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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http://www.iranicaonline.org/articles/ayyubids
아이유브 왕조(Banu Ayyub)는 12세기 중반 잔기 왕조의 시리아 방면 군대에서 득세한 쿠르드인 귀족 가문이다. 1168년 이집트를 장악한 아이유브 왕조는 곧이어 예멘, 시리아, 자지라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그들은 13세기 중반의 정치적 위기를 겪으면서 대부분의 영토를 잃어버렸지만, 그 뒤에도 얼마 동안 두 개의 작은 공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하마에서 1340년까지, 히슨 카이파에서 1462년까지) 또 상당수의 아이유브 가문 일원들이 14세기 초반까지 맘루크 술탄 치하에서 연금 생활자로 잔존했다.
아이유브 왕조의 시조인 샤디는 12세기 초반 쿠르드-아르메니아 도시인 드빈의 유력자였다. 이븐 할리칸에 따르면 그는 드빈에서 "가장 귀하고 존경받는 가문 사람"이었다.(*1) 샤디의 부친의 이름은 마르완인데, 그 이름 말고는 알려진 것이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샤디는 하드바니야 부족 휘하에 있던 라와디야 씨족의 일원이었으며, 라와디야 씨족은 드빈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쿠르드인 집단이었다. 즉 아이유브 왕조의 조상들은 흔한 목축민이 아니라, 촌구석이긴 해도 매우 복잡한 지역에 터를 잡고 살던 정치-군사적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완전히 권력을 장악한 뒤에 몇몇 아이유브 왕조 사람들은 그들이 쿠르드인이 아니라 아랍 귀족의 후예라는 설명을 지지하기도 했는데, 이에 따르면 그들의 혈통은 murra bin 'Awf, 혹은 우마이야 가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주장은 완전히 조작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Minorsky에 따르면 라와디야 씨족은 815년에 타브리즈의 총독이었던 아랍 장군 라와드 아즈디의 후손들일 가능성이 있다.(*2) 이들은 점차 쿠르드화된 뒤 10세기 후반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살던 하드바니야 부족 내에서 최고 씨족으로 대두했고, 그 중 한 갈래가 11세기경 드빈 지역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만약 Minorsky의 설이 사실이라면, 자신들이 아랍 귀족의 후예라는 아이유브 왕조의 주장도 정확한 사실에 대한 기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이유브 가문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130년 이후의 일인데, 이 때 튀르크인 군벌이 쿠르드인 군주가 지배하던 드빈을 점령하자 샤디는 가족을 이끌고 드빈을 떠났다. 샤디는 당시 성인이 된 두 아들, 나즘 앗 딘 아이유브와 아사드 앗 딘 쉬르쿠와 함께 이라크로 갔고, 셀주크 제국 치하의 이라크 총독이자 드빈 출신의 친구였던 무자히드 앗 딘 비흐루즈의 연줄을 이용해 티크리트의 영주가 되었다. 샤디는 얼마 안 가 죽고 장남 아이유브가 그 뒤를 이었는데, 여러 정치적 우여곡절 끝에 1138년 아이유브 형제는 모술의 아타벡인 이마드 앗 딘 잔기 휘하에 복무하게 되었다. 그들은 곧 잔기의 휘하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부하가 되었으며, 잔기의 아들인 누르 앗 딘 마흐무드(재위 1146-1174) 시대에도 높은 지위를 유지했다.
