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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칼럼] 영화 ‘원 세컨드’ - 2020년 감독 장이머우
1초의 무게를 체감하는 삶
지구의 자전 시간은 완벽하게 일정하지 않습니다. 지구의 내핵과 외핵, 바다, 대기 등의 움직임에 따라 항상 약간씩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한편 공식적인 국제 시간 측정 방식에 사용되는 원자시계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고 불변합니다. 따라서 지구의 자전과 원자시계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 그 차이를 보정해야 합니다. 국제지구자전좌표국(IERS)은 두 시간 체계 사이의 차이가 0.9초 이상이 되면 ‘윤초’를 적용해 인위적으로 시간 오차를 해소합니다. 윤초가 적용되는 해에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을 감싸는 시간에 1초가 더해지거나 빼질 수 있습니다.
눈 한번 깜박할 새, 혹은 한 번의 들숨과 날숨이 교차하는 순간 정도인 1초는 너무나도 미약하여 금방 사라지고 말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1초의 무게를 우주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 무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집니다. 적도를 기준으로 시속 1,660km인 지구 자전 속도의 결과로 나의 삶을 아우르는 시간이 1초씩 늘거나 줄 수 있다는 사실처럼 말입니다.
거장 장예모 감독의 영화 <원 세컨드>는, 1초라는 시간에 담긴 무게를 딸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에 비추어 그립니다. 1960년대 중국, 영화 시작 전 상영되는 뉴스 영상에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딸의 모습이 등장한다는 소식을 들은 장주성(장역 분)은 두 달에 한 번씩 영화를 상영하는 외딴 마을의 영화관으로 향합니다. 영화관으로 향하는 여정 중에 마주한 필름 도둑 류가녀(류 하오춘 분) 사이의 인연, 영화 필름이 훼손되자 온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필름을 복구해내는 과정, 어렵사리 상영되는 영화를 감상하게 되자 행복에 겨워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 영상 속에서 단 1초 동안 등장하는 딸의 모습을 찾아내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의 모습 등이 뿜어내는 극적인 분위기가 영화를 마주하는 관객의 호흡을 가쁘게 합니다.
주님의 공현은 주님께서 몸소 인간의 시간 안에 종속되셨음을 공식적으로 알립니다. 시간의 창조자로서 시간을 초월한 주님께서 인간 구원을 위해 인간이 짊어진 시간의 무게를 몸소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성탄과 공현을 기념하며 주님께서 몸소 짊어지신 시간의 무게를 가늠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늠은 우리의 삶을 둘러싼 시간을 우리가 더욱 무게감 있게 마주할 수 있도록 이끕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쉼 없이 흐르는 1초의 시간을 체감해봅니다. 별다른 감흥 없이 사소하게 흘려보냈던 시간이 극중 영상 속 딸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는 장주성의 모습으로 말미암아 훨씬 더 묵직하게 체감됩니다. 그렇게 영화 <원 세컨드>를 통해서 제 삶을 아우르는 1초의 시간을 지구 자전에 영향을 끼치는 자연현상의 무게처럼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유로 우리와 같이 시간의 무게를 체감하며 1초의 시간을 인식하셨을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보게 됩니다.
[영화칼럼] 영화 ‘본즈 앤 올’ - 2022년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사랑 깊은 펠리칸
미사 중에 사제가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여 재현함으로써 제대 위에 놓인 빵과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축성됩니다. 이렇게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외적인 형태는 그대로 남지만, 그 실체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인 ‘성체’와 ‘성혈’로 변화된다고 교회는 가르치는데, 이를 ‘실체변화’라고 합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식 중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신자들이 나누어 먹고 마신다는 이유로 식인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에서 드러나듯 교회는 실체변화를 통해서 당신의 살과 피를 끊임없이 나누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먹을 것이 떨어지면 자신의 가슴살을 떼어 새끼에게 먹인다는 어미 펠리칸에 빗대기도 했습니다.
카미유 드 안젤리스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 <본즈 앤 올>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오해받았던 ‘카니발리즘(cannibalism, 동족 포식)’을 표방한 작품입니다. 영화는 주인공 매런(테일러 러셀 분)을 중심으로 살기 위해서 사람을 먹는 ‘이터(eater)’들, 즉 본능적으로 식인에 대한 허기를 느끼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매런은 선천적으로 식인의 욕구를 지녔습니다. 매런의 아빠는 그런 딸의 욕구를 억누르고 딸이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는 조력자였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매런의 곁을 떠납니다. 그렇게 홀로 남게 된 매런은 오래전 자신을 떠난 엄마를 찾아 길을 나서게 됩니다.
