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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전중앙초등학교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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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자료실 스크랩 39년 전 유신선포 비화, 박정희의 술회
강신홍 추천 0 조회 55 12.10.07 19: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39년 전 유신선포 비화, 박정희의 술회

"나는 (유신으로) 욕을 먹겠지만 후엔 70년대를 잘 극복했다는 말을 들을 거야."

 

 

. 조갑제

 

 

 

'김대중이 당선되었더라도 군대가 가만 있지 않았을 것'

 

 

1972년 2월 22일.

 

 

대통령은 청와대 출입을 그만두게 된 권숙정·송영대·정준모·김윤환 기자에게 저녁을 대접했다. 이 자리에는 김성진 대변인이 배석했다.

 

'미국 닉슨의 중공 방문은 목적의 90% 이상이 재선을 위한 것이야.

 닉슨의 중공 저자세 외교는 유쾌한 일이 아니야.

 우리의 국방력은 거의 완성에 가까운 자주 능력을 갖추었어요.

 미국을 언제까지 믿을 수 있겠는가 말이오.

 지금과 같이 어려운 때일수록 국민은 단결해야 할 것 아닌가.

 

야당 인사라고 하여 책임 없는 발언을 해서는 안 돼(필자 注 : 金大中 후보의 예비군 폐지, 군 복무 단축, 병력 감축 등 주장과 관련해서).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야당의 金大中 후보가 무책임한 발언을 많이 했는데, 이런 말은 국민의 판단력을 해롭게 하는 것이야.

설령 그런 말을 한 김씨가 당선되었다고 할지라도 모측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오.

 내가 극력 막는다 해도 그들은 움직였을 걸(필자 注 : 군대를 가리키는 듯).

 

金이 청와대 출입 메달을 만들어 주는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식에 어긋난 선거전을 했는데, 앞으로는 이런 것을 절대 용인하지 않을 생각이오.

 

 다음 선거는 비상 사태 아래서 치르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무책임한 발언은 법의 규제를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해요.

 한마디로 말해서 과거와 같은 선거 양상은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소신이오.”

 

 

대통령은 북괴가 준동하고, 국내에서는 김대중 씨가 선동하는 소요가 일어날 것이니 비상 사태라도 선포하지 않으면 선거를 못 치를 것으로 생각하는 듯한 뉘앙스로 말했다.

 

 

1972년 4월 3일

 

 

박대통령은 전해 12월에 만들었던 국산 병기 시(試)제품의 試射會(시사회)를 참관했다. 이날 시사회는 26사단 지구에서 있었다.

 對전차지뢰를 터뜨리는 것을 朴대통령은 쌍안경으로 보고 있었다.

 고물탱크 밑에 파묻어놓은 지뢰가 터지자 불기둥이 ?았다.

 그 순간 내빈석에서 보니 무슨 검은 물체가 '휙'하는 소리를 내면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모두 '악'하면서 몸울 움츠렸다.

 그 물체는 내빈석을 넘어 멀리 날아가렸다.

 

 모두 '휴'하고 안도하는데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당담수석비서관 오원철의 발밑으로 '탁'하면서 떨어지는 게 있었다.

 쇠조각이었다.

 오수석이 대통령을 보니 쌍안경으로 폭발지점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파편이 날아온 것을 모르는지 '지뢰란 대단한 것이구만. 포신이 떨어져 나갔어'라고 했다.

 

유재흥 국방장관은 '중지!'라고 외쳤다.

 그러자 박대통령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순서대로 진행하세요'라고 말했다.

 시사회가 끝난 뒤 대통령은 81mm 박격포쪽으로 가서 포신 윗부분을 몇번이나 쓰다듬었다.

 吳수석이 보니 꼭 귀여운 자식의 뺨을 어루만지는 것과 같았다. 그는 더 이상의 치하는 필요없다고 느끼며 눈시울이 적셔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다치다

 

 

 

1972년 4월 21일

 

 

朴대통령은 좌측 흉부 쪽에 근골(筋骨) 타박상을 입었다.

 목욕탕에서 타일에 미끄러지면서 다친 것이다.

발표는 ‘산책 중 돌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타박상을 입어 당분간 휴양하실 것’이라고 했다. 항간에는 간이 나빠졌다느니 별별 소문이 나돌았다.

 

 

1972년 5월 16일.

 

 

지난번 다친 후 대통령은 이날 처음으로 외부 행사에 참석했다.

 5·16 민족상 시상식에 참석한 뒤, 대통령은 기자단과 금정렴 비서실장과 김성진, 심융택, 권숙정 비서관 등과 함께 오찬을 들면서 5·16 당시를 회고했다.

“그때 해병대를 데리고 한강을 도하하는데, 내가 권총을 빼들고 ‘돌격 앞으로’라고 외치면서 한강다리 난간에 패여 있는 홈을 세 개째 지났는데도 아무도 따라나서질 않는 거야. 그래서 총을 한 방 쏘면서 ‘돌격 앞으로’ 하고 다시 외쳤더니 그때서야 다 따라오더군.”

 

 

1972년 5월 21일.

 

대통령은 고향에 계시는 백씨 동희 옹을 문병하고 거의 밤 10시나 되어서 청와대로 돌아왔다.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이 대통령을 수행하였다.

 귀저(歸邸)한 대통령은, “동희 형님이 병세가 악화되어 식사도 못하고 말도 잘 못하셨다”고 하시면서 수심에 싸여 있었다.

 

 

남북비밀 접촉 내막

 

 

'청산가리도 가져갑니다'

 

 

1972년 3월 28일

 

 

중앙정보부 간부 정홍진(대외직명은 남북적십자 회담 사무국 운영부장)은 이날 판문점을 통해서 북한으로 들어갔다.

 그는 3박4일간 머물면서 북한노동당 조직부장 김영주金英柱(김일성의 동생. 日軍 통역출신)를 만나 이후락 정보부장의 방북에 합의하고 왔다.

 3월31일 서울로 돌아온 정홍진은 이후락 부장과 함께 청와대로 가서 박대통령을 만나 보고했다.

 박대통령은 '수고했다'면서 술잔을 많이 권했다.

 정씨가 집에 돌아가니 아이들은 '제주도 출장을 가셨다면서 귤도 안사오시고...'하면서 섭섭해했다.

 

 

1972년 4월 26일

 

 

 박대통령은 이후락 정보부장의 평양행에 앞서 이날 '특수지역 출장에 관한 대통령 훈령'을 하달했다.