1168년 쉬르쿠는 누르 앗 딘의 3차 이집트 원정군의 지휘를 맡아 이집트를 차지하고, 파티마 왕조의 허약한 칼리프 알 아디드로부터 강제로 수상 자리를 넘겨받았다. 그러나 그는 몇 달 안 가 죽었고, 조카인 살라흐 앗 딘 유수프가 수상 자리를 이어받았다. 서방 세계에 "살라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살라흐 앗 딘야말로 아이유브 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뛰어난 수완으로 이집트의 반발 세력을 모두 진압하고, 1174년 주군인 누르 앗 딘이 죽은 뒤에는 시리아 지역도 차근차근 정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1183년에는 시리아의 마지막 잔기 왕조 거점이었던 알레포를 점령했고, 1186년에는 모술 역시 속국으로 만들었다. 물론 살라흐 앗 딘의 업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그가 1193년에 죽을 때까지 벌인 십자군과의 전쟁이다. 그의 후예들이 아르메니아와 자지라 방면으로 지배 권역을 더 넓히긴 했지만, 어쨌든 살라흐 앗 딘이 정복한 영역이 이후 아이유브 왕조의 세력권을 확정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 글의 맥락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살라흐 앗 딘이 구성한 정치 시스템, 즉 향후 반세기 동안 그 후계자들의 사고 방식, 여망, 정치적 목적의 기초적 뼈대를 이루게 되는 시스템이다. 대략 "친족 연맹체" 정도로 부를 수 있을 법한 이 정치 시스템은 셀주크 제국과 잔기 왕조의 제도에서 유래했으며, 아르메니아에 살았던 살라흐 앗 딘의 조상들이 가지고 있었던 정치 구조와도 유사한 것이었다. 이 시스템의 가장 기본적인(동시에 묵시적인) 원칙은 국가 내에서 정치적 권위는 어떤 일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지배 가문의 남성 유력자들이 공유한다는 것이었다. 이 권위의 공유는 군주가 자기 가족들을 국가 내의 독자적 영지에 분봉함으로써 실현되며, 분봉된 군주들은 지위를 세습하고 자치권을 가진다. 물론 지배 가문 내에는 가문 전체를 아우르는 최고 지도자가 있고, 그는 다른 분봉왕들로부터 어느 정도 존중을 받는다. 그러나 그 최고 지도자에게 붙는 거창한 칭호들과는 달리, 그는 휘하 분봉왕들에 대한 명목상의 권위를 실질적인 권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어떤 행정적 수단도 갖지 못했다. 친족 연맹체 내의 통제와 협력은 최고 지도자가 군사적으로 크게 우세할 때, 혹은 최고 지도자가 강력한 가족적 권위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이루어졌다. 가족적 권위란 다시 말해서, 분봉왕들이 그들의 형이나 삼촌보다는 아버지가 최고 지도자일 때 더 쉽게 복종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같은 시스템에서는 군주들 사이의 친척 관계가 그들의 정치적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3)
살라흐 앗 딘의 정치적 관점이 위와 같은 고려 하에 형성되었으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1183년 알레포를 점령한 뒤 그가 정복지들을 여러 개의 분봉 지역으로 나눈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가 아들 셋, 조카 하나, 그리고 동생을 주요 후계자들로 세운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살라흐 앗 딘의 후계자들의 역사는 매우 복잡하다. 하지만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살라흐 앗 딘 이후 아이유브 연맹체의 최고 지도자 지위를 계승한 두 후계자들은 살라흐 앗 딘이 세운 정치 체제를 거의 바꾸지 않고 조율하는 선에서 만족했다고 할 수 있다. 살라흐 앗 딘의 동생인 알 말리크 알 아딜 사이프 앗 딘(재위 1200-1218)은 주요 분봉왕 자리에 자기 아들들을 앉힘으로써 권위를 세울 수 있었다. 반면 그의 아들인 알 말리크 알 카밀 나시르 앗 딘(재위 1218-1238)은 동생이나 사촌 형제들을 분봉왕으로 둬야 했고, 그들을 약간이나마 통제하기 위해서는 외교적 수단이나 군사적 위력에 의존해야 했다. 알 카밀은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영지를 두 아들, 알 말리크 알 아딜 2세와 알 말리크 앗 살리흐 나즘 앗 딘 아이유브에게 나누어 물려주었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분봉왕들 사이에서 서열을 정하기 위한 긴 투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마지막 경우에는 문제가 크게 달라졌는데, 1238년에서 1245년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들이 아이유브 연맹체의 성격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정치 구조의 이 같은 변화는 1240년부터 1249년까지 아이유브 왕조의 명목상 최고 지도자였던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활동에 따른 것이다. 거칠게 말해서, 앗 살리흐가 시도한 것은 연맹체(혹은 최소한 그가 지배하고 있던 영역들)를 군주의 동료나 친척들이 아니라 군주의 부하 관리들이 다스리는 중앙집권적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앗 살리흐가 이런 개혁을 추진하게 된 원인으로는 그의 권위적인 성격, 혹은 그가 친척들과 전통에 대해 느꼈던 뿌리깊은 이질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질감 역시 친족구조의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앗 살리흐의 시대는 아이유브 왕조의 4대 째에 해당하므로, 분봉왕들은 더 이상 가까운 친척이 아니라 가문 시조만 같은 독립 군주들이었다. 둘째로, 앗 살리흐는 명목상 아이유브 가문의 최고 지도자였지만 다른 분봉왕들에게는 사촌이나 조카에 불과했고, 다른 분봉왕들에 비해 항렬이나 권위가 특별히 앞서는 사람이 아예 없었다. 이 같은 사실들은 같은 시기에 북부-중부 시리아 지역에서 알레포의 분봉왕 알 나시르 유수프(재위 1236-1260)가 추진한 중앙집권적 정책(앗 살리흐보다는 다소 약하지만)에도 적용될 수 있다.
