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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보내는 편지 글이군요!
이쁜 생질녀 호영이와 몸이 불편한 동생 수현이도 건강히 잘 있겠지요?
새 형님을 뵌 지가 벌써 여러 해가 된 것 같습니다. 옹알이 하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호영이가 대학 사학년 졸업반 이라니 세월의 그 빠름이 허망하게도 느껴집니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그렇게 좋아 하셨던 새 형님을 생각할 때 마다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간절합니다.
그동안 사업차 해외를 돌아다니시느라 많이 피곤하실 터인데 건강은 어떠신지요?
가끔 욕심 많은 새 형님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물론 넉넉한 웃음과 함께 말이지요! 또한 누님의 성격 범상치 않음을 어릴 때부터 많이 겪어 보아서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세상일에 두 팔 걷어붙이고 열심히 살아가는 누님의 모습을 보면 가끔 안쓰럽기도 합니다. 새 형님과 누님의 종교적 믿음으로 두 분 다 잘 이겨 극복해 나가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제 아들놈과 딸년입니다.
어제는 식목일과 하늘이 맑다는 淸明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晉)나라 충신 개자추(介子推)가 면산에 숨어 살다가 불에 타 죽은 한식(寒食)이기도 합니다.
어제 계획으로는 적어도 저녁에 술 마시기 전까지의 생각으로 오늘은 새 형님의 장인 장모이신 우리 부모님 묘소에 성묘 갈려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가 어제 밤에 과음한 탓에 포기하고 만 불손한 놈이지요. 우리 뱃살의 말처럼 뭐 하나 똑바로 하는 것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오늘은 바깥 날씨도 우울한 내 마음을 닮아서 우중충한 날입니다.
방금 비라도 내릴 것 같은 흐린 날 오전 내내 집에서 빈둥거리다 오후 잠깐 밖에 나갔다 온게 전부인 참 미련하고 게으른 중생입니다.
진도가 잘 나가지도 않는 책 한권 펼쳐들고 벌써 몇 시간 째 그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아무리 사대부 집안의 후손이라지만 뱃가죽이 등가죽과 서로 맞닿을 지경에 이르고 나니 체면이고 뭐고, 울 엄니 말씀도 들리지 않더이다. 잠은 둘이서 자도 밥은 혼자 먹어야 겠습니다.
가까운 시장에 달려 나가 손으로 밀어놓은 칼국수 면발 천원어치와 조갯살 천원어치를 샀습니다. 집에 남은 명태 대가리와 북어 살점 몇 개와 국물멸치와 다시마 넣고 아... 냉장고에 사둔 콩나물도 몇 가닥 넣고 약한 불에 국물을 우려내어 사온 칼국시 넣고 팔팔 끓였습니다. 그리고 당파 송송 썰어 넣고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 듬뿍 넣어 맹근 양념간장에 참기름 넣고 한 그릇 배불리 먹고 나니 쓰린 속이 확 풀려버립니다.
역시 술꾼의 집안 내력에는 속풀이의 내력도 이정도면 수준급이지요! 이것이 다 우리 어머님의 솜씨를 간간히 어깨 넘어 보고 배운 것이라 퍽도 자랑스럽습니다. 그래도 라면도 제되로 끓일 줄 모르는 새 형님보다는 제가 한 수 위이지요?
무엇인가에 막혀있던 몸뚱아리가 뚫려 버린 듯 온 몸의 세포들이 소몰소몰 살아나는 느낌입니다. 이마에 온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가 땀이 흥건히 적셔져 옵니다. 몸이 가뿐 해 졌습니다. 이럴 때는 다시 입안을 행구 듯 니코틴의 연기가 무지하게 유혹을 합니다.
식사 후 담배를 물때 마다 히히락락 거리던 친구 놈 말이 생각납니다.
“食後不燃草 하면 子子孫孫 枯子 索出하고...”
웃자고 드린 말씀입니다. 이 어린 처남의 민망스런 애교에 너무 노여워하지 마소서... 밥 먹은 후에 담배 피우지 않았다고 후손들이 고자가 나올 리 있겠습니까?
홀로 실실 웃으며 밖으로 나가 담배 한 대 물고 폐부 깊숙하게 한 바퀴 돌았다가 다시 입으로 나옵니다. 입을 옆으로 길게 째고선 길게 허공으로 연기를 내 뿜습니다. 올라가다 만 연기들이 금세 허공으로 묻혀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따라서 내 마음도 허전해 져 옵니다.
