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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조승찬의 신심명(信心銘) 강의
출처 : http://www.mindfree.net/study/list.php?infor=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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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信心銘)은 중국 선종(禪宗)의 제3대 조사인 승찬(僧璨; ?-606)의 작품이다. 신심명은 선종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선시(禪詩)로서 초기부터 널리 읽히며 많은 영향을 끼쳤다. 146구(句) 584자로 되어 있으며, 1구는 4자이고, 2구가 1게송(偈頌)을 이루므로 전문은 73게송 2구이다. 이 짧은 문구 가운데 여래의 일대장경(一代藏經)의 요체(要諦)와 1,700 공안(公案)의 요지가 모두 함축되었다고 하여, 예로부터 선종에서는 중요 보전(寶典)으로서 널리 읽혀지고 있다. 여기에 연재하는 무심선원 김태완 원장의 신심명 강의는 지리산에서 2007년 8월 1일부터 4일까지 총 12시간에 걸쳐 행한 것을 녹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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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 게송 1>
至道無難(지도무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唯嫌揀擇(유혐간택) 다만 가려서 선택하지만 말라.
이 두 구절의 말에 신신명에서 하고싶은 이야기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지극한 도(道)는 전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에요. 스스로 확인하면 하나도 어려울 게 없어요. 그저 너무 당연한 일일 뿐이죠. 마치 사과가 나무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 보다도 더욱더 당연한 것이 도입니다. 모든 경우에 도가 당연합니다. 하늘에서 별이 반짝이고, 태양이 빛나고, 구름이 흘러가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배가 고프고, 덥고, 춥고, 목이 마르고, 이 모든 경우에 도가 당연합니다. 전부가 다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이란 말이에요.
그러나 생각으로 판단하여 ‘일체는 다 마음이라 했으니 이것들이 모두 마음이지’라고 아는 것은 물론 여기(손가락을 세우며)에 통달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은 이해가 아니라 체험을 해야 합니다. 도는 분별되는 사물이 아니고 배워서 얻는 지식이나 연습하여 익히는 기능도 아닙니다만, 공부하여 체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겁니다. 도라는 이름의 어떤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만, 체험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게 된단 말이예요.
『법화경』에도 이런 비유가 나오잖아요. 자기 주머니 속에 엄청나게 값이 나가는 다이아몬드가 하나 들어 있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길거리에서 동전을 구걸한다고 말이예요. 도가 자신의 눈앞을 벗어나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마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깨달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에요. 누구에게나 언제나 도가 있습니다. 사실은 사람이 있고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도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확인하지 못하면, 마치 보석을 가지고서 거지 노릇하듯이 진리 속에서 망상에 시달리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부하여 도를 깨달아야 도의 혜택을 누릴 수가 있죠. 자기 주머니 속의 다이아몬드를 발견하면 그걸 가지고 잘 먹고 잘 살듯이, 도를 확인하면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어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지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다만 가려서 선택하지만 말라.”
문제가 뭐냐 하는 게 딱 지적되어 있죠. 가려서 선택하는 게 문제다. 도가 어려운 게 아니고 분별이 문제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분별해서 개념을 세우는 그게 문제다 이 말이죠. 도가 어려운 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 도를 알려면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바윗덩어리나 나무토막처럼 죽어야 하느냐? 그런 건 물론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분별이 도가 아니라고 하니까 무분별이 도라고 다시 분별하는 짓입니다. 분별이 도가 아니듯이 분별이 없는 무분별 역시 도가 아닙니다. 분별과 무분별은 또 하나의 분별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이 망상이라면 분별 안하면 된다’고 이해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렇게 분별과 무분별, 있음와 없음의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 중도(中道)는 꿈도 못 꾸는 겁니다. 중도에선 양쪽이 없어요. 아무리 분별해도 분별이 없고, 아무 분별 없는 곳에서 얼마든지 분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으로는 전혀 접근할 수가 없어요. 잘 보십시오. 가리켜 드립니다. “도가 뭡니까?” “마이크입니다.” “도가 뭡니까?” “마이크입니다.” 만약 믿음이 깊은 사람이라면, “도가 뭡니까? 마이크입니다.” 이 말에 앞뒤가 아득해질 겁니다. 즉각 바로 와닿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면 다행이고 와닿지 않으면 앞뒤가 아득해질 것입니다. ‘도대체 저게 무슨 소리냐?’ 하고 멍할 것이란 말이죠. 이렇게 까마득하고 멍해야 공부하는 입장에 서는 겁니다. 앞뒤가 캄캄해서 생각이 갈 곳을 잃어버려야 비로소 올바른 공부의 길로 들어갈 가능성을 가집니다. 그런 처지에서 계속 이 문제를 마주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문득 체험이 옵니다.
