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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잘 지내시는지요. 또 글 하나 올립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문예지에 연재되는 글입니다.
꼭 그래서 쓴 건 아니지만 김 경이 권사님을 생각하기도 했어요. 내일 뵙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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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프루스트: 목소리, 숨소리 그리고 음악
오랜만에 차를 가지고 외출한다. 너무 추워서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어쩐 일인지 몸이 으슬으슬 하다. 내부순환 도로는 끝없는 정체다. 지루해서 카오디오 버튼을 누른다. 언제부터 그 안에 들어 있었는지 모를 미샤 마이스키. 그리고 <재클린의 눈물 (Les larmes de Jacqueline)>. 첼로의 선율도, 차들의 행렬도, 한기가 도는 몸도 마음도 느리고 낮은 Em를 따라간다. 잠깐 재클린 뒤 프레 (J. M. Du Pre)를 생각한다. 천재의 삶을 살다가 몸이 굳어가는 병으로 쓸쓸히 죽어야 했던 가엾은 첼리스트. 나중에는 눈물도 흘릴 수 없었다는데 그 많은 눈물들은 그러면 다 어디로 갔을까. 돌아와서 포도주를 한 잔 마시고 일찍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목까지 이불을 끌어 덮어도 몸은 무겁고 춥다. 그래서일까. 새벽녘에 꿈을 꾸었다. 옛 집이었다. 어스름한 저녁이었다. 내 방이었다. 대학원 시절일까, 아직 청년인 나는 책을 보는 중이었다. 그때 조용히 문이 열려서 뒤를 돌아보았다. 할머니가 열린 방 문 앞에 서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는 울상이었다. 구겨지고 뭔가가 묻은 휜 천을 손에 들고 있었다. 왜 그래, 할머니? 나는 물었다. 할머니가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어쩌냐, 그게 다시 나오는구나...
깨어나 어둠 속에서 뒤척인다. 어둠이 과거가 된다. 다시 옛 집이 보인다. 대추나무가 있는 앞마당, 현관으로 오르는 계단, 꽃무늬 소파가 놓여 있는 거실이 보인다. 사람들이 보인다. 그 사이에 사라진 사람들, 아직은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언젠가 또 사라질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보인다. 등을 돌리고 거실 마루 위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며 혼자 담배를 피우는 할머니. 너무 작고 말라서 오래 된 인형 같은 할머니. 할머니가 문득 돌아본다. 그리고 웃지도 않으면서 인사한다. 얘야, 그동안 잘 있었니...
할머니를 추억하면 소리들이 들린다. 아침마다 선잠 속으로 들려오던 거실 마루를 쓸고 닦는 소리, 집을 잘 비우던 어머니 대신 부엌에서 저녁상을 차리던 소리, 여름 날 마당의 화초들에게 물을 줄 때면 딸각 딸각 시멘트 바닥을 두드리던 지팡이 소리, 가끔씩 혼자 담배를 피울 때 푸른 연기에 섞이곤 하던 낮은 기침 소리... 하지만 그 소리들 속에 할머니의 목소리는 없다. 그래도 애써 귀를 열고 달팽이관의 기억을 뒤지면 할머니의 목소리 대신 눈앞으로 떠오르는 게 있다. 그건 할머니의 또렷한 말소리가 아니라 그림자처럼 그 말들의 끝을 지우는 목소리의 말없음 표다. 혹 엄한 할아버지나 특히 공손치 않은 며느리였던 어머니의 질타를 들을 때면 할머니는 몇 마디 맥 빠진 항의를 했어도 그 항의는 늘 마지막에 힘을 잃고 그 끝이 지워지곤 했다. 그리고 미처 말이 되지 못한 그 말들의 끝은 덧없이 입술만 움직이는 혼잣말 속으로, 지워지는 목소리의 말없음 표 속으로 숨어버리곤 했다. 그 들리지 않는 말없음 표의 중얼거림 속에는 그런데 무슨 말들이 들어 있었을까?
