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부 가을의 시작
1. 산이 잠드는 날
이름 모를 산새들
구슬피 울고
갈색 저고리 입은 나비
노란 띠 두른 꿀벌
보랏빛 들국화
이슬을 머금었다
풀숲에서
숨바꼭질하는
까만 여치들 다칠세라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눈다
가을 햇살
머리에 두르고
살랑대는 단풍잎들
작별 인사를 건네자
우수수 쏟아진 잎사귀들
산을 깊이
잠재운다
2. 한가위 산바람
산바람이 불어와
하늘에
뭉게구름을 올려놓고
막 이발한 산소의
편안한 잠자리를
살며시 흔들어 준다
대나무는 몸을 맡기고
억새는
고개를 숙인다
시원한 바람은
오늘이 한가위인 줄 알고
노래하며
춤을 춘다
터줏대감 밤나무 곁에서
동생 밤송이
살며시 눈을 뜨고
형님 밤송이는
가을을
먼저 연다
3. 강가에 서 있는 바다
김천구미역
율곡천에 사는
억새들
백발의 노인들처럼
의연하게
서 있다
앉아도
누워도
아무도
눈치를 주는 않는다
봄이 오자
햇순을 틔우고
돌복숭아 익어 가는
둑 아래
작은 바다 같은
초록 물결을 이룬다
그 위로
일렁이는
은빛 배
역사를 오가는
비둘기들은
선착장을 드나드는
갈매기 같다
4. 모래의 나이테+10
월곡다리 밑
모래땅에
냉이가
나이테를
그려 놓았다
부챗살처럼
누워
바람 불 때마다
힘닿는 데까지
그리고 또
이제는
더는
그릴 수 없어
보름
반달
몇 번의 자리
닿았던 연필
콤파스를 접고
다 내어주었다
셀 수 없는
새의 발자국
5. 불란서 국화에 반하다+6
율곡천변 길섶에
불란서 국화
은빛으로 피어 있다
바람에 몸을 기울이며
시선을 붙든다
곁에는
금빛 국화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꽃들 사이를 걷다
기억 하나가
앞서 걸어 나온다
새벽 등굣길
산모롱이에서
잠시 피었다가
사라진 보랏빛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그해의 설렘
지금은
국화로
다시 피어 있다
6. 측백나무
초록 열매를 만지다
열매를 달고 살아온
그대를 떠올립니다
그대의 발자취를 더듬다
되돌릴 수 없는 날들에
회한이 먼저 젖어 옵니다
껍질은 거칠었으나
맡은 자리에서
한 번도 물러선 적 없었고
운동장의 울타리가 되어
사람들의 못된 병을
묵묵히 받아냈습니다
맑은 날보다
궂은 날이 더 많았던 그대
바람 든 잎사귀 같은 몸으로도
자라는 초록 열매를 지켜보는
하루하루가
눈물처럼
맺혀 있습니다
2부 들판의 하루
6. 메뚜기 잡았다
고개 숙인 벼이삭에
메뚜기 한 쌍
짝지을 틈도 잊은 채
붙어 있다
한 번에
두 마리를 잡을 수도 있겠는데
가까이 쓰러진 벼
뱀이 지나간 듯
길게 누워 있다
나는 멀찍이 물러선다
뱀 나올까 살피며
가만가만 다가가면
메뚜기들은
요리조리 재빠르다
암놈은
업힌 수놈을 떼어내려
발버둥치고
무논에
머리를 처박은 한 쌍은
일어나지도 못한다
풀숲에
누가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는데
후다닥 튀어나와
뛰는 놈 따라가다
잡았다 놓치고
엉뚱한 놈을
쥐고 있다
7. 잡초가 풍년+
이게 얼마 만인가
드디어 오봉저수지 바닥이
드러났다
본래 자기 땅이라 우기던
잡초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바람을 타고
씨를 흩뿌렸다
넓고 기름진 땅
잡초 이삭들이
일렁인다
추수하면
몇 가마니나 될까
오십 년 만의 대풍작