앗 살리흐의 중앙집권화 정책의 중요성은 그가 죽은 뒤에야 드러났다. 그가 죽은 뒤 불과 6개월 만에 그의 휘하에 있던 바흐리 맘루크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개중 한 명인 이즈 앗 딘 아이바크를 술탄의 자리에 앉혔다. 시리아에 남아 있던 알 나시르의 잔존 아이유브 세력은 1260년 몽골의 침입으로 붕괴되었고, 결국 맘루크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과거 아이유브 분봉왕들이 다스리던 땅들은 이제 카이로를 중심으로 한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일부가 되었고, 그 국가의 공적 권위는 단 한 명의 전제 군주에게 귀속되었다. 이 같은 변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새로운 지배자들은 왕실 맘루크로 훈련받으면서 권위란 단 한 명의 군주에게 체화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맘루크들의 정치적 훈련과 경험은 주로 앗 살리흐의 중앙집권화 정책을 위해 시행되었으며, 그들은 그 외에 다른 정치적 시스템은 알지 못했다.
이상의 요약을 통해 봤을 때, 과연 아이유브 연맹체를 특별히 "쿠르드 국가"로 보는 것이 합당할까? 정치 구조의 측면에서 보자면, 아이유브 연맹체의 통치 방식은 확실히 그들의 발원지에서의 통치 방식과 비슷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통치 구조는 동시대 튀르크 국가들의 통치 구조와도 별 차이가 없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아이유브 왕조의 통치는 단순히 셀주크 제국의 계승 국가 수준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한 수준이다.
문화적 측면 역시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아이유브 왕조가 다스린 영역은 대부분 아랍어 사용 지역이었으며, 많은 아이유브 왕공들이 아랍 문학과 이슬람 신학에 능통했다. 그러나 그들의 발원지 및 이란 문화와의 지속적 연계에 대한 증거들 역시 적지 않다. 알 말리크 알 아딜과 그의 아들 알 말리크 알 무아잠 이사(?~1227)는 쿠르드어, 심지어 페르시아어를 구사했다. 특히 알 무아잠은 특별히 이란에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그가 후원한 파트흐 이븐 알리 분다리의 두 아랍어 저서에서 드러난다. 하나는 왕서(Šāh-nāma)의 번역본이고(*4), 다른 하나는 이마드 앗 딘 카팁 이스파하니가 쓴 셀주크조의 역사의 요약본(*5)이다. 그러나 이런 번역 작업이나 페르시아 문학 고전에 대한 관심이 아이유브 시대에 널리 유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신학 영역에서 이란 출신 학자들의 개인적 영향력이 강했던 것은 사실이다. Dominique Sourdel에 따르면 1150년에서 1250년 사이 알레포에 있는 마드라사 교수들의 거의 3분의 1이 쿠르드인이나 이란인 출신이었다. 다마스쿠스나 이집트까지 그 정도의 비율이 유지되었을 리는 없지만, 적어도 무시할 수 없는 정도 수준은 되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부분은 쿠르드 왕조인 아이유브 왕조 시대가 아니라 튀르크 왕조인 잔기 왕조 시대, 특히 누르 앗 딘 마흐무드가 다스리던 12세기 중후반부에 시리아로 온 것이었다.(*6)
쿠르드인들의 존재가 가장 눈에 띄게 드러나는 분야는 군대였다. 이들의 군대 유입 역시 아이유브 왕조가 권력을 잡기 오래 전, 모술의 이마드 앗 딘 잔기가 쿠르드인이 많이 사는 모술 북쪽의 산악지대에서 신병을 모집하면서 시작된 일이다. 비록 튀르크인 병사들에게 다소 업신여겨지기는 했지만 쿠르드인들 역시 기마 궁술에 익숙했으며, 사회적으로는 몰라도 전술적으로는 다른 잔기 왕조의 군대에 쉽게 융화될 수 있었다. 잔기가 쿠르드인들을 모집한 이유는 두 가지 문제 때문이었다. 우선 당시 시리아와 자지라 지역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주로 충원되는 튀르크인 굴람들을 많이 끌어들이기 어려웠고, 이 때문에 맘루크들을 주력 군대로 활용할 수가 없었다. 대신 튀르크멘 부족민들은 많이 있었지만, 그들의 최우선 충성 대상은 출신 부족이었기 때문에 정규군으로 양성하기가 어려웠다. 