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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章 용유진, 단계(端溪)에 가다 1. 용유진과 서문하는 말없이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몰골은 말이 아 니었다. 절벽에서 떨어질 때 이미 누더기가 된 용유진의 옷은 둘째치 고, 서문하의 보기 좋은 유삼도 걸레조각이 되어 있었다. 빙한풍은 한 편 대단하고 한편으로는 들은 것만큼 대단하지는 않아서 그들을 죽이 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옷을 얼어붙게 만들고 조각조각 부수는 것은 간 단히 해치워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서문하는 적잖게 다치기도 했다. 갓 회복된 용유진보다 운기 중이었던 서문하가 더 많이 다친 것은 얼핏 이상한 이야기 같았지만 용유진은 어렴풋이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억지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문하는 삼매진화를 끌어올려 저항하려고 했다. 거기 에 이유가 있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 일로 서문하의 자존심은 상해버렸다. 게다가 고고한 도학 자의 인상을 풍기던 그가 알몸에 가까운 몰골이 되니 우울함을 넘어서 비참한 심경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용유진은 되도록 그가 있는 쪽으 로는 시선조차 두지 않으려고 했다.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서문하가 더 욱 괴로워할 것 같아서였다. 이건 약간 문제가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빙한풍에 날려 절벽 아래 로 가랑잎처럼 떨어져 버렸었고, 그 결과 서문하는 부상을 입었다. 절 벽을 다시 올라가기는커녕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지 않는 가. 생각 같아서는 부축을 해서라도 협곡을 빠져나가고 싶은데 서문하 는 그런 손기를 거절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절벽 아래로 흐르는 개울 을 따라 쉬엄쉬엄 걷는 수밖에 없었다. 한없이 느린 걸음으로. 대개 협곡이라는 것은 사람이 이동하기 편한 구조가 아니다. 개울이 라도 있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사방에 무성하게 자란 잡목이요, 가시덩 쿨이었다. 이런 놈들은 겨울이라고 해서 시들어버리지도 않는다. 평상 시 같으면 간단히 뛰어넘을 바위들도 부상당한 노인, 그것도 자존심은 매우 강해서 도움의 손길을 거부하는 노인과 함께 가기에는 적잖이 힘 든 길이었다. 하지만 달리 하는 수가 없으니 그냥 걷는 수밖에 없었다. 용유진은 사실 마음이 조급한 상태였다. 표물, 표행만 생각하면 마 음이 무거워지는 것이다. 이장도에게 당한 보복은 둘째치고, 표물이 무 사히 도착했는지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한달음 에 절벽을 뛰어 올라가 표행을 추적해 보고 싶은데, 서문하를 이대로 두고 갈 수도 없었다. 평소 같으면 전혀 걱정을 않겠지만, 부상당한 몸 아닌가. 게다가 아마도 서문하는 이런 환경에서 생존하는 법을 모를 것 이다. 이 부분에서만은 적어도 그가 훨씬 고수였다. 그래서 그는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고,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하고, 필요 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빙한풍은 그들의 옷뿐 아니라 지니고 있던 물건조차 모두 휩쓸고 가 버렸기 때문에 변변한 물건 하나 없었다. 유일하게 도움이 될 만한 물 건은, 서문하가 그 상황에서도 놓치지 않은 것은 물론 혹시나 손상될까 봐 품에 안고 지키던 검 한 자루뿐인데, 지금 용유진이 생각하는 용도 에 사용하도록 빌려줄 리는 결단코 없기 때문에 없는 것으로 치부해도 좋았다. 그가 생각하는 용도, 바로 사냥과 요리였기 때문이었다. 서문 하의 자존심이 어떠한데 그 검으로 한낱 들짐승을 잡아 그 배를 가르 도록 내놓을 것인가. 그래서 그는 서문하를 앞서서 계곡을 따라 내려가며 유심히 바위들 을 살폈다. 그리고 적당한 바위를 하나 찾아내어 수도로 내리쳤다. 되 도록 타격이 큰 방향으로 치기 위해 노력했고, 덕분에 바위는 모퉁이에 서부터 여러 조각이 나서 깨어졌다. 그 중 널이 적당히 서 있고, 손에 움켜 뒤기 쉬운 것으로 골라 두세 개를 챙겼다. 칼 대신 사용할 물건이 었다. 필요한 것 중 돌에서 찾을 것은 더 있었다. 이건 조금 전보다 더욱 세밀한 시각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 불행히도 이 부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모양이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싯돌로 사용할 돌을 찾았지 만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돌 대신 불을 일으킬 방 법을 곧 생각해 냈기 때문이었다. 