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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루과이의 결승골 장면
월드컵 열기가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우리도 세계 최강 독일을 완파하고 세계 축구사에 영원히 남을 기록을 남겼습니다. 해서 오늘은 이 월드컵의 첫 번째 대회인 우루과이 대회를 조명해 봅니다.
약 90년 전인 1930년에 열렸던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결승전 당시 우루과이 팀에는 외팔이 선수가 나와 종횡무진 활약을 했고 상대팀인 아르헨티나 팀의 에이스였던 한 선수는 결승전을 앞두고 학기말 시험 때문에 귀국했다는 에피소드가...
아! 호랭이 담배피우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 월드컵의 유래 ]
1928년 5월 28일 FIFA(the Fede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총회가 모든 대륙별 회원국을 대표하는 팀간의 명실상부한 최고의 경기를 갖는데 대한 찬반투표를 위해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당시 찬성 23표, 반대 5표로 가결된 이 위대한 구상은 두명의 프랑스인 줄 리메(1921년 FIFA의장으로 선출)의 노력에 의해 1930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역사적인 경기를 갖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줄 리메
[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대회 ]
FIFA가 창립된 1904년부터 여러 차례의 논의가 진행되다가 세계 1차 대전으로 물거품으로 사라졌던 월드컵축구대회가 FIFA창립 26년 만에 우루과이에서 그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FIFA가 우루과이를 첫 월드컵 개최국으로 선정한 이유는 우루과이가 1924년 파리 올림픽과 1928년 암스텔담 올림픽축구를 연속 우승한 축구 강국이었다는데 있었죠.
개최국 선정에서 탈락한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우루과이를 개최국으로 선정한 것이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당시 선박에 의한 대서양 횡단이라는 너무 먼 여행이 부담이었고,
둘째 월드컵 기간 동안 자국 내의 경기들을 중단해야 하고,
셋째는 경제적인 문제였습니다. 당시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는 이미 프로 축구클럽들이 존재했고, 이 클럽들은 월드컵에 출전하는 선수들에게 거의 두 달 동안 봉급만 지불하고 경기를 못하는 것이 마땅치 않기도 했습니다.
월드컵 두 달 전까지도 유럽 나라들의 참가 여부가 불투명하자 남미축구연맹은 FIFA에서 탈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근근히 마련한 월드컵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쥴 리메 FIFA회장과 부회장이며 벨기에 축구협회장인 실드레이어스가 발벗고 나섰습니다.
* 최초의 우승국 우루과이 팀
두 사람의 설득으로 프랑스와 벨기에는 출전을 수락했습니다. 쥴 리메의 간청에 따라 루마니아의 카롤 왕은 대표선수들을 직접 선발해 3개월의 휴가와 보수를 지급하며 귀국 후 복직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파견했습니다.
루마니아에서는 당시 축구가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으나 카롤 왕은 젊은 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한 덕에 직접 나서 선수 선발은 물론, 월드컵을 전후한 90일 동안 선수들을 축구 외의 다른 일에 신경쓰지 못하게 까지 했습니다.
유고슬라비아도 뒤를 따랐습니다. 그래서 다행히 유럽의 4개국이 첫 월드컵에 출전하게 됐지만, 이 국가들은 유럽축구의 약체들이었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경우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가 모두 참가하지 않으면 불참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FIFA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3회 대회까지 불참하였습니다. 축구 종가라는 자존심 때문이었는데 이후 FIFA가 이러한 영국의 의견을 제4회 대회부터 받아들여 오늘날까지 영국의 4개국(?)이 참가하여 오고 있습니다.
* 우루과이에게 우승컵을 수여하는 줄 리메
결국 유럽 4개국과 미주 9개국으로 13개국 대표팀들이 참가하는 제1회 월드컵축구대회의 구도는 완성됐습니다. 미주지역의 출전국은 브라질을 비롯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칠레, 페루, 멕시코 그리고 미국이었습니다.
