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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언어] quinque panes(퀸퀘 파네스, 라틴어) : 빵 다섯 개
‘퀸퀘’는 숫자 5를, ‘파네스’는 ‘빵’을 뜻하는 ‘파니스’(panis)의 복수형입니다. 오늘 복음(마태 14,13-21)의 ‘오병이어(五餠二漁)’ 기적 속 다섯 개의 빵을 의미합니다.
일상에서 쓰는 ‘빵’이라는 단어는 순우리말이 아니라 ‘파니스’에서 유래합니다. 파니스는 포르투갈어로 ‘파웅’(pão)이 되었고, 16-17세기 포르투갈 상인과 선교사들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져 ‘판’(パン)이라 불렸습니다. 근대 개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에게 전해져 지금의 ‘빵’이 되었습니다.
라틴어 ‘파니스’ 앞에 ‘-와 함께’라는 ‘콤’(com-)을 붙이면 ‘빵을 함께 나누어 먹는 사람’이라는 뜻의 ‘콤파니오’(companio)가 됩니다. 한솥밥을 먹는 ‘식구(食口)’이자 생을 함께 하는 ‘동반자’입니다.
거룩한 미사에서 ‘생명의 빵’(panis vitae, 파니스 뷔테: 요한 6,35)을 함께 나누어 모시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식구입니다. 소외된 식구들을 살피고 내 것을 나누어 봅시다.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먹고 남았던 기적이 지금 이루어질 것입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64) 올바른 성인 공경, 「교회헌장」 제50항 후반부, 제51항
「교회헌장」 제50항의 마지막 단락은 전례 안에서의 성인 공경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순례하는 교회와 천상 교회의 결합은 성령께서 성사를 통해 작용하시는 거룩한 전례 안에서 우리가 함께 하느님을 찬미할 때 가장 고귀한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전례 안에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묵시 5,9 참조) 모든 이가 하나인 교회로 모여 하나의 찬미가로 하느님을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찬의 희생 제사를 거행하는 순례하는 교회는 천상 교회의 예배와 결합하여,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그 배필이신 성 요셉과 복된 사도들과 모든 성인”(감사기도 제2양식)을 기억하고 공경합니다.
이어지는 제51항은 지상 교회와 천상 교회 그리고 정화를 받고 있는 교회 사이의 친교에 관련된 교회의 사목적 지침을 언급합니다. 지상 교회의 신자들이 천상 교회 혹은 정화를 받고 있는 교회와 이루는 활기찬 결합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신앙은 매우 중요한 신심입니다. 하지만 성인 공경과 관련된 사목적 실천에서 어떤 남용이나 과도함 혹은 결함이 발견된다면 그러한 것들을 배제하고 시정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인 공경의 신심은 그리스도와 하느님께 더욱 충만한 찬미가 되도록 개선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공의회는 올바른 성인 공경이 외적 행위보다는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통해서 성인들로부터 ‘생활의 모범’과 ‘친교에 의한 결합’ 그리고 ‘전구의 도움’을 찾습니다. 이렇게 천상 교회의 신자들과 이루는 지상 교회의 통교가 신앙의 빛으로 이해될 때,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흠숭을 약화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값지고 풍요롭게 합니다.
실로 하느님의 자녀인 지상 교회와 천상 교회 그리고 정화를 받는 교회의 신자들이 한 가족을 이루어 서로 사랑하고 삼위일체 하느님을 찬미하며 서로 통교한다면 그것이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고 완성된 천상 전례를 미리 맛보고 그 전례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고 죽은 이들이 부활할 때 하느님의 광채가 하느님 나라를 비추고 어린양이 그 나라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의 백성이 살고 있는 온 교회는 사랑의 최고 행복 속에서 하느님과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을 흠숭하며 다음과 같이 외칠 것입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묵시 5,13).