임인년 가뭄 속
하늘이 내려준
조상 땅
감개무량한 잡초들
눈물을 훔친다
구석에 꾸겨진 물
언제 들판으로 끌려 나갈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덮일지
저수지 한가운데 선 왜가리
마음이 착잡하다
8. 도깨비바늘아
너를 만나지 않은
하루였으면 좋겠다
풀숲에 몸을 숨기고
메뚜기 곁에 앉아 있다가
어느새
나에게로 오는 너
싫다고 돌아섰는데
모자에도
신발에도
밤처럼
달라붙어 있다
때려도
털어도
놓지 않는 너
노란 웃음꽃
그땐 이름도 몰랐다
이렇게
날카로운 비밀을
품고 있을 줄은
살에 닿아
콕, 콕,
말없이 찌르는
뱀보다 조용해서
그래서 더 무섭다
9. 장독들의 뒤뜰 잔치+
장독들이
목욕을 마치고
뒤뜰
소나무 아래
모여 있다
키 큰 장독
물결무늬를 뽐내며
허세를 부리고
펑퍼짐한 장독
앉아
분칠하며 수다를 떤다
배 볼록한 장독은
매운맛에 취해
얼굴이 불그스름해지고
웃음도 덩달아 번진다
기우뚱한 장독 하나
뒤집힌 채
왕소금 같은 말을 뱉는다
거품이 튀고
뒤따라 웃음이 흐른다
황악산 골짜기
저녁이 와도
아직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장독들의 작은 잔치가
뒤뜰을 지키고 있다
11. 바통은 불보다 빨랐다
달봉산 으슥한 곳
모닥불을 쬐던 남자
나무 사이로 보인다
그 불
산에 옮겨 붙을 듯해
놀라 돌아보았으나
사람은 없다
가랑잎, 들국화도
몸을 떤다
단걸음에 산마루
산불감시원에게 일렀다
이글거린 눈빛
산불은
가만둘 수 없어
빛의 속도로 내려가
그게 뭐 합니까
뭐해
산이 떠나갈 듯
소리친다
떨어뜨린 바통
알아챈 남자
걸음아 날 살려라
부거리로
사라진다
12. 우렁이 삶+
칠남매로 자라
나눠 가진 사랑이
늘 모자라다고 여겼다
육십을 넘어서야
부모의 큰 사랑이
보이기 시작했다
힘겹고 어려운 살림에도
자식들 위해
참고 또 참으며
살아온 시간
살아계실 때는 몰랐다
우렁이처럼
새끼들이
속을 다 파먹고 나면
남는 것은
빈 껍데기
물 위로
천천히 떠가는
그 껍데기를 보며
새끼들은 말했다
어머니
시집간다 했지
비 내리는 오후
그 말이
가슴 깊이
가라앉는다
3부 길 위의 풍경
13. 빗물 길+7
올밤
빗물의 길을 따라
얼비친 추억 한 자락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여름 장마가 지나가면
도랑은 아이들을 불러들인다
남자아이들은 웅덩이를 파고
검정 고무신으로
물을 퍼 나른다
머리를 맞대고
풀로 엮은 물레방아가
잘 돌게 하려고 꾀를 더 낸다
여자아이들은 돌멩이로 쑥을 찧어
개떡을 만들고
고운 흙을 고물처럼 묻힌다
마루걸레를 들고 나와
방망이질을 하다가
비누 거품이 좋아
단발머리를 감고 또 감는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영차영차
돌다리를 놓고
손발이 부르트도록
하루를
물처럼 논다
14. 쌍계사 가는 길
금돈을 땅바닥에
주르르 쏟아놓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은행나무
금고가 없어
울대에 핏대를 세우고
세상을 노려본다
어두침침한 날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가만히 있어 봐
톡톡 두드린다
거친 숨결
비에 젖어
몸까지 축축하다
은행나무가
정갈하게 차려 놓은
야외 식탁
빈자리 하나 없이
가지런히 앉은 손님들
어디서
많이 본 얼굴들
만남은 곧 이별이라
내년 이맘때
또 만나자
인사한다