이 같은 상황에서 쿠르드인 용병들은 값싸고 믿을만한 대안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잔기 왕조의 군대에서 쿠르드인들이 소수파 이상의 비중을 차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살라흐 앗 딘의 집권 이후 쿠르드인 병력이 늘어나긴 했지만, 이 때에도 전체 병력 중에서는 소수 비중이었으며, 가장 높게 잡아 봐도 3분의 1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살라흐 앗 딘 군대의 쿠르드인들은 가끔 개인 단위로 징병되어 배치되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부족 단위 부대로 편성되었는데, 그 중 이름이 알려진 것으로는 학카리야(가장 수가 많고 강력했다), 메흐라니야, 호마이디야, 자르자리야(*7) 등이 있었다. 그러나 살라흐 앗 딘 사후 이와 같은 부족 단위의 부대는 거의 기록되지 않았고, 쿠르드인 병사들은 개인 이름으로 등장하거나 그냥 통틀어서 "쿠르드인(al-Akrād)"이라고 불렸다. 사실 살라흐 앗 딘 사후 쿠르드인들이 아이유브 군대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크게 약해진 것 같다. 정치 엘리트 중 쿠르드인 아미르들의 숫자는 점점 줄고, 튀르크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유브 왕조의 마지막 20년 동안, 쿠르드인들의 정치-군사적 위상은 다시 높아졌다. 이는 두 개의 새로운 쿠르드인 집단들이 시리아에 이주해 왔기 때문이다(두 집단 모두 부족명보다는 출신 지역을 이름으로 삼고 있다). 그 중 첫 번째인 카이마리야는 1244-46년 사이에 시리아를 휩쓸었던 화레즘 도적떼를 뒤따라 왔다. 이들 중 몇 명은 알 나시르 휘하에서 가장 강력한 아미르가 되었으며, 맘루크 술탄 루큰 앗 딘 바이바르스(재위 1260-1277)의 군대에도 다수가 남아 있었다. 한편 두 번째 그룹인 샤흐라주리야는 1259년 몽골군에 쫓겨서 도착했다. 샤흐라주리야는 3천 명의 기병을 보유할 정도로 수가 많았지만 알 나시르의 정규군에는 편성되지 못했는데, 그들은 그저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쓸려나가고 남은 인간 잔해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아이유브 왕조는 상당한 숫자의 쿠르드인 군대를 활용했지만, 이는 그의 튀르크인 전임자들과 경쟁자들(잔기 왕조와 아르투크 왕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군대를 "쿠르드 군대"라고 부를 수는 없다.
미주
*1 . Beirut, I, pp. 255-56, tr. de Slane, p. 243]
*2. studies in Caucasian History, pp. 114-16, 123, 128-30
*3. The first to identify this system of politics seems to have been Barthold [Turkestan3, pp. 268, 306-07]. Further discussion of this tradition in Humphreys,From Saladin to the Mongols, pp. 66-75.
*4. ed. ʿA. Aʿẓam, Cairo, 1350/1931
*5. ed. M. Th. Houtsma, Recueil de textes relatifs a l’histoire des Seldjoucides, Leiden, 1886-1902, II
*6. D. Sourdel, “Les professeurs de madrasa a Alep aux XIIe-XIIIe siecles d’apres Ibn Šaddād,” Bulletin d’etudes orientales 13, 1949-51, pp. 85-115
*7 see, e.g., Abū Šāma, Ketāb al-Rawżatayn II, pp. 144, 179
참고 문헌
...은 원문에서 보세요 하하하
첫댓글 서양에 대해 온건적인 살라딘보다, 바이발스를 더 높게 쳐주는 이슬람인들이 많음...
요즘도 대외 강경파가 자국내에서 인기를 끌기가 (상대적으로) 쉽죠..................
이란백과에도 아이유브조 항목이 있었군요 몰랐습니다. 내용도 흥미롭구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