이제 문제는 짐승을 찾는 것, 이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삭풍애 바닥 의 협곡에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덕인지 야생돌물은 숱하게 많았 고, 사람을 보고 피하지도 않았다. 그는 날다람쥐처럼 재빠르게, 허깨 비처럼 가볍게 나무 사이로 움직여서 손에 닿는 대로 몇 놈을 잡아 목 을 비틀었다. 이름 모를 산새 몇 마리와 산토끼였다. 그러고도 혹시 해 서 물 속을 뒤져 가재도 십여 마리 잡았다. 소금이 없는 것이 절실하게 아쉬웠지만 그것까지 바랄 수는 없었다. 그나마 돌아다니는 중에 먹을 수 있는 풀뿌리 몇 가지를 찾은게 다행이었다. 그는 적당한 장소를 골라 자리를 만들고 나무를 삼매진화로 태워 불 을 지폈다. 마른 나뭇가지는 많았기 때문에 땔감도 충분했다. 서문하가 뒤늦게 도착해서 불가에 말없이 주저앉았다. "잠시만 더 기다기세요. 곧 준비하지요." 그는 잡은 짐승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미리 만들어 둔 돌칼들이 도움이 되었다. 그는 돌칼로 새와 토끼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들어냈 다. 새는 개울가의진흙으로 싸서 불 속에 묻고, 토끼는 다시 돌칼로 껍질을 벗겨냈다. 토끼의 경우 껍질을 제대로 벗기지 않으면 누린내가 고약하게 나기 때문에 세심한 손길이 필요한 일이었다. 도구가 불편하 긴 했지만 그는 애를 쓴 끝에 제법 훌륭하게 해낼 수 있었다. 그는 토 끼를 잘개 조각 내어 나뭇가지 단단한 것에 줄줄이 꽂고, 그 꼬치를 불 에 닿도록 모닥불 옆에 비스듬히 꽂았다. 다음은 새였다. 새는 진흙에 싸서 불 아래 두었으므로 이젠 진흙을 떨어내는 것만으로도 대충 깃털을 뽑을 수 있었지만 그러고도 남는 잔 깃털은 일일이 손으로 뽑고 배를 갈라 내장을 들어내었다. 그러고 난 뒤에는 토끼와 달리 통채로 꼬치에 꿰어서 불에 올렸다. 가재는 쉬웠 다. 이것들은 손질할 것도 없이 그냥 꿰어서 구으면 그만이었다. 다음엔 양념. 소금이나 다른 양념이 없었으므로 그는 개울가에 넓적 한 돌 두 개를 주어서 씻고, 거기에 풀뿌리를 찧었다. 그것을 손으로 쥐어 토끼 고기와 새 고기에 발라가며 굽는 것이다. 서문하는 그가 이런 일을 하는 동안 아무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가 손이 좀 쉬는 듯하자 비로소 감탄사를 뱉었다. "솜씨가 능숙하군." "표행때문에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 일이 드물지 않죠." "요리보다도 도구 사용하는 법이 그렇다는 거다." 용유진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도구는 단지 도구일 뿐이죠. 뾰족하기만 하면 뭐든 자를 수 있는 법이고, 넓적하기만 하면 뭐든 찧을 수 있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무공이 있으면 그게 조금 더 편해지고...." "도구는 도구일 뿐이라...., 좋은 말이군." "소금이 없는 게 아쉽습니다. 그거산 있었으면 훨씬 맛있게 할 수 있었을 텐데요. 사냥꾼이나 표사는 단도 한 자루, 소금 한 줌만 있으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산에서 살 수 있죠. 훌륭한 사냥꾼, 표사라면 말 이죠." 서문하는 내내 우울해하던 표정을 풀고 빙긋 웃었다. "너는 훌륭한 표사냐?" 용유진도 웃었다. "전에는 그렇게 자부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죠." 그의 웃음에 씁쓸한 맛이 들어갔다. "너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당하고 절벽에서 떨어진 데는 뭔가 사연 이 있겠지?" "없진 않습니다만, 중요한 건 아니죠." 용유진은 고기가 다 익었음을 확인하고 서문하에게 내밀었다. "다된 것 같습니다. 맛은 없겠지만 좀 드시죠. 며칠 동안 내내 음식 을 입에 대보지 않으셨을 테니 말입니다. 저도 허기가 지는군요." 서문하는 용유진이 말을 돌리는 것을 눈치채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실제로 용유진의 말처럼 벌써 여러 날 굶었기 때문에 허기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말없이 토끼 꼬치를 들어 한 점 씹었다. "생각보단 맛있군." "다행이군요." 용유진도 새 고기를 뜯었다. 아주 맛있는 것은 아니지만 평범한 수 준은 되었다. 무엇보다도 허기가 반찬이 되었고, 서문하의 기분 또한 약간이나마 풀어진 듯 해서 다행스러웠다. 그와 같은 고수에게 상처란 대단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의기소침하면 그거야말로 치명적인 타격 이 되는 것이다. 지금 서문하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상처보다도 의기의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한 존재가 있었다. 용유진은 서문하가 아직도 검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빙한풍이 불어오기 직전 서문하는 검치의 존재가 주는 공포에서 벗어난 것처럼 말했고, 그렇게 행동했지만 그건 진정한 극복 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용기를 내기 위해 단지 그렇게 과장되게 행동했을 뿐인 것이 아닐까? 지금 서문하가 검치를 다시 만난다면 이번엔 이길 수 있을까? 