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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章 용유진, 흑점(黑店)에 가다(二)
1.
그건 오래 전의 이야기, 그가 동창 위사로 당시의 정쟁 속에서 상관
대부의 명에 따라 내각대학사 동습을 체포하는 임무를 맡았을 때 벌어
진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 그는 애써 정일붕을 살려 줄려고 했었다. 그
것이 실패한 것은 수하였던 양평중(梁平重)이 나중에 손을 봐서 죽여버
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용유진이 동창 수뇌부로부터 문책 받
을 것을 염려해 한 일리었고, 그나마 그 양평중마저 석경산(石景山) 싸
움에서 그를 위해 죽어버렸다. 결국 모든 것은 그의 책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책임을 회피하고 싶지 않았다. 태청검객 정일붕은 죽
었다. 그의 손에 죽었다. 그 죽음에 대한 값은 그가 지불할 것이다. 이
것이 용유진의 마음이었다.
단지 그에게도 할말이 없진 않았다.
"믿으실지 모르지만 그건 정당한 비무에 의한 결과였습니다."
"정당한 비무라고?"
무당에서 온 도사는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동창 위사 천여 명이 깔린 가운데, 당대의 충신을 호위하며 혈로를
뚫고 있는 사람을 막고 서서 검을 겨눈 것도 정당한 비무라고 말하는
건가?"
"상황은 분명 그랬죠. 그러나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저는 자
부하고 있습니다."
무당파 도사의 말로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알 수 있었다. 무당파
에 이 이야기를 흘린 사람이 누군가 하는 것이었다. 저 정도로 상화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동창 밖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그에게 앙심을 품고 있을 만한 동창 위사 하나를 그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치졸한 수를 썼꾼. 내부의 일을 흘려가면서.'
개인적으로는 잘 모르는 사이지만 그는 선우공수의 장래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자질이나 능력이 아무리 뒤어나도 그런 식으로 머리를
쓰면 끝인 것이다. 허신은 교활한 자, 잔인한 자, 악독한 자도 가리지
않고 썼지만 내부의 일을 흘리는 자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출세는
이제 끝난 것이다.
그래서 용유진은 선우공수에 대해서는 신경을 끊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정신을 집중했다.
"원하신다면 지금 저도 같은 상황에서 비무를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장내를 한 바퀴 둘러봤는데, 이건 현재의 상
황을 무당 도사에게 환기시키기 위한 행위였다. 보라. 사방에 있는 사
람들이 모두 그를 노리는 사람들 아닌가. 이들은 모두 쟁쟁한 무림고수
들이니 그들이 주는 압박감은 동창 위사들이 주는 압박감에 못지않을
것이다. 이것이 그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그의 이런 의연함은 장
내의 무림인들에게는 오만으로 비쳐졌다. 게다가 무림인들은 천성적으
로 관부나 거기 결탁한 자들을 미원한다. 동창 위사라면 무림공적이나
마찬가지였다. 후환이 두렵지만 않다면 누구든 때려죽이고 싶어하는
것이 동창 위사인것이다. 지금 용유진이 그렇게 비쳐지고 있었다.
무당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당신을 죽이거나 잡아오라는 명을 받았다. 그렇게 말하지 않
아도 겨룰 수밖에 없는 일. 그러나 무당파는 동창이 아니다. 위세로 눌
러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동창이나 하는 일이지 우리가 할 일
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사방으로 포권하며 말했다.
"삼가 강호동도 여러분께 부탁하는 바이니 우리와 저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말아 주시오."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감히 무당파가 하는 일에 정면으로 제지하고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소림사 사대금강이었다. 무당 도사가 불쾌한 빛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불형(佛兄)께서는 뭔가 하교하실 일이라도 있습니까?"
사대금강 중 하나가 일어나 한 손을 가슴 앞에 세우는 소리사만의
독특한 인사를 하며 입을 벌였다.
"소승들은 물론 무당파의 도우(道友)께서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희들도 장문방장(掌門方丈)으로부터 명을 받
아왔고, 그 명은 공료롭게도 저 용 시주와 관계가 있어 곤란하게 되었
습니다."
"저 악적이 소림의 분들께도 죄를 지었단 말이오?"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 알아볼 일이지요."
"그 말씀은?"