 이 훈령은 북한측에 대해 우리가 밝힐 기본입장이었다.

 

* 박대통령이 직접 작성한 이 훈령의 요지 :

- 조국통일은 궁극적으로 정치적 회담을 통한 평화적 통일이어야 한다.

- 4반세기 동안 정치, 경제, 사회, 기타 분야에서 상이한 제도하에 놓여 있는 남북의 실정을 직시하고 통일 문제는 제반 문제의 해결을 통하여 이뤄져야 한다.

- 현재 진행중인 남북한 적십자 회담을 촉진시켜 인도적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보도록 할 것이며, 경제 문화 등 비정치적 문제를 풀어나가면서 정치적 문제로 이행하고, 비현실적 일방적 통일방안의 선전과 상호비방 및 무력사용을 하지 않는다.

 

 

1972년 5월 2일

 

 

이날 오전 10시 이후락 부장은 평양으로 출발하기 앞서 인사차 청와대로 왔다.

 박대통령은 이부장과 만날 때 김종필 총리, 최규하 특별보좌관, 김정렴 비서실장만 배석시켰다.

 박대통령은 '미국 CIA 서울 책임자에게 잘 알려주었지. 잘 갔다와'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적지로 들어가는 이부장 일행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각서를 북측으로부터 받도록 하고 진행과정을 미국 CIA에 알려주도록 했다.

 

 남북한은 평양에서 서울로 연락이 가능하도록 평양-서울간 임시전화선도 개통시켰다.

 이후락 부장은 웃저고리 주머니를 가리키면서 '미국 CIA와 협조는 잘 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여기 준비해갑니다'라고 했다.

 북한에서 유사시에 자결하기 위해서 청산가리를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이후락은 5일 오전 전화연락에서 '어제 밤에 김일성 수상과 만났다'고 알려왔다.

 

 

박성철에 놀란 대통령

 

 

1972년 5월 31일

 

 

5월 29일 도착한 북한측 대표단이 이날 청와대로 와서 박대통령을 만났다.

 북한측 인사는 박성철 제2부수상, 유장식 노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겸 대외사업부장, 김덕현 노동당 정치위원회 직속 책임지도원이었다.

 우리 쪽에선 김종필 총리, 김정렴 실장, 최규하 특보, 이후락부장, 김치열 차장, 정홍진 국장이 배석했다.

 

박대통령은 만면에 미소를 띠었으나 박부수상 일행은 얼굴이 굳어 있었다.

 박대통령은 김일성 수상의 안부를 물었다.

 이윽고 박성철은 자세를 고치더니 웃옷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는 '박대통령 각하'로부터 시작되는 김일성의 인사, 남북회담에 대한 기본 입장을 수첩에 적힌 대로 읽어내려갔다.

 

 그 이후 대화가 있었지만 박성철은 들으면서 메모만 할 뿐 반론도 동감도 없었다. 무슨 말로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서 훈령을 받지 못한 탓이었다. 메모만은 세 사람 전원이 한 자도 빼놓지 않으려고 정신없이 적어내려갔다.

 

박대통령은 타이르듯 말했다.

 

'귀하들은 남북간의 장벽을 한꺼번에 허물자고 하는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듯이 해야 합니다'

'박성철 부수상도 시험 쳐본 적이 있지요. 시험을 볼 때도 쉬운 문제부터 풀고 어려운 문제는 나중에 풀지 않습니까. 남북 대화도 같은 식으로 풀도록 합시다'

 

공식 면담이 끝나자 만찬 전에 쌍방만 참석한 칵테일 파티가 있었다.

 박대통령이 박성철에게 '자, 술 한 잔 합시다'라고 권해도 박은 '저는 약을 먹고 있는 중이라서...'라면서 술잔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박대통령은 예상은 하였지만 북한권부의 실력자라는 박성철까지 이렇게 경직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대통령은 새삼 김일성 체제의 본질에 대해서 실감하는 바가 있었다.

 

 

이후락: '영구집권으로 가야 할 이유'

 

 

1970년의 8.15 선언, 1971년 8월 12일의 남북적십자 회담 제의, 7.4 공동성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남북대화는 박대통령이 주도권을 잡고서 진행하였다.

 그는 8.15 선언을 통해서 '남북한이 선의의 체제경쟁을 하자'고 제의했다.

 

1967년부터 늘어난 대남무장침투, 1968년1.21 청와대 기습사건, 이틀 뒤의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그해 가을의 삼척 울진 공비 침투사건, 이듬해의 미군정찰기 격추사건으로 이어지는 남북한의 긴장은 남한을 제2의 월남화하려는 김일성의 모험주의를 잘 보여주었다.

 

 1960년대말에 북한은 군사력 건설의 절정기에 달해 있었다. 미국은 월남전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존슨에 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닉슨 대통령은 게릴라전이나 제한전쟁에는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괌 독트린'을 선언했다.

 미국은 또 키신저 외교를 통해서 중공에 대한 적대정책을 포기했다.

 

 1970년대에 들면서 박대통령은 북한의 위협, 美中 접근, 남한의 국력충실을 조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對北정책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 되었다.

 

 그것은 무력충돌을 막기 위한 對北대화 채널의 개척과 방위산업 건설을 핵심으로 하는 자주국방 정책으로 나타났다.

 제2의 쿠데타라고도 볼 수 있는 유신조치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이 시기 박대통령을 지배한 가장 중심적인 전략 목표는 '남한의 국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져가므로 이제는 전쟁만 막으면 된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무장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박대통령의 대북제의에 김일성이 호응한 것은 남북대화에 따른 평화무드를 이용하여 남한에 적화기지를 만들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후락 당시 정보부장은 월간조선 오효진 기자와의 인터뷰(1986년12월호)에서 유신을 하기 위하여 남북회담을 한 것이 아니고 1971년부터 남북회담을 하는 과정에서 유신을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

 

'내가 대통령에게 그랬어요. 북한과 대화를 할려면 우리가 딱 한 가지 의견만 가지고 해야 하는데 이쪽에선 말이 많으니까 대화가 안됩니다.

 이 체제 갖곤 대화해봤자 우리가 손햅니다.

 대통령께서 영구집권은 안하더라도 영구집권할 수 있다는 기분으로 해야 대화가 되는 거지 얼마 있다가 그만둔다는 체제 갖고서는 대화가 안됩니다.

