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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2:14-15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양심
1984년 Avianca Airlines의 제트기가 스페인에서 추락했습니다. 사고의 원인을 조사하는 조사관들은 블랙 박스에 녹음된 마지막 음성을 발견했습니다. 조정석에 설치된 블랙박스는 사고가 나기 몇 분 전, 자동 경고 시스템의 콤퓨터로 합성된 날카로운 음성이 승무원에게 반복적으로 “고도를 높이라, 높이라!”라고 되풀이 해서 경고했다는 사실입니다.
조종사는 시스템이 오작동하고 있다고 확신한 듯 “입 닥쳐, 이 멍청아!”라 소리 치며 경고 시스템의 스위치를 꺼 버렸습니다. 몇 분 후 비행기는 산 허리에 처박혔고, 비행기에 타고 있던 모든 승객은 사망했습니다.
현대인들의 양심의 경고 메시지가 이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세대의 지혜는 죄의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정신 건강에 해로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무시해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방법들 마약, 심리치료, 엔터테인먼트 등은 죄악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으로 부터 벗어나려고 사용하는 것 입니다.
과연 이것이 바른 조언일까요?
무엇보다도, 양심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모두 느끼는 것이 죄의식 아닙니까?
그러나 기독교인에게는 양심은 자유를 얻게 하는 열쇠입니다.
양심은 자신의 죄를 느끼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크나큰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양심을 인간의 영혼의 중요한 구조물로 심어 주셨습니다.
당신이 충돌하여 폭발하기 전에 “고도를 높이라, 고도를 높이라!”라고 소리치는 자동 경고 시스템입니다.
양심은 인간과 다른 피조물을 구별하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양심은 옳고 그른 것을 느낄 수 있는 타고난 능력입니다.
모든 사람, 심지어 가장 영리하지 못한 야만인들도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 2:14-15, 강조 추가됨)
그러나 양심을 하나님의 음성이나 하나님의 율법과 동일시하지는 마십시오.
양심은 당신이 인식하는 최고 수준의 빛으로서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계시의 원천[하나님 말씀]도 아닙니다.
만일 당신이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하게 되면, 당신의 양심은 수치심, 괴로움, 후회, 놀라움, 불안, 불명예, 심지어 두려움 등의 감정을 유발하게 하여 당신을 책망합니다.
반대로, 당신이 양심을 따르면 양심은 당신에게 기쁨, 평온함, 자존심, 행복, 그리고 즐거움을 주고 당신을 칭찬합니다.
양심은 자기 자신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즉, 당신의 양심은 당신 내면의 동기와 참된 생각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양심에 대한 히브리 단어는 보통 구약 성경에서 “마음”으로 번역된leb입니다.
양심은 인간 영혼의 핵심인데,
따라서 모세는 바로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출 8:15) 한 것을 기록했을 때, 바로가 그의 양심을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완강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드러운 마음은(참조 역하 34:27) 민감한 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정직한”(시 7:10)은 순수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기도하며, 자신의 삶과 양심을 깨끗하게 하려고 구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양심을 억누르거나 지배하거나 침묵시키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원인은 어린 시절의 상처,
부모의 양육 방법, 사회적 압박, 또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었단 다른 원인에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때로 사람들은 죄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문제라고 보고, 알코올 중독, 성도착증, 부도덕 그리고 모든 다른 악덕을 “질병” 혹은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수도 없이 많은 위법을 저지른 후에 양심은 마침내 무디어 져서 잠잠해집니다. 도덕적으로는, 불량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장님이 되어 버립니다.
게다가 아무리 더럽고 숨겨진 양심이라도 영원히 묻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면 모든 사람의 양심은 의로운 재판관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죄로 마음이 굳어진 최악의 죄인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이고, 자신을 향해 악하다고 자신을 정죄하는 양심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이 절대 틀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옳고 그름에 대한 계시의 원천도 아닙니다.
양심의 역할은 당신에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이상을 가르쳐 주지는 않지만,
당신이 알고 있는 가장 높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으로서, 그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요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접하는 전통이나 진리가 양심에 정보를 제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의 기준이 반드시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고전 8 : 6-9).