엄마를 찾아 나서는 여정 중 매런은 자신과 같은 이터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중에서 리(티모시 살라메 분)는 매런에게 특별한 존재로 다가옵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매런과 리는 누군가를 해치지 않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삶, 정처 없이 떠돌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매런과 리에게 찾아온 영화 속 결말은 영화 <본즈 앤 올>이 카니발리즘을 표방한 이유를 상기시켜줍니다. 더불어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과 나눈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살과 피라고 하셨던 이유를 끊임없이 마음에 새기듯, 극적인 순간에 다다른 리가 매런을 향해 던진 ‘간곡한 부탁’을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가 끝나도 계속해서 곱씹게 합니다. 이처럼 영화 <본즈 앤 올>은 마치 새끼들을 향한 어미 펠리칸의 희생적인 사랑에 빗대듯이 극 중 매런과 리가 함께 하는 마지막 순간을 처절하고도 아름답게 그립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을 사치처럼 여기기 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순간의 욕망에 집착하고 피상적인 속성에 의존하는 사랑을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처럼 여기며 그 흐름에 전적으로 순응해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 <본즈 앤 올>은, 이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했던 것처럼, 살과 피를 내어주는 이야기를 통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우고 싶어 합니다.
[영화칼럼] 영화 ‘유령’ - 2023년 감독 이해영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歳寒然後知松柏之後凋)
사순 시기를 맞이한 신앙인들은 새로이 실천할 거리들을 살핍니다. 그러나 사순 시기는 무언가를 새롭게 실천하는 시기보다는 신앙인답지 못했던 지난 모습을 다지는 시기로 삼는 것이 더 좋습니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던 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 마음을 다잡는 시기인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순 시기가 겨울의 끝자락에 시작되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바로 세우며, 겨울을 다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새겨지는 것들로부터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더욱 깊이 묵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영화 <바람의 소리(2009)>로 이미 영화화된 소설 <풍성>을 각색한 영화 <유령>은 1933년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삼습니다. 영화는 극중 항일조직 ‘흑색단’이 조선총독부에 심어놓은 스파이 ‘유령’으로 의심을 받아 외딴 호텔에 갇히게 된 다섯 명의 용의자들이 의심을 뚫고 탈출하기 위해 벌이는 사투를 그립니다.
용의자 중 한 사람이자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인 준지(설경구 분)는 일본인 아버지와 조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온 인물입니다. 특별히 남몰래 조선의 독립을 열망한 어머니가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는데 앞장선 아버지를 살해하는 모습을 목격했던 때를 준지가 회상하는 장면에서, 어머니를 향해 ‘사라진 조선에 미련을 두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 아들의 질문에 어머니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歳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답을 들려줍니다. 이는 《논어(論語)》의 〈자한(子罕)〉편에 등장하는 말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는 의미인데, ‘곤궁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꿋꿋한 지조’를 비유합니다. 준지의 어머니는 조선의 독립이 가능한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항일운동을 옳은 길이라고 여겼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처럼 이룰 수 없어 보이는 일에 목숨을 거는 어머니를 비롯한 항일운동가들의 결기를, 준지는 자신에게 차별을 가하는 이들의 태도보다 더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한편 또 다른 용의자로서 통신과의 암호문 기록을 담당하며 흑색단의 유령으로 활동하는 차경(이하늬 분)은 작전 중 목숨을 잃은 동료 난영(이솜 분)을 향한 부채감을 떨치지 못합니다. 이 부채감은 목숨을 건 항일운동을 펼치는 차경의 심지를 흔듭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난영의 뒤를 따를 수 있을 것만 같은 차경이지만, 자신이 난영의 뒤를 고스란히 따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은 차경을 두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차경으로 하여금 스스로 겨우내 침엽수와 같은 존재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일깨워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난영을 떠오르게 하는 그 인물로 하여금 차경은 그간 지닌 부채감과 두려움을 떨칠 수 있게 됩니다. 극중 차경을 비롯한 흑색단원들의 목숨을 건 활약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독립은 여전히 요원해 보이지만, 그 요원함을 차경과 동료들은 희망으로 바꾸어 보는 법을 터득합니다.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겨울의 깊은 추위와 몰아치는 눈보라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순 시기를 지내며, 우리네 실존을 수없이 뒤흔들려드는 세파 앞에서도 꿋꿋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영화칼럼] 영화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 2021년 감독 샤카 킹
