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한바퀴 100-영인문학관
3월26일 화요일 합창단 연습 끝나고 평창동 영인문학관을 찾았습니다.
영인문학관(寧仁文學館)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에 위치한 문학 박물관이다. 이어령, 강인숙 부부가 설립 하였습니다.
입구에서 멀리 북한산 줄기가 보입니다.
1974년 주택이 없었을때 외딴집을 지어 이어령씨가 48년간 살면서 집필하였다고 합니다.
내부는 문이 닫혀있더군요
이어령(李御寧, 1933년12월29일~2022년2월26일)은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 언론인, 저술가, 대학 교수
를 지낸 국어국문학자이며, 노태우 정부에서 초대 문화
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우봉. 호(號)는 능소(凌宵)입니다
이어령씨는 충청남도 아산 출생입니다. 1956년 서울대학교 국문학 학사와 1960년 동 대학원 국문학과 문학 석사, 1987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문학박사 등을 취득하였습니다
경기고등학교 교사, 단국대학교 전임강사를 지냈으며,
1960년부터 서울신문,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등에서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1967년 8월부터 1999년 2월까지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하였고 1999년 2월부터 2022년에 별세할 때까지 동교 명예교수를 지냈습니다. 그 외에도 2001년 8월부터 2012년 8월까지 배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를 지냈으며 2012년 8월부터 2022년에 별세할 때까지 배재대학교 한류문화산업대학원 석학교수를 지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의 총괄 기획을 맡아 '벽
을 넘어서'라는 서울 올림픽 표어, 개회식의 굴렁쇠 소년등 전세계에 인상적인 연출을 하였습니다.
영인문학관 앞의 집 벽에 그림이 있는데 이그림도 작품입니다
동네가 분위기가 있습니다.
개나리가 노란잎으로 반겨줍니다.
어어령 길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의 총괄 기획을 맡아 '벽
을 넘어서'라는 서울 올림픽 표어, 개회식의 굴렁쇠 소년 등 전세계에 인상적인 연출을 하였습니다
1990년 노태우 정부에서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1990년 1월 3일부터 1991년 12월 19일까지 문화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2009년에는 경기디지로그창조학교를 설립하여 명예교장을맡았습니다. 2022년 2월 26일 암 투병 끝에 숙환으로 별세하였습니다.
학력
공주고등학교(1950년 전퇴) > 부여고등학교 졸업
(1952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학사(1956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 석사(1960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1987년)
경력
1960~1961: 서울신문 논설위원
1961:한국일보 논설위원
1962~1965. 경향신문 논설위원
1966~1972:중앙일보 논설위원
1966~1999: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학 전임강사, 조
교수, 부교수, 교수
1990.01~1991.12:문화부 장관
1992.09 올림픽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
1993 한백연구재단 자문위원
1993.12 범국민독서 새물결운동추진위원회 상임고
문
1994~2022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94.03 국제화추진위원회 위원
1994.03 광복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
1995.01 세계화추진위원회 위원
1995.02 조선일보21세기 정보화포럼 위원
1998~1999.03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공동위
원장
1995.02 조선일보21세기 정보화포럼 위원
1998~1999.03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공동위
원장
1998.05 통일고문회의 통일고문
1999.02~2022.02: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1999.04~2001.01: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2001.01~2022.02: 중앙일보 고문
2001.05 사이언스 북 스타트운동 공동대표
2001.08~2012.08: 배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좌
교수
2005.11 앙코르-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06 조직위
원회한국측 조직위원
2008.07 서울디자인올림픽 2008 조직위원회 위원
2009.03.~2016.03. 경기디지로그창조학교 법인 이
사장
2009.07 제3회 제주세계델픽대회 명예고문
2009.10~2022.02 Korea CEO Summit 명예이사
장
2010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회 위
원장
2010.04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창조위원회 위원장
2011.03 가족친화포럼 고문
2009.07 제3회 제주세계델픽대회 명예고문
2009.10~2022.02 Korea CEO Summit 명예이사
장
2010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회 위
원장
2010.04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창조위원회 위원장
2011.03 가족친화포럼 고문
2012.08.~2022.02: 배재대학교 한류문화산업대학
원석학교수
2014.12.~2022.02: 동아시아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2016.03.~2022.02. 경기디지로그창조학교 명예 교
장
영인문학관 명예 이사장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고문
한반도선진화재단고문
문단 활동
1956년 한국일보에 문학평론 <우상의 파괴> 를 발표
하여 주목을 받았습니다. <우상의 파괴> 에서그는 김동
리를 '미몽의 우상'이라고 하고 '모더니즘'의 기수를 자처하고 있는 조향을 '사기사의 우상', 이무영을 '우매의 우상, 최일수를 '영아의 우상'이라고 깎아내렸을 뿐만아니라 황순원, 조연현, 염상섭, 서정주 등을 '현대의 신라인들'로 묶어 신랄한 비평을 가했습니다. 그는 우리 문학의 불모지적 상황에서 새로운 터전을 닦아야할 것을 주장했으며, 이데올로기와 독재 체제의 금제에 맞서 문학이 저항적 기능을 수행해야 함을 역설하였습니다. '작품의 실존성'을 문제로 김동리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조연현과 '전통논쟁'도 펼쳤습니다. 특히 1959년 3월 한 신문을 통해 전개된 소설가 김동리와 비평가 이어령 사이의 시비는 대한민국 문단사에서 은유와 비문에 관한 '험악한' 논쟁으로 기록됩니다.