다들 건강을 생각해서 담배를 끊어라 야단들이지만 아직은 살만 한가 봅니다. 끊으려 애를 써본 적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저도 언젠가는 끊을 생각이랍니다. 그러니 너무 재촉을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러고 나니 이제는 잠이 쏟아져 옵니다. 그래서 낮잠 한 숨을 비몽사몽으로 새고 나니 아마도 봄비가 내리려나 봅니다. 제 몸이 뻑적지끈 신경통이 신호를 보내옵니다.
남은 시간 줄넘기를 백 번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팔 굽혀펴기를 땀나도록 했습니다. 다음에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지겨운 운동 앉았다 일어서기를 오십 번 반복합니다. 정말 지겹습니다. 그리곤 거실 한 가운데 카펫에 픽 쓰러졌습니다. 그것도 잠시 아들놈 학교에서 돌아와 배고프다고 안달이여서 남은 칼국시 다시 끓여서 멕이고 싱크대 설거지 까지 몽땅 해 치웁니다. 물기 하나 없는 깨끗한 씽크대를 보며 잠시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리고 다시 한식(寒食)에 대한 우리 이야기들을 더듬어 글로써 남기고 싶은 욕심이 생겨납니다. 오늘 하루를 그냥 헛되이 보낸 것에 대한 미련한 반성에서 우러나오는 보상 같은 것이겠지요! 살아가는데 전혀 필요치 않는 이런 이야기들이 새 형님이 늘 상 중요시 하는 그 많은 정보들 중에 가장 쓸모없는 한낱 귀찮은 정보쯤으로 여겨지리라 생각이 듭니다만 그래도 교회 장로이신 새 형님의 새로운 변모와 인적 양식을 위해서 몇 자 적어 봅니다. 부디 씰데 없는 짓이라 흉보지 마시고 한 번 쯤 읽어 주시길 감히 바랍니다. 혹 압니까? 어디서 이런 말들로 잘난 채 한 번 해서 사업 동반자들에게 좋은 점수를 따시게 될런지도...?
또한 이것은 서로 종교가 다른 이단자인 처남이 드리는 최소의 애교라 받아주시면 종교인으로써 넓은 마음을 인정하게도 되는 것이 아닐 런지요?
그렇습니다. 한식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 주나라가 하늘의 뜻을 거역하고 선정을 베풀지 않으며 어진 신하를 도외시 하고 결국 간신배를 등용하여 마침내 8백년의 기력이 마감되어 갈 적에 열국들이 서로 다투어 춘추전국시대를 열고 있었습니다.
이 때 진(晉)이라는 나라에 공자 중이가 아버지 헌공에게 미움을 사 추방을 당합니다. 그때 그의 인물됨을 알아본 개자추 등 몇몇이서 공자 중이와 함께 망명길에 오릅니다. 춥고 배고픈 어느 날 개자추는 따뜻한 고깃국을 자신의 주군이신 공자 중이에게 받칩니다.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자신의 주군에게 먹이신 게지요. 자신의 주군에게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했지만 그러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시기와 미움과 질투를 사게 됩니다.
춥고 외롭고 힘든 그 망명길이 장장 19년이나 계속되었고 마침내 고국에 왕으로 추대가 되어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자 공자 중이는 황하를 건널 때 그동안 방랑길에 동행했던 자신의 집기들을 강물에 던져 버리게 됩니다. 지난 힘들었던 망명길에서 이제는 벗어나게 되었다는 환희와 감격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었겠지만 그 모습을 본 개자추는 이내 실망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일 지라도 힘들었던 그 시절에 함께 했던 것들을 쉽게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잊을 수 있다는 그의 됨됨을 확인하는 결과겠지요. 그리고 함께 망명길에 올랐던 신하들이 앞 다투어 논공행상을 하는 것을 보고는 개자추는 그 길로 황하를 건너지 않고 늙은 노모가 계시는 시골집으로 19년의 방랑 생활을 마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공자 중이는 진(晉)의 문공이 됩니다.
개자추는 시골 어머니와 함께 짚신을 삼아 팔아 끼니를 연명하였습니다. 진문공은 자신의 다리 살점 까지 베여 끓여준 개자추를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19년 동안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 왔던 신하들의 질투로 인해서 개자추의 공적이 가리워지게 된 것이지요!
그 이후 진 문공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에 도움을 준 공신들을 1등급 2등급 3등급으로 나누어 정하고 아직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이가 있다면 말을 하라 방을 붙였습니다. 그 방을 본 개자추의 늙으신 어머니는 아들에게 말을 합니다.