"이번 표행 건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는 뜻입니다. 저희는
중원표국의 참사와 그 국주인 중원대협 이장도의 실종을 조사하러 내
려온 것입니다. 그 사건에 대한 유일한 증인이 저기 용 시주라는 것을
도형께서도 아시겠지요? 그러니 아까 저 반구대 시주가 이야기 한 뒷
이야기를 용 시주로부터 듣고 싶은 것입니다. 무당의 일은 그 뒤에 해
결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대단히 우락부락하게 생긴 화상이었지만 어울리지 않게 조리 있는
말을 하고 있었다. 무당 도사로서는 거절할 핑계가 없었다. 그리고 장
내의 다른 무림고수들도 사대금강의 말에 찬동하고 있었다. 그들로서
는 무엇보다도 먼저 표행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래서 결국 황금은
어디로 간 건지 알고 싶은 것이다.
결국 무당 도사는 물러섰다.
"그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요."
사대금강이 말했다.
"이야기를 들려주시기 바라오."
"에........"
용유진은 말을 길게 끌었다. 모두가 그에게 주목하는, 그것도 잡아
먹을 듯한 눈으로 주목하는 가운데서 이야기를 하려니 매우 즐겁지 않
았다. 게다가 이야기한 후의 결과도 빤히 짐작을 할 수 있어서 힘이 나
지 않았다.
"막상 이야기르 하려고 하닌 할 이야기가 별로 없군요. 저 친구가
아는 것에서 별로 덧붙일 것이 없습니다. 그 자리를 벗어난 뒤로 나는
탈진해 쓰러졌고, 새로은 도적들이 나타난 직후 절벽으로 떨어져서 표
행이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 모르니 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용유진은 입을 다물었다.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멀
뚱멀뚱 그의 입만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참다 못한 기련요마가 물었다.
"그게 다냐?"
"그게 다요."
설산진군이 진군, 즉 신선이라는 이름답지 않게 욕설을 뱉으며 일어
섰다.
"기껏 기다렸는데 그게 다라니, 사라을 실망시켜도 유분수지!"
용유진은 침착하게 말했다.
"궁금한게 있으면 물어보시오. 아는 대로 대답해 드리지요."
기련요마가 물었다.
"새로 나타난 도적들이 누구냐?"
"복면인들이었소. 숫자는 잘 모르겠는데 백 명은 넘지 않았던 것 같소."
"그 정체는?"
"물론 모르오. 복면을 썼는데 어떻게 알겠소."
"이런 젠장! 가장 중요한 건 결국 모른다는 얘기잖아!"
설산진군이 다시 욕설을 뱉었다.
"그래서 할말이 별로 없댔잖았소."
"도대체 절벽에는 왜 떨어진 거냐?"
용유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발을 헛디뎠다고 해두죠."
"해두죠? 그게 아니란 말이군요. 정확한 진상은 뭐죠?"
용유진은 물어 본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강위명이었다. 어떻
게든 그를 돕고 싶은 심정임을 알긴 했는데, 그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으니 곤란한 일이었다. 용유진은 성의껏 대답을 했다. 대체로 꾸민
이야기였지만, 아주 거짓말은 아닌 쪽으로였다.
"아까 저 친구가 이야기했듯이 나는 여러 사람과 겨루었고, 당연히
나도 다쳤소. 그때 도적들이 나타났고, 표사들은 부상자도 챙기지 못하
고 싸워야 했소. 나는 다친 몸이지만 어떻게든 도와 보려고 움직이다가
절벽 옆에서 발을 헛디뎠죠. 그 후론 계속 추락. 깨어 보니 절벽 밑이
었소."
설산진군이 다시 욕설을 퍼부으려다가 용유진이 누구와 겨루었
던가를 떠올리고 입 속으로 겨우 삼켰다. 반구대의 말대로라면 용유진
은 비단 고목대사르 쳐죽였을 뿐 아니라 동방척도, 그 외 여러 노마들
도 때려 죽였다지 않는가. 그 정도라면 천하제일고수라고 불려도 부족
함이 없을 정도의 신위였다. 그런 인물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은 신중하
게 선택할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부드럽게 물었다.
"그 절벽에서 떨어졌다고?"
"그렇소."
"그 천 장 절벽에서?"
"높이는 안 재봐서 모르겠지만 꽤 높았죠."