 이런 마당에 그렇게 안하신다면 북한한테 밤낮 밀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민 가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해놓고 나면 70년대를 잘 넘겼다고 할 거야'

 

 

李부장이 그런 건의를 하기 전에 이미 朴대통령은 체제변혁을 구상하고 있었다. 李부장의 건의는 그의 구상을 실천에 옮기는 날을 앞당기는 역할을 했겠지만 결정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유신쿠데타는 오로지 박정희 한 사람의 구상과 결심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육사 8기생들이 시작했던 5.16혁명과는 다르다.

 

김종필 총리는 박대통령이 1972년의 7.4 공동성명 이전인 5월말 토요일에 유신조치에 대한 이야기를 박대통령으로부터 들었다고 기억한다.

 

<그날이 토요일이었어요. 12시 조금 전에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늘 오후에 무슨 예정이 있나'

'다른 예정은 없습니다. 운동이나 할까 하는데요'

'나하고 가지. 이따 올라와'

 

뉴코리아 골프장으로 가는 차 중에서 朴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좀 획기적인 체제를 구상하고 있어.

 우리 나라는 선거를 잘못하면 어디를 갈지 몰라.

 내가 보기에 70년대가 순탄치 않아.

 없는 국력을 조직하여 효과적으로 관리해나갈 수 있는 체제로 정비가 되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도약이 어렵겠어.

 

 이것은 많은 반대에 부딪칠 가능성이 있지만 해놓고 보면 70년대를 잘 극복했다는 말을 들을 거야.

 조금 더 있다가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께.

 그때는 임자도 검토멤버에 들어와야 해'>

 

김종필은 6월 이후엔 유신조치에 대한 윤곽을 알았다. 발표 날짜를 잡는 회의 때도 참여했다.

 

 

'자기 나라에 쓸모 없는 인간이...'

 

 

1972년 5월 11일

 

 

이날 청와대 비서실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국사교육강화발언건의'라는 제목의 보고를 했다.

 그 요지는 '국사교육은 고등학교까지만 하고 각 기업체 채용시험은 물론 국가시행 고시에 있어서도 극소수(2%)의 시험만이 국사를 시험과목에 포함시키고 있는 실정이다'는 것이었다.

 서울대 교양과정부의 필수과목중에 세계문화사는 포함되어 있으나 국사과목은 없다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보고서 옆 여백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

<세계문화사를 알기 전에 제 나라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하지 않는가. 慨嘆. 慨嘆.>

 

朴대통령은 1972년2월7일 경북도청 연두순시 때도 국적 있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었다.

'지난 날 우리 교육은 선량한 민주시민을 양성한다는 막연한 목표를 내세웠기 때문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한국사람이면서도 정신상태는 한국인인지 외국인인지 분간할 수 없고 국가이념조차 분명치 않는 인간이 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훌륭한 한국인이 된 다음에야 선량한 민주시민도 인류사회에 공헌하는 세계인도 될 수 있다.

 자기 나라에 쓸모 없는 인간이 세계를 위해 공헌했다는 기록은 동서고금을 통해 찾아볼 수 없다'

 

 박정희는 역사서를 많이 읽었다.

 그의 역사관은 그의 통치철학의 바탕이었다.

 그는 主史翼經, 즉 역사적 경험을 중시하고 이론을 보조적으로 보려는 관점의 소유자였다.

 요사이 한국의 지도층이 역사, 특히 자기 나라의 역사에 대해 무식하거나 왜곡되고 천박되며 편협한 관점을 가진 경우가 참으로 많다.

 한국호의 방향이 잘못 가고 있다면 이런 역사文盲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어느 족속인지 모르지만'

 

 

1972년 5월 18일

 

 

이날 새마을 소득 증대 촉진대회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의 치사는 두 시간이 넘었다.

 그는 메모를 가지고 즉석 연설을 하는 식으로 자신의 꿈과 열정과 불만들을 작심한듯 토로했다. 그는 새마을 운동을 '잘 살기 운동'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배 부르게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도 물론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잘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보다 더 여유가 있고, 품위가 있고, 보다 문화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야겠고, 그것도 나 혼자만 그렇게 잘 살아서는 안됩니다. 내 이웃 사람은 지금 밥을 못 먹고 굶고 있는데 나만 잘 먹고 잘 입고 여유 있고 품위 있는 문화적인 생활을 하는 것, 이것은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朴대통령은 같은 맥락에서 도시민들이 농촌지역으로 놀러가서 농민들에게 방해가 되는 행락을 한다고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지난 주말에도 서울 근교에 나가보니까 산위에서 떠드는데 올라가보지는 못했지만 학생인지 하여튼 젊은 사람임에 틀림 없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잘 살아보기 위하여 농민들이 새벽부터 새까말 때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일하고 있고, 특히 도시의 처녀 같으면 한창 멋내고, 몸 가꾸고, 맵시 부릴 만한 나이의 학교 갓나온 시골처녀들이 삽을 들고, 곡괭이 들고, 머리에 돌을 이고, 내 고장을 한번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어보려고 열의를 올리고 있는데, 그 옆에 도시에서 온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지 어디 족속인지 모르지만, 부락사람들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는 그런 행동을 안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왜 그런 짓들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도시행락객들을 향해 대통령이 '그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지 어디 족속인지 모르지만'이라고 거의 막말을 한다.

 

 이 순간 朴대통령은 철권 통치자가 아니라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돌아가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고도 특권, 사치에 대해서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유지했던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완벽하게 권력을 조직적으로 행사한 그였지만 내면의 본성은 反骨(반골)이었다.

 

 

 

'선거 안 하는 방법 좀 짜내 보지”

 

 

1972년 6월 8일

 

 

대통령은 金비서실장과 비서관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법에 지나치게 얽매이면 할 일도 못할 때가 많아. 깡패 소탕 같은 것이 바로 그런 경우지. 할 일이 있으면 너무 법에 집착하지 말고 과감히 일을 처리해 나가야지.”

그러자 김정렴 실장이 입을 열었다.

“경제가 어려워지는 주된 요인이 선거 때 마구 뿌려지는 정치 자금 때문입니다. 선거 때 생긴 경제 주름살을 펴려면 2년이 걸리는데, 겨우 정상 궤도에 올려놓고 보면 금방 또 2년 후에 닥쳐올 새 선거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는 잠시도 제대로 자랄 수 없습니다.”

