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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프로 첫 해를 2군에서 보낸 황덕균은 ‘내년이면 1군 무대를 밟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1년이 2년이 되고, 2년이 3년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새 자기보다 지명 순위가 낮았던 선수들이 하나둘 1군 무대를 밟는 걸 그는 넋놓고 바라봐야만 했다.
두산 유니폼을 입고, 입에 단내가 나도록 뛰고 또 뛰었지만, 그를 찾아온 건 1군 승격 통보가 아니라 방출 통보였다. 2004년 두산에서 방출된 황덕균은 갈 곳이 없었다.
“충격이었어요. ‘아, 말로만 듣던 방출이란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더라고요. 좀 방황하다가 군 문제부터 해결해야할 거 같아서 입대했죠. 소속팀이 있었다면 상무, 경찰청 문을 노크했을 테지만, 저같은 무적 선수한테 문호를 개방해줄 곳은 없었어요.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몸을 만들었죠.”
“야구는 해야겠고, 야구할 만한 곳은 없고. 그러다 사회인야구에서 뛰게 됐어요. 사회인야구 1부리그에선 프로 출신의 경우 2이닝까지 던질 수 있거든요. 그걸 활용해서 최대한 투구감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어요. 만약 그 기회마저 없었다면 전 아마 야구를 일찌감치 포기했을 겁니다.”
그즈음 황덕균이 만난 이가 ‘야생마’ 이상훈이었다. 이상훈 밑에서 그는 1년 반 가량 투구를 다시 배웠다.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투구 기술뿐만 아니라 마운드에서의 마음가짐까지, 제가 프로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걸지 배울 수 있었어요. 가장 중요한 건 이 선배와 만나고서 ‘다시 프로 무대에 뛰고 싶다’는 도전의식이 생겼다는 겁니다.”
자신감을 되찾은 황덕균은 KBO리그에 도전장을 내기 전 일본으로 날아갔다. 일본 오사카를 근거지로 하는 ‘서울 해치’란 독립야구팀에서 뛰기 위해서였다. 서울 해치에서 황덕균은 오랜만에 동료들과 함께 훈련하며 정식 경기 속에서 실전 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해치가 운영난으로 존립 자체가 어렵게 되자 황덕균은 어쩔 수 없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중국으로 가야 했다.
야구와의 인연이 끊길 것 같던 황덕균은 2011년 가을 드디어 프로 재입문의 기회를 잡았다. 9구단 NC가 선수 수급 차원에서 공개 트라이아웃을 실시한 것이었다. 트라이아웃에 도전한 황덕균은 인상적인 투구를 펼치며 NC 창단 멤버가 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NC가 1군 진입을 위해 1년간 퓨처스리그에서 뛰던 2012년. NC의 주축투수로 뛰며 10승을 기록했다. 비록 퓨처스리그에서의 10승이었지만, 황덕균에겐 1군에서의 10승만큼이나 큰 의미가 있는 기록이었다.
그랬다. 2002년 프로에 입문했지만, 2012년까지 그는 단 한번도 1군 무대를 밟지 못했다. 다른 선수들에겐 평범한 일상인 1군 무대가 그에겐 메이저리그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지는 곳이었다. 퓨처스리그 성적만 보자면 그는 2013년 1군 데뷔를 치르는 NC 투수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려놓을 만 했다. 그 마지막 시험대가 그해 시범경기였다.
“시범경기 마지막 날이었을 거예요. 상대가 SK였죠. 속으로 ‘이 경기만 잘 던지면 1군 무대를 밟겠다’ 싶었죠. 그런데 SK 타선이 이명기, 최정으로 이어지더군요. 거기다 대타로 박정권이 나오고. 가뜩이나 그날 문학구장에 팬들까지 많이 찾아오시면서 심장이 ‘막’ 뛰더라고요. 그때 잘 던졌어야 했는데. 휴우-. 완전히 경기를 망쳤어요.”
시범경기 마지막 등판에서 최악의 투구를 펼친 황덕균은 개막 1군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는데 실패했다. 2군에서 시즌을 시작한 황덕균은 그해 8월이 넘도록 1군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다 2013년 9월 8일. 가까스로 기횔 잡았다.
무조건 잘 던지겠다는 다짐이 너무 강했던 것일까. 황덕균의 제구는 흔들렸고, 가운데로 공이 몰리기 일쑤였다. 결국 황덕균은 아웃카운트 하나 잡지 못한 채 2실점하고서 마운드를 내려갔다. 11년을 기다렸던 꿈같은 순간이 채 5분도 되지 않아 악몽이 되고 만 것이었다. 무엇보다 1군 등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번만 더 기회가 생기면 정말 잘 던질 거 같았어요. 그땐 침착하게 투구할 수 있을 거 같더라고요. 그런데 다시 기회가 오지 않았어요. 기회는 고사하고, 그해 시즌 끝나고서 방출됐죠.”