유럽의 3개국이 먼저 도착하였고 마지막으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도 도착했습니다. 참가국들의 집합은 끝났습니다. 첫 월드컵축구대회가 개막에 이르른 것입니다. 13개 팀을 4개조로 나눴다. 아르헨티나(1조), 브라질(2조), 우루과이(3조) 그리고 미국(4조)이 톱시드로 배정됐습니다.
미국을 시드 배정국에 포함시킨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선수였던 오울드, 맥기, 알렉스 우드, 갤러처 그리고 제임스 브라운 같은 선수들이 미국에 귀화했기 때문에 강한 팀일 것이라는 짐작이 그 이유였습니다. 대회 진행은 각 조의 1위 팀이 준결승에 진출하고, 여기서 이긴 두 팀이 우승을 놓고 결승전을 벌이도록 했습니다.
조 편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조 아르헨티나, 프랑스, 멕시코, 칠레
2조 브라질, 유고슬라비아, 볼리비아
3조 우루과이, 루마니아, 페루
4조 미국, 벨기에, 파라과이
개막경기는 7월 13일 포시토 스타디움에서 프랑스와 멕시코가 장식했습니다. 개막경기에는 개최국이 출전하는 게 통례이나, 이날이 프랑스 혁명기념일이어서 우루과이가 양보했습니다. 프랑스가 멕시코를 4-1로 이겼습니다. 월드컵축구 1호 골의 영광은 프랑스의 루시엥 로랑이 차지했습니다.
로랑은 90세의 나이로 1998년 프랑스월드컵을 관전했습니다. 그는 FIFA Magazine과의 인터뷰에서
“우루과이 월드컵 출전을 위해 15일 간의 선박여행을 하면서 훈련은 갑판에서 했고, 멕시코와의 개막경기는 눈이 오는 속에서 치렀다. 나의 월드컵 1호 골은 동료의 센터링을 오른발 발리킥으로 넣었다. 그러나 그 골이 역사적인 월드컵 첫 골이라는 사실은 경기가 끝난 뒤에 알았고, 아마추어 선수였기 때문에 어떤 포상도 받지 못했다"고 회상하면서
“오늘날의 축구는 그 때와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체력, 기술, 전술이 발전했으나 험한 태클이나 거친 경기 등 부정적이고 우려스러운 점들도 많다. 옛날의 축구는 동료는 물론 상대 선수들과 심판을 존중했다. 지금은 윙의 역할을 윙백이 대신하고 있는데, 진정한 윙의 역할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당시의 감독들은 지금의 감독들처럼 일일이 지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 결승전 경기장
프랑스와 멕시코의 개막경기에서는 필드플레이어의 GK 대역이라는 보기 드문 일이 일어났습니다. 전반 10분 경, 멕시코의 공격수 메히야가 슛하려고 뻗은 발이 몸을 던져 이미 공을 잡은 프랑스의 골키퍼 테포의 턱을 찬 것입니다. 턱뼈가 깨진 테포는 들려 나갔습니다.
선수교체가 허용되지 않은 시절(선수교체는 1970년 멕시코월드컵대회부터 시행됨)이라 레프트 하프인 샹트렐이 골키퍼의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월드컵 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 GK대역이 첫 월드컵대회 첫 경기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프랑스는 개막경기에서 10명이 싸우고도 이겼지만 다음 두 경기에서 패해 준결승에는 오르지 못했습니다.
