판가름나는 사회속에서 똑같이 쓰라린 상처 입은 벗들끼리 오직 성실과 부지런한 노동만이 진실하고 소중한 가치임을 온 몸으로 일깨워 끈끈한 협동속에 하나가 되는 또다른 그대 좋은 벗들을 얻어라
걸진 웃음 속에 모험과 호기를 펼치고 유격과 행군과 한따까리 속에 깡다구를 기르고 명령의 진위를 분별하여 행하는 용기와 쫄따구를 감싸 주는 포용력을 넓혀라 시간나면 읽고 생각하고 반성하며 열심히 학습하거라 달빛 쏟아지는 적막한 초소 아래서 분단의 비극을 깊이 깊이 새기거라
그대는 울면서 군대 3년을 썩으러 가는구나 썩어 다시 꽃망울로 돌아올 날까지 열심히 썩어라
이 못난 선배도 그대도 벗들도 눈부신 꽃망울로 피어나 온 세상을 환히 뒤흔들 때까지 우리 모두 함께 열심히 썩자 그리하여 달궈지고 다듬어진 틈실한 일꾼으로 노동과 실천과 협동성이 생활속에 배인 좋은 벗들과 함께 빛나는 얼굴로 우리 품에 돌아오라
눈물을 닦아라 노동자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열심히 열심히 잘 썩어야 한다
천생연분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이뻐서가 아니다 젖은 손이 애처로와서가 아니다 이쁜 걸로야 TV 탈렌트 따를 수 없고 새련미로야 종로거리 여자들 견줄 수 없고 고상하고 귀티나는 지성미로야 여대생년들
쳐다볼 수도 없겠지 잠자리에서 끝내주는 것은 588 여성동지
발뒤꿈치도 안차고 써비스로야 식모보단 못하지 음식솜씨 꽃꽂이야 학원강사 따르것나 그래도 나는 당신이 오지게 좋다 살아 볼수록 이 세상에서 당신이 최고이고 겁나게 겁나게 좋드라
내가 동료들과 술망태가 되어 와도 며칠씩 자정 넘어 동료집을 전전해도 건강걱정 일격려에 다시 기운이 솟고 결혼 후 3년 넘게 그 흔한 쎄일샤쓰 하나 못사도 짜장면 외식 한번 못하고 로숀 하나로 1년 넘게 써도 항상 새순처럼 웃는 당신이 좋소
토요일이면 당신이 무데기로 동료들을 몰고와 피곤해 지친 나는 주방장이 되어도 요즘 들어 빨래, 연탄갈이, 김치까지 내 몫이 되어도 나는 당신만 있으면 째지게 좋소
조금만 나태하거나 불성실하면 가차없이 비판하는 진짜 겁나는 당신 좌절하고 지치면 따스한 포옹으로 생명력을 일깨 세우는 당신 나는 쬐끄만 그 몸 어디에서 그 큰 사랑이, 끝없는 생명력이 나오는가
곤히 잠든 당신의 가슴을 열어 보다 멍청하게 웃는다
못배우고 멍든 공순이와 공돌이로 슬픔과 절망의 밑바닥을 일어서 만난 당신과 나는 천생연분 저임금과 장시간노동과 억압 속에 시들은 빛나는 대한민국 노동자의 숙명을 당신과 나는 사랑으로 까부수고 밤하늘 별처럼 흐르는 시내처럼 들의 꽃처럼 소곤소곤 평화롭게 살아갈 날을 위하여 우린 결말도 못보고 눈감을지 몰라 저 거친 발굽 아래 무섭게 소용돌이쳐 오는 탁류 속에 비명조차 못지르고 휩쓸려갈지도 몰라 그래도 우린 기쁨으로 산다 이 길을 그래도 나는 당신이 눈물나게 좋다 여보야
도중에 깨진다 해오 우리 속에 살아나 죽음의 역사를 넘어서서 이른 봄마다 당신은 개나리 나는 진달래로 삼천리 방방곡곡 흐드러지게 피어나 봄바람에 입맞추며 옛얘기 나누며 일찌기 일 끝내고 쌍쌍이 산에 와서 진달래 개나리 꺾어 물고 푸성귀 같은 웃음 터뜨리는 젊은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며 그윽한 눈물로 지자 여보야 나는 당신이 좋다 듬직한 동지며 연인인 당신을 이세상에서 젤 사랑한다 나는 당신이 미치게 미치게 좋다
새벽별
새벽 찬물로 얼굴을 씻고 나니 창살 너머 겨울나무 가지 사이에 이마를 탁 치며 웃는 환한 별 하나
오 새벽별이네!