할머니는 다섯 남매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할머니의 육체는 한 번도 아이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다섯 아이를 자궁 밖으로 내어놓고 세상을 떠난 한 여인의 뒤를 이어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호적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미 자손이 충분했던 할아버지의 호적 안에서 할머니의 자궁은 자연스럽게 닫혀 버렸지만 그 자궁과 더불어 성대도 닫혀 버렸다. 엄격한 유교 전통의 장손 집에서 제 아이를 갖지 못한 여인에게 무슨 권력이 있었을까. 더구나 큰 아들은 벌써 결혼을 했고, 이미 가내의 권력을 승계했던, 게다가 남달리 극성스럽고 야박했던 큰며느리 앞에서 할머니는 무슨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그 흔한 전처 자식들과 계모간의 반목은 없었다. 고부간의 갈등 같은 것도 없었다. 시어머니를 인정하지 않는 큰며느리 앞에서,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 자식들 앞에서, 할머니는 일찍이 목소리를 포기했다. 나중에, 아마도 어느 해 제삿날,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 말도 없이 얌전한 분이셨지.
그런데 목소리를 빼앗겼기 때문이었을까. 할머니는 평생 위통에 시달렸다. 그래도 할아버지 생전에는 때마다 남편이 약을 받아다 주었지만, 과부가 된 뒤에 할머니의 위장약은 뜨거운 설탕물이거나 그냥 참으며 견디는 인내가 거의 모두였다. 아마도 그 또한 대학원 시절이었을 것이다. 대추가 익기 시작했으니까 초가을이었고 오후였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긴 오수에서 막 깨어난 참이었다. 허기를 느끼고 할머니를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안방 문을 여니까 할머니가 휜 요 위에 새우처럼 등을 말고 누워 있었다. 속이 쓰려 일어날 수가 없구나, 할머니는 무릎을 배에 붙이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다니던 병원으로 달려가서 한웅큼 약을 지어왔다. 우리 장손이 할머니 생각을 얼마나 하는지 모른다우... 이후 할머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나의 선행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 가당찮은 효행을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건 그런 할머니의 자랑스러운 목소리 때문이 아니다. 그건 할머니의 숨소리 때문이다. 더운 물과 약 한 봉지를 입에 털어 넣은 할머니는 곧 잠이 들었다. 잠깐 책을 보다가 가만히 방문을 열어보았을 때 할머니는 가을 날 오후의 잔광 속에서 깊은 잠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숨소리가 들렸다. 깊고 고르고 부드러운 그 숨소리는 병들어 잠든 노인이 아니라 세상으로 도착한지 얼마 안 되는 유아의 숨소리 같았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 아무런 애환도 더는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 젖무덤 사이에서 잠든 아이처럼 다만 편안과 안심으로 자기 안에 꼭 담겨있는, 그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할머니의 숨소리 혹은 목소리... 하지만 할머니의 그 목소리를 나는 그날 이후 다시 들어보지 못했다. 곧 먼 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어느 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아침 전화를 받았고, 돌아왔을 때 할머니의 기일은 벌써 몇 번이나 지나간 뒤였으니까. 그 가을 날 오후 잠깐 귀를 기우려 훔쳐 들었던 할머니의 숨소리를 두 번 다시 기억해 본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할머니는 수많은 작은 기억들과 함께 내 망각의 하데스 속에 침묵으로 묻혀 버렸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 할머니는 그 깊은 망각과 침묵의 지층을 지나서 다시 내 꿈속으로 돌아온 걸까. 그것도 새로 하혈을 시작하면서...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아가는 여정은 잃어버린 목소리들을 찾아가는 여정인지 모른다. 특히 M. 프루스트의 경우는 그렇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안에서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들린다. 책을 읽어주는 어머니의 목소리, 가엾은 사랑을 고백하는 스완의 목소리, 거짓말하는 알베르틴의 목소리, 늙은 베르고트의 치매 걸린 목소리, 동성애자 샤를뤼스와 쥬피엥의 교태 어린 목소리, 부르주아의 허위의식을 야유하는 부엌데기 프랑스와즈의 목소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 많은 목소리들이 함께 부르는 언어의 합창이다. 그리고 그 합창 속에는 할머니의 목소리도 있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그런데 하나의 성부가 아니라 모든 성부로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다. 소나기가 내리면 열여섯 소녀처럼 정원으로 달려 나가는 할머니 (‘아, 너무 좋아라!’), 매춘부 오데뜨에게 홀딱 빠진 스완을 비웃는 할머니 (‘도대체 그게 무슨 부끄러운 일이람!’), 하극상이 버릇이 된 프랑스와즈를 겁주는 할머니 (‘그러면 다른 집으로 보내버리겠어!’), 어린 손자의 생일에 새빨간 표지의 연애 소설을 선물하는 할머니 (‘조르쥬 상드 정도가 뭐가 해롭담!’) - 하지만 어린 마르셀이 알고 있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오직 하나뿐이다. 엄한 아버지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어머니마저 냉정하게 응석을 받아주지 않을 때, 그래서 천애 고아처럼 마음이 아프고 슬프고 고독할 때, 선병질의 마마보이 마르셀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건 언제나 할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다 (‘귀여운 나의 생쥐야, 이번에는 또 뭐가 문제니? 곧 달려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렴...’). 바르트의 어머니가 또한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의 목소리는 ‘평생 한 번도, 그건 안 된다, 라고 말해 본적이 없는’ 목소리 (R. 바르트, <카메라 루시다>), 그러니까 죄와 회개 같은 건 알지도 못하고 묻지는 않는, 오로지 위안과 구원만을 알고 있는 절대적 사랑의 목소리다.