NC는 방출 통보 전 황덕균에게 스카우트 변신을 제안했다. 창단 멤버에 대한 NC의 배려였다. 당시 황덕균은 NC 제안에 감사해하면서도 한편으론 고민했다. 마침 10구단 kt에서 “계속 선수로 뛸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한 것이었다.
“제가 가장이다 보니까 가족을 생각하면 스카우트로 변신하는 게 맞았어요. 그때 아내에게 물었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요. 전 아내가 ‘이제 그만 뜬구름 잡고, 프런트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내가 kt 이야기를 듣고 정말 좋아했어요. 저 보고 그러더라고요. ‘지금 이렇게 야구를 관두면 아쉽지 않겠느냐’고. ‘당신이 계속 야구선수로 뛰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내가 나가서 돈 벌어올테니 당신은 당신이 하고 싶은 야구에 올인하라’고요. 3일 정도 고민했죠. 그러다 ‘이것만은 꼭 하고 물러나자’는 생각으로 kt에서 계속 현역으로 뛰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내의 조언에 큰 힘을 얻은 황덕균은 NC 배려를 정중히 사양하고, kt 유니폼을 입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이것만은 꼭 하고 물러나자’에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2014년 미국 애리조나에서 열린 kt의 첫 스프링캠프에서 황덕균은 NC와의 연습경기에 등판했다. ‘친정팀’을 상대로 한 등판이라 그런지 황덕균은 공 하나하나를 정성 들여 던졌다. 결과는 좋았다.
“정말 1군에서 ‘딱’ 1승만 거두면 좋겠어요. 다른 선수들은 한 시즌 10승, 통산 100승 달성이 꿈일지 몰라도 전 통산 1승이 마지막 목표에요. 승리투수 되고서 진짜 인터뷰 한번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꼭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거든요. 뭐냐고요? 절 지켜주신 분들께 정말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자신을 지켜준 이들에게 통산 1승을 바치기 위해 황덕균은 2014년 퓨처스리그에서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전천후 투수로 뛰었다. NC 때처럼 kt도 신생팀이라, 젊은 투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황덕균은 NC에서 뛸 때처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젊은 후배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아낌없이 나눠줬다. 이번에도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황덕균은 이해 퓨처스리그에서 24경기에 등판해 101이닝을 던져 8승 5패 1세이브 평균자책 4.46를 기록했다. 다승 공동 5위, 평균자책 10위, 이닝수 5위의 좋은 성적이었다. 특히나 팀 내 투수진에서 박세웅 다음으로 투구 성적이 뛰어났기에 많은 야구 관계자는 kt 개막 엔트리에 황덕균이 포함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없었다. 황덕균은 NC에 이어 kt에서도 팀의 1군 데뷔를 2군에서 지켜봐야 했다.
“좀 아쉽긴 했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어요. 저보다 잘 던지는 투수가 많았고, 젊은 투수들이 하루빨리 1군에 적응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1승까지 13년을 기다렸는데 1년 더 못 기다리겠냐’ 싶더라고요. 아니나다를까. 4월 하순이 되니까 1군 승격 기회가 오더라고요. 정말 이번엔 기회를 놓치치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4월 17일 삼성전에 등판한 황덕균은 1이닝을 삼자범퇴로 깔끔하게 막았다. 탈삼진은 없었지만, 2년 만의 등판치곤, 무엇보다 13년 프로 인생에서 2번째 등판치곤 매우 훌륭한 결과였다. 이날 호투를 발판삼아 4일 뒤 황덕균은 ‘운명의 SK'와 다시 만났다.
“NC 소속일 때 시범경기에서 SK 타자들에게 호되게 당하면서 개막 엔트리에 들지 못했어요. 2013년 1군 데뷔 등판 때도 SK에 난타당하면서 바로 2군으로 내려갔고요. 이번마저 SK전에서 부진하면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정말 죽을 각오로 던졌는데….”
1.2이닝 동안 황덕균은 3볼넷으로 3실점했다. SK의 높은 벽을 이번에도 뛰어넘지 못했다. 3일 뒤인 24일 넥센전에서 1이닝 무실점으로 호투를 펼쳤지만, SK전 3실점의 여파가 컸던지 그는 넥센전을 끝으로 2군행을 통보받았다.
