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민 9:22). 하나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을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은 친숙한 이야기이고,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보호와 인도에 관한 말씀으로 수없이 들어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며칠 전엔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라는 구절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언제 머무르고 떠날지 스스로 정하거나 예상할 수 없는 삶. 머무는 것이 하루인지, 한 달인지, 일 년인지 모른 채 꾸려가야 하는 삶. 그저 떠오르는 구름만 보고 사는 것. 그런 삶은 실상 불안하고 막연한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막막하게 살면서 늘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하긴 어렵다. 통제권을 잃은 인생이 불안해 떨고, 불평을 터뜨리고, 그런 자신을 꺾어 순종하는 연습을 숱하게 하지 않았을까.
요즘 청년들의 삶도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이라고 믿어왔던 삶의 양식,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가고, 졸업해 직장을 잡고, 결혼하고, 집과 차를 사고, 아이를 낳고 하는 것들. 이런 삶의 형태는 이미 보편성을 잃었다. 많은 청년들이 더 이상 그렇게 살지 못한다. 그러나 통념은 쉽게 바뀌지 않으므로 청년들은 늦어진 사회진출과 혼인 연령, 치솟는 주택가격 앞에 한없이 불안하고 초라해진다. 이 나이쯤엔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할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하니까. 언제쯤 취업이 될지, 결혼은 할 수나 있을지, 삶의 안정은 언제 오는 것인지. 그것이 올해일지, 내년일지, 아직 몇 년이나 더 기다려야 할지 알지 못한 채 오로지 구름이 떠오르기만을 기다린다.
안정적인 직업일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청년 법조인들의 삶도 다르지 않다. 오히려 다른 직업에 비해 한 직장에 머무르는 기간이 몹시 짧다. 애초에 정규직 채용을 찾기 어렵기도 하지만, 비교와 경쟁이 치열한 집단인 탓도 크다. 어려서부터 많은 경쟁을 뚫고 와서인지, 마치 몸에 밴 습관처럼 다시금 끝없는 경쟁으로 서로를 몰아넣는다. 그러니 학위이든, 자기계발이든, 혹은 이직이든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 버틸 수 없는 것이다.
이력서만 보면 공백기가 거의 없는 탓인지, 사람들은 흔히 나를 ‘무엇이든 계획대로 성취해온 사람’일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대하곤 했다. 하지만 내게도 이력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하나님과 나만의 광야의 시간이 있다. 정착이 허락되지 않은 삶, 오늘과 같은 삶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다음 단계는 언제쯤 열리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던 시간. 수없이 기도해보아도 메마른 침묵뿐이라 불안하다 못해 억울함이 사무쳤던 나날들. 그래서 하나님께 맡겼던 주권을 도로 찬탈해 오려 했던 시도들. 하나님과 지난한 줄다리기를 하는 사이에 생긴 우연한 발자국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20살 무렵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삶은 그럭저럭 예측 가능한 범주에 있었다. 과학고를 거쳐 공대 진학. 여느 선배들처럼 전공 분야의 어느 언저리에서 성실한 연구자로 살아갈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음성은 달랐다. “네가 예측할 수 있고 모두가 예상하는 삶, 그런 삶 말고 다른 삶을 살아볼래? 남들이 말하는 가치나 방식이 아닌 내가 제시하는 것이 기준이 되는 삶을 살아볼래?” 재고의 여지가 없는 제안이었다. 그 길로 진로를 꺾고 서둘러 취업했다. 콕 집어 취업하라는 말씀은 아니었지만, 대학원이 아니라면 취업 밖에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따라서 첫 직장이란 ‘진짜 진로’을 찾기 전 임시로 머물 장막과 같은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빠르면 3년, 길면 7년으로 예상했던 첫 직장에서 8년 반을 보냈다. 첫 음성과 달리 하나님은 새로운 삶을 위한 청사진이나 그럴싸한 비전을 제시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적당히 포기한 채 정착하는 삶을 허락하지도 않으셨다. 직장과 교회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오직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그사이 허망하게 소비되는 젊음이 억울했고, 그럴싸한 학위와 경력을 갖게 된 동기들, 결혼해 가정을 이룬 친구들 사이에서 홀로 뒤쳐진다고도 느꼈다.
당시엔 하나님의 침묵 속에 정체되어 있다고 느꼈지만, 돌아보면 그건 아버지 하나님의 묵묵한 기다림이었다. 스스로 인생을 너무 귀히 여겨,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에 몰두되어 있던 딸, 세속적 허영과 영적 허영을 모두 채울 보암직한 자리를 달라 생떼를 쓰던 딸의 시선이 온전히 당신 자신에게 향할 때까지. 가나안은 남부럽지 않은 경력이나 삶의 안정이 아닌 하나님 자체라는 알기까지.
“어차피 로스쿨을 갈 거였으면 진작 가지 그랬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러나 앞선 시간이 없었더라면, 그렇지 않아도 직업과 안정이 우상이었던 내가 이 무한경쟁 집단 속에서 얼마나 자신에게 몰두한 삶을 살았을지 알만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간은 완벽했다. 여전히 광야를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앙인의 모습으로 포장된 이면에 교묘히 세속적 가치를 좇고 싶어 하는 마음을 본다. 하나님과의 줄다리기도 여전하다. 그러나 점점 “오늘 행진을 할지, 진에 머무를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된다. 떠오르는 구름만 보고 사는 삶이 단순하고 편안하다고 느낀다. 처음 부르신 약속, 남들이 제시하는 가치가 아닌 오직 하나님만이 기준이 되는 삶은 그런 것이었다.
첫댓글 돌아보면 하나님 아버지의 묵묵한 기다리심은 참으로 많았다는걸...지금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