어둔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온다고 가장 먼저 떠올라 새벽별
아니네!
뭇 별들이 지쳐 돌아간 뒤에도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는 별 끝까지 돌아가지 않는 별이 새벽별이네
새벽별은 가장 먼저 뜨는 찬란한 별이 아니네 가장 나중까지 어둠 속에 남아 있는 바보 같은 바보 같은 별 그래서 진정으로 앞서가는 별 희망의 별이라네
지금 모든 별들이 하나 둘 흩어지고 사라지고 돌아가는 때 우리 희망의 새벽별은 기다림에 울다 지쳐 잠든 이들이 쉬었다 새벽길 나설 때까지 시대의 밤하늘을 성성하게 지키다 새벽 붉은 햇덩이에 손 건네주고 소리없이 소리없이 사라지느니
앞이 캄캄한 언 하늘에 시린 첫마음 빛내며 떨고 있는 바보 같은 바보 같은 사람아 눈물나게 아름다운 그대
오 새벽별이네!
조업재개
못난 놈들 부끄러운 놈들만 나왔구나 부석부석 술 덜 깬 얼굴 무겁게 수그리고 괜시리 서먹서먹 바쁜 듯이 눈길 피하며 애꿎은 담배들만 뻑뻑 피는구나 아직 덜 지워진 스프레이 구호가 부끄럽구나
하 그래도 다들 안 죽고 출근했구나 이까짓 공장뺑이 때려친다며 이참에 출세한 놈 잘나간 놈 하나 없이 작업복 차림 그대로 다들 기어나왔구나 감옥 가고 입원하고 수배 붙은 놈들만 빼놓고선, 미칠 일이지
헛헛 씨팔 우리 다시 일하자 우리가 가면 어딜 가겄냐 드럽고 치사한 패잔병들 아니냐 묵고 살아야만 하는 생존의 포로들 아니냐 안 죽고 안찍히고 안 짤릴라문 힘 죽이고 다시 일해야 쓴다 아 얼마나 목메이게 우리 외쳤느냐 노동자는 투사 아니면 임금노예라꼬
자 담배 한대 도고 니도 한대 묵어라 우리 고개 쳐들자 점심밥도 많이 묵으라 함마질 땅땅 용접불도 쎄게 쎄게 조지라 억울하고 눈물 터지는 조업재개다 이제 또다시 저 쌔빠지는 실적경쟁 철야특근으로 원상복귀다 열받치는 면담각서 징계회부 정신교육 자본에 군기 팍 잡히는 거다
그래 좋다 우리들 조업재개 - 쓰라린 패배의 노동을 한다 억장 터지는 배신의 노동을 한다 그러나 우리들, 임금노예 아니면 투사, 착착 조여드는 이 부끄러움 이 굴욕과 수치의 노동이 있는 한 우리는 결국 또다시 투쟁재개다
거룩한 사랑
성(聖)은 피(血)와 능(能)이다.
