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헌 정태수의 서예이야기 7
초서의 최고봉 장지(張芝)
동아시아 유학에서는 인간의 등급을 성인(聖人), 현인(賢人), 선비로 가름한다. 성인은 이상적 인간형으로 요임금과 순임금 등이 이에 해당되고, 현인은 공자의 제자 안연과 같이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며, 선비는 현인이 되기를 갈구하는 사람을 말한다. 서예에서도 각 서체의 최고봉에 이른 사람을 성인으로 불렀다. 장구한 서예 역사에서 첫손으로 손꼽히는 사람이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이다. 그렇다면 글씨의 꽃인 초서의 성인은 누구일까. 초서의 최고봉으로 평가되는 서예가는 초성(草聖)으로 불리는 장지(張芝, ?~192)이다.
장지는 후한 시대의 서예가로, 자가 백영(伯英), 고향이 돈황으로 지금의 감숙성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장환(張煥)으로 태상경(太常卿)을 지낸 후한의 명신이었다. 유년기부터 학문에 두각을 나타낸 장지를 본 조정의 관리들이 과거제도인 유도(有道)를 통해 그를 불렀으나 아버지의 명성으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 그를 가리켜 진정한 도가 있다면서 장유도(張有道)라고 일컬었다.
장지는 젊은 나이에 이미 초서로 명성을 얻어 대적할 상대가 없었다. 당나라 손과정도 ‘서보(書譜)’에서 “예로부터 글씨 잘 쓰는 사람으로는 한‧위시대의 종요와 장지가 제일 뛰어났다”고 말할 정도로 장지의 초서에 대해 높게 평가하고 있다.
초서는 매우 거칠고 단정하지 못하다는 의미인 ‘초솔(草率)’과 흘려서 쓴 속도감 있는 서체라는 의미를 포괄하여 초서라는 명칭을 얻었고, 예서와 해서의 규격화된 점획을 간이화하여 신속하게 쓰기 위한 목적으로 등장했다. 일반적으로 초서는 장초(章草), 금초(今草), 광초(狂草)로 나뉜다. 장초는 진나라 말에서 한나라 때 예서를 흘려 쓰면서 유행하여 장초로 불렸고, 금초는 후한시대 시작하여 동진시대에 유행한 초서체이며, 광초는 당나라 때 장욱이나 회소와 같이 미친 듯이 휘갈겨 쓴 초서체를 말한다. 장지는 초서 가운데 장초에 빼어났으며 조예도 깊었다. 그는 최원과 두도의 필법을 배운 뒤 장초의 점과 획, 파책(波磔, 오른쪽 아래로 길게 삐치는 필획)을 개조하여 금초를 창안했다.
당나라 장회관은 장지의 초서에 대해 “글씨의 형세는 일필휘지로 이루어내면서 우연히 연결되지 않은 것이 있다하더라도 혈맥이 끊이지 않았고, 연결된 글씨는 행마다 기맥이 서로 통한다”고 평했다. 또한 서예의 성인인 왕희지도 “장지의 초서에는 내가 미치지 못하지만 내가 만일 장지처럼 정교하고 익숙해질 정도로 연못의 물이 모두 먹물로 변하도록 연습을 하였다면 반드시 장지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초서의 최고봉으로 인정했다.
장지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면, 글씨쓰기를 좋아한 장지는 낮에는 손가락으로 땅에 연습하고 밤에는 이불 위에 글씨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아내가 새로 준비한 비단옷을 종이로 착각하여 새까맣게 글씨를 써서 옷을 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날마다 글씨연습을 쉬지 않고 반복하여 집 앞 연못에 벼루와 붓을 씻는 바람에 파란색 연못물이 마침내 새까맣게 변하였다고 한다.
현재 장지가 쓴 글씨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몇몇 자료를 통해 그의 서품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 장지는 장초를 바탕으로 금초를 선보이면서 자연스럽고 오묘한 변화를 가미하였다. 이런 장지의 성취를 두고 양 무제는 “장지가 글씨를 잘 쓴 까닭은 배움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상찬했다.
장지의 초서를 두고 삼국시대 위나라 서예가 위탄(韋誕)은 초성(草聖)으로 추앙하였고, 후대 사람들도 초성으로 부르게 됐다. 장지가 지었다는 ‘필심론(筆心論)’ 5편은 없어졌고, 송나라 때 편찬된 ‘순화각첩’에 그의 묵적이 전한다. 훗날 왕희지를 비롯한 여러 명가들도 장지의 영향을 받았으며, 오늘날까지 초서명가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2023. 10. 26. 서라벌신문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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