15. 가을 나그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
오늘은 유난히 파랗다
하늘빛 옷을 입은 용마루도
잠시 유명한 배우가 된다
익은 감 하나
풍경에 운치를 더하니
홍시여도 괜찮겠다
마지막 걱정 하나
이쯤에서 내려둔다
음지에서 나온 지네가
놀란 듯 스쳐 가고
등골에 소름이 오른다
변소 앞 장판을
정신없이 긁어대는 개
이유는 묻지 않는다
화분 속 메리골드
벌레 한 마리 괜히 집적거린다
나도 모르게
째려본다
가을 나그네
이 모든 풍경 앞에서
괜히 미안해진다
16. 가을밤 거리에서
가을밤 거리에서
스마트폰을 쥔 채
거리에서 잠든 젊은이
어서
일어나
집으로 가세
술잔이 하나 늘 때마다
말은 거칠어지고
집 쪽은
점점 멀어졌겠지
아이들은
소리보다
숨을 먼저 죽이고
그래도
누군가는
비바람 속에서
중심이 되어야 하네
모진 풍랑이 와도
버티는 쪽에
서 있는 사람
그래
가을밤이 차다
이제
집으로 가세
17. 율곡냇가 원장+
추석이 다가오면
율곡냇가가 먼저 바빠집니다
예초기 소리 요란하고
풀은 한꺼번에 쓰러지고
그 냄새 하나로
어린 시절이 몽땅 돌아옵니다
부모, 형제
그리고 고향
아침 운동 후
그 얘길 했더니
남편이 말합니다
“원장은 고향 후배 아들이지.”
냇가에 원장도 있습니까
동장은 몇 번 봤어도
원장은 처음 듣는 소린데
감기 기운 있는 남편 머릿속엔
아무래도
율곡냇가보다
율곡내과가
더 가까운 모양입니다
4부 삶과 기억
18. 억새의 시간+1
억새를 만나
가을이 울컥한다
마른 몸, 흰머리
바람이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따라온 한평생
여문 씨앗
이리저리 날려 보내고
초록의 열정은 아직 남아
춤추려 하지만
몸은 마음 같지 않다
마디마디 서린 정
호미 하나로
토지를 쓰고도 남을
한 사람의 인생
살아 있는 동안
위로의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한
나는 죄인이다
석양 속에서
풀 먹여 곧게 세운 주름이
서걱서걱
운다
19. 물구나무 선 참나무+2
참나무가
다리를 벌리고
거꾸로 서 있다
아무리 보아도 그렇다
다른 나무들과 달리
중심을 버틴 두 다리
몸집을 키우다 만
여러 개의 약한 다리
해를 향해 발돋움한
초록의 발들
참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들은
정수리에 돋은
힘센 뿔로
땅을 파고들며
물구나무를 선다
소중한 머리를 감싸 쥔 채
사방으로
몸을 펼친다
태풍이 오자
약한 다리 둘은
미련 없이 버렸다
땅속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20. 금오산도 아픈가+9
대구 병원으로 가는 날
사촌의 이름을
마음속에서만 부른다
하늘에 구름이 몰려간다
흰 것과 검은 것
뭉쳤다 흩어졌다
끝없이
금오산으로
국군의 날 아침
무슨 일이 있나
해는 빛을 접고
억만의 빗줄기가
쏟아졌다
잠시 멈췄다
다시 쏟아진다
금오산도
아픈가
김천도
대구도
비에 젖은 채
21. 먼저 전화 한 통
하늘은 높아지고
삶은 깊어진다
어제 웃던 억새도
갈잎 앞에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갈 운명
풀잎 하나도
제 갈 길을 안다
옳다 그르다
다투지 말자
먼저
전화 한 통
살아봐야
몇 해 차이
너도 나도
여린 인생
서로 감싸 안고
불꽃 같던 마음
조용히 다독이자
22. 형제+
고향에 사는 형은
동생에게 알리지 않고
