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상계동에 사는 윤수경(31)씨는 임신한 지 7개월째다. 임신 초기에 철분제제를 보강하라는 인터넷 의료상담을 받고 약을 사다 먹었다. 그뒤로 3개월째 접어들 때까지 메스꺼움, 구토 등이 너무 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참다 못해 다른 의료정보사이트에서 자료를 찾아봤다. 이 사이트에서는 임신한 뒤 4개월까지는 철분제제를 무분별하게 먹으면 도리어 안 좋다고 나와 있었다. 흔히들 임신하면 철분을 꼭 보충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철분이 부족해서 빈혈이 있는 이들을 빼고는 모두가 그래야 하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윤씨는 철분제제 복용을 그만두고나서 메스꺼움이 가라 앉았다고 한다. 인터넷 건강상담으로 그야말로 ‘일희일비’한 셈이다.
의료정보사이트 8천개 시대
각종 건강정보, 의료정보들이 넘쳐난다. 신문, 방송, 잡지에도 건강코너 하나씩 마련하지 않은 매체는 드물다. 특히 사이버공간에 들어가면 건강·의료 관련 정보는 단연 각광받는 대상이다. 세계적으로도 건강·의료 정보는 포르노, 증권과 더불어 네티즌들이 원하는 3대 콘텐츠의 하나로 꼽힌다. 많은 기업이 이 콘텐츠에 주목하는 이유는 건강·의료정보는 운동, 미용, 먹을거리쪽으로 꼬리를 물 듯 파생콘텐츠를 낳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가동중인 건강상담, 의료정보사이트는 8천개 이상을 헤아리고 있고, 포털사이트는 70여개가 넘는다. 의료주권을 내세우며 의사, 간호사, 영양사 등이 만들고 운영하는 사이트들도 급격히 늘고 있다. 이용자 증가속도도 폭발적이다. 98년 6월에 문을 연 인터넷 종합병원 ‘건강샘’(www.healthkorea.net)의 경우 지난 5월까지 상담 건수는 9만8200건. 최근 들어서 하루 평균 531건의 상담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돈도 되고 의미도 있는 장사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나고 있는 건강·의료정보사이트들이 정작 사용자들에게는 얼마만한 도움이 될까. 또 ‘사이버 의료’의 미래는 어떨까.
국내에 개설된 건강·의료관련 사이트들은 크게 네개의 카테고리로 묶어 볼 수 있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소재들을 모아 일종의 전시장 역할을 하는 종합사이트 △의료전문인을 대상으로 한 정보교환창구 △의료인과 일반인의 커뮤니티 형성을 기초로 하며 배너 광고 등을 적극 도입한 기업형 사이트 △의료인과 병원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 확장 사이트 등이다. 대부분 무료 회원제로 운영되며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인터넷업체 관계자들과 의료인들은 국내 건강·의료포털사이트 중 ‘대표주자’로 건강샘(www.healthkorea.net)과 엔헬스(www.n-health.com), 케어캠프(www.carecamp.com), 하이독(www.hidoc.co.kr), 클리닉(www.clinic.co.kr)을 꼽는다. (주)메디다스에서 운영하는 ‘건강샘’은 선두주자인 만큼 정보의 질과 양으로 볼 때 단연 앞서간다. 사이트 운영과 정보 제공자도 이원화했다. 이곳에 콘텐츠를 제공하는 (주)닥터헬프는 의사, 약사, 임상병리사, 영양사 등 전문 의료진만으로 구성된 회사다. ‘케어캠프’는 건강·의료 관련 사이트들을 디렉토리로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서비스와 함께 섹스, 금연, 알코올, 임신·육아, 정신건강 등 현대인의 관심분야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8월1일 문을 연 ‘클리닉’은 주소지에 따라 전국 2만여 병·의원들을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아울러 의사 참여를 높이기 위해 사이버 진료에 참여하는 의사들에게 건당 1천원씩 지불하는 유료 온라인 서비스와, 동영상으로 수술장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클리닉 TV 방송을 시작했다.