"거기서 떨어지고도 이렇게 무사하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런 개도
안 믿을 소리를 하고 우리보고 믿으라는 건가?"
다시 말이 거칠어 지는 데 용유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쳐들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자신처럼 말했어도 그 자신부터 안 믿었을 것이다.
좌중에 모두가 그를 거짓말쟁이라고 한다고 해도 별로 화낼 상황이 아
니었다.
"나도 안 믿어지지만 그렇게 됐소. 누구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오, 그래. 절벽에서 떨어졌더니 누군가 받아 줬다는 거군."
기련요마의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 은인이 누구신가?"
용유진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칠절신군 사문하 노선배요, 아, 하 자는 노을 하 자를 쓰신다더군."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기련요마가 어리둥절해하다가 재우쳐 물었다.
"증거는 있느냐?"
"물론 있소."
용유진은 반갑게 품으로 손을 가져가다가 멈칫하고 다시 내렸다.
"있지만 보여 줄 수 없소."
칠절신군의 검보를 보여줬다간 표행과는 상관없지만 만만찮게 귀찮
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문득 그는 흑점의 주인이 한 말
의 뜻을 깨달았다. 검갑보다는 검보를 파는 게 나을 거라고 하지 않았
던가. 그건 뭘 팔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뭘 팔지 말라는 쪽으로 해석을
햇어야 옳았던 것인가? 그는 이 상황을 예측했던 것인가?
어쨌든 지금 만약 검보가 아니라 검갑이 있었다면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훨씬 편했을 것이다. 기념으로 받아왔다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검
보라고 안 될 것도 없다. 이것 때문에 생길 귀찮음을 감수하고라고 우
선 오해받을 상황은 해소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니, 마음이 바뀌었소. 보여주겠소."
품으로 손을 가져가는데 개비수가 갑자기 소리쳤다.
"저놈! 저기 봐! 황금이다!"
용유진의 허름한 옷깃 사이로 아까 흑점의 주인에게서 받은 싯누런
황금이 고개를 내밀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사태는 돌이킬 수 없이 진행
되기 시작했다. 좌중의 무림고수들이 분분히 일어나 제각기 떠들기 시
작했다. 대개는 일단 잡아서 끓려 놓고 따지자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리
고 제풀에 흥붕해서 손을 쓰는 자들이 나왔다.
가장 먼저 용유진에게 달려든 것은 아무래도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
들이었다.
오월의 고수 팔비당랑이 어느새 빼들었는디 낫 두 자루를 들고 달려
들었다. 명호대로 사마귀 같은 모습, 사마귀처럼 빠른 동작이었다.
개비수는 해석하면 비밀을 밝히는 손이라는 뜻인데, 말하자면 비밀
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도록 두들겨 패는 자라는 뜼으로 형초 지방에
서는 악명이 높은 포두(捕頭)였다. 그 개비수 적강이 금강저(金剛杵)의
일종인 육모방망이를 휘둘러 용유진의 허리를 노렸다.
사방온신 노야방은 오히려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의 공격이 사실
은 가장 빨랐다. 사방에 염병을 뿌리고 다니는 자라는 별호는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하나는 그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남아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보면 재수가 없다는 뜻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름 그대로 독을 즐겨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아미 남들
모르게 독을 살포하고 스스로는 뒤로 물러난 것이다.
금환대도, 파산초자, 그 외 고만고만한 마두들이 떼지어 몰려들었지
만 그들은 미처 손쓸 틈이 없어서 구경만 했다. 고수들이 설치는 판에
끼어들면 오히려 방해만 될 뿐 아니라 자신들이 다칠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유진은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어동작을 했다.
그는 탁자를 걷어차서 필비당랑에게 날려보내고, 앉아 있던 의자를 잡
아 돌려 개비수의 육모방망이를 막았다. 사방온신 노야방이 뭔가 수상
한 것을 뿌렸다는 것은 눈치챘지만 그쪽으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건 오히려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이것으로 공격을 다 막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그는 어느 정도로 손을 써야 할지 결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엉
거주춤하게 서서 반응을 기다릴 뿐, 적극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상
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적절하게 상대해 줄 생각이었다. 다행히 그에
게는 이럴 때 쓰기 적당한 무공이 있었다.