인생은 꿈과 같다고 그러잖아요? 한 번 지나가 버리면 그만이죠. 모든 것들이 허망하게 지나가 버리지만, 오지도 가지도 않는 것이 분명 있습니다. 바닷가 또는 호숫가에 서서 바람부는 날 물결이 밀려오는 걸 쳐다보세요. 물결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사라지고 밀려왔다 사라지죠. 물결은 굉장히 허망하죠. 그러나 물은 그 허망함 속에서 애초에 오지도 가지도 않죠. 물결을 보면 허망하기 짝이 없지만, 물을 보면 허망함은 없습니다. 보이는 것은 물결이니 물을 보는 것은 인식이 아니라 지혜죠. 보이는 물결의 모양을 분별하여 어느 물결이 참된 물인가를 아무리 헤아려봐야 어리석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헤아리지 않으면, 어느 물결을 보아도 물 아닌 것이 없습니다.
도(道)도 비슷합니다. “어떤 것이 도인가?” 하고 우리는 묻지만, “이것이 바로 도이다.”라고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별에 발 딛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도와 도 아님이 따로 없어요. 당장 눈앞에 있는 이것(손가락을 세우며)이 언제나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도는 ‘안다’ 혹은 ‘모른다’ 하는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럼 도대체 진실은 뭐냐? (탁자를 두드리며) 이것입니다.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이 언제나 변함없을 뿐이죠. 도를 생각하든 세속사를 생각하든 무얼 하든지 간에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은 변함없이 이것입니다. 다른 것이 없어요. 하늘의 별을 관찰할 때에도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이고, 전자 현미경으로 원자를 관찰할 때에도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이고, 음악을 하고 미술을 하고 문학을 하고 연극을 하고 운전을 하고 일을 할 때에도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입니다.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은 뭐냐? 무엇이라고 하면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이 아닙니다. 도, 마음, 진리, 법, 본질 등의 이름은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에 붙인 이름입니다만,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에는 본래 이름이 없지요.
이제 “도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시계입니다.”라고 답합니다. 자, 그럼 시계를 보면 시계에 있는 쇠나 플라스틱이나 유리가 법이냐? 그건 아니에요. 그건 쇠고 플라스틱이고 유리지요. 그럼 시계라는 이름이 법이냐? 그것도 아니에요. 시계 안에 법이 있냐? 바깥에 있냐? 가운데 있냐? 이렇게 따져서 법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럼 뭐가 법이냐? 시계가 법이죠. 뭐가 법입니까? 시계입니다! 한 번 스스로 확인해봐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모두가 개념에 불과한 겁니다. 종교는 개념이 아닙니다. 요즘 종교 문제로 나라 안팎이 굉장히 시끄럽잖아요? 종교란 이름으로 모두가 개념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그런 온갖 시비와 갈등이 일어나는 겁니다. 종교를 개념화시켜서 그 개념에 집착하니 시비와 갈등이 있어날 수밖에 없지요.