하나마나한 소리 늘어놓아서야
(사진/(주)닥터헬프의 사이버상담모습)
사이트마다 아이디어 경쟁이 치열하다. 클리닉의 안재홍 상무이사는 “현대 사람들은 어느 의술은 누가, 어느 병원이 잘 하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하지만 현행 의료법상 ‘어느 어느 병원이 잘한다’고 알리는 것은 불법이다. 홍보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 사이트는 스페셜 클리닉이라고 해서 성형분야에서도 털이 많다거나 이빨이 밉다거나 코골이나 여드름이 심한 경우 등을 대상으로 한 특화된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고 사이트 운영 전략을 설명한다.
투자 자금이 넉넉하거나 전문 의료진들이 꾸려가는 사이트들은 기술과 콘텐츠면에서 속도감 있게 영역을 넓혀가고 있지만, 그 수만큼 반짝 상술이나 오프라인의 홍보효과를 노린 사이트들이 늘어나면서 사용자들을 짜증나게 하기도 한다. 같은 증상의 환자라도 백이면 백, 모두 다르다. 체질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먹는 음식이나 성격도 다르다. 그런 까닭에 콘텐츠 준비가 잘되지 않았다면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국·영·수 중심으로 암기과목을 열심히 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마나한 소리를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경기도 일산에 사는 주부 강정화(36)씨는 얼마 전 네살난 딸아이가 갑자기 열을 내고 몸을 떨어 혼비백산했다. 의약분업 문제로 폐업중인 병원을 찾기도 막막하고, 주위에 아는 의료인도 없어 애태우다가 인터넷을 뒤져봤다. 전문의 실시간 상담 등을 내건 몇몇 사이트에 정보를 의뢰하고 꼬박 하루를 기다렸지만 답변이 오지 않았다. 그사이 딸에게는 집에 상비하고 있던 해열제를 조금씩 덜어 먹이고 이불을 꼭꼭 덮어줬다. 나중에 알고보니 아이는 중이염으로 인한 열성경련 증상을 보인 것이다. 이런 경우 정확한 처방없이 해열제를 처방하는 건 도리어 위험할 수 있다. 강씨는 소아과만 해도 수십개의 사이트가 있었는데 딱히 도움되는 게 없었다고 속상해한다. 대부분의 정보들이 일반론에 그쳐서 정작 집에서 응급대처를 하기에는 적절치 않았다는 것이다.
강씨의 이웃동네에 사는 심연화(34·일산구 중산마을)씨 역시 답답한 일을 겪었다. 9월 중순 며칠째 감기로 고생하던 남편이 퇴근한 뒤로 상태가 몹시 나빠졌다. 남편은 일산 신도시에서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파주소재 문발공단에 직장이 있는 바람에 계속 병원을 못 찾았던 것이다. 평소 인터넷 서핑이 수준급이라 자부해온 심씨였으나 야간진료하는 병원을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사이트에 올라 있는 전화와 주소를 보고 닥치는 대로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러다가 상가 안내용 책자를 뒤져서 인근 탄현에 있는 의원 한 군데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정보의 불확실함만이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병이 처음 증상은 간단하다. 이를 가볍게 생각하고 이런저런 사이버상담만 하다 치료시기를 놓쳤다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아직 국내에 이런 사례가 보고된 일은 없지만, 얼마 전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한 할머니가 인터넷으로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실의에 빠진 나머지 할아버지와 동반자살을 한 사건까지 일어났다. 미국에서는 정확한 진료없이 인터넷 정보만 믿고 철분을 너무 많이 섭취한 사람이 간기능 약화로 사망한 일도 있다.
변화의 용트림, 몸집 불리기
(사진/한 성형외과 수술장면을 찍고 있는 인터넷방송<클릭TV> )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 환자와 가족들은 사이비 대체의학에 속아 넘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단시간에 효과를 보거나 완쾌될 것처럼 건강기구, 건강식품 등을 과대 광고하는 사이트는 일단 의심해 보아야 한다. 또 정보의 출처나 사이트 운영자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은 사이트도 마찬가지다.
