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朝人物考四十
조광헌 묘갈명(趙光憲 墓碣銘) - 창석 이준(李埈)
나의 고향에는 문벌(門閥)과 가성(家聲)으로 나타난 자가 한 성씨(姓氏)만이 아니나, 만약 효성 있고 근신한 행실로 구업(舊業)을 이어 후인(後人)들에게 남겨 준 자를 말한다면 반드시 고(故) 향장(鄕丈) 조공(趙公)을 추대하여 우선으로 삼는다.
공의 휘(諱)는 광헌(光憲)이고, 자(字)는 숙도(叔度)이다. 그의 선대에 조암(趙巖)이 있는데 고려(高麗)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이다. 이로부터 20여 대를 내려오면서 벼슬이 대대로 이어져 왔다. 고조(高祖) 조서정(趙瑞廷)은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이고, 증조(曾祖) 조회(趙恢)는 부사(府使)인 신송주(申松舟)의 딸을 맞아 조윤녕(趙允寧)을 낳았는데 벼슬이 춘천 부사(春川府使)에 이르렀다.
부사(府使)가 영의정(領議政)인 장순손(張順孫)의 딸을 맞아 조희(趙禧)을 낳으니 벼슬이 직장(直長)에 이르렀다. 이분이 공의 아버지이다. 직장(直長)의 배위(配位)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군수(郡守) 홍언경(洪彦慶)의 딸인데, 가정(嘉靖) 갑오년(甲午年, 1534년 중종 29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의관(儀觀)이 의젓하고 기질(器質)이 장중(莊重)하였다. 소싯적부터 시서(詩書)의 공부에 독실하여 과거 공부 외에도 사람들이 힘쓸 곳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일찍이 문장 공부를 익혀 과거를 하려는 뜻을 가지지 않았다.
사는 곳이 주성(州城)의 번화한 지역에 있어 지키는 마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미혹되는 바가 되지 않을 자 적을 것인데, 공은 간결(簡潔)함으로 스스로 단속하여 절대로 외인(外人)과 교류하지 않고 혼자 거처함에 있어 구도(矩度)가 아주 반듯하였다.
일찍이 노기를 띤 얼굴빛으로 말을 하지 않았어도 집사람들이 두려워 굴복을 하였다. 향리에 살면서 이익을 스스로 경영하지 않았고 또한 조금도 사사(私事)를 가지고 관청 일[公府]을 흔들리게 하지 않았다.
평상시에 말이 적고 조용해서 남의 득실(得失)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며, 사체(事體)에 관계된 일을 논의함에 이르러서는 시비(是非)와 가부(可否)에 있어 오직 정의가 있는 바대로 하였으므로, 무릇 여탈(予奪)에 있어 사람들의 이론(異論)이 없었다.
자제(子弟)들을 교도함에 친절하게 하되 문학(文學)과 행의(行誼)로 근본을 삼았다. 그래서 여러 아들이 의젓하게 자립을 하였으니, 이 몇 가지 일만 보아도 공의 뜻과 행실의 대개를 알 수가 있다. 가정(嘉靖) 무오년(戊午年, 1558, 명종 13)에 모친상을 당하여 슬픔에 수척해져서 거의 죽을 뻔하였다.
만력(萬曆) 정해년(丁亥年, 1587, 선조 20)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이때에 공의 나이가 53세로 슬픔에 상사를 이기지 못하여 거상 중에 쇠약해지자 친한 이가 고기즙을 미음에 타서 공에게 드리니 공이 눈물을 흘리면서 사양하기를, “슬픔을 잊고 구차히 살려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하고, 마침내 숨을 거두면서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증자(曾子, 공자의 제자 증삼(曾參))가 말한 ‘상사(喪事)에 그 슬픔을 다한다’고 한 것은 공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은 공이 어질면서도 일명(一命)의 품계(品階)를 얻지 못한 것에 대해 유감스레 생각하였다. 아! 얻고 잃는 상충으로 파벌을 만드는 무리가 가는 곳마다 넘쳐서 사람들이 그 성품을 상실한 자가 많은데, 공은 비록 세상에 잠겨 감춰져 있으나 덕행으로써 그 가정에 대를 이어 갈 수 있으니,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것이 또 무엇이 섭섭할 게 있겠는가? 자장(子張, 공자의 제자)이 말하기를, “군자(君子)의 (죽음을) 종(終)이라 한다.” 하였는데, 공과 같은 이가 그에 가깝다 하겠다.
