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 여행5 - 기차를 타고 프랑스 농촌의 전원지대를 보며 시농성을 생각하다!
10월 23일 아침에 프랑스 서부 에 있는 투르 Tours 시내 투르 미술관 과 생가티앵
대성당 의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고는 교회를 나와 루아르 강변 으로 걷습니다.
악기점 에 진열된 트럼펫이며 색스폰 을 구경하고는 거리에서 발레 포스터를 보는데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발레단 에서 순회 공연을 하는 것일러나?
예전에 블라디보스톡에서 기차로 상트 페테르부르크 까지 보름간 러시아 전국 일주
배낭여행 중에 저 도시에서 본 발레 백조의 호수 가 다시 떠오릅니다!
드디어 강변에 육중한 성채 가 보이니..... 바로 프랑스 전역에 2천개가 넘는다는
고성(古城) 중에 하나인 “투르 성”인 모양이네요?
여기 강변에서 역사적 유적이 즐비한 고성 주변을 흐르는 루아르 강변 에는 숲과 나무
그리고 꽃 들이 잘 가꾸어진 모습을 구경합니다.
강변을 한참 구경하고는 다시 투르 시내 를 남쪽으로 걸어서 투르 기차역 에 이르러
안으로 들어가니 .......
기차역 내부 에는 특이하게도 엄청 큰 걸개 그림들 이 보이는데 그 중에서 시농성
Chateau de Chinon 등 유명한 고성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 것을 봅니다.
역 전광판에서 12시 28분에 앙제 가는 기차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기다리는데......
세상에나! 출발 5분 전 에 별안간 소뮈르 Saumur 로 행선지가 바뀌네요? 우째 이런일이?
지금 “프랑스 철도가 파업중”이라 이 처럼 수시로 철도 노선이 변경 되는 데.....
지도를 보니 소뮈르 는 투르와 앙제의 꼭 중간 지점 입니다!
앙제를 못가는건 아쉽지만 그래도 투르 근교 에 농촌의 전원풍경 을 보자고 기차에 올라
타니 시내를 빠져나가 끝없이 펼쳐진 들판 을 달리는데...... 마음이 푸근해 집니다.
이 노선 바로 아래 노선 철도 로 가면 소뮈르 남쪽 에 역 구내에서 조금 전에 그림으로
보았던 바로 그 시농성 Chateau de Chinon 을 갈 수가 있습니다.
100년 전쟁 시기에 영국왕 헨리 5세 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 주장 으로 프랑스 왕자
샤를 7세 는 대관식도 올리지 못하고 시농성 에서 왕자의 신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헨리5세는 아쟁쿠르전투에서 프랑스에 승리해 트루아 조약을 맺고 프랑스공주 캐서린과
결혼했으니 샤를 6세가 죽으면 자신이나 아들이 프랑스왕위를 계승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왕 보다 영국왕 헨리 5세가 먼저 죽는 바람에 프랑스왕위를 얻지 못했으나
그후 샤를 6세가 죽으니 헨리 6세가 다시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며 침략 했는데....
거기다가 씨를 알수 없다는 출생에 대한 의혹 까지 겹쳐 의기소침한 시농성의 샤를 7세
앞에 1428년에 소위 신의 계시(?) 를 받았다는 잔다르크 가 찾아옵니다.
시농성 은 잔다르크 가 영국에 대항하기 위한 프랑스 군대를 일으킬 것을 호소한 곳으로
유명한데, 원래 954년에 블루아의 백작인 테오발트 1세 에 의해서 요새로 지어졌습니다.
12세기에는 나중에 영국 왕 이 되는 앙주 백작 제프리 플랜타지넷의 아들 인 앙리 2세
(헨리 2세) 의 거처가 되었으니 앙리 2세는 시농성의 많은 부분을 건축했다고 합니다.
헨리 2세 는 영국으로 쳐들어가서 플탠타지넷 왕조 를 연후 훗날 제3차 십자군을 일으킨
사자왕 리차드 1세 로 알려지는 아들의 반란으로 1189년 여기 시농성 에서 죽습니다.
영국왕 헨리 1세 는 후계자 아들이 없자 딸인 마틸다를 이혼시켜 앙주 백작에게 시집 보내
태어난 아들이 헨리 2세 로 프랑스왕에게 신년 인사 드리러 갔다가 왕비 엘레노르와 눈이
맞으니 이혼한 왕비와 결혼해 프랑스 아키텐등 거대한 영토를 결혼지참금 으로 받고 영국에
쳐들어가 스티븐왕을 죽이고 영국왕이 되었으나 아들 리차드 1세의 반란 으로 죽은 것이라?
시농성 은 세구역으로 나뉘는데 그중에 쿠드라이성 은 1307년에 프랑스왕 필립 4세
의 잔인한 탄압에 의해서 십자군 전쟁의 영웅 들인
템플 기사단원 들이 갇혔던 곳으로..... 아직도 당시의 낙서 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템플(성전) 기사단 은 1118년 상파뉴 기사 위그 가 십자군 전쟁시 기독교 순례자 보호
를 위해 조직해 교황의 승인 을 받았는 데 ....