겨루어 보기 전에도 이겼다거나 이길 수 있다거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서문하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용유진은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물론 서문하는 삭풍애에서 한 단계 도야를 이루었다고 생각하고(재미 있게도 막상 빙한풍은 조금의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도 그것을 인 정했다. 그러나 그가 느끼기에는 서문하가 아직 대공(大功)을, 도대체 그게 어떤 경지인지는 짐작도 안가지만, 이루었다고 믿어지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서문하에게는 아직 망설임이 있고, 두려움이 있었다. 그는 아직 자유롭지 않은 것 같았다. 그에게는 그와 같은 고수에게 기대되 는 여유로움이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그건 검치를 의식해서일 것이다. 그를 생각하고, 그와 겨룰 것을 생 각하는 것만으로도 여유가 제한 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아직도 그는 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대결은 하나 마나다. 그런데도 싸워야 하는 걸까.' 표사는 이해하지 못할 무사만의 마음이라지만 그는 역시 이해할 수 가 없었다. 물론 예전에는 그도 이기든 지든 싸우고자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하수일 때의 이야기이고, 그럼으로 해서 한 가지라도 더 배 우고 싶어서 발버둥칠 때의 일이다. 지금 그의 경우라면 이유 없이 싸 우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유가 있어도 어지간하면 피하 고, 말로 해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기고 싶은 상대가 없어서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이기고 싶은 상대뿐 아니라 목숨을 걸고 싸우고픈 상대도 없었다. 적수가 없어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며칠 전 싸운 동방척에게는 약 간 우위를 보이긴 햇으나 그건 상대가 얕본 덕이었을 뿐, 다시 싸운 다고 그가 이긴다는 자신은 없었다. 여기 서문하만 해도 비록 검치의 그림자에 짓눌려 의기소침해 있지만 본신의 실력으로 따지면 결코 그 보다 아래는 아닐 것 같았다. 즉, 십대고수 중 삼군 이상의 인물들은 아직도 그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이다. 신진고수들도 있었다. 진장자의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그 하나하나가 절기 아 닌 것이 없는 무공은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울 것이다. 중원에서 찾아보 기 힘든 남궁홍의 기묘한 검법은 내공 대결, 혹은 초식 대결과는 완연 히 다른 어떤 방식의 싸움을 강요하기 때문에 역시 버거운 상대였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더 막강한 상대, 녹림도 총표파자 사대철인 임태 풍이 있었다. 그는 극히 위험한 사람이었다. 지금 비록 마교는 사라졌지만 진정한 천마의 후예가 있다면 그 외에는 다른 사람을 꼽을 수 없었다. 그는 선 설에서나 전해져 오는 파괴적이고 사악한, 그러면서도 소림과 무당 의 무공에나 비견될 수 있을 광대정심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만인평의 싸움에서 계속 진행되어 그가 검을 뽑았다면 용유진은 그 자리 에서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임태풍 역시 겨뤄 보고 싶고 이기고 싶은 상대는 아니었다. 문득 그는 임태풍과 싸우는 내내 뭔가 부족하고 뭔가 아니라는 느낌 이 들었던 까닭을 생각해 내었다. 그가 적이라고, 그러니 죽이고 싶다 고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한 마디로 투지가 생겨나지 않았 었다. 그건 임태풍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그의 손에서도 마교 무공 특 유의 패도적인 기상은 느껴졌지만 살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을 이제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임태풍은 표사와 도적으로서 만나 긴 했지만 적수로서 만나지는 않았고, 앞으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에게 진정한 무사로서의 투지를 불러 일으키는 상대 는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표사일 뿐 무사가 아닌 셈 이었다. '되고 싶지도 않군. 사부님께는 미안하지만.' 진정한 검객이 되라고 말했던 허신을 생각하고 그는 자시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애초에 검객이 아닌 사람이 애초에 검객이 될 마음이 없는 사람을 제자로 삼아 검객이 되라 했으니 어불성설 아닌가. 사부에 게는 미안하지만 지키지 않아도 될 명령인 것이다. '하지만 사부는 강한 사람이다.' 허신은 검객도 아니지만 강한 사람이었다. 