그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I Don’t Know How To Love Him)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제작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대표적인 넘버(number, 뮤지컬에 삽입되는 노래)인 ‘그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I Don't Know How To Love Him)’의 가사에는, 극 중 예수 그리스도를 온마음을 다해 따르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실존적인 고뇌가 담겨있습니다. ‘인간 예수’와 ‘메시아 그리스도’를 구분 짓지 않고 함께 아우르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바라보고 싶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고민이 넘버의 가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 넘버는 같은 뮤지컬 안에서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괴로움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와중에도 불립니다. 그런데 동일한 곡임에도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를 때의 분위기와는 분명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유다가 부르는 ‘그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에는 예수를 정치적 혁명가로 여기며 따랐지만, 현실 속 예수의 의지가 자신의 신념에 미치지 못한다는 실망감에 예수를 배반하기로 마음먹었을 때의 ‘두려움’과 자신의 배반으로 예수께서 잡혀갔다는 ‘죄책감’이 한데 엉켜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 첨예한 논란을 일으켰던 흑인 무장 단체 ‘흑표당(Black Panther)’의 일리노이 지부장이었던 프레드 햄프턴(대니얼 컬루야 분)과 관련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햄프턴보다는 햄프턴을 연방수사국(FBI)에 밀고하는 윌리엄 오닐(라키스 스탠필드 분)이라는 인물에게 더욱 집중합니다. 연방수사국 요원을 사칭하며 차량을 절도하려다가 체포된 오닐은 처벌받지 않는 대신 연방수사국 수사관 로이 미첼(제시 플레먼스 분)의 정보원으로 고용됩니다. 그리고 흑표당에 잠입해 당국에서 ‘블랙 메시아’라 불리며 요주의 인물이 된 햄프턴을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후 오닐은 흑표당 내에서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닌 채 지속적으로 연방수사국의 압박을 받으며 힘겹게 정보원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미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 간 불평등을 타파하려는 햄프턴의 열정적인 모습에 동화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극 중 오닐이 겪은 실존적인 갈등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기 바쁜 대부분의 범인(凡人)들이 겪는 갈등을 대변해주며,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기 전에 먼저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과 ‘예수님의 사형선고를 향한 유다인들의 광기’를 가슴 깊이 새겨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숙명과도 맞물려 보입니다.
극 중 햄프턴의 열정적인 연설에 동화된 오닐의 모습을 본 연방수사국 수사관 미첼은 오닐에게 묻습니다. 그것이 본심을 감추기 위한 연기였는지, 아니면 정말로 연설에 동화되었던 것인지를 말입니다. 영화의 결말만을 놓고 본다면 오닐이 연기를 했다고 보는 것이 옳지만, 영화 속 자막으로 전해지는 실제 오닐의 삶의 마지막 모습을 놓고 본다면 그가 햄프턴의 신념과 열성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동화되었다고 보는 것 역시 가능해집니다. 그렇게 ‘그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유다의 뒤늦은 후회의 마음이자, 영화 속 밀고자 오닐이 품었을지 모를 햄프턴을 향한 회심의 고백이며, 동시에 사순 시기를 보내고 이제 곧 주님의 부활을 맞게 될 우리의 고해성사가 되어줍니다
[영화칼럼] 영화 ‘너에게 가는 길 - 2021년 감독 변규리
자모(慈母)신 교회
지난 2021년 2월 22일,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동성 간 결합의 축복과 관련된 의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제목의 문헌을 통해 ‘가톨릭교회는 동성애자는 축복하더라도 그들의 결합은 축복할 수 없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긴 답변문을 전했습니다. 교회가 동성애자를 비롯한 우리 시대의 성 소수자들을 존중하고 동정하며 그들을 향한 혐오와 배척 같은 부당한 시선에는 저항하지만, 교회 안팎에서 요구되는 동성 간의 혼인에 대한 축복을 해줄 권한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지닐 수도 없다는 내용입니다.
이에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편집자였던 오스트리아 빈 교구의 크리스토퍼 쇤보른 추기경은, 세상의 어떤 어머니가 자녀가 처한 상황에 따라 자녀가 바라는 축복을 거절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동성애를 느끼거나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교회를 어머니로 느끼기 어렵다. 하지만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다. 그들은 교회를 어머니로 보고 싶어 한다.”고 설명했습니다[‘가톨릭 평론(2021년 여름호 제32호) 참조] 이 같은 쇤보른 추기경의 설명은 신앙교리성이 발표한 신학적 원칙을 사목적으로 적용할 때 사목 대상자들을 향한 더욱 섬세한 시선, 즉 ‘어머니의 시선’이 요구된다는 사목적 차원의 첨부라고 봄이 옳을 것입니다.