팔비당랑이 한 쪽 낫으로 탁자를 찍어 던지고, 다른 낫으로는 그의
턱을 걷어올릴 듯이 쳐왔다. 물론 저 시퍼런 날에 걸리면 걷어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반쪽이 나고 말 것이다. 용유진은 개비수의 육모방망이를
막은 의자를 당겨서 다시 한 번 낫을 막고, 이번에는 낫에 찍힌 곳을
중심으로 의자를 돌려 팔비당랑의 턱을 후려쳤다.
주루의 의자라는 것은 무수한 사람들이 앉았던 것이고, 숱한 음식물
이 떨어졌다가 닦이고, 술과 기름, 정체를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다양
한 국물들이 밴 물건이다. 만들어진 지 한두 달 안에 부서지지 않으면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왠만한 칼날 정도는 거튼히 버티게 마련인 것이
다. 개다가 사용법만 알면 의자의 긴 판자와 네 개의 다리는 보통의 무
기로 상대하기에 대단히 껄끄러운 물건.
그래서 팔비당랑은 의자를 낚아챈다거나 절단한다든가 하는 무리를
피하고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났다. 뒤는 개비수가 처리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드의 이런 마음이 통했는지 개비수가 그의 빈자리를 대신 채웠
다. 두껍고 단단한 판자를 상대하기에 칼날은 무리지만 방망이는 부족
함이 없는 물건이다. 두들겨 부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평소 사람들
에게 하던 대로 우악스럽게 방망이를 휘둘러댔는데, 예상과 달리 용유
진은 의자를 치우고 맨손으로 맞받으려는 듯했다.
용유진의 중심이 미세하게 옆으로 이동하고, 그의 손이 개비수의 방
방이 아래로 뱀처럼 다가들었다. 개비수는 대뜸 이것이 금나수라는 것
을 알아차렸다. 그도 포두, 금나수는 그의 두 번째 성명절기나 다름없
는 것이다. 그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손목에 힘을 주고 방망이는 아래
로 떨구듯 움직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손목을 잡으로 들어오는 용
유진의 팔목에 압력을 가하여 관절을 틀어놓으려고 했던 것이다. 게다
가 그에게는 자유로운 한 손이 있었다. 그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자유로운 손으로 용유진의 팔꿈치를 잡아 들어갔다.
그러나 용유진의 금나수는 개비수의 경지보다는 훨씬 위였다. 그는
동창 사상 제일의 금나수라 불리는 취타십팔방을 배운 사람 아닌가. 의
자를 든 손은 쓰지도 않고 단지 한 손만으로 그는 개비수의 방망이 든
손을 꺾어버리고, 뒤어어 다가온 다른 한 손마저 맞잡아 뭉개버렸다.
우두둑하는 소리가 개비수의 고통스런 얼굴을 배경으로 흘러나왔다.
그의 손은 용유진의 고루천강수에 짓이겨져서 제 형태를 잃었다.
힘없이 주저앉는 개비수의 머리 위로 사마귀 같은 그림자가 떴다.
팔비당랑이었다. 용유진은 의자를 던지고 재빨리 개비수가 놓아버린
방망이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그걸 검 대신으로 삼아 팔비당랑의 정
수리를 후려쳤다.
의자가 구름이 되고 방망이는 달이 되었다. 팔비당랑은 구름을 걷어
내자 나타난 달빛에 정통으로 맞아버렸다. 딱! 하는 경쾌한 소리가 퍼
졌다. 팔비당랑은 여덟팔자로 바닥에 누워버렸다. 그의 이미에서 한줄
기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용유진이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그는 피가 아니라 뇌수를 흘리며 저승길을 걷고 있었을 것이
다.
용유진은 방망이를 한 손으로 가볍게 돌리며 사방을 둘러 보았다. 개
비수아 팔비당랑 외에는 접근하는 사람들이 없었는데, 그것은 사방온
신이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유진은 그들에게 물었다.
"이제 이야기를 찹문히 들을 생각들이 나셨소?"
사방온신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들어야지. 널 잡아 꿇려 놓고 말이다."
"그건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자센데?"
"좋아하건 말건 상관없다. 곧 그렇게될 테니까."
사방온신은 마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한 손을 치켜들더니 손가락을
튀겼다.
