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관 50주년/靑石 전성훈
임관 50주년, 아득히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22살의 풋풋한 청년이 대한민국 육군 소위에 임관된 그때, 그 시절은 저 멀리 사라져 어디로 갔는지 형체조차 찾을 길 없다. 마음은 그날처럼 파릇파릇한데 육신은 가야 할 먼 길을 바라보는 쇠잔한 노병이다. 임관 50주년 기념식 연락을 받고 어찌할지 생각하다가 참석하기로 마음먹는다. 며칠 동안 추억의 군대 시절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하고 진한 아쉬움을 느끼기도 한다.
먼저 생각나는 게 ROTC 후보생 시절의 추억이다. 아주 심한 기계치인 탓에 태권도와 보급품 정리를 잘못해서 후보생 1년차인 3학년 때에 선배들로부터 기합을 많이 받아 후보생을 그만둘지 고민할 때, 같은 학과 동기생이 여태껏 훈련받으면서 얻어터진 게 아깝지 않냐고 말리고, 격려해 주어 무사히 견딜 수 있었기에 이 자리를 빌려 친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초급 장교로 임관되어 광주 보병학교로 떠나는 날 아침, 옛 용산역에서 어머니는 우시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려고 애쓰시면서 ‘더블백’을 어깨에 메고 떠나는 아들 모습을 지켜보신다. 겉으로는 울음을 참고 계시지만, 가슴 속으로 얼마나 애간장 태우셨을까. 옆에 계시면 지금이라도 여쭤보고 싶다. 그날 어머님 마음이 어떠셨는지. 기차가 홈에서 천천히 움직이자, 멀어져가는 애인을 놔줄 수 없는지 한 아가씨가 열차를 따라 철길을 달린다. 그 모습을 보고 기차 안에서 소리 지르던 동기생들 모습이 불현듯이 떠오른다. 그 젊은 연인은 어찌 되었는지?
한밤에 광주 상무대에 도착하여 힘들고 고된 16주간의 훈련을 받는 동안 조금씩 늠름한 장교로 변해간다. 유격 훈련을 받다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동기생, 학생 같은 기분으로 먼저 간 동기생을 그리워하며 집단행동을 하여 군사재판에서 처벌받은 동기도 생각난다. 보병학교 초등군사반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꿀맛 같은 4박 5일 짧은 휴가를 맛본다. 집결지인 청량리역에서 군용열차를 타고 도착한 강원도 춘천역,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어느 부대로 가는지도 모른 체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명령을 기다린다. 차례가 되어 이름이 불리고 화천으로 가는 군용버스에 오른다. 처음 가보는 첩첩산중 험한 산길을 달리는 군용버스, 배치된 부대를 찾아가니 대성산에서 텐트 생활하며 진지 공사를 하고 있다. 약 3시간을 걸어서 올라간 부대가 2년 후 제대할 때까지 몸담으며 지내던 부대이다. 부여받은 직책은 중화기 중대 기관총 소대장이다. 뭐가 뭔지도 모른 체 소대장 임무를 수행하는 몇 개월의 세월이 흐르자, 뼈를 깎는 듯한 추운 겨울이 찾아와 정신을 홀딱 빼놓는다. 9월 하순부터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여 엉겁결에 내복을 입는다. 눈이 많은 고장이라, 영화 ‘닥터 지바고’처럼 엄청난 눈 세계를 만났고, 전방 고지의 한겨울 추위가 어떻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해준 곳이다. 겨울에는 화목(火木)작업으로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벽난로 불쏘시개를 하는데, 그럴 때는 눈길에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여름 장마철에 작전 도로가 유실되면 한동안 도로 복구 작업을 한다. 보병학교에서 배운 야생 생존술 훈련을 핑계 삼아 뱀을 잡아 구워 맛있게 먹은 것도 꽤 된다. 사격장에서 사격하면 탄약 냄새를 맡은 꿩이 찾아온다. 카빈총으로 정말 운 좋게 꿩 머리를 맞추면 꿩고기 맛을 볼 수 있다. 겨울철 야간에 작전 도로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켠 채 길에서 꼼짝 못 하는 산토끼를 줍기도 하고, 사격하다가 예광탄으로 산불이 나면 불을 끄면서 본의 아니게 산토끼 몰이를 하기도 한다.
철책선 경계를 섰던 겨울 적근산, 부대 막사의 실내 온도가 영하이고 바깥은 영하 20도 정도이다. 막사 주변 외곽 네 곳의 온도를 측정, 평균 온도를 내어 상급 부대에 보고한다. 계곡물이 꽁꽁 언 탓에 쌓인 눈을 퍼다가 녹여서 물을 만들어 밥하고 마시고 얼굴과 손을 간단히 씻을 정도이다. 오죽하면 검열 나온 검열관이 시커먼 소대장 얼굴을 보고, “세수는 제대로 하라”고 했을 정도이다. 혹독한 겨울이지만 가을이 익어갈 때 골짜기마다 다르게 울긋불긋 물든 단풍 모습과 봄이 되어 계곡 아래로부터 생기를 띠며 나무에 파릇파릇 물이 오르는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다. 제대하고 훗날 기회가 되면 이곳에서 산행 안내인 노릇을 하면 좋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거의 50년 만에 만나본 동기생들, 낯익은 얼굴도 보이지만 전혀 누군지 알 수 없는 동기도 있다. 게다가 이름은 대부분 기억이 안 돼 가물가물하다. 먼저 세상을 뜬 동기생도 벌써 여럿이다. 그만큼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우리 차례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반가운 마음으로 악수하고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술 한잔하며, 잠시나마 즐겁게 보낼 수 있어서 감사하다. 모임을 주선한 모든 분에게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25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