용유진은 그가 만난 사람 들을 하나씩 생각해 보고, 지금까지 만난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다 른 누구도 아닌 그의 사부 허신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공 따위는 조금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인간적으로 강한 사람, 어쩌면 그것은 검치 와 같은 경지의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쩌면 서문하의 말대로 검치를 만나게 되면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되도록 만나기 싫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 이었다. 언제나 그렇게 결론이 흐르는 것처럼 훌륭한 표사가 되기에도 힘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상념을 떨쳐 버리고 입을 열었다. "갓 잡은 고기는 사실 그렇게 맛있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연하고 맛있는 부분만 먹으면 먹을 만 하죠. 물론....." 용유진은 토끼 고기를 한 입 베어물고는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희 같은 경우엔 맛있는 부분이건 아니건 발가락 하나 남기는 경 우도 없습니다만." 서문하가 불쑥 말했다. "너는 뼛속까지 표사구나." "그건 웬 말씀입니까?" "네 태도나 행동이 꾸며서 하는 것 같진 않다는 소리다." 용유진은 피식 웃었다. "꾸밀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조예를 갖추고 있다는 건 놀랍군. 넌 도대체 무공을 왜 익힌거냐?" "표사 일을 하기 위해선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표사의 일을 하기 위한 것치고는 넘치는 것 같지 않으냐?" "넘치다니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러고도 표물 잃고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창피한 노릇이지요." 서문하는 잠시 침묵하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 정도의 무공으로도 표사 노릇하기가 힘들다면 세상이란 얼마나 살기 어려운 것이냐." "나이도 어린 주제에 이건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무공이 있어도 세 상 살기가 편해지지 않더군요." "그래?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서문하는 깊은 침묵에 잠겨 들었다. 용유진은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먹던 것들을 치우고, 그 자리를 떠났다. 반나절쯤 지났을 때, 용유진은 옷 두 벌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서문하가 물었다. "어디서 난 거냐?"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었습니다. 산을 몇 개 넘으니 사냥꾼의 움막 이 있더군요. 거기서 얻어 왔지요." 서문하는 더 묻지 않고 옷을 받아 입었다. 가져온 것은 거친 베로 짠 바지와 윗옷 두 벌뿐이었다. 용유진은 산골 촌놈이 되었고, 서문하 는 산골 무지렁이 노인이 되어버렸다. 용유진이 말했다. "사냥꾼 움막이라 이런 것밖에 없었습니다. 누추해서 죄송합니다." "옷이야 아무러면 어떠랴. 그런 건 중요치 않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서문하의 태도는 조금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훨 씬 여유가 있어진 서문하를 보면서 용유진은 생각했다. 사람에게는 옷이 때로는 음식보다도 중요하다. 특히 서문하같이 평 생 체면을 중시하면서 살아온 사람에게는 어쩌면 목숨보다도 중요할지 도 모른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옷이나 체면 같은 것에서는 훨씬 자유 로운 편이다. 그건 어쩌면 무공에도 반영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직 서문하의 검법은 구경하지 못햇지만 대단히 격식을 갖춘것이 아 닐까 추측했다. '언제 한 번 보여 달라고 할까?' 그러나 그는 곧 그 생각을 포기했다. 상대없이 혼자 검을 휘두르는 것을 구경한다고 해서 서문하의 검을 알 수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어다. 검이 경지는 겨루는 것을 봐야, 아니 어쩌면 사람을 보면 이미 알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서문하를 보고, 이야기를 좀 했는데도 그 검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검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서문하였다. 그는 자 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보더니 뒷짐을 지고 입을 열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군. 