마르셀은 사랑만을 알고 있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영원히 자기를 지켜 줄 구원 천사의 음성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할머니의 목소리는 천사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건 피조물의 목소리이고 그래서 고통의 비명이 되어야 하는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어느 날 샹젤리제 거리를 산책하던 할머니는 뇌졸중을 일으키고 마침내 임종의 침상에 눕는다. 임종의 침상은 프루스트에게 생명이 마감되는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목소리가 무서운 고통의 비명으로 변하는 장소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할머니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는 몸을 활처럼 구부린 채 헐떡이고 있는 할머니, 아니 할머니의 머리털을 뒤집어쓰고 이불 속에 누운 한 마리의 짐승이 온 몸을 흔들면서 뒹굴고 있었다 (...) 고통을 못이기는 할머니는 몸부림을 치면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는데, 그 몸부림과 비명은 이제 우리를 기억하지도 알아보지도 못하는 몸짓이고 목소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임종의 침상은 다만 목소리가 고통의 비명으로 변하는 장소만이 아니다. 그곳은 동시에 목소리가 고통의 비명 밑에서 숨소리의 노래로 변하는 장소다.
“의사는 할머니에게 몰핀 주사를 놓고 호흡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산소 기구를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 산소 공급과 몰핀이 만들어내는 이중 효과에 힘입어 할머니의 호흡은 이제 고통스럽게 그르렁거리면서 가슴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게 아니라 매끄러운 흐름에 실려서 빠르고 가볍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할머니의 숨소리 밑에는 마치 바람이 갈대 피리 속에서 몰래 선율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그 어떤 노래가 들어 있었는데, 그 노래 속에는 가까이 다가오는 죽음과 더불어 오히려 해방된 듯, 이제는 아무 것도 더는 느끼지 못하는 사람만이 알고 있는 고통과 행복이 섞여서 만들어내는 소리들이 섞여 있었다.”
숨소리의 노래는 그리고 끝나지 않는 음악이 된다.
“...산소가 쉭쉭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멈추었다. 하지만 몸속에서 겨우 빠져나오는 호흡소리는 가볍게, 그러나 중간에서 막히면서, 다 끝나지도 않은 채 새롭게 시작하면서, 계속 이어져 나갔다. 의사는 다시 할머니의 맥박을 짚어 보았는데, 그때 할머니의 호흡 소리는, 마치 다 말라버린 개울 안으로 새로운 물길이 흘러들어 오는 것처럼, 새로운 노래가 되어서 중단되었던 악절 속으로 스며들었고 그러자 한동안 끊어졌던 악절은 다른 선율로 바뀌어 살아나 점점 높아지면서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알겠는가? 죽어가는 할머니 스스로는 알지 못하겠지만, 그러나 이 마지막 호흡의 선율들은, 오래 압축되었다가 새어나오는 공기처럼, 그동안의 고통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채 갇혀 있다가, 이제 임종에 이르러 선율처럼 가볍게 흘러나오는 무한히 부드럽고 행복한 할머니의 마음들이 부르는 노래일지도 모른다는 걸. 할머니의 숨소리는 그동안 우리들에게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당신의 말들이 마음껏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고, 그 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유창하고 자명한 의미로 우리들에게 속삭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음악도 끝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눈물을 닦고 할머니에게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말이 없었다. 산소 장치의 식식거리는 소리가 멈추었다. 의사가 침대에서 물러났다. 할머니는 숨을 거두었다.” (이상 M. 프루스트, <게르망트 쪽으로 1>, 글쓴 이 번역)
그러면 마침내 침묵만이 남는 걸까. 목소리와 숨소리도 멈추고 음악도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걸까. 하지만 마르셀은 일 년 뒤 다시 찾은 발벡에서 사라졌던 음악을 다시 만난다.