[가톨릭 교리] 요한복음 2장 - 카나의 첫 기적과 성전 정화
요한복음서의 특별함과 강조점
4 복음서 중 넷째 복음서는 앞의 3권과 좀 다릅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바라보는 관점이 비슷해 ‘공관’(共觀, Synopsis) 복음서라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는 좀 다릅니다. 공관 복음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저술되었고(AD 60~80년), 예수님의 탄생, 공생활, 하느님 나라 선포, 그리고 수난과 죽음 등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합니다. 반면 넷째 복음서는 가장 늦게 기록되었으며(AD 90~100년), 예수님의 신성, 영원한 생명, 그리고 예수님의 심오한 메시지를 신학적으로 다룹니다. 요한복음 제1장은 로고스 찬가(1,1-18)로 시작해,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으로 구성됩니다.
제2장에서 본격적으로 예수님 활동을 다루는데,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첫 표징이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루시는 놀라운 일을 공관복음은 ‘기적’(δύναμις 뒤나미스)이라 하고, 요한복음은 ‘표징’(σημειον 세메이온)이라 합니다. 전자는 초자연적 행위 자체, 놀라운 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후자는 그 행위가 지닌 상징적인 의미, 즉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2장에는 두 사건이 기록되는데, 첫째는 ‘카나의 혼인 잔치’(2,1-12), 둘째는 ‘성전 정화 사건’(2,13-22)입니다. 요한복음 초반에 기록된 두 사건은 이후 예수님이 겪으실 수난과 죽음, 새로운 계약의 의미와 연관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 – 예수님과 성모님
“사흘째 되는 날,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요한 2,1) ‘사흘째 되는 날’은 요한복음 1장과 연결시켜 보면 예수님 공생활 중 7일째 되는 날입니다. ‘7일’은 창세기 1장의 창조사건을 연상시킵니다. 7일째는 안식일이고, 창조의 마지막 날이자 완성의 날입니다. 요한에게 카나에서의 사건은 창조 사건과 연관되어 새 하늘과 새 땅, 즉 새 창조를 상징하고 암시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해 창조하셨던 것처럼, 포도주, 즉 예수님의 피를 통한 새 창조, 새 계약이 시작됨을 암시합니다. 또한 이 중요한 사건에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라는 표현입니다. 성자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마리아는 함께 계셨고, 예수님 공생활의 첫 활동에도 함께 하십니다. 요한의 관점에 따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첫 활동에, 그리고 마지막 활동인 십자가 곁에도 함께 하십니다.
특히 마리아는 혼인 잔치를 벌이는 그 집을 걱정하며 아들 예수님께 청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마리아는 혼인 잔치에 초대받으셨는데,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집니다.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셨고, 예수께서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하라고 일러줍니다. 왜 성모님은 이 집 잔치에 마음을 쓰신 걸까요? 첫째 성모님의 마음은 항상 그러하십니다. 곤궁한 사람의 처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십니다. ‘중보’(仲保, 대신 빌어 줌, 전구)가 성모님의 중요한 역할이자 위치입니다. 둘째 성모님은 이미 예수님의 능력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직’ 때가 오지 않았지만, 성모님은 기도를 통해 그 ‘때’를 바꾸십니다.
거기에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물을 채우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나누어 주십니다. 유다인의 관점에서 하느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이유 내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씻는 ‘정결례’는 유다교 예식의 핵심입니다. 정화되어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독이 비었다는 것은 현재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물독 6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고, 훗날 최후의 만찬의 잔은 신약을 상징합니다. 7일째 창조의 완성이 이루어진 것처럼, 구약의 6개 물독이 최후의 만찬의 1개 잔을 통해 7로 완성됨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 ‘무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보여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줍니다. 포도주는 이후 예수님의 피, 즉 새 계약을 상징합니다.