변규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은 게이 아들을 둔 어머니 ‘비비안’과 트랜스젠더 아들을 둔 어머니 ‘나비’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비비안과 나비는 ‘성 소수자 부모 모임’에서 사용하는 두 어머니의 활동명입니다.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성향의 자녀를 둔 두 어머니는 자녀를 부끄러워하거나 억지로 바꾸려 들지 않습니다. 여느 어머니들처럼 자녀의 고민을 들어주고 아픔을 보듬어 주며 자녀가 부당한 일을 겪으면 함께 저항합니다. 이같이 영화의 중심을 이루는 비비안과 나비, 두 어머니의 모습을 마주하며 쇤보른 추기경이 언급한 ‘교회를 어머니로 보고 싶어 한다.’는 문장에 담긴 의미를 곱씹어 보게 됩니다. 특별히 영화는 엔딩 크레딧에서 자녀가 성소수자임을 당당하게 고백하는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세상의 축복을 받으며 행복한 삶을 영위해 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된 성소수자 부모님들의 커밍아웃(coming out)은 차별과 혐오에 맞서고 소외된 이들을 향해 기꺼이 손을 내미는 사회 운동으로 이어지며, 여기에 관객들도 동참하기를 촉구합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탄생과 돌봄의 맥락에서 필연적으로 ‘어머니’를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여성성에 종속된 모성’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뒤처지거나 길을 잃은 이들과 함께 먼 길을 돌아서 갈 수 있는 ‘용기’와 숨 가쁘게 밀려오는 사태를 긴 호흡으로 마주할 수 있는 ‘인내’를 통해서 우리는 어머니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명은 어머니가 품은 용기와 인내를 통해서 세상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고, 교회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표상으로 삼으며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영화칼럼]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 - 2017년 감독 드니 빌뇌브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선천적 청각장애인으로 살아온 어머니에게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애쓰는 아들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들은 글을 모르는 어머니에게 사랑의 의미를 알려주기 위해 하트 모양을 보여주거나 볼에 입을 맞추는 등의 다양한 방법을 강구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끝끝내 아들이 설명하는 사랑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결국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꼭 끌어안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속절없이 내비칩니다. 그런데 이어서 다큐멘터리는 아들의 눈물과 포옹에 더 따뜻한 포옹으로 화답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머니의 이 모습을 통해서, 언어적 차원으로 전달되지 못한 사랑이 어머니를 향한 아들의 진심 어린 마음을 통해서 인격적이고 실존적인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전달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테드 창의 단편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는 앞서 소개한 어머니와 아들의 사연을 떠오르게 합니다. 영화는 전 세계 열두 곳의 장소에 ‘셀’이라고 불리는 외계 비행체가 ‘도착(arrival)’하는데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셀에 탑승해 있는 ‘헵타포드’라고 불리는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도착 후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자 미국 정부는 그들이 지구에 온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 분)와 물리학자 이안(제레미 레너 분)을 군사 작전 팀에 합류시킵니다. 이들이 접촉한 외계 생명체는 인간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의 문자를 보여주고, 이를 해석하고 분석하는데 긴 시간이 소요되면서 서로의 소통은 지지부진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빚어진 오해로 인해 군 수뇌부는 헵타포드를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고 그들과의 소통을 중단하려고 하지만, 루이스는 인내심을 갖고 그들과의 소통을 진행해나가며 결국 외계의 언어를 파악하게 됩니다.
또한 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선형적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언어 체계를 벗어나 과거 · 현재 · 미래를 동시에 아우르듯 인식하는 외계의 언어 체계를 깨우치게 됩니다. 이 능력을 바탕으로 루이스는 인류에게 벌어질 파국적 상황을 막아내고, 딸을 잃었던 과거의 아픔이 반복될 자신의 미래를 또다시, 그러나 새로운 시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의 이성으로 깨우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인간의 언어 체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이 신비를 ‘믿을 교리’로 삼은 이유는 삼위일체 신비가 품은 하느님의 사랑, 즉 독자적인 세 위격이 함께 활동하심으로써 끊임없이 내어주시는 그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큐멘터리 속 아들이 어머니에게 ‘사랑’을 일깨우는 모습은 삼위일체 신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일깨워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떠오르게 합니다. 더불어 외계의 언어를 파악하자 시간의 흐름에 구속받지 않고 세계를 폭넓게 이해하게 된 영화 속 루이스의 모습은 삼위일체 신비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몸소 살아내려는 신앙인을 대변해 주며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이가 느낄 참된 자유를 상징하듯 다가옵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신비는 언어적 한계를 넘어선 자유를 보증하며, 말하지 않고도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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