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의 승천
왕하2:11“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신앙을 갖지 않았던 칼 융은 어린 시절 지하 계단으로 연결된 예배당에 들어갔다가 제단 중앙에 세워진 거대한 돌기둥 우상을 보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 꿈은 당시의 교회상 뿐만 아니라 오늘의 교회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님 대신에 세상의 지식과 권력과 부가 교회 제단위에 올려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아합왕이 북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절 이스라엘은 바알 우상숭배에 깊이 물들어 갔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 엘리야는 왕비 이세벨의 칼날을 피해 호렙산 동굴로 피신하고는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왕상19:10“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신앙을 위해 자기 목숨을 걸고 투쟁했습니다. 풍요와 번영의 신 바알을 따르는 선지자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주의 제단을 헐고 바알의 제단을 쌓고 있습니다. 믿음의 이름으로 곳곳에서 우상숭배가 벌어지는 이 세상에서 엘리야처럼 유별난 신앙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6: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부활 신앙이란 관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죽게 하는 실존적인 삶의 체험과 변화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죄를 대속하는 십자가이면서 동시에 우리 옛사람을 못 박혀 죽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이 두가지 사건은 불가분리의 사건입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이 단지 우리를 죄사함받게 하는 죽음으로 그치고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는 죽음이 못 된다면 우리는 우상숭배에 떨어지고 맙니다. 주님의 제단위에 주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앉아있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롬6: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만이 부활신앙을 갖습니다.
엘리야의 승천은 예수님의 승천을 예표하는 승천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시고 얼마든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살리시려 십자가의 길, 그것도 가장 혹독하고 쓰라린 십자가의 길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없이는 우리를 위한 속죄함도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자신이 죽는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승천과 재림이라는 종말론적 시간에 살고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꼭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더딘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회개와 주님께 충실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오랜 참으심입니다.
<카라마초프카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대심문관처럼 오늘 이 순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오심을 거부하며 지금 자기가 하는 일에 당위성을 부과합니다. 언제라도 당장 모든 일에 손을 떼고 다시 오시는 주님을 환영하며 기뻐하는 종말론적 신앙 자세가 필요합니다.
두 천사의 말처럼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실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지키는 일에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습니다.
계14:13”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의 자랑도 목회의 성공도 아닙니다. 다만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순교자적인 삶입니다. 24. 9. 14 장기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