하느님 현존 체험의 장소인 성전의 정화
카나의 기적에 이어 요한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을 전합니다. 공관복음에는 성전 정화 사건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후 최후 만찬 직전에 발생한 것으로 위치시키는 반면, 요한은 예수님 공생활 초기 사건으로 기록합니다. 공관복음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된 이유가 유다인들과 갈등 폭발이었고, 이는 안식일 규정, 신성 모독 등에 기인한 것이라 이해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공관복음의 관점과 다르게 이 사건을 바라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곳은 원래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희생 제물로 바치려던 모리야 산(참조: 창세 22,9.16-18)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극적으로 나타나셨던 곳이고, 아들 봉헌을 통해 그의 믿음도 입증된 의미 깊은 장소라, 솔로몬 왕도 이곳에 성전을 세웠습니다(2역대 3,1). 유다인들은 성전에서 바쳐지는 제사를 통해 죄를 씻고 정화되어 하느님께 나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게다가 성전은 ‘말씀의 궤’를 보관했던 곳입니다. 이미 그 당시엔 말씀의 궤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거룩한 장소, 하느님 현존의 현재화가 이루어지는 장소라 믿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많은 유다인이 성전을 방문해 기도하는 것은 의무사항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성전은 “장사하는 집”(요한 2,16), “강도들의 소굴”(마태 21,13)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 현존의 장소인 성전을 정화하고, 본래 의미를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요한은 성전 정화 사건이 물을 포도주로 바꾼 카나의 혼인 잔치 이후 발생한 것으로 기술합니다. 포도주, 즉 피는 이스라엘에서 계약을 의미합니다.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인 성전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합니다. 이 두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계약, 새 성전을 암시합니다. 성전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는 장소인데, 예수님은 새 성전이 건물이 아닌 당신 자신임을 예고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성전이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 자신이 진정한 성전임을 알려주십니다.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을 통해 새 계약이 시작되고,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알려줍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요한 2,5)
[신약 외경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 마리아의 부모, 요아킴과 안나
7월 26일은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입니다. 요아킴과 안나는 마리아의 부모로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어떻게 우리에게 전해졌을까요? 신약성경에는 마리아의 부모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초점을 맞춘 신약성경에서 마리아의 부모가 언급되지 않은 것이 놀랍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신약 외경에는 마리아의 부모에 관한 이야기들이 전해집니다. 예수님을 향한 관심이 그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에게로, 나아가 마리아의 부모에게까지 확장된 것입니다. 마리아의 부모가 처음 언급된 작품은 150년경에 저술된 야고보 원복음입니다. 마리아의 출생 경위와 성장을 다루는 대목(1-6장)에서 요아킴과 안나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대목은 요아킴과 안나 부부가 겪은 불임, 하느님의 개입, 그리고 마리아의 잉태와 탄생을 순차적으로 보여줍니다(본문은 「신약 외경 1」에 실려 있습니다).
요아킴의 수모와 광야의 단식(1장)
요아킴은 줄곧 규정보다 많은 예물을 주님께 바치면서 ‘여분의 예물은 모든 백성을 위한 것이 되고, 주 하느님께 바치는 용서의 예물은 내 죄를 보속하기 위한 것이 되리라’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벨이라는 사람이, 요아킴은 이스라엘에 자손을 남기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의 예물 봉헌을 막아섭니다. 자손이 없다는 것이 죄인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비통함에 빠진 요아킴은 성조 아브라함이 늦은 나이에 이사악을 얻은 것을 기억하면서, 아내를 집에 남겨 둔 채 홀로 광야로 떠납니다. 그는 하느님이 찾아오실 때까지 40일 밤낮을 단식하며 기도하기로 결심합니다.
안나의 비탄과 간절한 탄원(2-3장)
남편이 광야로 떠나자 비탄에 빠진 안나는, 자신의 태를 닫으신 분이 하느님이라는 여종 유티네의 말을 듣고 더 큰 상처를 받습니다. 안나는 정원의 월계수 아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의 새, 땅의 짐승, 물과 땅조차 하느님 앞에서 열매를 맺는데 자신은 열매 맺지 못하는 여인이 되었음을 한탄합니다. 그리고 사라에게 베푸셨던 기적을 자신에게도 내려달라고 하느님께 호소합니다.
천사의 발현과 마리아의 탄생(4-5장)
이때 주님의 천사가 안나에게 나타나 그녀의 탄원이 이루어졌으며 곧 아이를 낳게 되리라 예고합니다. “안나야, 안나야! 주 하느님께서 네 탄원을 들어주셨다. 네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네 자손에 관해 말할 것이다.”