“선거 안 하는 방법 좀 짜내 보지, 허허. 유혁인 비서는 신문사에 있었으니 묘방이 있을 것 아닌가. 선배나 동료들에게 좋은 아이디어 있는지 물어 봐”

 

대통령은 이때 벌써 정보부를 시켜 유신 준비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의 비서실 역사를 알고 있어요. 그 당시 전방 지휘관들은 후방에 나들이할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 하면 경무대 비서관과 저녁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신경들을 많이 썼지. 요즘 우리 비서관들은 전에 없이 일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비서관들이 돈을 갖다 줘도 받지 않는다는 인식이 외부 인사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 아니겠소. 사실이 어때?”

“…”

“내가 깨끗하다고 해서 지나치게 행정부에 간섭하면 그들이 일을 못해. 이런 점을 유의해서 중요한 것만 체크하도록 해요. 옥상옥(屋上屋)이라는 말은 절대 듣지 말도록 하고. 건강은 40부터 45세 사이에 조심해야 해. 김시진 장군은 마흔일곱이지? 알아서 하시고”

 

 

1972년 6월 14일

 

 

대통령은 아스팍 총회 대표들과 청와대 본관 옆뜰에서 가든파티를 열었다. 유재흥 국방장관이 옆에 있던 태국의 사라딘 대표를 가리키며 말을 했다.

“각하, 사라딘 대표는 각하께서 10년은 더 집권하셔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대통령이 말없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대통령은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어서 자신에게 듣기 좋은 얘기는 낯간지러워 했다.

 사라딘 태국 대표가 태국 政情을 설명했다.

“우리는 국회의원들이 국가 예산 심의를 5개월씩이나 연기시키면서까지 자기 선거구의 사업에 쓸 예산을 과다하게 요구하는 통에 의회를 해산시켜 버렸습니다.”

“충분히 이해하겠소. 다른 나라의 평에 구애받지 말고 현 체제를 당분간 그대로 밀고 나가야 할 것이오”

“언젠가는 의회를 다시 가져야 하겠지만 우선은 현 상태대로 밀고 나가렵니다”

“동남아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배우다가 병들었어요. 태국 현실에 대해 강대국들이 제시하는 의견에 태국 정부가 따를 필요는 없다고 수상에게 전하시오”

 

“비평만 하는 강대국이 우리에게 대하는 태도는 어떤 경우에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국회를 없앴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또 국회를 열게 되면 다른 트집을 잡아서 비난할 것입니다”

“타놈 수상의 결단성을 높이 평가합니다. 나는 당신이 오늘 한 얘기에 대해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정권을 누구에게 넘겨 줄 것인가”

 

 

1972년 6월 16일

 

 

저녁 6시경에 대통령은 김현옥 내무·김보현 농림장관, 홍성철 정무·정소영 경제1수석·박진환 특보 등과 함께 본관 대통령 집무실 앞 등나무 아래에서 식사를 했다.

9시쯤에 식사가 끝나자, 대통령은 술이 센 비서관들과 “한 잔 더 하자”고 해서 한 시간 가량 막걸리로 대작했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한때 나라를 병들게 했어. 국회와 언론계는 지금 정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적당한 수준이라고 봐.

 서로가 더 규제하려고 하면 안 돼. 1975년도에 정권을 누구에게 넘겨 줄 것인가가 문제인데, 자칫 잘못하면 그 동안 쌓아올린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질까봐 걱정이야.

 나야 그때 그만두면 개인적으로는 편하고 명예로운 것이지.

 장관들 중에는 아직 소신이 없는 사람들이 있어.

 당에도 아직 문제가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어.

 어이 00 비서관 자네가 이 자리에서 장관들을 하나하나 평을 좀 해봐.”

“…”

“임자가 장관들 얘기하는 것은 고자질이 아니야.

그건 비서관 임무에 속하는 것임을 알아야 해.”

 

“김00 장관이 청운각에서 술을 먹다가 업자들한테 한참 공격을 받으니까 ‘내가 이거 하고 싶어합니까. 대통령이 하라니까 할 수 없이 하지요’라고 말할 정도로 소신이 없습니다”

“김 장관이 입장이 곤란하니까 내 이름을 좀 팔았겠지. 하하하!”

 

 

현장감독 같은 대통령

 

 

1972년 6월 20일

 

 

이날 하곡수매에 관한 지방장관 회의에 참석한 朴대통령은 내무부 지방국장이 砂防(사방) 사업과 造林(조림) 사업에 대해 현장 슬라이드로 보고할 때 일문일답을 하는데 토목공사장의 현장감독 같은 날카로운 지적이 계속된다.

 

 朴: 저 슬라이드 한 장 넘겨보시오.

 내가 조금 서라고 하면 서고, 불 좀 끄고, 가만 있어, 넘기라면 넘기고.

 이건 서울에서 춘천 가는 도중에 어디를 찍은 모양인데, 저런 상태를 우리가 두고 금수강산이니 무어니 하고 누구한테 큰 소리를 치고 자랑을 합니까?

 그 다음 넘겨요.

 저곳은 업자가 공사하느라고 파갔는지 전국에 가면 도처에 저런 상태요.

 

국장: 이것은 그 자리를 바로 손질해놓은 것입니다.

 

朴: 저 꼭대기는 다른 방법으로 해야지 만일 비가 와서 저곳이 와르르 무너지면 밑에까지 다 내려오지 않겠어요.

 또 다음.

 이곳은 뒤의 암석을 그대로 살렸는데....밑에는 자역석을 맞추어서 상당히 튼튼하게 됐는데, 다음. 암석이 떨어져서 내려오지 않을까?

 저런 데는 좋은 나무를 심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아카시아 같은 것을 심어서 자꾸 뻗어나가게 해서 덮고 사이사이로 바위가 노출되도록 하면 튼튼해지지 않을까?(下略)>

 

朴대통령은 경제 국방뿐 아니라 조림, 조경, 토목공사 등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수준의 안목을 갖고 있었다.

 

 그가 토목공사나 도시계획 및 조경 등에 대해서 스케치로 남긴 여러 도면들을 보면 사물을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대통령은 상황이나 사물의 핵심을 한 눈으로 잡아낼 수 있는 동물적인 능력의 소유자였다.

 박대통령은 헬리콥터로 전국을 돌아보면서 지도와 현장을 대조하는 것을 즐겼다.