사이버 의료는 인터넷 쇼핑 하듯 클릭 한번으로 진료와 처방을 할 수 있는 꿈의 신세계는 아니다. 대부분의 사이트들이 건강상담과 의료정보 제공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 이유는 우선 익명의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는 인터넷 속성상 책임소재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담을 넘어선 진료와 처방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의료계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건강샘’에 의료정보를 제공하는 (주)닥터헬프의 김진(37) 대표는 “사람의 몸과 생명에 관련된 이상 1만명이 편하다고 해서 한명이 위험한 일을 할 수는 없다”며 사이버 처방전을 반대한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할 때는 촉진, 시진, 청진 등 총체적인 진단방식이 동원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처방이나 치료 뒤 반응을 지켜보아야 할 때도 많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처방을 하면 결과를 확인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러나 사이버 처방전은 모니터링이 불가능하다. 이는 법적인 문제 이전에 의사 양심상의 문제다”라고 잘라 말한다.
의약분업, 의보통합, 수가변화 등으로 ‘현실 의료계’가 지각변동을 겪고 있다면 ‘사이버 의료계’ 역시 하루가 다르게 변화의 용트림을 하고 있다. 사이트 운영자인 개인과 법인, 병원, 대학병원은 너나 할 것없이 기발한 아이템 개발로 정보제공 경쟁을 하고 있고, 업체들은 몸집 불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난 9월15일에는 국내 최대의 가상병원 ‘건강샘’(www.healthkorea.net)이 국내 가상병원 중 ‘빅5’에 드는 ‘하이닥’(www.hidoc.co.kr)을 인수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이버 의료 시대가 반갑지 않은 의사들도 상당수다. 디지털 마인드가 없거나, 시간을 내기 어려운 이들일 경우 더욱 그렇다. 서울 구로동에서 피부과를 운영하는 전문의 박아무개씨는 “울며 겨자먹기로 한 포털사이트에 참여했다”고 하소연했다. 피부과나 성형외과, 비뇨기과 등은 고객관리가 중요하고 입소문이 무섭기 때문에 대세를 무시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사이트에 광고가 아닌 정보제공 형태로 병원 이름을 올려놓으면 입맛 까다로운 네티즌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봉사’를 해야 한다. 실시간 상담이나 예약서비스 등은 일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또 노력봉사를 한다고 해서 그 사용자들이 자신의 병원을 찾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홍보에 들이는 품에 비해, 한마디로 수익모델이 창출되지 않는 셈이다. 그런 까닭에 문을 닫거나 업그레이드를 중단한 ‘사고 사이트’들도 상당수 생겨났다.
의료정보에 KS 마크를
그렇다면 사이버공간의 건강·의료정보를 제대로 나누기 위해서는 어떤 기준과 원칙이 필요한 것일까. 대한의사협회 정보이사를 지냈던 이덕희 박사(이덕희 성형외과)는 “무익한 정보야 그렇다쳐도 유해한 정보까지 범람하는 건 문제다. 사이버 상담의 범위와 책임 기준이 없어 의사들 스스로 대체적인 기준만 갖고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사이버 의료정보에 대한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사이트 운영자들은 정보 제공자나 사용자 양쪽을 위해 사이버 의료의 기준과 책임을 명확히 할 인증제도가 시행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나쁜 정보를 규제하기보다 일종의 KS마크처럼 옳은 정보를 표시해 알려주는 방법으로 정보를 구분하자는 뜻이다. 젊은 의료인들의 모임 오픈닥터스(www.opendoctors.net)에서 인터넷 의료정보감시단을 꾸리기도 했던 최영철 대표 역시 “사용자들의 공개고발에 의존하는 아마추어적 활동 방식은 한계가 있다”고 자평했다. 인터넷의 속성상 모든 사이트를 감시하고 규제한다는 건 불가능한 탓이다. 현재 보건사회연구원의 연구진과 대한의사협회 회원들, 인터넷포털사이트에 참여하는 의료인을 중심으로 인증 메뉴얼 개발을 위한 기초연구에 들어간 상태다. 따라서 당분간은 사용자들 스스로 옳은 정보와 그른 정보를 구별하는 안목을 기르는 수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수술장면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하고 원격영상진료를 통해 직장에서 편안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시대에 접어 들었지만, 결국 그 모든 기술과 정보의 선택은 사람에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