"입을 벌린 게 실수였던 게야. 이제 그만 꿇어라! 하나, 둘, 셋!"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방온신은 당황한 듯 눈을 꿈
벅거리더니 다시 외쳤다.
"꿇으라니까! 둘, 셋!"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 용유진은 불쾌한 표정이 되어 사방온신에
게 말했다.
"내게 벌레를 먹인 모양이군. 허락도 없이."
사방온신이 사용한 독이 사실은 고독(蠱毒)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
이다. 시전한 사람의 명령에 따라 작용하는 독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과연 사방온신은 두려운 듯 뒤로 물러섰다.
"분, 분명히 중독됐을 텐데? 왜 멀쩡한 거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피를 뿌리며 뒤로 길게 누워버렸다. 용유
진이 던진 방망이가 그의 이마에 작렬했기 때문이었다. 극히 단순한 공
격으로 보이지만 독을 사용하는 것말고도 상당한 고수급에 속했던 그
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 죽이지는 않고 기절만 시키는 정
교한 힘의 조절까지적용된 한 수 였다. 그러나 이 절기를 알아보는 사
람이 드물었던지, 아니면 사방온신의 독이 이미 효력을 다했다는 것을
안 것인지 숱한 고수들이 우수수 덤벼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번 공격
에는 정파의 사람들까지 합세했다.
금환대도와 파산초자가 달려들었다가 차례로 팔이 꺾여 나가 떨어졌
다. 그 뒤를 이은 것이 형산사검이었다.
무공에는 뜻을 중시하여 만들어진 것과 형을 중시하여 만들어진 것
이 있는데, 그 중 형을 중시하여 만들어진 것에도 주류를 이루는 것은
동물의 모습을 흉내내어 만든 것들이다. 이는 사람이 일반적인 동작으
로는 발휘하지 못하는 힘을 동물의 동작을 취함으로서 발휘하고자 하
는 순박하면서도 근거가 없지만은 않은 소망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 중에도 원숭이를 흉내내어 만든 무공이 많고, 또 이런 종류의 것
들이 절기로 꼽히는 경우가 많은 것은 사람이 가장 흉내내기 쉬운 형
태의 동작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원숭이는 얼핏 사람과 비슷한 신체구조를 가졌으면서도 도약력은 다
섯 배에 달하고, 팔의 히은 열 배를 넘는다. 그 힘과 빠르기, 통통 튀
는 공처럼 탄력적인 순발력은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동작이 가능하도
록 하는데, 그것은 원숭이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불가해하고 이치에 어긋나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이 상대하기 어려운 무공이 되는 것이다.
지금 형산사검의 동작과 그들이 발휘하는 무공이 그러한 것이어서
일반적인 무공은 물론 잘 알려진 후권류(후拳類)의 무공과도 저혀 그
궤가 달랐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긴 팔에 두 자루의 오구검(吳鉤劍)을
나누어 들고 네 마리의 거대한 원숭이처럼 날뛰었다. 그들의 행동에서
는 격식이나 품격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단지 제멋대로 난폭
하게 날뛰는 것만이 원칙이고 극의인 듯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그들
검에 걸리면 그야 말로 난폭한 원숭이 손에 갈가리 찢겨질 듯한 공포를
심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네 마리 큰 원숭이 사이에 갇힌 용유진은 태연자약했다.
그는 어떤 대응도 하지 않고 서서 형산사검의 동작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다 한순간 형산사검이 콩 퀴듯 튀어올라 벼락같이 덮쳐오는 때에
양 손을 뻗어 팔방으로 휘둘렀다. 그는 버릇없는 아이들 뒷덜미를 잡아
올리듯 네 사람을 하나씩 잡아서 서로 부딪치게 하고, 던져버렸다. 그
동장이 너무 빨라 사람들 눈에는 형산사검이 용유진을 깔아뭉개듯 한
곳으로 덮쳐갔다가 다시 물방울 튀듯 뛰어서 물러난 것으로 보일 뿐이
었다. 그러나 그 틈새를 잡아 공격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점창신백 백
일봉과 그의 세 사제였다.