어린 시절 방학 때마다 서울서 고학하던 형님이 허약해져 내려오면 어머님은 애지중지 길러온 암탉을 잡으셨다 성호를 그은 뒤 손수 닭 모가지를 비틀고 칼로 피를 묻혀가며 맛난 닭죽을 끓이셨다 나는 칼질하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떨면서 침을 꼴각이면서 그 살생을 지켜보았다
서울 달동네 단칸방 시절에 우리는 김치를 담가 먹을 여유가 없었다 막일 다녀오신 어머님은 지친 그 몸으로 시장에 나가 잠깐 야채를 다듬어주고 시래깃감을 얻어와 김치를 담고 국을 끓였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퍼런 배추 겉잎으로 만든 것보다 더 맛있는 김치와 국을 맛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어머님의 삶에서 눈물로 배웠다
사랑은 자기 손으로 피를 묻혀 보살펴야 한다는 걸
사랑은 가진 것이 없어도 무능해서는 안 된다는 걸
사랑은 자신의 피와 능과 눈물만큼 거룩한 거라는 걸
하늘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 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 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시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대대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것지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 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못다 한 정
깊은 산중에 산막을 치고 우람한 나무들을 우직끈 찍어 넘겨 강물에 떠내려보내는 산꾼들은 뗏목 위에 산딸기, 머루, 꽃들을 얹는다 저 그리운 사람마을 누군가에게
강가에 우는 그대여 기다림에 울다 지친 그대여
이 장강에 쓰러져 흐르는 뗏목같은 생목숨 위에 얹힌 달고 고운 꽃송이 받으라 거친 일생에 못다 한 못다 한 정 받으라
아직과 이미 사이
'아직'에 절망할 때 '이미'를 보아 문제 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굽혀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민들레처럼
일주일의 단식 끝에 덥수룩한 수염 초췌한 몰골로 파란 수의에 검정고무신을 끌고 어질어질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굴비처럼 줄줄이 엮인 잡범들 사이에서
"박노해씨 힘내십시오" 어느 도적놈인지 조직폭력배인지 노란 민들레 한 송이 묶인 내 손에 살짝이 쥐어주며 환한 꽃인사로 스쳐갑니다
철커덩, 어둑한 감치방에 넣어져 노란 민들레꽃을 코에도 볼에도 대어보고 눈에도 입에도 맞춰보며 흠흠 포근한 새봄을 애무한 민들레꽃 한 송이로 환하게 번져오는 생명의 향기에 취하여 아…… 산다는 것은 정녕 아름다운 것이야
그러다가 문득 내가 무엇이길래 긴장된 마음으로 자세를 바로잡고 민들레꽃을 바라 봅니다 어디선가 묶인 손으로 이 꽃을 꺾어 정성껏 품에 안고 내 손에까지 쥐어준 그 분의 애정과 속뜻을 정신 차려 내 삶에 새깁니다
민들레처럼 살아야 합니다 차라리 발길에 짓밟힐지언정 노리개꽃으로 살지 맙시다 흰 백합 진한 장미의 화려함보다 흔하고 너른 꽃 속에서 자연스레 빛나는 우리 들꽃의 자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빛나지는 않아도 조금도 쓸쓸하지 않고 봄비 뿌리면 그 비를 마시고 바람 불면 맨살 부대끼며 새 눈과 흙무더기 들풀과 어우러져 모두 다 봄의 주체로 서로를 빛나게 하는 민들레의 소박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요 논두렁이건 무너진 뚝방이건 폐유에 절은 공장 화단 모퉁이 쇠창살 너머 후미진 마당까지 그 어느 험난한 생존의 땅 위에서건 끈질긴 생명력으로 당당하게 피어나는 민들레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우리는 보호막 하나 없어도 좋습니다 말하는 것 깨지는 것도 피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피어나야 할 곳에 거침없이 피어나 온몸으로 부딪히며 봄을 부르는 현장의 민들레 그 치열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자신에게 단 한번 주어진 시절 자신이 아니면 꽃피울 수 없는 거칠은 그 자리에 정직하게 피어나 성심껏 피어나 기꺼이 밟히고 으깨지고 또 일어서며 피를 말리고 살을 말려 봄을 진군하다가 마침내 바람찬 허공중에 수천수백의 꽃씨로 장렬하게 산화하는 아 민들레 민들레 그 민들레의 투혼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새야 새야