찰방(察訪) 홍윤최(洪胤崔)의 딸을 맞아 4남을 낳으니, 조정(趙靖)과 조익(趙翊)은 둘 다 계과(桂科, 대과(大科))에 나란히 발탁되었는데, 성품이 곧아서 세속에 어울리지 않았다. 벼슬에 나가는 길이 비록 연달아 어려운 듯했으나 맑은 재능과 아름다운 지조는 당시에 중히 여기는 대우를 받았다.
장공(長公)은 통훈 대부(通訓大夫)로서 벼슬이 봉상시 정(奉常寺正)인데, 장차 관질(官秩)이 차 통정 대부에 올려 주려고 하였으나, 마침내 병을 핑계로 하여 돌아가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고, 중공(仲公)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서 일찍 세상을 떴다.
그 다음 조굉(趙竤)도 준결(峻潔)한 행실이 있어서 그를 일컬어 가아(家兒)라고 하여 천거해서 평시서 직장(平市署直長)에 제수되었고, 막내 조준(趙竣)은 재능이 있었으나 떨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딸이 셋인데, 참봉(參奉) 구광원(具光源), 진사(進士) 김안절(金安節), 유학(幼學) 이욱(李勗)에게 시집갔다.
봉상시 정은 내자시 정(內資寺正) 김극일(金克一)의 딸을 맞아 5남을 낳으니, 조기원(趙基遠)은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이고, 조영원(趙榮遠)과 조홍원(趙弘遠)은 진사(進士)인데 일찍 죽었고, 조형운(趙亨遠)은 무변(武弁)으로 통정(通政) 품계에 올라 군수(郡守)가 되었고, 다음은 조흥원(趙興遠)이며, 딸은 이기(李歧)와 정흔(鄭炘)에게 각각 시집갔다.
장령(掌令)은 생원(生員) 박사눌(朴思訥)의 딸을 맞아 1남 조유원(趙柔遠)을 낳았다. 직장(直長)은 생원(生員) 권경룡(權景龍)의 딸을 맞이하여 2남을 낳으니, 조승원(趙承遠)ㆍ조명원(趙明遠)이며, 딸 넷은 아무아무에게 시집갔다. 조준은 이국형(李國衡)의 딸을 맞았는데, 아들이 없다.
구광원(具光源)은 2녀를 두었으며, 이욱(李勗)은 2남을 두었다. 증손(曾孫) 남녀가 20여 인이고 측출손(側出孫)이 10여 인인데, 여기서 보시(報施)의 이치가 거짓이 없음을 징험할 수 있어서 선(善)을 하는 자의 권면으로 삼을 만하다.
공은 기축년(己丑年, 1589, 선조 22) 모월(某月)에 장사지냈는데, 그 묘소는 모향(某向)의 언덕에 있다. 부인(夫人)은 유순 명철[柔明]하고 안존 장중[靚莊]하여 숙행(淑行)이 있었는데, 5년 뒤 임진왜란을 만나 삼산(三山)에서 세상을 떠나 처음에는 그 땅에 장사지냈다가 모년 모월 모일에 옮겨 공의 묘에 부장(祔葬)하였다.
나 이준(李埈)은 장공(長公)에게는 인친(姻親)이 되고 중공(仲公)에게는 연계(年契)가 되는 처지이므로 공의 행의(行誼)의 아름다움을 모두 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이었는데, 지금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해 오니 의리상 사양하지 못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영광되고 이로운 길은 세상 사람들이 쫓아가는 곳인데,
덕을 숨기고 나타내지 않는 것을 남들이 오활하다고 하는 것이다.
공이 좋아하던 것은 저들과 판이하였으므로,
오활하게 여기는 것을 취하여 과거 공부를 일찌감치 포기하였네.
몸소 행하여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고 집에 거처함에 법도가 있어서,
그 것으로 여러 아들을 인도하니 재능이 있으면서도 착하였네.
덕을 심는 일은 몸에 있으나 보답할 책임은 하늘에 있는 것.
