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테토스(Epictetus, 50년경-135년경)는 종교적 경향의 가르침으로 유명하며, 이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가들로부터 존경받았다. 에픽테토스는 저술을 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어록〉·〈제요〉는 제자인 아리아노스가 그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이다. 정치이론가로서 에픽테토스는 인간은 신과 인간을 파악할 수 있는 위대한 체계의 일원이라고 보았다. 소년시절 노예였지만 스토아 학파 무소니우스 루프스의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후에 자유민이 되었으며 절름발이에 늘 건강이 나빴다. AD 90년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그를 로마에서 추방했는데 황제는 자신의 폭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좋게 평가하는 스토아 학파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에픽테토스는 여생을 니코폴리스에서 보냈다.
에픽테토스(Epictetus)는 스토아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다. 노예로 태어났고 평생 다리를 저는 장애를 앓았지만 꿋꿋이 자신만의 행복을 누린 자유인이었다. 흔히 스토아학파는 ‘아파테이아(apatheia)’라는 정념이 없는 부동심의 상태를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념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상태에 이르기 위해 자연의 질서와 자신의 운명에 맞게 살아야 한다. 능력 밖에 있는 세속적인 행복이나 성공을 기대하기보다 자신의 욕구를 억제해야 한다.
운명(運命)이란 마치 ‘뱃사람이 바람의 방향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덕이 있는 자는 어떠한 고난에도 꺾이지 않는 일관된 태도를 갖는다. 운명에 따른 고통 자체를 바꿀 수는 없지만 고통에 대한 관점을 바꿀 수 있기에 행복하게 살기 위해 세상사에 대해 무덤덤하고 무감각한 태도를 유지한다. 이처럼 스토아학파는 인간이 우주의 자연의 법칙에 따라야 하는 점에서 숙명론이지만 인간의 욕망과 충동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 점에서 금욕주의다. 어떠한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면서 욕망을 줄이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렇다면 타인의 불운과 불행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타인이 곤경에 빠진 경우 돕고자 하는 마음이 인간의 본성이다.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孟子)는 이를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불렀으며 흄, 섀프츠베리, 스미스 등 서양의 많은 학자도 타자에 대한 연민을 도덕 감정의 기초로 삼았다.
그러나 에픽테토스는 불행한 타인을 돕지 말라고 조언한다. ‘너의 콧물은 스스로 닦아라(Wipe your own nose)’는 말로 타자에 대한 값싼 연민을 거부한다. 에픽테토스는 어떤 사람이 ‘내 콧물이 흐른다’고 하소연하니 ‘너는 손이 없냐’며 꾸짖는다. 이러한 냉혹한 조언은 불쌍하다는 감정에서 약자를 계속 도와주면, 타인에게만 의존해 평생 자신의 콧물을 스스로 닦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타자(他者)에 대해서나 자신에 대해서나 스토아학파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태도는 무관심(無關心)이다. 자신의 운명을 냉정하게 들여다보기 위해서 욕망에 휩쓸려서는 안 되며 불운마저 자신을 더 성장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자신을 운명의 지배자로 인식하고 스스로 자존감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탁월한 사람은 불운에 처한 자신에 대해 낙담하지 않고 불행에 놓인 타인을 동정하지 않는다. 다만 타인이 그러한 고통을 통해 더 높은 덕을 지닌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바랄 뿐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무엇보다 강조되는 오늘날 에픽테토스의 직설적인 화법은 다소 불쾌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평생 장애를 갖고 살았던 에픽테토스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었다. 오늘날 휠체어나 목발과 같은 보조기구를 주려는 값싼 동정심은 그를 불쾌하게 했을 것이다.
운명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의 불운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주는 교훈은 사회적 약자가 자립심을 갖게 하고 자존감을 높여주자는 것이다. 무한한 애정과 사랑만으로 각자의 불운과 불행을 넘어서기 어렵기 때문이다.
출처: 동아일보 2024년 05월 14일(화) [강용수의 철학이 필요할때(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