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 계절이 되는, 나는 할머니가 살았던 곳의 담벼락
을 거닐고 있었는데 문득 그 계절을 걷게 되면 내게 파도가
밀려오는 듯하고 나는 순간 놀라 다음 걸음을 걷고 또 놀라
그다음 걸음을 걷고...... 놀라서 걷는 걸음이 다음 걸음이
되는. 거기서 하염없이 멀어진 채로 떠돈다면 나는 파도의
걸음이 되는 듯하다고 파도의 걸음으로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기분이 좋아지고 문득 그 계절이 흘러드는.
그러면 꿈을 꿀 수도 있을 텐데. 어느 날엔가 불현듯 떠오
를 만한 꿈. 이 꿈 속에서는 누군가 사과를 하고 또 누군가
용서를 하고 나는 그 둘 다가 되어서 사과와 용서를 하고 그
래 미안해 그리고 괜찮아, 헤어나올 수 있을 거라고 이 꿈을
마저 꾼 다음에 어디로든 들어가버리자고 숨어버릴 수 있
다고. 문득 잊어버린 꿈을 꾸고 난 후가 되어 있었지. 그러
니 파도 속으로 들어가면 좋을 텐데. 바람 속인지 물속인지
모르는 채로 파도라는 것 속으로 들어가면 모든 게 서툴러
지는 듯하고 문득 그 계절이 되는.
계절은 흔들릴 수 있을까. 흔들렸어, 잠깐 흔들렸던 것 같
다고 방금 전 그 계절을 되돌아보며 멈칫했는데, 할머니?
하고 불러볼 수 있을까. 할머니? 하고 부르면서는 다시
할머니라고 부르고 싶은 다른 것들이 생겨나나, 그 계절이
된다면. 문득 그 계절이 감은 눈 속으로 흐르는 노래라면 고
추밭 너머에 있는 방파제라면 가을 평상으로 흘러드는 구름
의 숨결이라면 내 앞에서 생겨나는 것들에 대해서 할머니?
내 앞에서 가만히 있는 것들, 테킬라와 감귤과 소라와 창
문 너머 점멸하는 불빛에 대해서 할머니? 하고 불러보았는
데. 문득 그것들한테는 너라고 할 수도 있어서 그 계절이
되는. 할머니한테도 순간 너라고 불렀으므로 기이한 느낌
이 드는. 할머니한테 너라고 하다니, 나는 놀란 걸음으로
다시 걸어가고 다음 걸음을 놀란 채 딛다가도 문득 너는 누
구입니까.
너는 누구인가요. 그 계절에는 다만 일기를 쓰는 사람인
가요. 너는 어떤 사람인지. 문득 적은 일기로 그 계절이 되
는 사람인가요. 너의 일기로 계절은 흐른다. 흐른다. 파도
가 낸 길은 닿기도 전에 이미 젖은 채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너는 여자가 되기도 남자가 되기도 하나요. 그리움이 되기
도 하나요. 나는 닿을 수 있나요. 일기에 무엇을 적었습니
까. 나는들여다보려다가 머뭇거렸습니다. 이윽고 손대자
나는 퍼져나갔죠.
[기억 몸짓], 문학동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