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지지 않는 믿음
오늘은 믿음의 기본적인 자세 믿음의 성격 믿음의 내용을 돌이켜 보고자 합니다. 이 부분은 여러 차례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만 제가 매우 강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항상 말씀드리다시피 부처님의 법은 교리조직이 아닙니다. 이론체계가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란 종교적 천재자가 세상에 태어나서 그 탁월한 높은 듯과 명석한 두뇌를 동원하여 조직화시킨 교학체계가 아닙니다.
불법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심과 상관없이 본래부터 있는 것입니다. 불법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확인하시고 그 확인하신 바 그 법을 사실 그대롤 설파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불교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 이전에 진리가 있습니다. 이 진리가 불법이요 본래의 것입니다. 부처님도 법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렇지만 이 법을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짐짓 세간에 범부상을 나투시고, 법의 길을 열어 보이시고, 법을 증득해 보이심으로써 법의 진실 당신의 진실 이것을 우리 앞에 밝혀 주신 동시에, 우리 모두를 법이라고 하는 진리에로의 회복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불법은 본래적인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래서 저는 언제나 부처님의 법은 실재요 사실이라는 것을 말씀드려 왔고 또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말씀드려 왔습니다. 불법은 존재이지 이론이 아닙니다. 지식이 아니고 관념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법은 절대로 교학적인 논리체계나 합리주의에 담겨지지 않습니다. 불법은 부처님으로 존재하고 진리로서 존재하고 우리의 생명으로 존재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여기에 근거하고 기초하여야 합니다. 불법의 특징을 말씀드리자면 다음 다섯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불법의 현견(現見)적입니다.
아주 현실적이고 현재 볼 수 있고 현재 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법이다 그런 말입니다. 이 말은 현재에 되지 않고 미래에 이루어진다거나 타방국토에서 된다든가 하는 그런 것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법은 이와 같이 현재 증득할 수 있는 것이고 현재 볼 수 있는 것이고 현재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현시(現時)적입니다.
즉시(卽時)에 그 경과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원인 결과라는 그런 과정에 상관없이 완성된 그 결과 그대로가 거기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공덕충만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 우리 스스로가 직접 나 자신 가운데서 그 모두를 증험할 수 있는 것이란 뜻도 갖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내견(來見)적입니다.
이 말은 진리는 항상 열려 있고 드러내보이고 있으니 누구나 와서 보라 그런 뜻입니다. 이와 같이 불법의 성격은 현재 보이는 현실적인 것이고, 현재 당장 여기 있다는 현시적인 것이고, 항상 열려 있어서 누구든지 와서 볼 수 있다는 내견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분은 가지고 있고 어떤 분은 없고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떤 국토에는 불법이 있고 어떤 땅은 악도가 돼서 불법이 없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 어느때는 나타나고 어느때는 숨고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어떤 특정한 사람이 가지고 있어서 그 사람 마음대로 주고 말고 적당히 그런 것이 더더욱 아닙니다. 불법은 이와 같이 아주 현실적이며 아주 직접적인 현존(現存)입니다.
이 점에서 불법은 “마땅히 이렇게 되어야 한다.”하는 당위(當爲)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법을 당위로 알고 있는 분도 계시지만 당위에 앞서 사실이 있습니다. 참으로 있는 현실, 이 현존이 토대가 되고 그것이 근거가 된 다음에 나오는 것입니다. 불법은 이론 이전자이고 참으로 있는 실존입니다. “불법은 진실로 있는 것에 대한 긍정이고 해명인 까닭에 부처님의 말씀이니까 그렇게 하여야 한다. 그렇게 행하면 좋으니까 그렇게 한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내가 무엇이니까, 무엇이 진리이니까, 나의 실존재가 무엇이니까 저절로 그 실존의 표현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과 실존이 하나로 긍정될 때 자기답게 사는 가치의 출발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이 마하반야바라밀의 진리는 이와 같이 현재 볼 수 있는 것이고, 현재 드러나 있는 것이고, 어느때나 열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면 추구하는 소망을 성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와 같이 존재한다는 이해가 적립되어야 하겠습니다.
네 번째는 열반으로 인도합니다.
열반으로 인도한다고 하는 것은, 불법의 내용 즉 불법의 진리가 필경에는 궁극적인 본래상으로 인도하고, 결실을 시킨다는 뜻입니다. 바로 마하반야바라밀, 이것이 열반에 이르게 합니다. 『반야심경』에 “모든 보살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마음 걸림없고 공포가 없고 일체의 허망한 데서 벗어나서 구경열반에 이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반야바라밀 그 자체가 구경열반입니다. 그리고 사념처(四念處)에 대응한 열반사득을 말씀하셨습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이지요. 이 근원적인 진리를 보지 못하고 현상적인 상태에서 볼 때는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변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적인 것을 보고 있는 한 모든 것은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반야바라밀, 구경열반인 이 바라밀다, 완전성취의 진리 그 근원자리에서는 불변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변치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열반의 근원적인 성격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우리들의 생명의 근원인 진리의 면모입니다. 열반사덕의 두 번째는 낙(樂)입니다. 일체는 고(苦)다 해서 현상적인 것, 감각적인 것, 보여지는 것, 만져지는 것, 그 전부는 변멸하는 것이고 필경엔 공허한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아무리 붙잡고 매어달려도 필경엔 고(苦)로서 결론되고 만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열반의 자리, 일체성취의 자리, 반야에 의해서 전개된 우리의 근원자리는 낙(樂)입니다. 고가 아니라 낙이다 이 말씀입니다. 생명의 거침없는 완전성취상 이것은 즐거움입니다. 즐거운 것, 이것이 진리이고 근본면모의 표정입니다.