(남영신, <나의 한국어바로쓰기 노트>)
평론
<이상론: 순수의식 뇌옥과 파벽 작가이상의 문학적 진면목을 널리 알림
<우상의 파괴 (1956): 스물두살에 기성세대를 비판하고새로운 세대의 출발을 알림. 평론이 아닌 선언문 형식으로 단문임
<화전민의 선엉 (1958) :스물네살에 한국전쟁으로 모든 게 파괴된 이 땅에 창조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고 주장
<비유법론고>
<해학의 미적 범주>
씨사회참가의 문학>
<현대소설 60년)
평론집
<저항의 문학>
<전후문학의새물결>
<한국작가전기연구>
소설
<마호가니의 계절)
<장군의 수염>
<의상과 나신)
씨소년 봉신방>
소설집
<환각의 다리>
<둥지 속의날개>
<무익조>
수필
<흙속에 저 바람속에 (1962년)> 한국인이란 누구
인가,한국문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한국인의 체험의
원형은무엇인가를묻고 답함
<신한국인>
<축소지향의 일본인> 이웃 일본문화에 대한 날카로
운통찰을보임
<디지로그> 선언편: 다지털과 아날로그를 결합한 디
지로그를 만들. 디지털 문화를 창출함으로써 한국 사
회가 세계 사회의 새로운 리더가 되자고 주장
<지성의 오솔길)>
<지성에서 영성으로>
해외 출판
<축소지향의일본인>이어령의 책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하였고, 지금까지도 번역 출판되고 있습니다. 특히 2005년 4월 출간된 <장켐 문명론>(신조사)은 <축소지향의 일본인> 이후 문명 융합에 대한 해박한 경륜을 담아 한 중일 삼국의 미래를 조망했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받았습니다.
평가
이어령은 이 시대 최고의 지성, 오천년 역사상 가장 돋보이는 창조적 인물로 칭송을 받고 있지만 선천적인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일부에서는 강한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고령의 나이에 비해 컴퓨터 및 소프트웨어 활용 능력이
뛰어납니다. 서재에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7대의 컴퓨터가 있으며, 자료 정리는 에버노트를 주로 씁니다.
이 김정운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에버노트에 저장된 노트의 수가 18,000개라고 밝혔습니다.
1969년 <한국문학연구소>에서 시작한 영인문학관은 그 후 40년 가까이 수집한 자료들로 2001년 '영인문학관'으로 개관하였습니다. 이어령 선생님께서 13년간 <문학사상>을 하면서 수집한 원고, 초상화, 편지 외에 서화, 애장품, 문방사우, 사진 등을 수집하였으며, 근대문학의 성숙기인 70~80년대 작가들의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도 영인문학관의 특징입니다.
❤친구가 없는 삶은
실패한 인생이다.
- 이어령 교수 -
"존경은 받았으나
사랑은 못 받았다.
그래서 외로웠다.
다르게 산다는 건 외로운 것이다.
"세속적인 문필가로 교수로,
장관으로 활동했으니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실패한 삶을 살았다.
겸손이 아니다. 나는 실패했다.
그것을 항상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내게는 친구가 없다.
그래서 내 삶은 실패했다.
혼자서 나의 그림자만
보고 달려왔던 삶이다.
동행자 없이 숨 가쁘게
여기까지 달려왔다.
"더러는 동행자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보니 경쟁자였다.
"이어령 교수님의
'마지막 수업'에서 남긴 말이다.
"정기적으로 만나
밥 먹고 커피 마시면서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를 만들어야
그삶이 풍성해진다.
"나이 차이, 성별, 직업에 관계없이
함께 만나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외롭지 않을 것이다.
"조용히 얘기를 듣고,
얘기를 나누고
조용히 미소짓는
그런 친구가 있다면,
그것이 성공한 인생이다.
"난 그런 진실한 친구가
없어 늙어가며
더욱 더 후회스럽기만 하다.
정말 바보스러운 삶이였다.
나는 수다를 떨면서
서로간 외로움을
달래줄 그런 벗이 있는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