점창파의 검법은 예로부터 정파답지 않게 잔인하고 악독하다 할 정
도로 궤이신랄했고, 그 백미는 비검술(飛劍術)의 일종인 회풍무류사십
팔검(廻風舞柳四十八劍)이었다. 어검술을 발휘할 능력이 아닌데도 그와
흡사한 효과를 볼 수 있는 검법이 이것, 속임수라는 느낌이 강하긴 하
지만 제대로만 사용하면 손써 볼 틈도 없이 꼬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형산사검이 만드는 원 바로 밖에서 대
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형상사검이 공격을 가하고, 다시 물러나자 백일
봉의 손에서 검이 떠났다. 그들 사제들이 그와 거의 동시에 검을 던졌
다. 네 자루의 검이 허공에 떴으나 그 방향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것
들은 마치 살아 있는 새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팔랑개비처럼 허
공을 가르며 날다가 용유진의 한 몸에 모였다.
그러나 용유진은 침착했다. 서문하와의 만남 이후 그는 이상하게 침
착해지고, 여유로워졌다. 예전의 그는 단지 고강한 내공과 다양한 무공
기법으로 적을 쓰러뜨리는 데 급급했고, 그래서 과하게 손을 쓰는 경우
가 많았다. 서문하와의 만남 이후, 그로 인한 마음공부 이후 그는 그런
식의 무공이라는 것은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에 다름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싸움은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침착하게 끝까지 보고 적절하
게 손 한 번 쓰면 끝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형산사검은 던진 직후 머리에서 지워버리고 점창파 검
객들이 던진 네 자루의 검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그를
위협할 만한 것은 단 한 자루, 백일봉이 던진 것뿐임을 알아보고, 손을
내밀어 바로 그 검을 잡아채었다. 그는 그 검으로 나머지 세 자루의 검
을 쳐서 되돌려 보냈다.
비록 자기가 던져보낸 검이라 하나 거기 다른 힘이 개입해서 되돌아
오는 것까지 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런 경우 피하는 것이 상책이
었지만 점창파 검객들은 목숨을 걸고 받아내려고 했다. 그 결과 세 명
의 검객은 스스로 던진 칼에 맞아 부상을 입고 물러나야 했다. 그나마
도 못한 한 사람, 점찬신검 백일봉은 망연히 서서 용유진의 손에 잡힌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의 동공에는 갖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용유진은 검을 거꾸로 잡고 손잡이를 내밀었다.
"귀한 검을 더럽혔습니다."
백일봉은 그러나 자신으 앞에 내밀어진 그 검을 잡지 않았다. 대신
들어올린 손으로 스스로의 머리를 쳐서 깨뜨려버렸다. 그는 썩은 기둥
처럼 쓰러져 죽었다.
객청 안은 얼어붙은 듯이 조용해 졌다. 용유진도, 그리고 그 광경을
묵도한 다른 사람들도 이 사태를 믿지 못하겟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검이 없으면 주인도 없다.'
무림 구대문파 중에서도 다시 검법의 명가로 유명한 점창파릐 이름
을 떨친 금언이었다. 사문에서 나올 때 점창의 제자는 누구나 한 사
람당 하나씩 검을 받아서 나온다. 그 검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절대
로 잃어버리거나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특히 대결 중에 손에서
떨군다거나 하는 것은 절대 금기 사항이었다. 검을 잃으면 그 순간 그
의 목숨도 끝났다고 생각해야 하고, 남이 죽여 주기 전에 스스로 죽음
을 택해야 하는 것이 점창파 제자의 자존심이고, 점창파 규율이었다.
그렇게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렇게 확실하게 지켜지는 것
을 보는 것은 여기 있는 누구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용유진에게도
그것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마음공부로
가다듬었다고 생각한 평정심이 이 한 번에 흔들려 버렸다. 그는 뚜렷한
대상도 없는 분노에 불타 올라서 객청 안의 사람들을 하나씩 쏘아보았
다.그리고 검을 바로 잡고 가슴 앞에 들어올렸다.
"바랐던 것은 아니나 끝내 피를 보고 말았소. 이렇게 된 바에야 다
시 피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참이오. 다음은 어느 분께서 상대
해 주시겠소?"
엄청난 위압감이 객청 안을 감싸고 돌아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고개조차 바로 들지 못할 정도의 존재감이 용
유진의 눈과 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싸우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고, 그래야만 하는 입장이 있다.