『금강경』에 보면 “성인(聖人)은 무위법(無爲法)으로서 범부(凡夫)와 차별이 된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무위법이기 때문에 성스럽다는 뜻이에요. “무위법”이라고 하는 것은 개념을 세워서 취하고 버리고 하는 일이 없는 것이죠. 그러니 개념을 세워서 “성스러운 것은 이런 것이고, 세속적인 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전혀 성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개념을 세워 분별하는 것이 바로 세속이에요. 이처럼 우리가 개념에 얽매이면 개념들은 항상 상대적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난다 말이예요. 종교가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해방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투쟁하게 만든다면, 이런 종교는 사라져야 됩니다. 이런 종교는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단 말이에요.
물론 사람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어떤 세뇌랄까 최면같이 끊임없이 어떤 개념을 반복하여 주입시켜서, “진리는 이런 것이고,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교육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개념에 오염되어 로봇처럼 프로그램된 대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은 자신의 삶이 아니잖아요. 꿈 속에서 헤매는 것일 뿐, 깨어있지 못한 겁니다. 사실 종교뿐만 아니라 세속의 삶이란 것이 모든 측면에서 그렇게 주입되고 교육된 개념에 얽매여 살아가는 것이죠. 심지어 우리가 타고난 본성이라고 여기고 있는 욕망이나 감정도 좋아하고 싫어하는 측면에서는 역시 교육된 측면이 많이 작용합니다.
선(禪)이니 불교니 하는 이름 아래에서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런 모든 꿈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꿈을 진실이라 여기고 꿈 속에서 헤매는 것을 불교에서는 미혹(迷惑)이라고 하죠. 속아서 헤맨다는 뜻입니다. 꿈속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꿈을 찾아서 그 꿈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중생(衆生)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행복한 꿈은 없습니다. 행복은 불행으로 말미암아 느끼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행복이 있으면 반드시 불행이 있습니다. 아직 불행이 찾아오기 전에도 불행하게 될까봐 늘 두렵죠. 꿈은 결코 완전한 행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꿈에서 깨어나라고 하는 겁니다. 꿈에서 깨어나면 행복도 없고 불행도 없어요. 꿈에서 깨어나면 모든 분별과 개념에서 풀려나니, 시비와 갈등에서 자유롭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시비와 갈등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참된 종교이고, 이런 종교는 인류 아니 우주 전체를 하나로 통합하고 둘 아닌 세계, 갈등이 없는 세계로 만듭니다. 그런데 거꾸로 종교가 개념화되면 오히려 갈등을 불러일으킨단 말이에요. 역효과를 낸다 이겁니다. 그래서 종교를 공부하려면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 올바른 공부일까요? 어떤 개념이나 분별에도 물들지 않은 이것(탁자를 두드리며) 하나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공부입니다.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에 통하게 되면, 보고․듣고․느끼고․아는 모든 경우에 다만 이 하나의 올바름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개념을 필요에 따라 사용하면서도 어떤 개념에도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을 하면서도 말하지 않고, 생각하면서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비유로 말하면, 꿈 속에서 깨어 있는 것과 같아요. 꿈 속에서 깨어 있지 못하면 꿈에 말려 들어가 온갖 허망한 일에 빠져서 헤어나오질 못합니다. 꿈 속에서 온갖 슬픔과 즐거움과 사랑과 미움 등의 갈등을 다 겪게 되겠죠. 꿈 속에서 깨어 있으면 슬퍼해도 슬픔이 없고 기뻐해도 기쁨이 없어요. 모르는 사람이 이런 말을 들으면 뜻도 없는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말의 뜻이 모순되니까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공부를 해서 진실한 모습 즉 실상(實相)을 맛보면 생각으로는 모순되는 것들이 아무 모순 없이 모두 분리되지 않는 하나임이 밝혀집니다. 모든 모순과 분열이 실상에서는 전혀 모순도 분리도 없는 하나입니다. 그러니 실상은 생각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망상이 곧 실상이다.”라거나,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라거나,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라거나, “하나가 다수요 다수가 하나다.”라거나, “한 순간이 영원이요 영원이 한 순간이다.”라거나 하고 뜻이 모순되는 말을 흔히 하는 것은, 본래 분열도 모순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심명 첫머리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다만 가려서 선택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물이 어떤 것인가를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고 직접 가리켜 주려면, 그 사람을 데리고 물가에 가서 손으로 물을 휘저으며 “이것이 물이다.” 하고 가리켜 주겠지요. 직접 물을 가리켜 주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모든 개념에 얽매여 있지 않은 실상을 가리키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념으로 설명할 수는 없고 언제나 바로 직접 가리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는 말입니다. 세계의 실상을 불교에서는 마음이라고 부르고, 그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바로 가리킬까요? 말과 행동을 통하여 바로 가리킵니다.