부모님 산소를
조부모님 산소 곁으로
이장했다
형이 보낸
사진 문자 하나
그걸 받은 동생은
형 몰래 고향에 내려와
벌초를 하고
돌아갔다
동생이 오기 전날
아침 일찍
예초기를 메고 간 형은
그 앞에서
멈췄다
아픈 동생이
말도 없이
모두 해두었다
형은
동생이 애처롭고
동생은
아픈 형이 애처롭다
23. 고향 닮은 산골+
차창 밖
나를 지켜주던 해는 떠나고
누렇게 익은 나락은
고개 숙인 채
말이 없다
눈물이 난다
나락 때문에
울고 웃던 아버지
호롱불 아래
갱시기 한 사발
급히 뜨고
밤이슬 맺힌 들로
서둘러 가시던
그 뒷모습
낫질 끝에
달구지, 개상, 탈곡기,
풍구, 멍석
먼지 속에서
코까지 새까매지던
우리 아버지
해처럼
나를 사랑해 주셨는데
고개 숙인 나락 속에
그 애환이
아직도 서려 있다
5부 인생의 가을
24. 노루였다+3
할머니 산소를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
가문의 대를 지켜온 할머니
그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고
혼잣말을 한다
가을 기운 가득한 산골짜기
폭포는
몸을 부딪치며 흐른다
노루였다
굽은 등
누렇고 뭉툭한 털
궁둥이 위에
왕관처럼 얹힌 햇빛
할머니는
여왕처럼 꼿꼿했다
댓바람을 가르며
계곡을 건너
복숭아밭으로 사라진다
할머니 배고픈 날이 많았지
복숭아 하나 없는
복숭아나무들이
노루를 숨기고
홍안의 할아버지
그 나무들 속에서
할머니를 다시 숨긴다
25. 누가 나를 알까+4
권정생 선생은 초가집에서 살았다
나도 초가집에서 살았다
동화는 학교에 있다 했고
나의 추억도 학교에 있다
부용대에 올라
하회마을을 내려다본다
강물이 휘돌아
마을은 섬처럼 놓여 있다
초가집과 기와집
삼신당 신목과 하회탈
볼거리는 많았지만
젊은 날의 나는
시간에 쫓겨 그것들을 스쳐 갔다
솔청에서 안동 간고등어에
막걸리 한 잔으로 점심을 하고
봉정사에 올라
남편의 건강을 빌었다
경치는 좋고 사람도 좋아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와
버스에 앉아 창밖을 보는데
문득 허무가 밀려온다
오늘 안동 땅을
이렇게 돌아다녔는데
누가 우리가 다녀간 걸 알까
이 세상에 와
살다 돌아간들
누가 나를 알까
26. 펴 보지 못한 날개+5
김 서린 공간
꽃 천지를 알리는
새소리에
분이가 떠오른다
처음 맞춰 입는 세라복
몇 번 입지 못하고
점심시간
젖가락이 떨어져
도시락을
끝내 열지 못한 채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꿈속에
자주 서 있다
아무 말 없이
꽃밭에서 노래하는 저 새가
그렇다면
무리 지어 피어 있는
꽃들은
함께 떠난
아이들일 것이다
펴 보지 못한 날개는
그곳에 두고
여기서는
기억만 남긴다
27. 이별시
석양,
하루가
들에 핀 꽃처럼 진다
흐르는 물 같은 여정
젊은 날의 열정도
서산으로 기운다
황홀했던 임이여
잘 가요
동녘에 서늘한 달이 떠
조용히
작별 인사를 건넨다
단풍,
떠나려는 고운 임
고이고이
보내고 싶은 마음은
짓궂은 바람에
시도 때도 없이 흔들리고
아직은 이른데
곱게 단장만 마친 채
미련 없이
훌훌
떠난다
28. 하루 열 알+8
나이 많은 은행나무 아래
노란 융단이 깔렸다
노란 모자 쓴 할머니가
후드득후드득
떨어진 은행을 줍는다
잘 익은 은행들
손으로 껍질을 까니 끈적끈적하다
풋콩 삶아 껍질 까먹던
옛 기억이
손끝에서 되살아난다
차바퀴 지나간 자국 따라
눈길처럼 부서진 껍질들