양심은 참된 거룩함에 따라 완전하게 작동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작동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비록 죄책감이 성경적 근거가 없다 하더라도, 그들은 중요한 영적 조난의 신호입니다. 만일 당신의 양심이 잘못된 조난 신호를 보낸다면 그 신호는 당신의 양심을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를 이루어 당신의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자극제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양심은 마음의 확신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므로당신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격려를 받아야 하고 더욱 민감해 져야 합니다.현명한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진리를 알아 가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여 온전한 정보로 바르게 판단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깨끗한 양심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 이유이고(딤전3:9),
그것을 더럽히거나 진흙탕에 빠뜨릴 만한 것에 대하여 경고한 이유입니다(고전8:7; 딛1:15).
바울은 또한 굳은 살이 박힌 양심(고전8:10)과
상처 입은 양심(고전 8:12)과
화상을 입은 양심(딤전4:2)의 위험에 대해 말했습니다.
정신병자, 연쇄 살인범, 병적인 거짓말쟁이 및 도덕적 감각이 부족한 사람들은 양심을 망치거나 그들의 양심이 둔감해진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그들이 엄청난 부도덕과 불법을 통해 자신의 양심을 파괴해 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 양심에게 정보를 주십시오.
절대로 양심을 무시하지 말고 양심의 경고에 신속하게 대응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범하여 용서를 구할 때 일관된 고백을 통해 양심을 깨끗게 하십시오. 그러한 것들이 당신의 양심을 강화해 줄 것이고, 그렇게 할 때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양심의 자유와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얼마나 파괴적인가 하는 것을 잊어버리기 쉽다—
단지 영원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날마다의 삶가운데에서 말이다.
우리는 언급되지 않은 수많은 죄가 우리의 가족과 우정,
그리고 경력을 어떻게 파괴시키고 있는지를 보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내면적인 엄청난 충격을 초래하는데,
바울은 양심이 뒤얽히고 타락한 사람들을 향하여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수치)에 있고”(빌립보서 3:19; 참조. 로마서 1:32)라고 하였다.
마음과 양심 모두가 심하게 더럽혀지게 되면,
그들은 무엇이 순결하고 무엇이 부정한지를 구별할 수가 없게 된다.
그렇게 많은 위반을 한 이후에 양심은 결국 잠잠하게 된다.
도덕적으로 더럽혀진 양심은 함부로 행동하게 된다. 경고 신호는 사라지고, 분명히 위험은 없다고 하지만 사실 위험은 그 어느때보다도 더욱 심각한 것이다.
더군다나, 가장 더럽혀진 양심조차도 언제까지나 잠잠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심판 가운데 서게 되면, 모든 사람의 양심은 하나님, 의로우신 재판관의 편에 서게 될 것이다. 악행한 자의 마음을 굳어버리게 한 최악의 죄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악행자 자신에게 불리하게 증거하는 양심을 보게 될 것이다.
회심한 양심의 순결함을 지키는 것은 기독교인의 높고도 거룩한 의무이다.
바울은 이것에 대하여 할 말이 많았다. 다음의 구절에서 그가 어떻게 양심에 대하여 말했는지를 주목하라(강조 추가):
“그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사도행전 23:1).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사도행전 24:16).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디모데전서 1:5).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디모데전서 1:18-19).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디모데후서 1:3).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디모데전서 3:9).
선한 양심이란 당신 자신을 위한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건전한 양심은 그리스도에 대한 강력한 증거이다.
바울은 증인으로서의 그의 양심을 자주 언급하였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린도후서 1:1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린도후서 4:2).
베드로도 또한 순결한 양심의 가치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 3:16).
깨끗하고 강한 양심은 당신의 영적인 성장과 아울러 다른 사람들을 향한 당신의 증거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내일은 어떻게 당신의 양심을 깨끗이 하며, 또한 그것을 어떻게 깨끗하게 유지하는가에 대하여 살펴 볼 것이다.