마음을 바로 가리키는 말과 행동을 ‘화두(話頭)’라고도 합니다. 예컨대 “부처가 뭡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뜰 앞의 잣나무이다.”라고 답했어요. 마음이니 부처니 도(道)니 하는 것은 유일한 실상에 대한 다양한 이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음이라 하든 부처라 하든 모두 유일한 하나의 실상을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니 “뜰 앞의 잣나무이다.”라고 답했는데, “뜰 앞의 잣나무이다.”가 바로 화두입니다. 물론 이것은 저기 뜰 앞에 서 있는 잣나무라는 사물이 곧 부처라고 이해한 개념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이 무엇인가를 묻는 사람에게 손으로 물을 휘저어 보이듯이, 부처가 무엇인지를 묻는 사람에게 “뜰 앞의 잣나무이다.”고 직접 가리켜 주는 것입니다. 털끝만한 틈도 없이 완벽하게 가리켜 준 겁니다. 개념에는 맞고 틀리고가 있지만, 직접 가리키는 실상에는 맞거나 틀리는 차별이 없어요. 언제나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가리킵니다. 부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저는 이렇게(탁자를 두드리며) 답합니다. 한 치의 남음도 모자람도 없이 정확하게 가리킵니다, 이렇게(탁자를 두드리며).
그러나 마음의 발길이 생각 쪽으로 간다면 벌써 이걸 놓쳤어요. 마음의 발길이 이쪽(탁자를 두드리며)으로 와야 생각을 하면서도 생각이 아닌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이 분명해지게 됩니다. 이 실상은 언제나 당장 여기에서 바로 가리킬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은 간접적으로 가리킬 수 있는 게 아니고, 시간차를 두고 가리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탁자를 두드리며) 직접적으로 즉각적으로 바로 드러내고 바로 가리킬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선(禪)을 직지선(直指禪)이라고도 합니다. 마음의 진실한 모습에선 어떤 틈도 있을 수 없습니다. 틈이란 전부 생각이 만들어내는 헛된 것입니다. 꿈을 진실이라고 여기는 순간 꿈 속의 온갖 모습들이 따로따로 있는 다른 사물처럼 보이듯이, 생각에 말려드는 순간 온간 틈이 생겨서 따로따로 차별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꿈을 깨면 그 모든 차별은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실상은 ‘불이(不二)’ 즉 ‘둘이 아니다’고 합니다. 조금의 틈도 없기 때문에 또 ‘여여(如如)하다’고도 합니다. 진실로 둘이 아니고 진실로 틈이 없다면, 지금 말하고 있는 이런 말들도 모두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을 하되 말이 없고, 생각을 하되, 생각이 없고, 행동을 하되 행동이 없다고 합니다.
“부처가 뭐냐?”란 물음에 운문 스님은 “동산이 물위로 간다.”고 했습니다. 둘 없고 틈 없이 “동산이 물위로 간다.”입니다. 바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가리키는 자도 없고, 가리키는 대상도 없고, 가리키는 행위도 없이 바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만 “동산이 물위로 간다.”일 뿐, 그 이상도 없고 그 이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다만 가려서 선택하지만 말라.”입니다.
Prajna paramita Skt / Imee O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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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