점창파의 남은 세 검객이 나섰다. 그들은 적게, 또 크게 상처를 입었지
만 지금 상처 따위가 중요하지 않았다. 동문의 시체를 앞에 두고 물러
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오른손에 든 검을 천장을 향해 바스듬히 기울이고
있었다. 점창파 검법의 또 다른 절기인 사일신검(斜日神劒)의 기수식이
었다. 그런 자세로 천천히 원을 그리며 용유진을 포위하고 돌았다. 똑
같은 자세, 똑같은 동작, 자로 잰 듯 똑같은 보폭, 심지어 호흡의 간격
과 깊이까지 똑같은 세사람이었다. 그리고 한순간 동시에 움직여 공격
을 가했다.
일정한 속도로 반복운동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 그것고 극도로 긴장
된 상태에서 집중해서 지켜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호흡을 맞
추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자각한다고 해도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
하는 것이 그런 경향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순간 호흡이 깨지면 반
응이 느려지고, 반응이 느려지면 손이 따라서 느려지게 되는 것이다.
점창삼검의 동작은 그것을 노린 공격이었다. 일정한 속도와 동작을
강조하다가 동시에 움직이게 되면 공격당하는 사람은 그 동작 역시 같
은 방식으로 즉 셋이 똑같이 해올 거라고 무의식중에 믿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공격은 서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이 각기 다른 방향,
다른 방식으로 가해졌다. 이렇게 되면 공격당하는 사람이 당황하게 되
고, 검과 검을 마주 한 상태에서 당황은 곧 패배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용유진의 경지는 그런 것을 넘어서 있었다. 그에게는 점창삼
검이 같은 방식으로 공격해 오든 다르게 해오든 상관이 없었다. 그는
더 이상 타인의 호흡에 영향받지 않고, 자기만의 호흡을 유지할 정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어떤 동작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집중력을 동
시에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를 향해 날아오는 세
개의 검을 하나씩 파악하고 그 검들 사이로 이어지는 하나의 선을 따라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짧은 비명 세 마디가 퍼졌다. 점창삼검이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그
들의 가슴팍, 혹은 목,또 혹은 어깨에 칼자국이 나있고, 피가 비쳤다.
'죽은 것인가?'
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자문했다.
다시 세 개의 시신이 늘어나는 것인가? 단 일격에?
에쌍이라도 좋고, 기대라고 해도 좋았지만 모두 틀려버렸다. 점창삼
검은 죽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쳐다보더니 수치스러워 얼굴을 붉혔다
가 이대로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비장함으로 표정을 바꾸었다.
누가 봐도 뻔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서 말리려고 하지
않았다. 지는 게 뻔한, 그래서 죽는 게 예정되어 있는 싸움이라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들은 모두 점창파의, 그 이전에 무인의 자존심
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중에는 무인이라는 것을 넘어서는 사람도 있어서 점창삼
검을 밀어젖히고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무당도사였다.
"이 자리는 저희들에게 넘기시는게 어떠하십니까?"
점창삼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도 참견해서는 안 될 일에 끼여드
는 무당 도사가 오히려 이상하고, 그런 무신경함이 분노스럽다는 표정
이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당 도사에게는 할말이 있었다.
"세 분께서는 따로 할 일이 있으시잖습니까."
"어떤 일도 이 일보다 중요하지 않소."
"빈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당도사느 점창삼검의 모욕감을 느낄 정도로 간단하게 정면으로
부정하고 백일봉의 시체를 가리켰다.
"싸움에서 진 것은 진 것, 죽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동문의 시신은 여러분이 거두지 않으면 모욕을 당할 수도 있겠지요."
그 말에 점창삼검은 크게 깨달은 것처럼 입을 벌렸다. 그리고는 셋
이 귓속말로 상의를 하고, 무당도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희를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가서 장문인께 고할 수 있
도록 도호(道號)를 알려주시면 저희가 편하겠습니다."
무당도사가 대답했다.
"자소궁(紫宵宮)을 맡고 있는 석현(奭峴)이라 하오."
장내가 술렁거렸다. 무당 도사의 신분이 생각보다 대단했던 것이다.
첫댓글 잘밨어요
감사합니다
ㅈㄷㄱ~~~~~```````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였습니다.
감사해요~^^
즐독하였습니다
56ㄱㄹ
즐감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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