 장교시절부터 독도법에 능했던 박대통령은 1970년대에 들어가면 전국의 큰 나무 한 그루까지 안다고 할 정도로 국토에 대한 완벽한 장악이 되어 있었다.

 그는 가끔 하늘에서 내려다 본 국토를 '내가 그린 그림을 보는 것 같애'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정과 국토개발의 세부 사항에 대한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파악능력에 있어서 朴대통령은 당대의 한국인들중 단연 1위였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도 그렇지만 박대통령의 경우에는 한국인들중 가장 두뇌가 우수하고 비전과 열정이 가장 뜨거웠던 사람이 권력자가 된 경우이다.

 대한민국의 기적적 발전의 결정적 요인은 두 천재형 지도자의 연속(30년) 등장이 아닐까.

 

 

'홍종철, 이석제 정도가 남아'

 

 

1972년 7월 1일.

 

 

저녁 9시 45분 당직 비서실로 내려온 대통령은 당직자와 한참 동안 얘기했다.

“송요찬 씨가 신병 치료차 일본 갈 적에 모든 편의를 봐주었지. 본인이 희망해서 군의관과 간호원을 따라 보냈어.

 그 뒤 송씨가 성우회(星友會)에 들러 이 사실을 장군들에게 전하면서 나의 은덕이 어떻다느니 하며 한참이나 칭찬을 했다고 하더군.

이때 동석했던 다른 장성들은 송 씨가 간 다음에 ‘지난날에는 대통령을 배신하더니 지금은 저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한다’고 빈정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어.

10년 전에 많은 사람들과 혁명을 같이 했는데 거의 모두가 도중에 흔들리거나 탈락해 버렸어.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은 홍종철과 이석제인 것 같아.

 혁명을 같이 한 그 사람들이 나와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면 내게 충고를 해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자기들 말을 듣지 않자 의견이 다르다면서 한마디 말도 없이 내 곁을 떠나는 것처럼 섭섭한 일은 없어”

 

당직 비서관은 이렇게 말했다.

 

“한번 뜻을 같이 했으면 윗분이 잘못된 길을 걸으시더라도 몇 번 되풀이해서 충고 말씀을 드리고, 그래도 달라지지 않을 경우에는 윗분과 헤어질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도 윗분을 따라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동양적 사고방식에서 말하는 의리인데, 요즘에는 그런 생각들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

 우리 국민의 도덕률에 대해서 회의감마저 가지게 되더군. 나는 10년 정치에서 그러한 경우를 당할 때마다 그런 것이려니, 하고 체념을 하게 되었어”

 

대통령의 표정은 쓸쓸하게 보였다.

 

 

국민이 반대하는 사건도 있어야 회담이 잘되는 거야

 

1972년 7·4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난 뒤 남북 적십자회담이 열리고 있던 어느 날. 북한 대표가 서울에 오기로 결정된 뒤, 대통령은 유혁인 비서 등과 함께 식사를 했다.

 

"서북청년회 사람들은 때리는 것도 잘하잖아. 왜,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에게 얘기해서 계란 좀 던지라고 해요. 국민들이 반대하는 사건도 있어야 회담이 잘되는 거야.”

 

영락교회 신도들은 북한의 적십자회담 대표가 서울에 올 때 던지기 위해 계란까지 준비를 했었는데, 이것을 정보부가 알고 사전에 막아 버려 실제로 계란 던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대군(對軍) 친서

 

 

다음 자료는 1972년 7.4공동성명 직후 박정희 대통령이 군 지휘관들에게 보낸 친서의 주요부분이다.

 朴대통령은 남북대화 무드 속에서 국군 지휘부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를 강조하여 설명하고 있다.

 남북무장대치상황에서 전개되는 오늘날의 대화 속에서 국군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시사(示唆)가 될 것 같다.

 

<(前略)이제 '대화 있는 대결'로 접어드는 이 시점에서 나는 국토방위의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 군지휘관 여러분에게 다음 몇 가지 사항을 특별히 강조하고자 합니다.

 

1. 북한공산주의자들과의 대결에 있어서 이제부터 시작되는 '대화 있는 대결'은 어느 의미에서는 지금까지의 '대화 없는 대결'보다도 오히려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새로운 시련에 직면하는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확고한 자신을 가지고 민족적 자각을 바탕으로 더욱 굳게 단결하여야 하겠습니다.

 만의 일이라도 '대화'가 곧 '평화'나 '통일'을 가져오는 것으로 착각하여, 동요하거나 안이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아니되겠습니다.

 자신과 자각과 단결로써 결집된 국민의 힘이 정부를 강력히 뒷받침해 주어야만 할 때인 것입니다.

 

2. '남북공동성명'의 발표가 우리 대한민국의 유일 합법적 정통성과 국가 기본 정책 등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더욱이 이 성명이 북한공산집단을 합법정권으로 인정한 것은 결코 아니며 '유엔 감시하에 토착인구 비례에 의한 총선거'라는 우리의 통일정책 기조가 바꾸어진 것도 아니고, 그들을 비방, 중상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우리의 정책에 하등의 변경이 있는 것도 아님을 똑똑히 알아야하겠습니다.

 

3.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통일노력의 성과에 대하여 조급하게 서두르거나 환상적인 기대를 갖는 것은 삼가야 하겠습니다.

 공동성명의 발표는 대화를 모색하는 첫 단계에 불과하며 그 성과여하는 북한공산주의자들이 과연 그들이 약속한 바를 성의 있게 행동으로 옮기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동태에 더욱 큰 경계를 견지하면서 각기 자기가 맡은 임무에 충실하여 내실을 강화함으로써 국력배양에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4.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고 해서 국군의 감축이나 유엔군 철수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유엔군의 한국주둔은 우리나라의 안전보장을 돕기 위해서 아직도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무력행사의 포기를 말만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실증할 때까지는 유엔군 철수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5. 이런 때일수록 군지휘관 여러분은 더욱 긴장하여 막하 장병과 더불어 대공(對共)경계를 철저히 할 것이며, 국방력 강화에 일각의 소홀도 있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항상 우리의 허점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우리의 방위태세에 만전을 기해줄 것을 거듭 당부하는 바입니다>

 

 

 

'대의(代議)제도란 미명하에 비능률 감수'

 

 

1972년 7월 17일

 

 

 이날 朴대통령에게는 제헌절 경축사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금명간 헌정을 중단시킬 조치를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던 그로서는 관례대로 헌법수호를 강조할 입장이 아니었다.