그러자 안나는 태어날 아이를 하느님께 예물로 바치겠다고 서원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살아 계신 한, 사내아이든 계집아이든 제가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를 저의 주 하느님께 예물로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평생 하느님을 섬기며 살아갈 것입니다.” 태어날 아이는 평생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키우리라는 맹세입니다.
천사는 요아킴에게도 가서 안나의 잉태 소식을 전합니다. “요아킴아, 요아킴아! 주 하느님께서 네 탄원을 들어주셨다. 아래로 내려가라. 네 아내 안나가 아이를 가졌다.” 요아킴은 기뻐하며 귀가하고, 문가에 마중 나온 안나와 기쁨의 재회를 나눕니다. 다음날 요아킴은 성전에서 예물을 드리며 사제의 패를 통해 자신에게 죄가 없음을 확인받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게 자비로우시고 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알았다”라는 것입니다. 아홉 달이 차서 안나는 딸을 출산하고, 아이의 이름을 ‘마리아’라 짓습니다.
마리아의 성장과 첫돌 잔치(6장)
마리아가 태어난 지 여섯 달이 되어 일곱 발자국을 걷자, 안나는 아이를 성전에 데려가기 전까지 아이가 세상의 땅을 밟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침실 안에 성소를 만들어 아이에게 부정한 것이 닿지 않게 하며 기릅니다. 마리아의 첫돌이 되자 요아킴은 수석 사제들과 원로단, 온 백성을 초대해 큰 잔치를 엽니다. 사제들은 마리아에게 다시없을 축복을 내리며 말합니다. “가장 높은 하늘의 하느님! 이 아이를 눈여겨보소서. 그리고 이 아이에게 다시없을 최고의 축복을 내리소서.” 안나는 자신의 수치를 씻어주시고 ‘정의의 열매’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찬가를 올립니다.(요아킴과 안나는 아이가 세 살이 되었을 때 성전에 봉헌합니다.)
요아킴과 안나의 이야기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마리아의 잉태와 탄생은, 늘그막의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사악을 잉태한 것처럼,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하느님의 힘으로 가능해졌다는 뜻입니다. 둘째, 마리아는 잉태 전부터 하느님께 바쳐졌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무엘이나 삼손처럼 마리아는 날 때부터, 아니 나기 전부터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마리아의 잉태에는 아무런 죄가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부 사이의 자연스러운 임신이 죄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마리아의 잉태 과정에 인간의 욕심이나 죄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음이 암시됩니다. 늘 예물을 바치면서 자신의 죄를 보속했던 요아킴은, 아내의 잉태 소식을 들은 뒤 성전에서 예물을 바치는 동안 아무런 죄의 표지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개념의 싹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적어도 150년경부터 마리아의 잉태에 죄가 개입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아킴과 안나의 이야기는 마리아가 기도로 잉태되고 기도로 키워졌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마리아의 잉태와 탄생 그리고 그 성장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돋보기] 사적 계시에 대한 이해
1. ‘계시들’(구약)과 ‘계시’(신약)
계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탈출 33,23 참조), ‘숨어 계신 하느님’(이사 45,15 참조)이 인간에게 접근하여 ‘자기 자신’(발현)과 ‘자기 뜻’(메시지)을 공표하는 사건이다. 하느님에 대한 인식 가능성의 토대인 계시는 ‘은총’이며, 계시에 대한 응답이 ‘신앙’이다.