너도 알다시피 내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그래서 말이지만, 오늘이 가기 전에 네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 용유진은 그게 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기력이 채 회복되지도 않았 을 텐데 무리를 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 사양할까 하다가 그냥 두 손을 맞잡고 절을 했다. "감사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서문하의 언행에서 마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비장함을 느낄 수 있 었기 때문이었다. 또 혹은 생사의 대적을 만나 겨루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을 정리하고 돌이켜보며 반성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 었다. 이런 때는 그저 감사히, 집중해서 지켜보고 들어주는 것이 은혜 에 보답하는 길일 것이다. 서문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뽑아 들었다. 유학자의 검답게 고색 창연하지만 낡지는 않은 검, 예기(銳氣)보다는 정기(正氣)가 느껴지는 훌륭한 검이었다. "중정(中正)이라고 부른다. 주역의 각 괘(卦)에서 제 이효(二爻)와 오 효(五爻)를 중(中)이라 하고, 음양의 효가 제 위치에 있는 것을 정 (正)이라 하는데, 그 중에서도 이효와 오효가 정위치에 있을 때 이르 는 말이 정중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이걸 길(吉)한 것을 나타내 는 표시라고만 생각하나 사실은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마음가짐, 살 아야 할 도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그 도리를 듣고 잊지 않기 위해 검에 그 이름을 붙였다." 검의 이름 하나에도 그렇게 유학의 도리를 꼭꼭 채워넣어서 지었으 니 유학자답다고 할까, 고리타분하다고 해야 할까 모를 일이라고 생각 하고 있는데 , 막상 서문하는 도리 설법을 하는 입과는 달리 아이를 보 는 것처럼, 오랜 친구를 보는 것처럼 감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검을 쓸 어 보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검객이며, 그 점에서는 이름에 비룡 (飛龍)이니 홍예(虹霓)니, 심지어 무적(無敵)이라고까지 이름을 붙이고 다니는 시정의 검객들과 다르지 않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적어도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었고, 그것은 서문하가 추구 하는 검리(劍利)에도 반영이 되고 있었다. "나는 검을 쓰는 형에 있어서도 필법(筆法)을 참조하였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하도낙서(河圖洛書)로 부터 시작된 팔괘(八卦)의 의미를 담고자 노력하였다. 그 중에서도 나는 경방(京房)의 설을 따라 상세팔순(上世八 純)의 순서로 검법을 만들었는데, 즉 건(乾) 진(震) 감(坎) 곤(昆) 손(巽) 이(離) 태(兌)의 순서다. 그러니 검은 달리 팔괘검(八卦劍)이 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그 자세한 내용과 이념을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서문하는 근 한 시진에 걸쳐서 그의 팔괘검에 대해 설 명했는데, 대체로 쉬운 이야기고, 그가 동창에서 배운 무공 중에는 팔 괘의 원리를 도입했다고 하는 무공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알아듣기 어 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칠절로 유명한 서문하답게 그 해석에는 생전 처 음 들어보는 어려운 말이 적지 않아서 용유진은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 아들으면서도 막상 그 심오한 도리에 대해서는 반도 채 이해하지 못하 였다. 서문하도 굳이 구결을 일일이 전수해 줄 마음은 없었는지 해설이 끝 나자마자 시연에 들어갔다. 용유진이 짐작해던 그대로 격식과 함의(含 意)를 중시하는 고풍스러운 검법이었다. 검법을 춤이라고 할 때, 서문 하의 그것은 학의 춤과도 같아서 동작 하나하나에 고매한 기풍이 듬뿍 묻어나오는 그런 검법이었다. 용유진은 그 동작들을 보면서 서문학 한 시진에 걸쳐 설명해 준 그 원리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구현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처음 보는 형태의 검법이었고, 거기 담긴 검리와 무엇보 다고 그 힘은 그가 보고, 또 알고 있는 숱한 검법 중에서도 순위에 꼽 힐 정도로 지고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잘 봤느냐?" 다시 거의 한 시진에 걸친 시연이 끝난 후에 서문하가 그를 보며 물 었다. "예, 잘 보았습니다." 대답하면서 용유진은 내심 감탄하는 눈으로 서문하를 보았다. 근 두 시진에 걸친 강론과 시연으로 피곤해야할 서문화는 오히려 그 전보 다 훨씬 기력이 충실한 듯했다. 