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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했소.”♣ <2009-10-28>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체제를 출범시키자 1970년대 중반 조향록 목사는 김지하 시인, 법정 스님, 한승헌 변호사 등과 함께 ‘민주회복추진협의회’를 조직하여 유신체제 철폐 범국민운동을 전개한 경력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저항운동을 많이 하셨죠.
“박정희 정권이 5·16을 일으켰을 때 끝까지 저항했어요. 1973년 10월에 육영수 여사가 교회로 두 번 전화해서 ‘영감님이 점심식사나 함께 하자고 하는데 시간 좀 내달라’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지금 생각하니 괜히 고집을 피운 것 같아. 만나서 할 말 다했으면 될 텐데. 민주주의를 하려면 선거를 해서 임기를 마친 뒤 남에게 넘기는 관례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승만 박사가 그걸 못했지요.
그 다음 정권이 생겼는데 박 장군이 9개월 만에 엎어 버리니 민주주의를 못 하는 백성이 아니냐, 그런 생각 때문에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육 여사가 세상 떠나고 박 대통령까지 세상 떠난 뒤 많은 충격을 받았어요.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를 만난 조향록 목사(앞줄 왼쪽). ⓒ 조향록 홈피
농촌을 발전시키고 조국을 근대화시키는 과정에서 한국 역사는 박 대통령의 공로를 잊을 수가 없어요.”
조향록 목사는 1976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 신학대 학장을 지내는 동안 한신대는 격렬한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조 목사는 그런데도 박정희 대통령이 한신대에 종합대학 인가를 내주었다며 ‘통 큰 양반’이라고 평했다.
▲한국 신학대생들의 유신반대 데모. 1974년 10월 24일 50여명의 한국 신학대생들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유신헌법 폐지를 외치는 데모를 벌이고 있다. ⓒ 자료 사진
“내가 한신대 학장을 지낼 때 종합대학교를 인가받는 게 우리 교단의 꿈이었어요. 당시에는 신학과 밖에 없었지요. 당시 전국 대학들 가운데 한신대학만 유일하게 반정부 데모를 했어요. 데모하면 박 대통령이 밤 9시까지 사무실에 앉아 수습되었는지 물었다고 해요.
내 임기 중에 반드시 종합대학 인가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하여 돈도 없고 땅도 없으면서 서류를 냈어요. 서류를 내면서 차관에게 ‘이렇게 설명을 해 달라. 그래서 안 되면 유감없다’며 메모를 써서 줬어요.
뭐라고 썼느냐면 ‘밤낮 당신 물러가라고 데모하는 학교에서 낸 서류니 반려해도 원망은 하지 않겠다.
한국의 민족사와 기독교 역사 속에서 기장(基長)이라는 교단과 한신대학이 가진 유니크한 역사가 있다.
한민족의 장래를 위해 이 대학에서 인물을 키워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할 큰 꿈을 갖고 있다.
이것을 옳게 생각하면 허락해 달라’ 그런 내용이었는데 당시 수석비서관이었던 고건 현 총리가 보고를 했다고 하더군요. 그 메모를 보고 마음이 움직였는지 ‘대통령 물러가라’고 데모하는 학교를 종합대학교로 인가해 줬어요.”
막상 인가가 나자 학교에서 오히려 당황했다고 한다.
아무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덜컥 인가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 후에 박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했어요. 살았으면 ‘여보, 그때 무슨 심사로 허가 했소’라고 물어봤을 텐데...
(글, 펌. 編: 동해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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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천둥이 치고 비가 오기 시작 했습니다
좀 많이 와야 가뭄이 해소 될건데...동해쪽은 어떤지요?
그러게요. 이곳은 봄부터 현재까지 비 한방울 내리지 않았습니다. 큰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