핸드폰 통화의 세 구성 요소인 발신인, 수신인, 통화 내용처럼, 계시 사건은 ① 계시자, ② 수신자, ③ 계시 내용으로 성립된다. ① 계시자는 계시 주체인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계시는 일방적 주입이 아니라 ② 수신자 인간이 수용 가능한 방법으로 달성된다. 수신자는 일반적으로 ‘청각’(말씀을 들음)과 ‘시각’(행업을 봄)으로 계시를 체험한다. 계시자 하느님의 일관된 ③ 계시 내용은 사랑에 기반한 ‘구원’과 정의에 기반한 ‘심판’이다. 이와 연계한 계시 내용의 핵심 키워드는 ‘회개’와 ‘신앙’이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통화의 매개체인 핸드폰과 통신사처럼, 하느님의 계시는 ‘연결 고리’를 통해 실현된다. 이 연결 고리의 차이로 인해, 계시 사건을 보도하는 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된다. 구약의 계시(복수형 ‘계시들’)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상으로 ‘다양한 형태의 중간 존재들’(예언자, 사제, 왕 등)을 통하여 세상을 창조하고 구원하는 하느님의 초월적 권능을 소개한다. 신약의 계시(단수형 ‘계시’)는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유일한 형태의 중간 존재’(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고 구원하는 하느님의 말씀과 업적을 전파한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신약의 계시를 완수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중간 존재만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
구약의 다양한 ‘계시들’은 신약의 유일한 ‘계시’로 집약·완성된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정점이요 절정이다. 구약의 계시가 ‘계시 내용’(예: 율법)에 충실하기를 요청했다면, 신약의 계시는 계시 내용에 앞서 ‘계시자’(하느님)와의 만남을 역설하였다. 구약은 예언자들을 통해 ‘계시자가 전달한 계시 내용’(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신약은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 내용을 전달한 계시자’(하느님인 말씀)와의 만남을 부각한다. 이는 유일한 형태의 중간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하느님 나라)로 완결된다. 비유하자면, 구약은 다양한 통신사를 통한 비대면 통화들로부터 ‘구원에 대한 정보’를, 신약은 유일한 통신사를 통한 화상 통화를 기점으로 ‘구원자(계시자)와의 대면 만남’을 계시하였다.
2. ‘공적 계시’(계시)와 ‘사적 계시’(계시들)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기 뜻’(계시 내용)을 계시하신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민족’(수신자)을 대상으로 ‘자기 자신’(계시자)을 계시하였다. 지상 생애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그분, 당신)과 ‘하느님의 뜻’(사랑의 계명)을 ‘유일하고 완전하게’ 계시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완성(최종)이며, ‘공적 계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헌장」은 다음과 같이 공언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선성과 지혜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당신 뜻’의 신비를(에페 1,9 참조) 기꺼이 알려 주시려 하셨으며”(2항), “새롭고 결정적인 계약인 그리스도의 구원 경륜은 결코 폐기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시기 전에는(1티모 6,14; 티토 2,13 참조) 어떠한 새로운 공적 계시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4항).
공적 계시는 세상 끝 날까지 ‘교회 안에서’ 보존되며,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면서 ‘교회를 통하여’ 해석·적용된다. 완료된 계시의 구체화를 수행하는 교회는 ‘말씀 선포’와 ‘성사 거행’을 통해 ‘② 수신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③ 계시 내용’을 듣고 보게 함으로써 ‘① 계시자’ 하느님인 예수 그리스도를 현재화한다. ‘신앙 유산’(depositum fidei)을 수호하는 교회는 ‘공적 계시’(예수 그리스도)를 준거로 계시에 관한 수많은 기록 중에 ‘정경’(canon) 목록을 지정했고, 이단들과의 대립 과정에서 ‘신앙 규범’(regula fidei)을 정립했다.
사도 시대와 박해 시대 이후 급성장한 교회 안에 특별한 영적 체험을 바탕으로 ‘중간 존재’(메신저)의 사명감을 지닌 이들이 출현했다. 공적 계시와 대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이후의 ‘다양한 형태의 계시들’을 ‘사적 계시’(특별 계시)라고 칭한다. 사적 계시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 교회의 규범은 ‘사적 계시는 공적 계시에 종속된다.’이다. 사적 계시의 정당성은 공적 계시로부터 부여된다는 원칙을 전제로, 공적 계시의 보존 권한과 책임을 지닌 교회 교도권이 사적 계시의 진실성을 조사하는 인준 절차를 진행한다.
내연 자동차의 비유는 ‘공적 계시’(계시)와 ‘사적 계시’(계시들)의 구분을 위해 유용하다. 엔진, 연료, 차체로 구성된 자동차는 도로 여건에 맞게 가속과 제동을 반복하며 목적지를 향해 운행한다.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자동차의 엔진이 공적 계시(예수 그리스도)다. 엔진이 탑재된 차체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다. 연료는 신앙 여정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성령이다.
