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권의 금융 허브로 홍콩은 런던, 뉴욕, 도쿄와 함께 세계 4대 경제 중심지가 되었고요. 또한, 홍콩섬의 위치는 중국의 남중국해 및 동남아시아로의 팽창을 막는 방어거점으로의 가치도 있었습니다. 영국은 영원히 이 곳을 점유하고 싶었습니다만 1990년대가 오자 사정이 달라집니다. 중국이 개혁개방의 성공으로 경제력을 갖추자, 중국 내부에서는 민족주의 열풍이 붑니다.
또한, 당시 중국의 최고 지도자 등소평은 지난 20세기는 중화민족의 굴욕시대였지만 21세기는 중화민족의 상승시대를 열자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시초가 홍콩과 마카오의 반환이었습니다. 사실 기존 조약에 따르면 영국이 돌려줘야 할 곳은 신계지역 뿐이고 홍콩과 구룡반도는 엄연히 영국의 영토였습니다.
하지만, 홍콩과 구룡의 공간은 매우 협소하고 식수, 전기, 식량은 넓은 신계지역에서 조달하였으므로 신계의 상실은 홍콩 전부의 상실과 마찬가지 였죠.
영국은 1980년대에 신계의 임대를 50년 연장하는 방안을 북경에 제시하였지만, 중국 정부는 이 제안을 일면지하에 거부합니다. 그리고 1997년에 홍콩, 구룡, 신계 전 지역을 일괄 반환하지 않을 경우, 영국은 알아서 하라는 반협박을 합니다.
당시 경제적으로 쇠락하던 영국은 중국의 협박을 당해낼 경우가 없었고 결국 1997년 7월 1일에 홍콩은 영국에서 중국으로 완전히 주권이 넘어갑니다.
주권 반환으로 소식으로 인해 홍콩인들의 다수는 집단 멘붕상태에 빠집니다. 그 중 대다수는 홍콩의 언론인들과 정치인들이었는데 중국공산당의 어두운 면인 대약진 운동실패,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벌어진 대학살극, 천안문 사태와 같은 인권 침해 등 중국정부가 대외적으로 숨기고 싶은 것들을 이들이 모두 까발렸기 때문입니다. (8억인과의 대화를 쓴 고 리영희 선생도 후에 집필당시,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일어난 학살극을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할 정도로 중국의 폐쇄성은 강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홍콩판 엑소더스가 발생하는데, 반환 이전에 태어난 홍콩인들은 모두 영국의 식민지 시민권을 가졌으므로 캐나다, 호주 등 영연방 국가로의 이주가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캐나다 서부의 벵쿠버는 이른바 '홍쿠버'라고 불릴정도로 홍콩출신들이 많이 사는데 대부분 반환시기에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홍콩의 엘리트 인적자원 유출이 심해지자 중국정부는 '홍콩기본법'을 제정하여 향후 50년동안 북경은 홍콩의 정치 및 경제, 사상의 자유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천명합니다. 이른바, 대만과 통일시에 추진하겠다는 일국양제를 시범케이스로 적용한 것입니다. 실제로 중국으로 반환 이후, 홍콩 정부의 수반과 의회는 홍콩인들의 자유선거로 구성됩니다.
대신에 중국은 다른 방법으로 홍콩에 개입을 시작합니다. 유출된 인구 수만큼 중국본토의 인구로 채워넣는거죠. 홍콩으로의 이주민은 자유를 찾아 온 사람도 있지만, 중국 정부의 의도를 충실히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폐쇄된 언론사 대신, 친 중국정부적인 언론사들이 북경의 지원을 받아 생겨났고 홍콩 의회에는 중국공산당을 추종하는 정치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홍콩의 기본 언어는 광동어와 영어였는데 영어교육과 광동어 교육이 축소되고 표준중국어가 필수과목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홍콩의 광동어와 영어 사용 인구비율은 점차 축소되어 갔습니다.
이렇게 기존 홍콩인들의 정체성은 점차 소멸되어 갔고 이 과정에서 홍콩인들의 자존감은 떨어져가는 와중에2005년에 홍콩의회가 천안문 사태에 대한 언급을 공식적으로 규제하는 법안을 발의하자 홍콩인들은 무려 50만명이나 들고 일어납니다.