고수에게 있어서 무공을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운기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순간 그는 알게 되었다. 형형한 눈과 긴장된 근육들은 서문하가 칠십 노인이라고, 더구나 오 늘 아침까지만 해도 상처 입어 기진해 있었던 노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 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서문하가 한순간 검을 늘어뜨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이 오늘 아침까지의 내 성취였다. 만약 네가 내 제자가 되어 오늘 아침 내게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면 이것까지만 보여 줄 수 있었겠지.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는 순식간에 절망하고 지친 노인이 되어 푸념하듯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모든 것이 실제 이 기고 지는 데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정한 검은 이 격 식과 허상들을 깨뜨리고 난 휘에 남는 어떤 것일 거라는 걸 이제야 인 정하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 내가 내 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거다. 못 본 걸로 하고, 잊으라는 거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니까. 적어도 검치를 이기는 데에는 말이다." 용유진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드러낼 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문제는 서 문하고 제기하고 답도 서문하가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가 대신 싸워 줄 것이 아니라면. 다행히 서문하는 그것을 찾은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조금 전과는 완전히 표변된 모습으로 눈을 빛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버리기로 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것,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렇게 버리고도 끝까지 남는 내 최후의 것, 진정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그와 싸 우기로 했다." 그가 기력이 충만한 무사에서 노쇠한 늙은이로, 이제 다시 일대 종 사의 기풍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마치 마술을 보는 것과도 같이 흥미로웠다. 그것은 마치 눈앞에서 한 사람이 탈태환골하는 모습 을 보는 것과도 같았기 때문에 여태까지 서문하가 햇던 어떤 말보다고 어떤 오묘한 무공의 시연보다도 그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많았다. 용유진은 비로소 걸림 없이 웃는 모습을 서문하에게 보여 줄 수 있 었다. "축하드립니다. 대공을 성취하셨군요." 서문하는 멋쩍게 웃었다. "대공은 무슨, 이제 뭘로 그와 싸워야 하나 생각하면 앞이 막막하지." "잘하실 겁니다." "잘할지는 몰라도 부끄럽지는 않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 까지 두려워했던 것은 검치가 아니었던 거야. 내가 혹시 형편없는 실력 으로 그를 실망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죽는 것보다도 싫었다. 나는 검치가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내가 망가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야." "이젠 두렵지 않으신가요?" "두렵지 않다." 서문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밝고 거침 없는 목소리였다. "이젠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되더라도 두렵지 않다. 그게 난 걸 알았 으니까. 설사 그의 손에 죽는다 해도 미련이 없을 것 같다." "죽는 다는 말씀은 마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죽는 거지." 서문하는 용유진을 향해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만난 이 후 처음으로 취하는 친근한 태도였다. "내겐 무수히 많은 제자가 있다. 황궁의 학사(學士)로부터 기원의 피 리쟁이에 이르기까지. 그 중에는 검객도 적지 않지. 하지만 내 최후의 심득(心得)은, 그런 것이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네게 전수되었 다. 난 운도 좋고 복도 많은 늙은이인 거야. 바라기로는 네가 이 심득 을 발전시켜서 검치의 자리를 대신해 주면 좋겠다만, 그거야 네가 알아 서 할 일이겠지." 그는 용유진이 겸손한 말을 하기도 전에 돌아섯다. "날이 어두워지는 구나. 