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25-34)
성공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시간 관리를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때보다 바쁘고 분주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티븐 코비스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에서 “소중한 일을 먼저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 바쁘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긴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을 먼저 하셨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있는 곳을 찾아 몰려 왔지만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여 산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사귐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청을 다 들어주지도 않으셨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인생의 우선순위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좋지만 중요한 일을 우선적으로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찰스 헴멜이 쓴 ‘긴급한 일의 횡포’라는 책에서 하루에 30시간이 있어도 우리들의 삶에 끝내지 못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쌓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간이 흘러도 일은 계속 쌓이게 되고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헴멜은 결국 긴급한 일들을 ‘하나의 폭군’으로 간주합니다. 폭군이 사람들을 죽이듯이 긴급한 일이 우리를 영적으로 죽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긴급한 일과 중요한 일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삶의 본과 약속을 통하여 긴급한 일에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말씀과 기도로 보내는 경건의 시간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흐트러진 관계를 정화시켜 줍니다. 오늘 해야 할 일과중에 우선순위가 정하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지혜입니다.
본문 33절, 다시한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삶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우선순위를 따른 삶을 살 수 있습니까?
1.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는 염려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 예수님께서 무려 다섯 번이나 염려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5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이를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에 염려가 많은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수많은 염려를 달고 삽니다. 성경에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하는 말이 모두 몇번 나오는 줄 아십니까? 365번이나 나옵니다. 왜 365번이나 나오겠습니까? 1년 365일 걱정없는 날이 없기에 365번 근심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말씀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날마다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까? 우리가 염려를 중단해야 하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계십니다. 첫째는 아주 실제적인 이유입니다. 그것은 염려 그 자체가 우리의 영혼을 마비시키기 때문입니다.
(눅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진다, "둔하여진다"는 말은 '감각을 잃어버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감각을 상실하고 무력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무서운 일입니다. 염려는 영혼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지나치면 영적으로 무력해질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치명적인 위험에도 빠지게 됩니다.
신앙경력이 깊고, 교회봉사를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할지라도 늘 염려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영혼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본문 27절을 보십시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염려한다고 이미 다 자라버린 키를 자라게 할 수 있습니까? 전혀 의미없는 걱정, 해봐도 유익하지 않은 염려속에서 우리 인생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본래 염려란 단어는 헬라어로 ‘메림나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은 메리조라는 말과 누스라는 말이 결합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메리조, 나누다, 갈라지다는 뜻이고 누스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염려한다는 말은 마음이 갈라지다, 분리시키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갈라지면 어떤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일에 집중력이 떨어지게 되면 우리가 기대하는 좋은 결과를 생산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갈라진 마음, 그 마음에서 어떤 생산적인 일을 기대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또 한 가지는 신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염려를 극복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염려는 사실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한다면 어떠한 상황이 다가와도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니까 염려에 사로잡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중에 얼마나 염려가 많았던지 불평과 원망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저들의 불신앙은 10번이나 큰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언하십니다. (민 14:22-23)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을 가던 이스라엘 1세대들은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 갈렙 외에는 한 명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염려가 이렇게 그 사람들을 망치는 죄악입니다. 오늘 본문 31절의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의식주의 문제, 이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그 누구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의식주는 불신자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관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관심을 가진 것 자체는 전혀 잘못이 아니지만, 문제는 그것에 대해 염려에 빠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믿지않는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내 능력의 한계를 생각하면 불안하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갑자기 어려운 일이 다가오면 당황스럽고 염려가 더 많아지고 두려움에 빠져 걱정을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이 걱정하고 염려한다면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절을 보면 매우 중요한 도전을 하십니다. (32절)"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하는 것 때문에 염려하고 그래서 방황하는 인생, 그렇게 삶을 사는 것은 이방인들의 삶의 모습이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된 너희가 저들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뭔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염려거리는 기도거리입니다. 기도가 믿음인 것입니다. 염려는 그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바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평강을 가져다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염려하는 여러분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염려와 두려움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믿음은 모든 염려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느 때든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염려거리가 생기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앞에 나아와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염려를 극복하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올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시니까 염려가 많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요 14:1)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렇습니다.