중국정부는 대약진운동 실패와 문화대혁명 과정에서의 학살은 모택동과 공산당의 잘못된 판단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하였지만, 1989년에 일어난 자유항쟁인 천안문 사태는 여전히 국가반란사태로 규정하고 있으며 언급 자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천안문 사태는 홍콩 언론이 최초로 천안문 사태로 인한 망명자와의 인터뷰로 보도되었고, 홍콩 및 중국 전체 자유주의 운동의 상징이기에 이에 대한 규제는 홍콩인들의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결국 이러한 반발로 입법은 무산되었지만, 중국 대륙에서의 언론 및 인터넷 검열은 심화되었고 '천안문 사태' 검색 제한에 대한 이견차이로 구글 중국 법인이 홍콩으로 철수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중국내에선 구글 및 페이스북, 트위터를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바이두와 웨이신, 위챗이 사용되지요.)
21세기에 들어 홍콩의 지정학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는 하락세가 됩니다. 우선 양안 관계가 개선되면서 대만 자본이 직접 중국으로 송금 및 투자할 수 있게 되었고, 해외 기업들도 중국에 직접적으로 투자하면서 굳이 홍콩을 경유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중국 정부가 기존 중국 제1의 경제도시 상해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면서 중화권의 금융허브는 홍콩에서 상해로 다시 돌아갑니다. 홍콩의 물동량도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홍콩을 통해 비싼 값을 지불하고 물류를 싣을 필요가 없게 되면서 홍콩항의 물동량은 중국 본토의 상해, 천진, 광주보다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홍콩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관광과 서비스 자원 뿐입니다. 문제는 관광 & 서비스 산업은 국제 경기의 흐름에 크게 좌지우지되고 고용이 불안정합니다. 따라서 글로벌 기업에 있어 홍콩은 투자처로서 레드오션이고 영어를 잘 못하는 홍콩인은 인재로서 가치가 매우 떨어집니다.
이제 중국 정부에 있어 홍콩은 예전의 매력적인 도시가 아닙니다. 아니 반환 후, 10여년을 거치면서 꿀을 다 짜낸 벌집의 밀랍과 같습니다. 그리고 쓸데없이 민중의 자유도만 높은 거추장스런 곳이지요. 게다가 신장지역의 위구르-이슬람 세력은 중국이 지향하는 '하나의 중국'에 큰 도전을 하고 있으며 중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소요사태로 시진핑의 권위는 위협받고 있습니다.
시진핑의 주변에는 한때 정치적 라이벌이었으나 지금은 실각한 보시라이의 잔당등, 적대 세력이 아직 존재하고 있기에 이러한 도전들을 제압하고 본인 정치 입지를 굳건히 다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홍콩기본법을 무시하는 무리수를 둬가면서까지 홍콩에 친 중국적인 인물을 세울려고 하는 겁니다.
이번 시위 사태는 중국정부의 '홍콩기본법'을 무시한 정치적 행위에서 비롯되었지만, 중국의 경제발전에 따른 홍콩의 경제적 소외 및 청년 실업률의 증가같은 경제적 요인, 그리고 소외되었던 홍콩인의 아이덴디티등이 복잡하게 작용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중국 정부는 이번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겠다고 하였지만, 글쎄요... 1989년의 북경 천안문은 외부에 철저히 통제되었었지만 2014년의 홍콩은 통제하겠다고 해서 통제될 수 없는 곳입니다. 물러설 수 없는 시진핑의 정치적 도박과 물러설 수 없는 홍콩 민중의 감정. 양자의 충돌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첫댓글 홍콩때쉬ㅠㅠㅠㅠㅠ 힘내세여
며칠전에 첨밀밀봣눈데 이거보니꺼 슬품 ㅠㅠㅠㅠㅠㅠㅠㅠㅠ 홍콩 ㅠㅠ힘내여
흥미돋.....그래서그랫던거엿구만...
홍콩 아예 독립했음좋겠음
홍콩 파이팅...
오 역사나 그런거 궁금했는데 ㅎㅎ 앞에꺼 읽어보니까 이해된다 고마워!!
오 좋은글이당!! ㅠㅠ중국진짜 여기저기서 곪고 있네 언제까지 그렇게 막고 때우기만 할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