세 번째는 아(我)입니다.
무아(無我)라고 그랬습니다만 우리가 아(我)라고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그 구성요소를 분석해보면 몇 가지 원소의 화합이고 그 원소라고 하는 것들조차도 몇 가지 힘의 관계라고 오늘날의 물리학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과 같이 확고한 알맹이가 없습니다. 현상을 분석해본 결과로는 무아다 해서 아(我)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원적인 우리 생명의 바탕, 깨달음의 법성진여에 이르러서는 성품의 아(我), 진리로서의 아(我)가 전면 등장합니다. 이것은 절대아(絶對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정(淨)을 말합니다.
현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 감각적인 것, 만져지는 것은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있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변해가는 것이고 죽음을 시현하는 것이고 파괴 괴멸을 시현해 가는 것입니다. 어떤 것 하나 가만히 있는 것이 없고 생주이멸(生主異滅)의 과정을 거쳐서 변하고 허물어지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죽음과 부정이 항상 함께 따라옵니다. 그래서 이 현상적인 것은 부정한 것이고 깨끗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진성에 이를 때는 무극청정, 다함이 없는 청정이라고 하며 그것은 본래상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생명의 본 모습은 이와 같이 항상되고 즐겁고 참된 아(我)이고 청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일체 번뇌가 끊어진 상태를 이름이 아닙니까? 번뇌가 없는 진리 그 자리가 열반이요 바라밀다입니다. 그래서 열반이 바로 바라밀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바라밀수행, 부처님 법의 수행이 특별한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현견적이고 항상 함께 있는 것이고 누구에게나 항상 열려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그대로 열반이며 바라밀입니다. 그 열반이 그 바라밀이 가지고 있는 한량없는 공덕을 우리들이 생명으로서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견적이다. 현시적이다. 내견적이다 하는 이 말은 바로 열반공덕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고, 바라밀다-부처님의 깨달음의 진리 자체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진리는 멀리 떠나 있거나 어느 권능을 갖고 있는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만인 앞에 이렇게 드러나 있는 것이고 만인이 주체적으로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지자(智者)가 다 아는 것입니다.
지혜있는 사람이면 스스로 다 아는 것, 지혜가 무엇입니까? 반야입니다. 반야의 눈을 가진 사람이면 다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밝다는 것은 눈을 가진 사람이면 다 아는 것입니다. 눈을 감은 사람, 눈이 먼 사람, 눈을 가린 사람은 세상이 어둡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지혜있는 사람은 부처님의 공덕세계, 진리의 세계, 부처님의 은혜의 세계가 이와 같이 현견적이며 즉시적이며 내견적이다 하는 것을 보고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서가모니 부처님을 생각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바로 마하반야바라밀 진리의 시현이신 것을 압니다. 우리의 생명 존재는 바로 부처님의 광명이며 진리다 하는 확신(믿음)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내 생명이 진리광명으로서 실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그 진리성 그 공덕성 그 완전성을 확실이 믿는 불괴신(不壞信)을 가지고 그 토대 위에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진리가 가지고 있는, 법이 가지고 있는, 부처님의 공덕세계가 가지고 있는 무장에 부가사의 공덕이 거기서 현전하는 것입니다. 무장애 불가사의 공덕은 다른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월광「불광」에 나오는 신앙 수기를 보면 합리적인 머리로서 해석되지 않는 많은 이적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이적들은 딴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세계에는 이러한 논리를 초월한, 합리 불합리에 관계없는 완전무결한 원모습이 있으며 그것이 바로 내 생명으로서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 현존성이 현성으로 나타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경험세계에 나타날 때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논리나 합리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생명 본모습의 나툼입니다.
만법과 짝하지 않는 자 불광출판사
첫댓글 부처님을 사생자부라 하셨는데 언제나 불법의 밭에서 희망을 일구게 하시는 큰스님의 자비로우심이 바로 부처님의 그것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감사 합니다. _()()()_
말 이전에 본래부터 있었던 진리를 말과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했으니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 당연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래부터 있었던 진리가 바로 이 자리에 현현할 수 잇도록 한 걸음씩 나아가야겠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고맙습니다.하루하루 더욱 나아진 모습으로
고맙습니다.............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