주경기장인 센테나리오 스타디움의 개장경기는 개최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 18일, 우루과이의 첫 경기로 페루 전이었습니다. 우루과이는 카스트로가 후반 15분에 넣은 한 골로 페루를 이겼습니다. 센테나리오 스타디움은 물론 초만원이었습니다. 1조의 프랑스와 아르헨티나 경기에서는 다시는 볼 수 없는 희한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우루과이 관중이 아르헨티나에 대한 라이벌 의식으로 프랑스를 응원하는 가운데 정상적으로 진행된 경기시간은 84분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장돌뱅이라는 별명의 몬티가 후반 35분 선취골을 넣었습니다. 10분밖에 남지 않아 다급해진 프랑스는 동점골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레프트윙이 프랑스 문전으로 센터링한 공을 프랑스의 피넬이 받아 재빠르게 전방으로 내 찼습니다. 역습이었습니다. 프랑스 공격수 랑기예르가 골키퍼와 맞서게 된 순간! 놀랍게도, 브라질의 주심 알메이다 레고가 경기를 끝내는 휘슬을 불고 말았습니다. 이때가 후반 39분이었습니다.
월드컵대회에 다시는 있을 수 없는 주심의 계시 착오라는 해괴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프랑스선수들은 거세게 항의했고, 관중들의 야유와 소란이 스타디움을 어지럽게 했습니다. 경찰이 경기장에 난입한 관중들을 내보내고 주심이 자신의 우연한 실수였음을 인정한 후 남은 6분의 경기가 재개됐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기회를 다시 잡을 수 없어 아르헨티나에 1-0으로 패했습니다. 관중들은 훌륭히 뛰고도 진 프랑스 선수들과 함께 경기장을 돌았습니다. 이것은 아르헨티나에 대한 우루과이 관중들의 경쟁의식의 표출이었습니다. 두 나라의 경쟁은 전부터 있어왔지만 1928년 올림픽 축구결승에서 더욱 커져 있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주심의 오판 덕분으로 프랑스에 이긴 후,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스타빌레가 14분 사이에 2골을 넣는 등 골 풍년을 이루면서 6-3으로 압승하고, 칠레도 3-1로 물리쳐 준결승에 올랐다. 브라질은 유고슬라비아에 2-1, 4-0으로 패해 탈락했습니다.
4조의 미국과 파라과이의 경기에서는 월드컵 자책골 1호가 나왔습니다. 파라과이는 15분만에 곤잘레스의 자책골을 미국에 헌납한 뒤 기력을 잃어 3-0으로 패했습니다.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는 미국에 6-1로 대승했습니다. 미국은 전반 10분에 센터하프 라파엘 트레이시의 다리가 부러져 10명이 뛰면서 대량 실점했습니다.
또 하나의 준결승에서 우루과이도 유고슬라비아를 6-1로 이겼습니다.
[ 결승전 상보 ]
* 결승전을 앞두고 학기말 시험 때문에 귀국한 아르헨티나 선수
* 외팔이 축구선수가 뛴 우루과이
결승전은 서로를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첨예한 경쟁의식에 빠져있는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사이에 벌어지게 됐습니다. 1928년 암스텔담 올림픽축구결승의 재판이 된 것입니다. 우루과이는 올림픽 챔피언이었고 아르헨티나는 남미 챔피언이었습니다. 이 결승전을 응원하기 위해 3만여 명의 아르헨티나 축구 팬들이 라플라타 강을 건너왔습니다.
우루과이 월드컵조직위원회가 아르헨티나축구협회에 준 입장권은 10,000매에 불과했습니다. 우루과이 경찰은 플라타 강을 건너오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서 120여정의 권총을 압수했고, 센테나리오 주경기장 입장 때도 80여 정을 추가로 색출했습니다. 대망의 제1회 월드컵축구대회 결승전에는 9만 명이 넘는 관중이 몰려들었습니다.
오전 8시부터 문을 연 경기장은 경기 두 시간 전인 정오에 초만원을 이뤘습니다. 입장하지 못한 수만 명이 경기장 밖에서 난동을 피워 무장경찰이 경비를 해야 했습니다. 경기를 앞두고 결승전에 어떤 공을 사용할 것인가에 관해 관중들의 관심이 쏠렸습니다. 그때만 해도 공인구(公認球)가 없어 나라마다 선호하는 공이 따로 있었습니다.