“...발벡을 다시 찾았던 첫날 저녁, 나는 갑자기 심장 장애를 일으켰다. 격렬한 아픔을 멈추게 하려고 나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허리를 구부리고 구두를 벗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첫 번째 목구두의 단추에 손을 대는 순간, 나의 가슴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러나 너무도 귀중한 어떤 현존감으로 충만해졌고, 그러자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면서 나는 어린애처럼 흐느껴 울고 말았다. 심장에 충격을 받은 나를 도와주려고 달려 온 어떤 얼굴, 지금 내가 돌연한 기억의 고통 속에서 다시 만난 얼굴은, 어린 시절 발벡에 도착하던 첫날, 지금과 똑같이 내가 어려움에 빠지고 외로왔을 때, 걱정스러운 그러나 사랑이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몸을 기우리고 나를 달래어 주었던 그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마르셀은 비로소 깨닫는다. 어떤 음악은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아니 끝날 수 없다는 걸. 남은 사람의 기억이 놓아주지 않으면, 죽은 사람도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그 사람의 목소리와 숨소리도 침묵으로 지워지는 대신 사랑의 음악으로 영원히 흐른다는 걸. 그리고 마르셀은 또 깨닫는다. 그 음악은 오직 하나, 사랑의 고통이라는 회로를 통해서만 멈추지 않고 흐른다는 걸. 그러니까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의 어머니처럼.
“...구두를 벗다가 새롭게 알게 된 고통 때문에 나는 어머니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말없이 먼 곳만 바라보던, 눈물도 없이 건조하고 메마른 어머니의 시선은, 프랑스와즈가 매정하다고 투덜대던 것과는 달리, 할머니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모든 기쁨들이 어머니로부터 남김없이 떠나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어머니는 마치 온 몸이 굳어져서 그 무엇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는 조상(彫像)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조상 안에는 할머니가 있었다. 어머니의 몸속에서 할머니가 어머니를 꼭 붙들고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조금만 움직이거나 조금만 큰 소리를 내어도, 어머니를 꼭 붙들고 있는 할머니가 그만 떨어져나가고 말까봐, 그렇게 할머니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까봐 두려워하는 것만 같았다.” (이상 M. 프루스트, <소돔과 고모라 2>, 글쓴이 번역)
그러고 보면 요즈음 이유를 모르게 마음이 무겁고 몸이 아팠다. 그게 너무 일들에 치어서 그런 줄만 알았다. 싫지만 병원에도 가보고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만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그건 우울 때문도 병 때문도 아니었다는 걸. 나는 까맣게 몰랐지만 오랜 세월 동안 할머니는 내 안에서 살고 있었는지 모른다. 프루스트가 말하듯, ‘우리 몸속에 있지만 우리는 알지 못하는 그 어떤 미지의 장소’에서 나와 함께 줄곧 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내 안의 미지의 장소에 살면서 할머니는 그 동안 내내 나를 바라보고 또 부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도 내가 듣지 못하고 돌아보지 않으니까, 이번에는 꿈속으로 나를 찾아온 건 아닐까. 하혈을 하면서, 그러니까 멈추지 않는 음악이 되어 흐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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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글을 연재하고 계셨네요. 저도 요즘 삶과 죽음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우리네 삶이 영원한 것도 아닌데,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죽음을 잊고 사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 하면서도 우리가 갈 본향에 대해서는 기대하는 바도 없고
당장의 삶의 현안들과 불투명한 미래의 삶을 위해 걱정하고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음악도 끝나지 않으면 안된다' ..... 그렇군요... 그런데 음악이 끝나는 것이 아직은 두렵습니다
작품속의 임종을 앞둔 할머니의 가뿐 숨소리를 노래로 음악으로 묘사하는 부분이 생생한 감동을 주네요
그리고 꿈 속에 나타나신 집사님 할머니의 숨죽인 삶속에 깃든 그 무언의 노래에 눈이 젖어옵니다
지금 그 숨소리노래를 가쁘게 부르고 계실 한 분을 생각하며 그의 소프라노 음색을 영원히 기억하며....
읽는 내내 눈시울이 뜨거워 지네요.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잊혀지는 것들중에 유독 기억이 더욱 생생해 지는 것들이 있는것 같아요. 늘 저와 함께 하고 있는 것처럼.....
죽음앞에서 하나되는 새맘... 김진영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우리의 본향을 생각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내 맘을 읽어주는 듯한 문장들 덕에 위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