자동차에는 필수 구성 요소 외에 ‘옵션’(선택사항)이 있다. 운전자의 기호와 성향에 따라 운행 보조의 기능을 수행하는 옵션은 운전자의 안전을 보장하는지, 자동차의 목적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검증을 요청받는다. 예를 들어, 옵션 중 하나인 내비게이션은 지도의 신뢰성이 검증되어야만 운전자에게 유익하다. 자동차 옵션에 대한 검증은 사적 계시에 대한 교도권의 인준과 유사하다.
사적 계시의 가치는 필수성이 아니라 공익성에 있다. 공적 계시를 개선·보완·대체할 수 없는 사적 계시는 개별 신자들의 선택 영역에 속해 있다. 사적 계시의 공익성을 조사·공인하는 교도권의 인준이 필요한 이유는 공적 계시에 부합한 안전성 확보, 보조적 차원을 본질적 차원으로 둔갑하는 왜곡 방지, 감각에 치우친 자극적 요소의 현혹으로부터의 방어다.
가톨릭교회 계열의 사적 계시에는 성모 마리아와 이와 연관된 대상물(예: 성모상),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상처와 ‘성체 성혈’(그리스도의 몸과 피)과 연관된 사례들이 많다. 다음 호에서는 성모 신심과 성체 신심의 의미를 살펴보고 바람직한 신심 생활을 제언하고자 한다.
[교회상식 더하기] (31) ‘평화의 인사’는 많이 할수록 좋다?
가까이 있는 이들하고만 차분하게 인사 나눠야
미사 중 ‘평화의 인사’ 시간에 종종 주위 분들과 타이밍이 맞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옆에 계신 한 분 정도만 인사를 나누고, 다른 분들의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인사 시간이 끝나 난감한 경우도 생기곤 합니다. 서로에게 평화를 빌어주는 시간인데, 좀 더 시간을 길게 두고 더 많은 신자와 인사를 나누면 좋지 않을까요?
평화의 인사는 평화 예식의 한 부분입니다. 신부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고 기도하는 부분,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며 평화를 기원하는 부분,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하고 초대하는 부분에 이어 신자들은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이 평화 예식을 잘 살피면 우리가 ‘평화의 인사’로 나누는 평화가 그저 친근하게 나누는 인사나 인간적인 평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고 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 하시며 주신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권고 「사랑의 성사」에서 “성찬례는 본질적으로 평화의 성사”라며 “미사에서 성찬 신비의 이 차원이 평화의 인사를 통해 특별히 표현된다”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49항) 이 예식에서 교회는 자신과 인류 가족 전체의 평화와 일치를 간청하며, 신자들은 성체를 모시기 전에 교회에서 누리는 일치와 서로의 사랑을 드러냅니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82항)
그렇다면 더더욱 평화의 인사를 더 오래 성대하게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하지만 교회는 평화의 인사 시간에 “가까이 있는 이들하고만 차분하게 평화를 표시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교황청 경신성사부 훈령 「구원의 성사」 72항) 평화의 인사 시간에 노래를 부르거나 자기 자리에서 이동하거나 이 시간에 축하나 덕담, 조의 등을 표현하는 것을 피하라고도 권고합니다.(교황청 경신성사부 「회람: 미사 중 평화의 선물을 표현하는 예식에 관해」 6항 참조)
평화의 인사는 평화를 나누는 행위 자체도 중요하지만, 신자들과의 친교나 화해보다 “성체를 받아 모시기 전에 이루어야 할 평화와 친교, 사랑을 의미”합니다.(「구원의 성사」 71항) 평화의 인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도 “영성체에 앞서 회중이 산만해질 수 있다”는 점을 짚으면서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절제 있게 이뤄진다 해도 이러한 몸짓의 커다란 가치가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사랑의 성사」 49항)
그러니 혹시 많은 분과 평화의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 한 분과 인사를 나누더라도 우리가 나누는 이 평화가 곧 영성체로 모시게 될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평화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