“현역선수로 뛰는 게 전 정말 좋았어요. 하루하루가 행복했으니까요. 하지만, 정작 1군에 합류하면 정반대의 기분이 들었어요. 솔직히 하루하루가 힘들고, 고통스러웠어요. ‘여기서 못 던지면 바로 2군으로 내려간다’는 압박감이 말도 못하게 컸으니까요. 그걸 이겨냈다면…절 지켜주신 분들에 대한 인터뷰를 이미 한번은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황덕균은 올 시즌 후반기에 방출 통보를 받았다. 황덕균은 kt 방출에 좌절하지 않았다. 대신 넥센 테스트장에 찾아가 다시 공을 던졌다.
“‘이대로 야구를 그만두기 아깝다, 내 진가를 보여주겠다’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14년 동안 누구보다 제가 제 실력을 압니다. 다만, 꼭 한 가지 이루고 싶은 게 있어서 넥센 테스트장에 찾아간 거예요. 일전에 형님한테 말씀드린 것처럼 정말 꼭 승리투수 한번 되고 싶습니다. 승리투수가 되서 절 지금까지 지켜준 아내와 가족 그리고 세훈이 형에게 꼭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 그리고 제 아이들이 컸을 때 그래도 아빠가 프로에서 1승을 거뒀던 투수라는 걸 꼭 알려주고 싶습니다. 전 그 꿈을 위해 이대로 야구를 그만두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든 도전하고, 또 도전해서 반드시 제 꿈을 이뤄야만 합니다.”
운이 따른 것일까. 황덕균은 테스트에 합격하면서 넥센과의 내년 시즌 계약에 성공했다. kt 때보다 연봉은 깎였지만, 황덕균에게 그건 큰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페이스메이커라도 좋습니다. 1등을 못해도 좋습니다. 저보다 뛰어난 투수들이, 저보다 젊고 가능성 있는 투수들과 함께 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제겐 큰 행운입니다. 페이스메이커로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도 없을 거 같아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다시 한번 죽을 각오로 뛰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꼭 저와 팀 그리고 절 아껴주신 분들을 위해 꼭 완주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직관갔었습니다 ㅎㅎ
오늘은 넥센의 선발이 박주현이라 웬지 이길 거 같은데? 하는 그런 느낌때문에
직관을 갔죠.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빨리 선발투수를 강판시켰습니다.
그리고 등장한 선수가 바로 황덕균.
지난시즌 초반 모습을 보였던 선수라 기억하고 있었는데
설마 이렇게 달라진 모습을 보일줄은 몰랐습니다.
덕분에 이겼다고 생각한 이 경기는 결국 주권이 물러나고
타선이 침묵하며 드라마같이 채태인에게 2점홈런 맞고
주효상에게 2타점 적시타를 맞으며
역전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황덕균 선수의 호투는 반가웠습니다.
올시즌 5번 직관가서 5전 전패... 개인적으로는 분명 아쉽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웃으며 경기를 즐길 수 있는건
경기장에 들어서면 들리는 신나는 음악과
그리고 선수들의 노력을 볼 수 있다는 것이죠.
황덕균 선수가 kt에서 못다이룬 그 꿈을 넥센에서 꼭 이룰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P.S.
개인적으로 넥센응원가들이 제 취향에 잘 맞는 게 많습니다.
kt 응원가도 물론 재밌는 게 많지만
오늘 너무 빨리 죽다보니 제대로 부른 기억이 없고
넥센 선수들 응원가만 앉아서 흥얼거렸네요.
날려라 넥센의 윤석민~ 부터 넥센의 임병욱 누구보다 빛나는 너잖아까지
하나하나 음색이 깨끗하고 가사가 좋아서 듣기 참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듣기 좋았던건 역시 윤석민 응원가,
그리고 김지수 선수 응원가가 좋더라고요. (박정음 응원가도 듣고 싶었는데 부상이라 안나왔네요.)
티켓값만 낮춘다면 자주가고 싶은데 돔구장의 특성인만큼 비싼 건 어쩔 수 없겠지요.
넥센이 포스트시즌에서 돌풍을 일으키길 응원합니다.(kt경기는 이제 더 안볼래 ㅠㅠ)
첫댓글 멋있다 정말...
진정한 프로야구 선수네요
“정말 1군에서 ‘딱’ 1승만 거두면 좋겠어요." 이 부분에서 괜히 눈물이 나네요..;;
앞으로 넥센에서 좋은 모습 오래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드라마는 아직 진행중이군요. 황덕균 선수의 간절한 바람이 이뤄지길 기도하겠습니다. 승리 인터뷰 꼭 보고 싶네요.
아내의 말 '지금 이렇게 야구를 관두면 아쉽지 않겠느냐’ ‘당신이 계속 야구선수로 뛰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내가 나가서 돈 벌어올테니 당신은 당신이 하고 싶은 야구에 올인하라’
정말 감동입니다. 이런게 사랑아닐까요? 부럽습니다. 기사 원문보니 외모도 이쁘던데 마음은 더 이쁘네요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