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 거주하다보니 지역 자부심 갖고 이것저것 역사문화에 대해 자랑하는 글들을 보곤 하는데 그 중에 인상적인게 바로 임금님이 놀러왔다는 것이었다.
아, 헌강왕과 처용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꼭 헌강왕을 말하는것도 아니었다.
생각나서 정리해보면 이러한 분들이 오셨다.
1. 사부지갈문왕
사부지갈문왕 이야기는 천전리 각석에 잘 나와 있기에 울주군에서 문화콘텐츠화를 위해 이것저것 구상중이라고 한다.
천전리 각석을 발견한 문명대 교수는 2019년에 울산명예시민으로 임명되셨다.
https://news.v.daum.net/v/20190920171957031?f=o
찾아보니 발견하신게 1970년(또는 1971년)이라고 되어있는데(연합뉴스나 오마이뉴스 등에서 1970년 12월과 1971년 12월 둘다 나와서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정작 명예시민이 되신지는 얼마 안됬다. 그래도 작년에 받았다는건 TV에도 나와서 알고는 있었다.
2. 진흥왕
진흥왕이 왔다는것도 각석에 언급되는 부분이다.
3. 헌강왕
울산은 그 옛날 개운포로 헌강왕이 와서 처용을 만났던 곳이고 처용문화제를 진행하는 곳이다보니 1996년에는 <신라 헌강왕 울산 행차 재연 길놀이'> 행사에서 처용탈을 쓴 참가자들이 가장행렬을 했던 모양이다.
당시 관련 기사는 있는데 정작 사진은 없다.
처용관련된 캐릭터 응모나 상품이나 굿즈 이미지 관련 공모가 있을 때 처용, 처용부인, 역신, 헌강왕은 꼭 등장한다.
그런데 이거 태클걸고 싶은데.. 왜 창작물에서는 헌강왕은 늙은이인가?
10대 연령의 군주가 애니메이션으로 나온 위인전에서도
요런 얼굴로 나오는데 (저 이야기의 주인공이 최치원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즈음에는 20대 중반인데도 저 애니에서는 수염까지 희네...)
http://culturecontent.kr/contentdata/contentDataView.do?cp_code=cp0701&content_data_id=cp0701c00002
문화콘텐츠닷컴에 있는 헌강왕 외모도 그보다 젊지만 흠...
4. 고려 성종
울산에서 칼럼 쓰고 향토사에 대한 글 쓰는 분들 중에서 고래를 먹고 식중독 걸려서 돌아가신 왕으로 알고 있는데 직접 사료를 찾아보니 사료에는 딱히 그런 내용은 없었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23879&cid=62131&categoryId=62161
국역 고려사: 세가
성종 16년(997) 정유년
[• 9월
○ 왕이 흥례부(興禮府 : 지금의 울산광역시)로 가서 태화루(太和樓)에서 직접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 큰 바닷고기가 잡혔다.
○ 왕의 몸이 편찮았다.
기사일. 동경에서 개경으로 돌아왔다.
• 겨울 10월
무오일. 왕의 병세가 더욱 심해지자 개령군(開寧君) 왕송(王誦)을 불러 친히 유언을 내려 왕위를 전한 후 내천왕사(內天王寺)로 거처를 옮겼다. 평장사(平章事) 왕융(王融)이 사면령을 반포하자고 했으나, 왕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무엇하러 죄지은 자들을 풀어주면서까지 억지로 목숨을 연장할 필요가 있겠는가? 또 나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이 무엇으로써 새 왕의 은혜를 펼 수 있겠느냐?”
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죽을 당시 나이는 38세이고 16년 간 재위했다. 시호를 문의(文懿)라 하고 묘호를 성종(成宗)이라 했으며 남쪽 교외에 장사지내고 능호를 강릉(康陵)이라 했다. 목종 5년(1002)에는 강위(康威)를, 현종 5년(1014)에는 장헌(章獻)을, 같은 왕 18년에는 광효(光孝)를, 문종 10년(1056)에는 헌명(獻明)을, 고종 40년(1258)에는 양정(襄定)이라는 시호를 각각 덧붙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종 16년(997) 정유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경인문화사)]
즉 성종은
-울산으로 내려가 신하들과 잔치를 벌임
-큰 바닷고기(아마도 고래)가 잡힘
-왕이 아픔(울산에서는 이를 고래먹고 식중독이라 해석)
-개경에 복귀후 세상을 떠남
울산의 그 옛날 우시산국 시절의 이름 모를 수많은 왕들이나 혹은 신라 왕들 중에서 일부는 울산 들렸을 수 있겠지만 기록이라도 남아있어야 알테니 뭐 어쩌겠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