주심 랑게누스는 전반에 아르헨티나에서 만든 공을, 후반에는 우루과이에서 만든 공을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결승전은 오후 2시에 시작됐습니다. 광적인 양국 응원단 사이의 긴장 속에 시작된 경기는 살얼음을 밟는 듯 했습니다. 전반은 아르헨티나가 더 공격적인 듯 했으나 첫골은 우루과이가 얻었습니다.
12분이 흘렀을 때, 우루과이의 외팔이 카스트로가 상대 페널티에리어 정면에서 오른쪽으로 밀어주자 좁혀 들어오던 오른쪽 날개 파블로 도라도가 아르헨티나의 그물을 출렁이게 했습니다. 센테나리오 스타디움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20분, 카를로스 페우세예가 단독으로 정면을 뚫고 들어가 동점골을 터뜨렸습니다.
두 나라 응원단의 함성과 신음이 교차했고, 기대와 실망을 되풀이하게 하는 경기가 전반 35분에 이르렀을 때, 아르헨티나의 18세의 기예르모 스타빌레가 역전골이자 이 대회 여덟 번째의 개인 골을 터뜨렸습니다. 우루과이 선수들은 이 골이 오프사이드라고 주장했으나 허사였습니다.
전반은 2-1로 아르헨티나가 앞선 채 끝났습니다. 잠시 아르헨티나의 스타빌레에 관한 얘기를 하고 넘어 가죠. 주전이었던 페레이라가 첫 경기인 대 프랑스 전을 마친 후 학기말 시험을 위해 귀국한 자리에 고등학교 학생인 18살의 스타빌레가 대신 투입됐습니다. 스타빌레는 아르헨티나의 두 번째 경기인 멕시코 전에 첫 출전해 3골을 넣어 월드컵 최초의 해트트릭을 기록했습니다.
스타빌레는 결승전의 한 골까지 모두 8골로 제1회 월드컵대회 최다득점선수가 됩니다. 후반에 들어서자 우루과이는 만회골을 위해 총공세를 펼쳐 13분만에 체아가 동점을 만들었고, 23분에는 이리아르테가 역전골을 터뜨렸습니다. 3-2. 우승을 확신하는 우루과이 관중들의 함성이 연발했습니다.
* 월드컵 최초의 골을 넣은 프랑스의 루시엥 로랭
이후 아르헨티나의 공격은 성난 파도였지만 완강한 우루과이의 방파제에 막혀 소득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경기 종료 1분전, 우루과이의 외팔이 헥토르 카스트로가 4-2로 우승을 굳히는 골을 작렬 시켰던 것입니다. 어릴 때 오른팔을 다쳐 잘라낸 카스트로는 오른발의 위력이 특히 강해 그의 슛은 가히 대포알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이 대회에서 2골을 넣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후안 에바리스토와 마리오 에바리스토는 월드컵 결승에서 함께 뛴 최초의 형제입니다. 우루과이의 주장 호세 나사지는 월드컵축구 우승자로 쥴 리메 컵을 껴안은 최초의 선수입니다. 제1회 월드컵축구 결승전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 경기 이후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경쟁의식은 더욱 커졌습니다. 우루과이 정부는 다음날을 축제일로 정했음은 물론 선수단에 포상하고, 우승을 기념하는 선수들의 조각상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반면, 아르헨티나 언론들은 심판진의 편파 판정과 우루과이 선수들의 거친 경기 때문에 우승을 빼앗겼다고 주장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 수천 명이 우루과이 영사관 앞에서 돌을 던지는 등 격렬한 항의시위를 벌여 경찰이 공포까지 쏘며 해산시키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 우승팀 우루과이
한 쪽의 과격한 행동은 상대의 흥분을 불러와 두 나라는 결국 국교단절에 이르러 이후 6년 동안 서로 얼굴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우루과이는 두 번의 올림픽 축구 연속우승과 월드컵 초대 챔피언의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우루과이 정부는 다음날을 경축휴일로 선포했습니다. 몬테비데오 시 전체는 광란의 도가니로 빠져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