그만 가거라." "노선배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서문하가 움직일 기색이 없음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대충 짐작했겠지만 검치와 약속한 장소는 삭풍애 아래다. 그와 약 속할 때부터 나는 삭풍애에서 수련할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정했 지. 그러니 나는 여기서 그를 기다리겠다. 생각할 것도 있고..... 너는 이대로 이 절벽만 기어 올라가면 길이 나오니 그리로 가거라." 용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문하가 이제 심득을 정리하고 마 음을 가다듬으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더 이상 그의 옆에 있는 것은 방해만 될 것이니 빨리 떠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사실 그도 아까 옷을 구해오면서 본 어떤 것 때문에 길을 재촉해야 할 처지이기도 했다. "그럼 더 방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인사하고 가려는데 서문하가 갑자기 들고 있던 검갑(劍匣)을 내밀었다. "이건 네가 가져라." 용유진은 의아해서 검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검은 어쩌시려고 검갑을 제게 주십니까?" "그건 이제 필요 없다." 서문하는 서쪽을 가리켰다. "잔도로 올라가서 하루 이틀만 더 가면 경치 좋은 계곡이 나올 거다. 그냥 계곡이 아니라 단계(端溪)라고 해서 꽤 유명한 곳이야. 거기서부 터는 관도가 시작되는데, 그 초입에 객잔이 하나 있다. 유명한 곳이지. 꽤 크고.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게 거기 묵고 가곤 한다. 혹시 아는 곳인가?" "몇 번 묵어는 봤습니다." "거기 주인을 좀 안다. 위험한 사람이지. 뭐 지금 너하고는 상관없겠 지만. 내가 이 검갑을 신표로 줄 테니 그 사람에게 가져다주고 돈을 달 라고 해라. 재워 주고, 먹여 주고, 원하는 만큼 돈도 줄 거다. 나는 이 제 필요 없지만 너는 노자라도 좀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용유진은 그래도 검갑을 받아들지 않았다. "돌아갈 곳이 없으면 검이 불상해지잖습니까." 서문하는 피식 웃었다. "검은 돌아가지 않을 테니 검갑도 다른 데로 가는 게 낫겠지." 용유진이 말했다. "싸움에 임해서 검집을 버리는 것은 불길한 행동이라 흔히들 말하 지 않습니까." 서문하는 정색하고 말했다. "그런 속설에 구애되지 않는 것도 수양이겠지. 나는 검치를 이기든 지든 더 이상 검을 들지 않으려 한다. 만약 내가 지면 더 이상 검을 들 손이 없을 테니 말할 것도 없고, 이긴다 해도 마찬가지다. 검치를 이긴 뒤에도 내가 검을 들고 겨룰 상대가 있을까? 어느 쪽이든 검은 할 일 을 잃을 것이고, 검갑 또한 그럴 것이다." 용유진은 검갑을 받아 들었다.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이것을 다시 찾으면 돌려줄 곳 이라도?" "그럴 곳은 없다. 그냥 그 주인에게 파는 거라고 생각하면 될 거다. 제법 가치 나가는 것이니 두둑이 받도록 해라. 헐값에 넘기면 내 체 면에 손상이 가는 거니까." 용유진은 검갑을 흘깃 봤지만 상어가죽과 무소의 뿔, 구리로 솜씨 좋게 만든 것을 알 수 있을 뿐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 검갑의 어디에 가치가 있다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것을 꼬치꼬치 묻고 있을 시간은 그에게도, 서문하에게 도 없었다. 그는 검갑을 허리춤에 찔러 넣고 깊이 인사했다. "부디 안녕을 빕니다." 서문하가 손을 저었다. 그것을 신호로 용유진은 몸을 날렸다. 그 뒤 에는 나는 새같이 절벽을 뛰어 올라가서 잔도에 내려섯다. 그리고 최대 한의 속도로 달렸다. 사실 그의 품속에는 옷을 구하러 가기 전에는 없던 것이 들어 있었 다. 서문하에게는 보여 줄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안 보여 준 것이지만 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어떤 것이었다. 그것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그 에게 알려 주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에게는 매우 불쾌한 것이었다. 표행은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애초부터 실패하기 위해 출발한 것이 었다. 서문하와 있을 동안은 표내지 않으려 애를 썼으나 지금 그는 속 으로 이를 갈고 있었다. 그는 이장도에게 당해 절벽에 떨어졌을 때보다 지금 오히려 더욱 분노하고 있었다. |
첫댓글 즐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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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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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하고 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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