 

 이날 그는 헌정의 낭비적 요소를 비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헌정 제도를 운영해오는 과정에서 과연 대의제도의 이름으로 비능률을 감수했던 일은 없는지, 자유만을 방종스럽게 주장한 나머지 사회기강의 확립마저 독재라고 모함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민주주의가 마치 분열과 파쟁을 뜻하는 것으로 본의 아니게 착각한 일은 없었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민주제도를 형식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내실적 차원에서 짜임새 있고 능률적으로 운영해야 하고 이것이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지나놓고 이 대목을 읽어보면 새 헌정질서를 모색하겠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72년 8월 3일

 

 

박대통령은 기업은 사채를 신고하고, 빌린 모든 고리 사채의 상환조건을 '월리 1.35%에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의 새로운 조건으로 교체하라는 긴급명령을 내렸다.

 

 이는 '8.3 조치'로 알려지게 된다.

 이 조치로 해서 기업이 고리 사채의 부담에서 벗어나 체질이 건강해졌고 이듬해의 석유파동을 돌파할 수 있게 되었다.

 

 기업의 회생은 그러나 수많은 사채업자들의 희생을 딛고 이뤄졌다.

 이 8.3 조치는 미리 정보가 새면 사채회수 사태로 번져 경제질서를 파국으로 몰아갈 위험이 있었다.

 준비작업은 박대통령, 김정렴비서실장, 남덕우 재무장관, 김성환 한국은행 총재, 그리고 실무책임자인 김용환 비서실장 보좌관(뒤에 재무장관)만 알았다.

 

 

1972년 10월 6일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은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일본국 히로히토 청황내외의 초청으로 오는 11월 13일부터 18일까지 6일간 일본을 공식방문한다'고 발표했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며칠 뒤 경호 선발대를 데리고 준비차 도쿄로 날아갔다.

 그는 비상조치에 대한 낌새를 전혀 차리지 못했다.

 유신선포를 안 것도 도쿄에서였다.

 비상조치의 발표날짜를 10월 17일로 정하는 회의 때 김종필 총리는 대통령의 방일 뒤에 하자고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최초의 국빈방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1972년 10월 유신선포 전야

 

 

10월 유신선포의 실무작업은 이후락이 지휘하는 정보부 팀이 맡고 청와대의 참모들과 신직수 장관의 법무부 팀이 거들었다.

 김정렴 비서실장, 최규하, 홍성철, 유혁인, 김성진 같은 이들이었다.

 최특보는 외국의 헌정 제도를 연구했다.

 

 김정렴 실장에 따르면 박대통령이 특히 관심을 보인 것은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이 운영하던 제도였다.

 인도네시아 군은 헌법에 의하여 정치참여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정원 500명인 국회의원중 100명은 대통령이 현역군인으로 임명한다.

 수하르토 대통령이 소속된 여당과는 별도로 인도네시아 국민협의회(MPR)가 대통령을 선출하고 헌법제정 및 국책사업을 확정한다.

 대의원 정원의 절반은 국회의원이 겸임하며 나머지 절반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박대통령이 유신선포 직전에 확정한 유신헌법의 핵심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국가기관의 정상에 놓고 여기서 대통령을 간선한다는 것이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법안을 검토할 때 박대통령은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대통령 후보의 정견발표와 찬반토론이 없는 상태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한 것이어서 이는 선출이 아니라 추대가 아닌가라고 그는 곤혹스러워했다.

 

 심의과정에서 이후락의 중앙정보부 팀은 남북대화를 물고들어가면서 강하게 나왔다.

 그들은 북한측에 대하여 한국의 국론이 단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라도 압도적인 다수로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대통령은 꺼림칙하게 생각하면서도 이 건의를 받아들였으나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김정렴 증언).

 

 

하비브: '막을 방법은 없지만...'

 

 

1972년 10월 16일

 

 

이날 저녁 6시. 김종필 국무총리는 필립 하비브 주한미국 대사에게 내일 박대통령이 발표할 비상조치의 내용을 통보했다(같은 통보는 주한일본 대사에게도 이뤄졌다).

 

 김총리는 이 내용을 앞으로 24시간 비밀에 붙여줄 것을 요청했다.

 하비브는 수시간 뒤 미 국무성으로 긴급전문을 보냈다.

 

<이 비상조치는 박대통령에게 적어도 12년을 더 현직에 머물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이 기간중 반대와 불만은 더욱 약화될 것이다.

 만약 이 조치가 시행된다면 한국은 완전한 권위주의 정부로 변모할 것이다.

 박정권이 북한과 대화하는 데 국내기반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조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돈 오버도퍼 전 워싱턴 포스트 기자가 쓴 '두개의 한국'이란 책에는 하비브 대사가 대사관측이 박대통령의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미리 얻지 못한 데 대하여 화가 났었다고 썼다.

 그는 박대통령이 비상조치의 발표일을 잡은 것도 미국을 바보로 만들기 딱 좋게 한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 3주 전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헌정질서를 중단시켰지만 미국은 개입할 수 없었다.

 

 마르코스와 박정희는 닉슨 대통령이 재선을 노리고 선거전에 돌입해 있는 시점을 잡았다.

 닉슨은 월남전 휴전협상에 골몰하고 있을 때였다.

 닉슨은 선거전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는데 마르코스나 박대통령의 비상조치에 공개적으로 개입하여 말썽거리를 만들 여유가 없었다.

 

 하비브는 전문에서 '가장 강경하고 즉각적인 조치만이 박대통령의 예정된 비상조치를 막을 수 있지만 다음 몇 시간안에 그런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 미국 정부의 의무는 아니다.

 그렇지만 박대통령은 이번 조치로써 그와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큰 문제를 일으킨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이번 조치에 대해서 논평할 때는 한국의 국내문제에 대해서 무관함을 명백히 하면서도 극히 우회적 표현을 해야 할 것이다'고 건의했다.

 

 미 국무부는 하비브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 대신 박대통령에게는 다음과 같이 항의하도록 훈령했다.

 

<한국 정부가 이처럼 장기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미국 정부와 의견 교환을 하지 않은 것은 미국이 역대 한국 정부, 특히 현정부에게 제공했던 지원과 희생을 생각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미 국무부는 또 하비브에게 지시했다.