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이 사망과 죄악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환경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염려하지 않고 인생의 우선순위를 추구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 모든 역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원자이십니다. 이 모든역사를 주관하시고 내 인생도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그의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 그분은 내 곁에서 동행하시고 나를 지키시고 돌보십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전능성을 우리가 참으로 믿는다면 왜 걱정합니까? 왜 염려합니까? 결국 우리가 염려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말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아주 신뢰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하나님을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정신 의학자가 환자들의 염려를 분석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다. 그러니까 96%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것이다.". 염려는 한마디로 말하면 쓸데없는 불신앙에서 온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베드로가 우리에게 이런 권면을 하지 않았습니까?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무슨 얘기입니까? 주님이 돌보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면서 깨달은 진리는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요동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신실하신 아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사도가 권면합니다. "여러분,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십시오. 주가 돌보십니다. 주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는 살아계십니다. 그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가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가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이것이 베드로의 권면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주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공중에 나는 새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저들을 책임져 주고 그들에게 주어진 기간만큼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그 새보다 귀한 존재가 아닙니까? 저 들의 백합화를 보십시오. 사실 본문의 백합화라는 것은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원문에서는 잡초라는 뜻입니다. 들에 핀 저 잡초같이 아무것도 아닌 풀도 창조주 하나님이 돌보시고 가꾸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기위해서 주께서 창조하신 고귀한 피조물인 사람을 주께서 책임져주시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그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30절)“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는 것은 아셨습니다. 그러나 염려하는 이유, 걱정하는 이유, 그 염려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이유, 인생의 초점이 분명하지 못하고 당당하게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작아서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 하루의 삶에 부딪혀 온 폭풍우, 풍랑 앞에 서서도 "역사의 주인되시고 삶의 주인되신 내 하나님을 제가 믿습니다"하는 신뢰하는 이 믿음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까? 인생의 초점이 분명해지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리고 내 삶이 당당한 승리요 영광이기를 소원하십니까?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창조자 여호와를 신뢰하라. 구원자 예수님을 신뢰하라, 주권자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그 하나님을 신뢰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3.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먼저 구할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죽은 다음에 가는 천당입니까? 우주의 어느 구석쯤에 있는 거룩한 공간입니까? 아닙니다. ‘나라’라 할 때 우리는 어떤 공간이나 땅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헬라어 ‘바실레이아’를 번역한 말로서 ‘통치ㆍ다스림ㆍ지배’를 의미합니다. ‘나라’는 공간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상태’에 대한 개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너를 통치하시게 하라, 하나님이 너를 다스리시게 하라”는 말입니다. 세상이, 욕망이, 쾌락이, 권력이, 고정관념이, 감정이, 상처가, 좌절이, 절망이, 과거가, 죄가 너를 지배하게 하지 말고, 하나님이 지배하시게 하라!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을 다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삶에 대한 염려 때문에 밤잠을 설치지는 않습니까? 혹시 마음의 상처 때문에 허구한 날 우울하고 슬픈 감정 속에서 지내지는 않습니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 때문에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린 시절부터 충족되지 않은 욕구 때문에 늘 마음 한 구석이 텅빈 것 같지는 않습니까? 이 세상의 헛된 풍조와 철학이 여러분을 다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매순간 하나님과 하나님 이외의 것 사이에서 선택과 결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염려 대신에 신뢰와 확신을, 어두운 감정 대신에 거룩한 빛을, 내 뜻대신에 하나님의 뜻을, 헛된 풍조와 철학 대신에 복음적 가치관을 선택하고 그것을 따라 살 것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이론적이며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삶의 현실과 관계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통치해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나를 다스리고 있습니까?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 순간 속에서도 염려를 주께 맡기고 주의 다스림, 주의 통치를 구하고 있습니까? 주께서 나를 다스리시고, 주께서 나를 인도하신다면 무엇이 걱정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통치하시는 삶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기준이요 표준이란 뜻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잣대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우리의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로 재어보아야 하며 하나님의 기준으로만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기준이 바로 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란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계시해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구하셨던 예수님처럼 십자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여러분의 삶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입니까?
오늘 나를 위협하고 있는 염려와 걱정에도 불구하고 내 생의 주인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오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이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십시오. 지금까지 내 뜻대로 살아왔다면 이제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십시요. 하나님께 결단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는 염려를 주께 맡겨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진짜 믿음은 염려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삶을 통치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염려거리가 있으면 하늘 아버지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앞에 엎드려 기도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선순위를 바로 하는 것이 신앙의 지혜이요. 진정한 믿음의 역사인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입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역사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신 것을 확신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소중한 기회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