깔끔한 청소, 갓 칠한 페인트, 약간의 정원 작업은 당신의 집 바깥을 아주 다르게 보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만약 집 안이 썩어있다면-벌레가 들끓고 쓰레기와 오물로 가득 차 있다면- 외관에 들인 모든 작업은 헛된 노력이다.
똑같은 원리가 당신의 영적인 삶에서도 진실이다.
죄악된 행동, 태만죄, 고의가 아닌 죄를 고백하고 그만두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생각의 죄는 영혼을 물들이는 죄이고 인격을 파괴하는 죄이다.
생각의 죄는 양심과 의지에 직접 작용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정직하고 철저하게 다루는 것은 우리의 죄를 죽이는 것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측면 중 하나이다.
구약의 ,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신다(행15:8).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16:15)
하나님의 눈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가
사람들 앞에서 무엇을 하는지보다 한없이 중요하지 않은가?
욥의 “위로자들”은 욥이 불결한 생각의 삶을 살았다고 욥을 잘못 비난했다.
소바는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천장에 물고 있을지라도”(욥20:12-13).
소바가 그린 악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선명하게 실물 그대로다.
악한 생각은 그들에게 사탕과 같다.
그들은 상상의 죄에서 매우 큰 만족을 얻는다.
그들은 악한 상상을 흡족하게 즐긴다. 그들은 혀 아래의 달콤한 choice morsel(맛 좋은 소량의 음식;역주)처럼 악한 상상을 즐긴다.
그들은 상상 속에서 악한 생각을 이리저리 굴린다. 그들은 금지된 기쁨을 주는 똑같은 악한 묵상으로 계속해서 돌아온다. 그들은 되새김질하는 동물처럼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악한 생각들을 되풀이하여 그들의 마음 안에서 새롭게 재연하면서 곰곰이 생각한다.
그러나 소바는 욥을 잘못 판단했다.
욥은 사악하고 탐내는 생각으로부터 신중하게 자신을 지켰다:”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31:1) 그는 하나님이 그의 생각의 청중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만일 내가 허위와 함께 동행하고 내 발이 속임수에 빨랐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욥31:4-6) 욥은 그의 마음이 그의 눈을 따랐음을 부인했다(욥31:7). 그는 그의 마음이 다른 여인에게 유혹받았음을 부인했다(욥31:9). “그것은 참으로 음란한 일이니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요”라고 욥은 인정했다(욥 31:11) 죄악을 품에 감추려면, 그가 말했듯이 다른 사람처럼 그의 악행을 숨겼을 것이다(욥31:33). 바로 이 생각이 그의 의로운 마음을 질리게 했다.
분명히, 욥은 악한 생각의 위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죄를 피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신중하게 그의 마음을 경계했다.
그는 심지어 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마음으로 범죄했을 경우를 대비해 특별히 제사를 드리기도 했다:”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1:5, 저자 강조)
생각에 대한 욥의 주의 깊은 보호가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유한 축복을 주시려고 고르신 바로 그 이유로 보여진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말씀하시기를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1:8)고 하셨다.
욥은 바리새인들이 완고하게 보기를 거부했던 그것을 이해했다:
단지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비밀한 욕망의 핑계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정욕은 그 자체로 죄이다.
탐욕 단독으로도 사악하다.
탐심, 분노, 교만, 정욕, 질투, 불만, 증오, 그리고 모든 악한 생각은 그것이 생산하는 행동만큼이나 나쁘다.
마음에 이러한 생각들을 간직하고 즐기는 것은
원래 악한 생각의 죄에 위선을 더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특히 극악무도한 죄다.
당신은 진실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고, 헌신적이고, 독실하고, 순종하는 그리스도인과
무너지고, 약하고, 분투하는 그리스도인의 차이가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가?
그들은 같은 교회에 출석하거나, 같은 사역에서 열심히 활동하거나, 외적으로 똑 같은 일을 행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사람은 무너졌고 다른 사람은 영적으로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있다. 그 차이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양심의 삶이다.
예수님도 비슷하게 말씀하셨다:”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눅8:17).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눅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