좁다란 네면 벽이
좁기도 하고 넓기도 하다
침침한 무덤속인가
아득한 우주속인가 사방인가
적막한 마음에 창살 틈에 밥알 놓으니
산새가 날아와 지저귀며 물어간다
낭낭한 새울음에 방 안이 금새 환해지는 듯
문득 노래 끊겨 귀를 세워 기다려도
먹을 것 없는 창살 가에 새소리는 다시 없구나
새야 새야
너도 외롭고 나도 쓸쓸한다
잊은듯 한번쯤 와서 맑은 노래 들려주렴
밥알이야 있건 없건 찾아와 주는 건 하늘 마음이고
먹을 긋 없다고 오지 않는 건 무엇의 마음이랴
새야 새야
너 외롭지 않으면 찾지 않아도 좋다
나 혼자라도 괜찮아
슬프면 슬픈대로 놓아두고
쓸쓸하면 쓸쓸한대로 말없이 산다
찾아오는 마음 떠나가는 마음
이마음 저마음 모두
하늘 뜻 숨어 계시는 하늘 마음이려니
첫마음
한번은 다 바치고 다시 겨울나무로 서있는 벗들에게
저마다 지닌 상처 깊은 곳에 맑은 빛이 숨어 있다
첫마음을 잃지 말자
그리고 성공하자 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 첫마음으로
겨울 더 깊어라
겨울 새벽 냉수 마찰중인 문득 만져진 내 여윈 어깨죽지 날이 갈수록 붉고 푸르다 검은 피멍이다
고된 벽 속의 묵언 정진 길 서둘지 말고 쉬지도 말라 쫓기는 삶 돌이켜 쫓아라 서슬 푸르게 후려치던 내 마음의 준비 자욱들
검게 굳어진 살 넘어 언 땅 깊이 검고 굳은 씨앗들의 뜨거운 떨림돌 떨림돌
겨울 더 깊어라
바람 잘 날 없어라
바람 잘 날 없어라 내 생의 길에 온 둥치가 흔들리고 뿌리마다 사무치고
아-- 언제나 그치나. 한고비 넘으면 또 한고비 너무 힘들다 너무 아프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싸워야 하나
바람 잘 날 없어라 울지마. 살아있다는 것이다. 오늘 이 아픔 속에 외로움 속에
푸르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다 시
희망 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체로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랑의 침묵
너에게도 세월이 지났구나 꽃들은 어둠 속에 소리 없이 지고
내 사랑하는 것들은 말이 없고 내 사랑하는 여자도 말이 없고 나는 너무 많은 사랑은 하다가 쓰러져 흰 눈 쓴 겨울 사내로 말이 없고
깊은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르듯 진실로 사랑하는 가슴은 너무 많은 말과 너무 많은 사연과 너무 많은 눈물이 있어 사랑은 말없이 흘러가는 것
그래도 꼭 한마디 품고 가야할 말이 있어 나 이렇게 새벽 강가에서 사랑의 침묵을 듣고 있을 뿐
강물은 자신이 가는 길을 안다
강물은 흐른다 굽이 치며 흐른다
동북아의 바람은 불어 풀잎과 나무는 강물 따라 달린다
붉은 해가 뜨고 붉은 해가 지고 강물은 자신의 깊이를 알고 있다
자신의 숨겨진 고요와 자신의 가슴속 폭포와 자신이 흘러온 땀과 눈물을 안다
저녁 강에 달이 뜨고 별들이 건너 간다
강물은 흐른다 강물은 자신이 사라질 것을 안다
강은 강을 만나고 마침내 바다를 만나지만 그러나 강은 강, 강물은 자신이 가는 길을 안다
긴 눈물
바그다드를 떠나는 날 오늘도 총소리는 울리고 검은 연기는 타 오르는데 늦은 비가 내린다
머리 위에도 얼굴 위에도 무너진 건물더미에도 굵은 빗방울은 떨어지는데
나는 보았다 처음으로 티그리스 강이 우는 것을
사람들은 처음으로 전쟁의 얼굴 위에 차갑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스스로의 노동과 한 숨과 뼈 빠지는 나날로 씻고 치우고 일으켜 세워야 할 미래의 삶의 무게를 생각하는 듯 침잠한 표정으로 빗속을 걷는다
전쟁으로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자들은 하루 하루가 전쟁이지만 바그다드는 마지막 늦비를 맞으며 전쟁의 두터운 먼지를 씻고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본다
바그다드를 떠나는 날 나는 보았다 처음으로 티그리스 강이 우는 것을 이라크의 가슴에 흐르는 긴 눈물을
풍경
내가 지나온 풍경은 늘 초라하고 그늘 지고 거칠었다. 그것이 나의 슬픔이었다.
더 슬픈 것은 내 마음이 나도 모르게 내가 서 있는 풍경을 조금씩 닮아 가는 거였다.
지금 내가 서 있는 풍경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 없이 거칠고 가파르고 초라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