“한 번 나가 보아라. 너는 19년 동안이나 주공을 모시고 방랑하지 않았느냐. 더구나 지난날에 너는 넓적다리 살점까지 도려내어 임금을 잡수게 하지 않았느냐. 가서 말하면 우리 모자의 조석 끼니에 도움이 될 곡식 정도는 줄 것이고 그러면 짚신을 삼아서 파는 것 보다야 낫지 않겠느냐?”
개자추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주공을 모신 것은 다른 공자보다도 어지셨기 때문이고, 하늘도 이를 알아 우리 주공에게 혜공. 희공의 자리를 빼앗아 주공께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신하들은 이런 뜻을 모르고 각기 자기의 공인 줄만 알고 서로 벼슬을 다투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과 다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차라리 일생동안 짚신을 삼을지언정 하늘의 공을 자기의 공인 것처럼 탐하기는 싫습니다.”
모든 공을 하늘의 공으로 돌린 개자추의 그 깊은 생각에 저는 뿌듯해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늙은 어머니는 참으로 감동을 합니다. 그리고 개자추는 늙은 노모를 업고 면산(綿山)으로 들어갑니다. 깊은 산골에 초려를 짓고 풀로 옷을 해 입고 나무 열매를 따먹으며 일생을 마칠 생각이었지요.
그러나 그마져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개자추의 이웃 사람 중에 개자추의 행방을 아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충심을 아는 해장이라는 사람이었지요. 그는 한 밤중에 글을 지어 조문(朝門) 위에다 걸었습니다.
“여러 마리 뱀이 따라다니며 고생한 끝에 용을 연못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리하여 뱀들은 각기 자기 거처할 집을 마련했도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던 용에게 자기 살을 베어 먹인 뱀만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저 벌판에서 울부짖고 있다.”
이 글을 본 진문공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할 리 없었지요! 그리고 후회를 하며 해장을 따라 면산으로 갔으나 첩첩산중에 개자추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효성이 지극한 개자추의 심성을 아는 진문공은 산에 불을 놓아 숲을 태우면 늙으신 노모를 위해 뛰어 나올 것이라 생각을 하였던 게지요. 그리고 산에다 불을 질렀습니다. 그 불은 삼일 간 탔다고 합니다. 그러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들과 어머니는 버드나무 아래서 서로 안고 타 죽은 것이지요.
지금의 통령을 만든 그 공이 서로의 크다 다투는 이들을 보았었습니다. 그리고 잊지 않고 그들에게 감투를 하나씩 하나씩 논공행상 하듯 씌워주곤 했지요! 하늘의 공인것도 모른체 지금도 여전히 코드라는 신종용어를 빌려 진행 중인 것으로 압니다.
멀리 중국에 있었던 일이었지만 신라 때부터 우리의 4대 명절중 하나로 행하여 왔던 것은 바로 그의 성품과 그가 전하는 교훈이 우리 민족의 심성과 가슴에 와 닿기 때문인가도 생각합니다. 지금 개자추를 닮은 청빈한 정치인이 궁합니다.
그 때 산에다 불을 지른 것이 동짓날로부터 105일이 지난 삼월 초닷새 날이며 절기로는 청명절(淸明節)이였답니다. 그래서 개자추의 그 뜻을 애통해 하며 불을 피우지 않은 날이 되었지요. 처음에는 한 달 동안 불을 피우지 않았다가 나중에는 삼일로 줄였다 합니다.
우리나라의 한식(寒食)은 이런 것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신라 때부터 성묘를 하는 풍습이 있었고 고려 때부터 대표적 명절로 성묘를 허락하였으며 죄수의 금형(禁刑)을 실시하기도 했었답니다. 근래에 들어서는 성묘 이외에는 거의가 폐지되고 말았지만 농가에서는 이날부터 농사가 시작되는 시기라 합니다. 곡식의 씨앗을 뿌리는 날이지요. 어쩌면 새롭게 일 년을 시작하는 날이 되기도 하는 것이라 생각이듭니다.
종교적 의미로 볼 때는 매년 봄에 궁궐에서는 헌 불을 끄고 버드나무 가지로 비벼 새 불(新火)을 만들어 임금께 바칩니다. 버드나무로 불을 비벼 만드는 것은 개자추가 버드나무 아래서 불에 타 죽었기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그 새 불을 받은 임금은 육조대신(六曹大臣) 들과 팔도감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합니다. 그 뒤 다시 백성들에게 전달이 되었지요.
우리나라 한식은 헌 불을 끄고 새 불이 가는 전달과정의 시간의 필요성에 의해 한식날 하루는 불을 지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언제 부터인가 한식날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귀족이나 사대부 등 서울 상류계층에만 이 불이 국한 되어 전달되었고 여느 백성들은 각 가문별로 종가(宗家)에서 새 불을 일으켜 집안에 반화(返火) 하게 되었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가족주의가 발달하게 된 동기이기도 한답니다.