 

<만약 귀하가 미국은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이것은 국내문제이므로 결정권은 박대통령에게 있다'고 답하라>

 

미 국무부는 비상조치에 즈음한 박 대통령의 성명서가 美中 화해와 이에서 비롯된 국제정세의 유동화(流動化)를 비상조치의 한 이유로 지적하고 있는 데 대해서 크게 우려했다.

 윌리엄 로저스 국무장관은 김동조 주미한국대사에게 항의하여 이 대목을 빼도록 요청했다.

 

 

CIA는 알았다

 

 

 당시 미국 CIA 지부장은 존 리차드슨이었다.

 그는 1969년에 부임하여 73년까지 근무하면서 3선개헌, 대통령 선거, 남북회담, 유신선포를 경험했다.

 부임할 때 그는 이미 56세였다.

 대머리인 그는 허리가 꾸부정하여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그는 2차 대전 때 이미 CIA의 전신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에 몸담았던 베테랑 정보맨이었다.

 CIA 부장을 지낸 윌리엄 콜비, 리차드 헬름즈와는 친구 사이였다.

 그는 그리스 정보기관을 조직, 훈련시켜 주고 자금을 대주는 일에 관여했다.

 리차드슨은 1960년대 초반 사이공 주재 CIA 지부장을 지냈다.

 

 그는 고딘디엠 대통령뿐 아니라 그의 동생으로서 정보기관장이던 고딘누와 친했고 反고딘디엠 장성 그룹과도 연락관을 두고 있었다.

 

 당시 미국 대사인 헨리 캐보트 롯지가 고딘디엠 제거 공작을 시작하자 리차드슨은 이에 반대하다가 롯지의 요구로 본국에 소환되었다.

 

 미국이 불만에 찬 장성들을 지원하여 일으킨 고딘디엠 제거 쿠데타는 고딘디엠과 동생 고딘누의 피살을 불렀고 월남의 지도력 불재를 초래하여 미국이 월남전에서 패배하는 원인을 만들었다.

 

 리차드슨 지부장은 하비브 대사의 주장과는 달리 이후락 정보부장이 지휘하던 유신 준비작업을 미리 알았음이 확실하다.

 

 박대통령, 이후락, 그리고 한 군 정보기관장이 청와대에서 만나 비상조치에 대한 협의를 한 며칠 뒤 리차드슨 지부장은 군 정보기관장을 만나러 왔는데, 토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처럼 물었다고 한다.

 

 이후락 정보부장은 정홍진과 자신이 판문점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갈 때 리차드슨을 통하여 미리 미CIA에 통보하여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1950년대 주미대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할 때부터 미국 정보기관과 친했고, 자신의 출세에 있어서 그쪽으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던 이부장이 리차드슨 지부장을 바보로 만드는 보안작전을 쓴 것 같지는 않다.

 

 김형욱 전 정보부장은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있으면서 리차드슨 지부장과 자주 만났다.

 리차드슨은 끈질기게 '박대통령은 결국 총통제를 강행할 것으로 보는가'라고 물었다.

 

 그 며칠 뒤 이후락 부장이 부하를 김형욱에게 보내 '왜 총통제 이야기를 발설하고 다니느냐'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리차드슨은 이부장에게 김형욱의 이름을 인용했던 것 같다(김형욱 회고록).

 하비브가 유신조치에 대해서 하루 전까지도 몰랐다고 말한 것은 공식통보를 받지 못했다는 의미일 뿐이다.

 

 

'호네누키곤냐쿠다'

 

 

1972년 10월 17일

 

 

이날 아침 박대통령은 최규하 박진환 등 특별보좌관들을 서재로 불러 저녁에 발표될 비상조치 발표문을 읽고 있었다.

 

 이후락부장이 들어오더니 '미국 대사관에서 발표문 중 '미국과 중공의 접근'이 이번 조치의 한 원인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삭제해달라고 부탁합니다'라고 보고했다.

 

'내가 뭐 거짓말 했나? 미국놈들이 안그랬으면 내가 뭐 답답해서...'

김정렴 비서실장도 '각하, 그 대목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래, 빼줘!'

 

 좀 있으니 일본 대사관에서도 비슷한 주문이 들어왔다.

 朴대통령은 '그것도 빼줘!'라고 말하더니 '호네누키노곤냐쿠다'(뼈가 없는 곤냐쿠다. 곤냐쿠는 구약나물의 지하뿌리를 반죽한 다음 끓는 석회휴와 섞은 뒤 물에 넣어 익힌 식품)라고 중얼거렸다.

 

유신선포로 알려진 1972년 10월 17일의 대통령 특별선언 비상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정을 중단시키고, 국회를 해산하며,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열흘 이내에 새 헌법안을 공고하며, 그 한 달 이내에 이를 국민투표에 붙여 확정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이날 朴정권은 전국 비상계엄도 선포했다.

 며칠 뒤 새 헌법안도 계엄하에서 찬반토론이 금지된 가운데 국민투표에 붙여졌다. 이는 사실상의 쿠데타였다.

 

 나는 입사 2년짜리 기자로서 이 뉴스에 접했을 때 그야말로 느닺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요사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북한군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갑자기 국회 해산이라니?

 

 5.16 군사혁명은 윤보선 대통령마저 '올 것이 왔구나'라고 할 정도였고 서울시민의 과반수가 혁명을 지지한 것으로 여론조사가 나올 정도로 외부의 혼란이 무르익은 가운데서 일어났었다.

 

 10월 유신은 그런 가시적인 요인이 전혀 감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행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 이건 박정희의 독재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유신에 대한 이런 선입견이 그 후 7년간 朴정권을 따라다녔다.

 

 이날 朴대통령이 읽은 특별선언문에도 왜 이런 엄청난 조치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었다.

 진행중이던 남북대화에 대비한 한국의 체제 정비 필요성, 파쟁을 일삼는 정당과 국회에 대한 불신,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화만으로써는 헌정중단의 당위성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朴대통령의 다른 연설과 비교해서 이 연설은 내용상 힘이 없었다.

 다만, 끝 부분의 한 줄이 그의 비장한 각오를 드러낼 정도였다.

<나 개인은 조국통일과 민족중흥의 제단 위에 이미 모든 것을 바친 지 오래입니다>

 

 

야당의원들 군부대로 연행, 고문

 

 

 

 이날 정부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사령관은 노재현 육군참모총장.

 

 그 직후 박대통령은 육군보안사령관 강창성 소장을 불렀다.

