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포도나무
(요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시니”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과 아버지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 15:5)절에서 주님은 자신과 제자를 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말씀하시면서,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서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1~5절에 비유에 말씀을 기독교인들은 포도나무의 가지에 붙어 있는 것을 기독교인이 되어 교회 안에 들어 온 것으로, 제자 된 자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함에는 내용에 있어서 얼마든지 주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라고 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면 그리 해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관계 맺은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삶에 열매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즉, 성도가 말씀 안에 거해서 그 말씀에 의한 삶에 열매로 그리스도인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지 된 자가 중요하게 여길 것은 자신의 삶에 열매를 맺게 하는 공급원은 포도나무(말씀)며, 가지는 그 말씀에 근거한 자기 삶에 그리스도적인 열매로 자기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제자, 거듭난 자녀)는 그 나무가 주는 것(말씀)을 먹기에 그 말씀으로 인하여 맺은 열매를 가지게 되는데, 이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이니라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여서, 말씀의 열매를 가진 것으로 자녀 됨을 증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제자 자녀 그리스도인 됨에 근거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어서 그저 기독교 종교인이 된 것을 가지고 가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될 뿐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볼 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가 한 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반응하고 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15장의 관계가 된 사람(제자, 거듭난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만 보더라도 자기 삶의 근거를 예수(포도나무)의 말씀에 두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포도나무 진액(예수의 하신 말씀)은 영적인 삶을 유지하게 하는 것(요6:63 내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라)이기에 영의 양식이라 여기며, 그 진액을 먹음(영적 생명 유지)에 온 삶을 집중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의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 육 적인 사람이었을 때는 땅의 것을 목적하고 살았다면, 15장 이후의 사람은 포도나무 진액이 목적이 된 것입니다. 사는 목적이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바뀜은 애쓰고 노력해서가 아닌 어느 말씀을 듣고 깨달음이 있게 되는 순간에 바뀌게 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깨닫기 전까지는 교인으로 살면서도 육적인 것을 목적으로 살았는데,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서 그것을 끊고, 말씀으로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짐은 에덴동산의 삶(하나님과 관계성으로의 삶)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적으로 회복이라고, 거듭남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렇게 됨을 포도나무와 농부에 의해 되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약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에서 나는 진액을 먹었다면, 에덴동산에서부터 이미 그들에게 천국은 시작된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자기 형상의 자녀를 원했는데, 빗나가서 지식의 열매를 맺어 사는 사람으로 나갔으니, 육적 의식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살면서 영적인 것과 육적인 어떤 필요성을 동시에 함께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의 근거이기에... 이 모습이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여기까지가 “가지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농부의 입장에서 가지를 보실 때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농부는 열매로 가지를 평가하고 있는데, 가지에 맺어 있는 열매로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 가지가 포도나무에 매달려 있는데, 무화과 열매가 열릴 수 없는데 보니까 무화과가 매달려 있다면 농부는 그 가지를 잘라버린다는 것입니다.
농부는 참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인데, 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서도 다른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진 존재였는데, 미혹하는 존재에 의해 다른 열매, 곧 지식의 열매를 맺어 그 열매로 사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농부는 자기가 원하는 열매 맺음이 아니기에 그 가지를 자르는 것입니다.
농부의 입장에서는 포도를 수확하려고 했는데, 다른 열매가 맺혀 있으니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가지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참 포도나무 뿌리에서 올라오는 것을, 나무도, 가지도, 함께 마시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이며, 요 2장의 물 포도주가 되며,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입니다.
하나가 된 것으로 끝납니다. 나무에 충만함은 가지이고, 가지의 충만함은 열매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요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요 15:4-5)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런데 (약 3: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눅 13:7)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요 15장은 우리 존재를 ‘그 열매 맺은 것’으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너는, 어떤 너냐는 것입니다.
(마20: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한 데나리온 약속을 합니다.
(마 21: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0장과 21장 사건을 비교해야 합니다. 20장은 품꾼들입니다. 21장은 아들들 이야기입니다.
내 아버지는 농부입니다.
아들은, 자녀 된 자는, 제자 된 자는, 거듭난 자는, 요 15장의 관계 가운데 있는 자는, 이미 에덴동산에 들어가서 생명나무로부터 먹기 시작한 자를 말합니다.
이렇게 밝혀지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가 무엇이냐? 그것을 먹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양의 문이라” 통과입니다. “길이라”-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가지 없는 포도나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 입장에서는 농부 없는 포도나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농부와 아들과 자녀의 관계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 15:1절은 구원의 핵심이 “나는 참 포도나무다.”입니다. 나로 인하여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아는 어떤 나입니까? 그리고 그 나의 삶에 맺은 열매는 어떤 열매인가요?
실제 삶은 종교인으로 살면서 생각으로는 말씀으로 산다고 여기면서 실제 그 삶에 참 포도나무와 아무런 관계가 없이 살고 있지 않으신지요?
여러분들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입니다‘라고 하면서 여전히 육신의 열매를 추구하고 있지는 않으시는지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것이냐? 라는 질문에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속으로 ‘예’하는 우리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포도나무 안에 있다고 하면서 열매 없는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농부가 하는 일은 포도나무의 열매가 아니거나 열매가 없는 가지를 잘라버리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심판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 울타리 안에 있어서 그 안에 있는 것을 주님의 품 안에 곧 내 안에 있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실제 삶에 그분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닌 열매를 맺었거나 아예 그분의 열매조차 없는 가지로 있다면 그 이유가 뭘까요?
세상에서 주어지는 진액을 공급받았거나, 종교가 주는 진액을 가졌거나(유대인들처럼)가 아닐까요?
열매 맺지 않는 가지(우리)나, 다른 열매를 맺은 가지(우리)는 잘라냅니다. 가지는 항상 포도나무의 열매를 기억해야 합니다. 깨달음의 은혜가 임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