이것은 곧 각 가정에 씨불(種火)이 되어 화로에 담아 간수를 하게 되었지요. 이것이 바로우리나라 주부권위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불을 꺼트리면 소박을 맞기도 하였으니 그 소중함이야 말할 것이 없었지요! 또한 가까운 친족들이 찾아오면 이 불로 밥을 지어 먹으며 친족의 단결과 공동체의 구심점을 새기곤 하였고 먼 몇몇 촌 이상의 친척들이나 벗이 오면 다른 불로 밥을 지어 먹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만큼 분리되어 불을 다루었지요!
그렇게 본다면 그 옛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던 그 화려한 시절에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만 로마의 베스트(?) 신전의 여 사제가 불을 일으켜 돌려주는 행사가 있었답니다.
그것은 단결과 결속과 운명 공동체의 자의식이 되는 동기가 되었지요. 그러나 우리 민족과 똑 같은 공동체 의식 속에 로마는 내셔널리즘으로 승화되어 융성하였으나 우리는 그렇지가 못했지요. 그것은 씨족과 가족 중심의 사회로 전환 축소 되어가는 그것 외에 밖으로 우리가 아닌 것에 대한 배타성이 깊게 물들어있었기 때문인가도 생각해 봅니다.
지금 새 형님과 나와의 배타적 동기부여가 보이지 않게 가로막혀 있는 것과 같은 동질의 뜻을 부여 할 수 있겠습니다.
작금의 시대를 보면 씨족도 피아 구분이 확연하고 친족도 피아 구분이 확연한 지리멸렬한 사회가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저 같은 긍정적 비판의 회색분자는 어디 발붙일 틈이 있어야지요...
어떤 놈들은 옛날에 그렇게도 비판하며 나누어 가지지 못하는 씨불에 대해 질투를 하던 자들이 이제는 역전이 되어 지네들끼리 모여 새 불을 피워 저들끼리만 나누어 가지는 모습들을 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모습은 정치인 특유의 모습에 변함이 없는 듯 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내는 애국자도 아니요. 그렇다고 반골도 당연히 아닙니다. 저도 이제 한 살 한 살 지천명의 나이에 가깝게 다가는 지금 옛날의 교훈들이 너무나 쉽게 사람들의 뇌리에 잊혀지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드리는 말씀입니다.
새 형님 친구 분 중에 아주 잘 나간다는 이름 석 자만 대면 다 아는 정치인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여당인지 야당인지 정계를 떠난지 오래된^^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감히 그분께 개자추나 한식의 유래와 씨불에 대한 비판 몇 마디와 제가 말씀드린 로마이야기 몇 마디 가볍게 해 주시지요!
국민 대통합이라는 거창한 구호는 아니더라도 한 발 한발 가까이 다가가는 진정한 통합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해서지요...
그러다 보면 어쩌면 가장 활기차고 미래 지향적인 번성한 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 시켜 주심이 어떨 런지요?
뭐라고요? 아예 씨알도 맥히지 않는 소리 말라 이거지요?
예, 그래요 지난날 처럼 여전히 혼자 씨부렁거렸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아는 지식을 동원하여 적은 것이 아닙니다. 저도 모르는 것을 공부하며 자료를 찾고 기억이 가물 한 것은 필기 노트를 더듬어 적은 것이지요! 왜 고등학교 시절에 나도 잘 모르던 수학 문제를 다른 친구에게 설명을 하게 되면 자연스레 그 문제에 관해서는 완벽하게 이해를 하게 되듯 말입니다.
식목일에도 한 그루의 나무도 심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산불을 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만큼 절박한 하루를 보낸다는 뜻입니다. 절박하다는 것은 혹여 오해가 있을까 덧붙이자면 새형님이 쓰고 남은 돈 있으면 나누어 달라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니 걱정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ㅎㅎㅎ
별 씰데없는 이야기로 바쁜 새 형님께 신경 쓰게 해 드린 것 같습니다. 그냥 웃어넘기는 여유를 가지시고 한 번 쯤 쉬어 가시라는 뜻으로 드린 글이었습니다.
이제 황사가 심해지겠지요...
각별히 건강 유의 하시고 가내 평안한 날 되시 길 빕니다.
호영이 수현이에게 변변찮은 외삼촌이 안부 전합니다.
이천 육년 사월 육일
못난 처남이 드립니다.
I'd love you to want me - Lobo
첫댓글 ..........잘 지내시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