나이는 비록 수(壽)했다 할 수 없으나 실은 온전하게 돌아간 것이다.
금석(黔石)의 언덕이여! 산은 울창하고 물은 길이 흐르니,
장자(長者)가 묻힌 곳임을 후인들은 잊지 말지어다.
------------------------------------------------------------------------------------------------------------------------------------------------------
[原文]
趙光憲 墓碣銘[李埈]
吾鄕之以閥閱家聲而著者非一姓, 而若其以孝謹之行, 承舊業而裕後人者, 必推故鄕丈趙公爲先。 公諱光憲, 字叔度。 其先有諱巖, 爲高麗開國功臣, 自是而後歷二十餘代, 冠冕赫世。 高祖諱瑞廷, 奉常判官。 曾祖諱恢, 娶府使申松舟女, 生諱允寧, 官至春川府使。 府使娶領議政張順孫女, 生諱禧, 官至直長, 是於公考也。 配南陽洪氏, 郡守彦卿之女, 以嘉靖甲午生公。
儀觀偉然, 器質莊重, 少而篤詩書之業, 知於擧業之外有吾人用力之地, 未嘗習詞華爲覓擧意。 所居在州城紛華之地, 非所守之確, 其不爲所惑者鮮矣。 而公簡潔自飭, 絶不與外人交遊, 燕居矩度整整。 未嘗厲色辭, 而家人畏服。 居鄕, 不以利自營, 亦不以一毫私事撓公府。 常時寡默, 不言人得失, 至於論議之有關於事體者, 其是非可否, 惟義所在, 凡有予奪, 人無異論。 敎導子弟, 恂恂以文學行誼爲本, 以故諸子皆嶷然有立。 觀此數事, 公之志行之槪, 可知之矣。 嘉靖戊午, 遭內艱, 哀毁幾不保。 萬曆丁亥, 遭外艱, 是時公年五十三矣, 哀不勝喪, 委頓草土。 所親以肉汁和淖糜以進, 公涕泣辭曰: “忘哀苟活, 非我志也。” 遂凘盡而不悔。 曾子曰: “喪致其哀。” 非公之謂乎? 或以公之賢而不階一命爲憾。 噫! 得喪之衝, 波流滔滔, 人失其性者多矣。 公雖潛閟於世, 而能以德行而世其家, 其不耀於世, 又何憾也? 子張曰: “君子曰終。” 若公其庶幾也。
聘察訪洪胤崔女, 生四男: 靖, 翊, 俱擢蓮桂科, 介直不耦俗。 其仕進雖若連蹇, 而淸才姱節, 見重於時。 長公以通訓官奉常正, 將秩滿陞資, 而終引疾歸, 人以爲難。 仲公以司憲府掌令而早世。 其次竤, 亦有峻潔之行, 稱其爲家兒也, 以薦授平市署直長。 季竣, 有才不
振而夭。 女三: 適參奉具光源、進士金安節、幼學李勗。 奉常娶內資正金克一女, 生五男: 基遠, 司贍主簿: 榮遠: 弘遠, 進士, 早死: 亨遠, 以武弁階通政爲郡守 : 興遠。 女適李歧、鄭炘。 掌令娶生員朴思訥女, 生一男柔遠。 直長娶生員權景龍女, 生二男: 承遠, 明遠。 女四, 適某某。 竣娶李國衡女, 無後。 具光源二女。 李勗二男。 曾孫男女二十餘人, 側出孫十餘人。 觀於此而驗報施之理不誣, 而足以爲爲善者之勸也。 公之葬以己丑某月, 而其宅兆某向之原。 夫人柔明靚莊有淑行, 後五年而遭辰巳之亂, 卒于三山, 始葬于其地以某年月
日, 遷窆而祔于公。 埈於長公爲姻親, 於仲公爲年契, 公行誼之美, 皆所耳濡而目染, 今於碣銘之屬, 義不可辭。 銘曰:
榮利之途, 世之所趨; 潛德不耀, 人之所迂。 公之所好, 與彼而異。 取其所迂, 科業夙棄。 範物以躬, 居家有法。 以迪諸子, 有才而穀。 種德於身, 責報於天。 年雖罔壽, 實歸其全。 黔石之原, 山蔚水長。 長者所藏, 後人勿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