지독한 냄새
코끝을 파고든다
바구니에 담아 냇물에 씻고
집에 와 다시 씻어
햇볕에 말리니
모시조개처럼
가지런하고 예쁘다
하루에 열 알
노릇하게 구운 보약을 먹으며
해마다 그 자리에 서서
묵묵히 열매를 내어주던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생각한다
29. 버릴 것이 없던 삶
깨끗한 비닐봉투를 모아
시골 텃밭으로 간다
남편이 지어 놓은
무와 배추, 파와 부추를 다듬으며
흙 묻은 무를
지하수에 씻는다
자식에게 가져갈 감은
상처 없는 것만 골라
조심스레 상자에 담는다
땀 흘려 가꾼 것
버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알뜰살뜰 살다 가신
부모님의 하루가
내 손끝에 남아
이렇게 이어진다
돌아오는 길
길섶의 은빛 억새가
부모님처럼 서 있다
나는 잠시 차를 늦추고
구름에 가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부르지 못한 이름들께
가만히 인사한다
30. 같은 쪽으로 걷는다+
101살 아버지는 마른 논에서
77살 아들은 진 논에서 벼를 벤다
아들이 나르는 볏단을
차곡차곡 경운기에 쌓아 올리는
아버지
밧줄을 꼭 잡고
볏단 꼭대기에 동그마니 앉았다
방한모에는
도깨비바늘이 빽빽하게 박혀 있다
아버지가 논바닥으로 떨어질라
조심조심 흔들거리는 경운기를
몰고
아들은 집으로 간다
아버지는 아들 같고
아들은 아버지 같다
중학교에 들어간 아들이
월사금을 내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던 날
아버지는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아버지가 곁에 있어
아들은 버텼다
대대로 내려온 가난을
이대로 두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같이 건강하고
같이 부자다
부자가 되었어도
아버지는 여전히 논을 둘러본다
이제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
몸이 먼저 밖으로 나간다
아들은
아버지를 말리지 않는다
같이 늙는 일도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오늘도 같은 쪽으로
천천히 걷는다
31. 아무 말도 못하는 사랑+
이 세상 떠나는 날
겨울밤 혼자 조용히 가셨다
엄마가 낳은 칠남매
한 번만 보고 싶다 하셨는데
미안해요, 엄마
그때가 마지막인 줄 몰랐습니다
자식들이 속을 썩여도
말 한마디 못 하고
아버지가 화를 내면
잘못했다며
먼저 고개 숙이던 사람
아무 말도 못하는 사랑을
우리는 마음대로 대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 큰 사랑을
왜 몰랐을까요
엄마, 보고 싶어요
저승에서는
참지 말고
화도 내고
호통도 치고
이승에서 못 해 본
함박웃음
마음껏 지으세요
32. 달이 밝아서
제사 지낸 밥상을 들고 가는
언니를 따라
나는
감주 주전자를 들고 간다
꺾인 골목을 도는데
기웃기웃 서성대는
검은 그림자
도둑이다, 도둑!
언니가 소리쳤다
그 소리에
집으로 흩어졌던 사랑꾼들
어디서
저기서
하나둘 모여든다
도둑은 후다닥 달아나고
동구 밖 둑 아래
참깨, 고추, 콩
주인에게
되돌아갔다
그 도둑,
지금은 잘 사는가
휘영청 밝은 달은
알고 있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