예루살렘 에 도착해 십자군 왕 볼드윈 1세 의 영접을 받아 옛 솔로몬 신전인 바위사원
자리를 차지해 독일 튜턴 기사단 및 성요한 기사단 과 함께 이슬람 군대와 싸웠습니다.
여기 바위 돔 에 670년에 이슬람 칼리프 오마르 가 세운 알 아크사 사원 은 팔각형이라
템플 기사단 은 이를 자기네 상징으로 만들어....
크로아파테를 교묘하게 도안 해 십자가의 모든 바깥점들을 연결하면 팔각형 이
되독록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크로아파테 란... 템플 기사들이 백색 튜닉의 등에 끝이 넓어진 독특한 양식의
붉은 십자가 를 단 것을 의미하는 데,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의 표시 라고 합니다.
이후 1187년 하틴의 전투 패배 로 이슬람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을 뺏긴후 해안가로
물러나 100여년을 더 버티다가 1290년 아크레(아코) 가 함락되자 철수 하는데....
성 요한 기사단은 로도스섬 을 차지해 오스만터키와 끝까지 싸웠으나 템플기사단은
바로 귀국해 영국과 프랑스 등지에 자리를 잡습니다.
이후 프랑스 각지에서 새로운 입회자 가 몰려들고 기증 받은 토지로 금융업에 종사해
거부 가 되니 도처에 성곽을 건설하여 세력 을 떨치게 됩니다!
이른바 "명성과 부(富)" 를 한손에 거머쥐니 프랑스왕이 이를 시기 하기에 이릅니다!
1309년에 프랑스 왕 에 의해 로마에서 잡혀와 프랑스 아비뇽에서 새 교황청 을 차렸던
클레멘스 5세 교황 이 2년후 왕의 압력 탓인지 템플기사단에게 이단혐의 를 내리니
기다렸다는듯 프랑스왕 필립 4세 는 재산에 대한 욕심 과 왕권 신장 을 위해 행동합니다.
프랑스왕 은 전국의 3천여 수도원에 자리잡은 템플 기사단원을 이단 으로 몰아 1만 5천명
기사들을 체포해서 재산을 몰수 하고는 6년간 끔찍한 고문 으로 이단 재판 을 합니다.
결국에는 수천명을 화형 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니, 그 결과 템플기사단은 해체 되었는데
인간의 재물욕 이라는 것은 구제불능의 병 일러나? 국내에 세력이 커지는
템플기사단 그 자체도 장차 위협 이 될수 있으니 눈에 가시이지만.... 당시 군대는 왕의
사병이나 용병 이니 이를 운용하는데에는 많은 돈이 필요 했기 때문이지요?
1314년 3월 18일 마지막 그랜드 마스터 자크 드 몰레 는 화형을 당해 죽어 가면서
프랑스왕과 교황이 곧 신의 보좌앞에서 심판을 받으리라고 저주 했으니.....
그 탓일까요? 교황 클레멘스 5세는 4월에 급사 하고 프랑스왕 필립 4세 도 11월에
갑작스레 의문의 죽음 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 대단한 힘을 발휘한 저주 여!
일부 생존자가 살아남아서 붉은 십자가 크로아파테를 상징 으로 프리메이슨 을 결성하니
모짜르트도 회원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이든 까지만 해도 음악가는 국왕이나 교회 또는
귀족의 하인 수준이었으나 볼테르, 루소, 칸트와 같은 계몽사상가의 영향으로 모짜르트는
자유 직업인이라는 의식이 생겼다는 것이지요? 해서 베토벤 부터는 자유 직업인 이 됩니다!
세월은 흐르고 1793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루이 16세가 기요틴에서 처형 되어 그 목이
바구니로 굴러 떨어지자 프리메이슨 한명 이 튀어 나와 왕의 피를
손가락 에 묻힌후 하늘을 향해 "자크 드 몰레 그대는 복수를 했다!" 고 외쳤다나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억울한 탄압 탓에 몇년 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 졌으니 바로....
“템플기사단”과“다빈치 코드”입니다!
이런 저런 상념 에 잠겨 있는 사이에..... 마침내 기차는 소뮈르 에 도착해서 내리자
말자 열차시간을 확인 해 보니.....
이 기차가 바로 투르로 되돌아 가는 데, 다음 기차는 철도 파업 탓인지 무려 3시간 반
이후에나 있습니다!
순간의 망설임!!! 기차 역사를 나가 농촌 지대를 한번 걸어보려던 계획은 물거품
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아직 투르 시내 를 다 보지 못했는 데...... 아무래도 그 때 까지는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고 시간도 너무 늦으니 아쉽지만 포기 하고는 급히 올라 탑니다.
돌아 오는 기차에서 차창 밖으로 강과 들판에 저무는 해 를 바라보는 데...... 농업
위주의 시대에는 과연 이 나라가 유럽 최고의 부국 임을 다시 실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