 대통령은 '이 친구들을 잡아넣고 철저히 조사해'라면서 명단을 건네주었다.

 이세규, 조윤형, 조연하, 이종남, 강근호, 최형우, 박종률, 김한수, 김녹영, 김경인, 나석호, 김상현, 홍영기, 윤길중, 이기택, 박한상, 김동영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강창성은 '박대통령이 한 사람씩 짚어가며 문제점과 비리를 이야기했다.

 나는 돌아와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 다시 청와대로 들어가 윤길중, 이기택, 박한상, 김동영, 김상현, 조윤형, 이세규는 온건하니 제외해 주십시오'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이세규하고 조윤형은 절대로 안돼'라고 잘랐다. 김상현은 그대로 넘어갔다가 한달 후 유신비판 발언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군부대로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받은 이 야당의원들은 주로 김영삼 김대중의 측근이었거나 박대통령과 직접 관련되는 문제를 국회에서 폭로한 이들이었다.

 

 비리혐의라고 했지만 박정희의 사감이 많이 개재된 수사지시였다.

 수사관들은 '김대중의 자금출처와 조직계보를 대라'는 식으로 다그쳤다.

 

이때 일본에 나가 있던 김대중은 국내로부터 들어온 정보를, 자기 수첩의 1972년12월 19일자 난에다가 이렇게 적었다.

 

<김상현-너무 아파서 만원까지도 자백. 나의 정치 자금 캐는 것. 안방까지, 부의금 명단. 운전사 고문. 조윤형 태도 의연: 나에게 격려. 옥두-제일 강, 이태구씨 전나 고문>

 

 

재떨이에 수북한 담배꽁초

 

 

1972년 10월 21일

 

 

 朴대통령은 사이공에서 귀임한 하비브 주한 미국 대사를 면담했다.

 하비브 대사는 사이공에 가서, 월남 휴전안을 가지고 와 월남의 티우 정부를 설득하고 있던 키신저를 만나고 온 뒤였다.

 

 하비브는 朴대통령에게 막바지에 접어든 월남 휴전회담의 진전 상황을 보고했다.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고 있던 朴대통령은 이런 요지의 우려를 표명했다.

 

'휴전안에 침략자인 월맹군의 철수는 규정하지 않고 외국군의 철수만 규정한 것은 불공평하다.

 월맹과 베트콩과 월남을 묶는 연립정부안의 성격이 애매하다.

 국제감시에 대한 규정도 불안전하다.

 따라서 이 안은 공산당의 침략을 법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되어 월남정부를 약화시키고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이고 티우 대통령이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공산당에 대해서는 강한 힘만이 그들로 하여금 약속을 지키게 할 수 있다.

 만약 이 안대로 휴전이 이뤄지면 월남은 1년도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다'

 

 

1972년 10월 23일

 

 

 주월남 한국 대사 유양수는 본국의 훈령으로 일시 귀국하여 일차로 박대통령에게 월남 휴전협상건을 보고 올렸었다.

 

 이날 새벽 김정렴 비서실장으로부터 유대사에게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전갈이 왔다.

 오전 9시 대통령 집무실에서 박대통령은 하비브로부터 통보받은 휴전안을 유대사에게 보여주면서 자신의 걱정을 티우 대통령에게 전달할 것을 지시했다.

 

 유대사는 박대통령이 하비브로부터 받은 휴전안이 자신이 그 며칠 전에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첩보 내용과 너무 달라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다.

 

 유신선포 7일째인 박대통령은 무척 수척해보였다.

 그는 연신 담배를 피워가면서 두 시간 반 동안이나 걱정과 다짐이 오고가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민주주의도 좋고 자유도 다 좋지만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미국의 국론이 저렇게 분열되어 수습을 못한다면 미국에 대한 자유세계의 신뢰는 떨어질 것이다.

 우리는 결코 안보를 미국에만 의존해선 안된다.

 월남을 보라!

자주국방을 하려면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선 국력의 낭비를 막아야 한다.

 효율의 극대화, 국력의 조직화가 유신선포를 한 이유이다'

 

박대통령은 자기 말에 취해서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대통령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유대사가 대통령 집무실을 나올 때 보니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1972년 10월 27일

 

 

유신(維新)이라고 작명

 

 

 

이날 박대통령이 발표한 '헌법개정안 공고에 즈음한 특별담화문'은 유신선포를 만들어낸 자신의 정치 철학을 당당하게 밝힌다.

 

<남의 민주주의를 모방만 하기 위하여 귀중한 우리의 국력을 부질없이 소모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몸에 알맞게 옷을 맞추어서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 가장 알맞는 국적 있는 민주주의적 정치 제도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서 신념을 갖고 운영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헌법 개정안은,능률을 극대화하여 국력을 조직화하고 안정과 번영의 기조를 굳게 다져나감으로써 민주주의 제도를 우리에게 가장 알맞게 토착화시킬 수 있는 올바른 규범임을 확신합니다>

 

朴 대통령은 이날 담화문에서 유신체제라고 불리게 될 새 제도를 '능률적인 민주적 정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날 국무회의는 사실상의 쿠데타인 이번 조치를 '10월유신으로 개념화하여 모든 유신작업을 진행할 것'을 의결했다.

 

 최규하가 좌장으로 있던 특별보좌관 일동이 그렇게 건의했던 것이다.

 이 작명에 주로 관계했던 분은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했던 철학자 박종홍 임방현 두 특보였다.

 중국의 고전인 詩經에 나오는 '周雖舊邦(주수구방)이나 其命維新(기명유신)이라'는 문구(주 나라는 오래된 나라이나 국정혁신으로 그 생명력이 새롭다)에서 '유신', 또 공자가 편찬한 서경에 나오는 '咸與維新'(함여유신, 다 함께 참여하자)에서 '維新'을 따왔다.

 

유신이라 하면 한국인에게는 일본의 성공한 근대화 개혁인 '명치유신' 이 너무 강하게 기억되어 아무리 중국의 고전을 들먹여도 일본적인 것, 무단적인 것, 따라서 비민주적인 것과 연상되었고 이것이 일본 육사출신 박대통령의 이미지와 중첩되었다.

 

 유신은 한국인의 가슴속에 공통된 가치관으로서 뿌리내리기에는 너무 고루하고 딱딱한 명사였다.

 유신의 모토인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는 박대통령의 뛰어난 작명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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