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야기에는 우물이 많이 나오잖아요.
퐁 퐁 퐁
레몬을 생각하면 입안에 노란 침이 고이는 것처럼 우물을 생각하면 우물에서 있었던 일들이 우물 주위로 모이는 것처럼
우물이 실제 있었고
주인도 있었지만 그 얘기까지 하려면 너무 길어지니까 바로 우물가로 가볼게요.
감자 껍질 까다가
물길러 온 엄마한테 질질 끌려서 집까지 온 적 있어요.
남의 집 감자 껍질 까기와
우리집 감자 껍질 까기는 뭔가 다르잖아요. 감자를 숟가락으로 긁어댈 때마다 감자도 하얘지고 그애 얼굴도 하얘지고
얼굴 가득 하얗게 웃고 있는 그애 앞에서 엄마는 욕을 욕을 하고
머리채를 잡고
(그런 줄 알았으면 머리를 안 기르는 거였는데 말입니다. 엄마는 내 머리를 묶어줄 때마다 또 얼마나 생색을 냈는지.......)
그애랑 놀고 싶어서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저를 미워하고 미워하고 그러다가 사는 게 뭐 이런가 싶어서 혼자
울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또 엄마에 대한 저의 환상이겠지요. 일하고 일하고
밥하고 밥하고 도무지 헤어나올 길 없는 그 쳇바퀴 속으로 엄마가 들어갈 줄은
집안 어른들 눈을 피해 친구들과 놀아날 때는 몰랐겠지요.
이게 아직도 정신 나간 소리나 하고 있네. 엄마는 가늘게 실눈을 뜨겠지만 지금도 감자 껍질을 까고 있으면
우물가에 나둥그라진 숟가락과
감자 껍질 까던 손을 어디다 둘지 몰라 등뒤로 감추던 그애. 그애 손처럼 뒤로 밀리던 여름. 여름처럼 갈변해가는 감자알
엄마?
괜찮아. 네 문장 속에서 악을 썼더니 머리가 조금 아플 뿐이야!
[생명력 전개],문학동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