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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수(蒙首)는, 고려(高麗)여인(女人)들의 전유물(專有物)?
○ 조선왕조(朝鮮王朝)시대(時代)라면 :
· 현존(現存)하는 우리들의 조상(祖上)님들이 살았던 시대(時代)이고,
· 조상(祖上)님들이 살아왔던 그 시대(時代)의 풍속(風俗)은, 대대(代代)로 이어져, 오늘날까지도 변(變)하지 않고 있는 것들이 있는가하면, 여러 이유(理由)로 소멸(消滅)되어 버린 것도 많을 것이다.
· 특히 혼례(婚禮)와 상례(喪禮)에 관한 것들은 쉽게 소멸(消滅)되지 않는다. 또 부녀자(婦女子)들과 관계(關係)되는 것들도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규방(閨房)의 은밀(隱密)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풍속(風俗)중에서 <머리에 쓰고, 얼굴을 가리는 너울>에 대해, 풍속(風俗)과 관계(關係)가 있는 것인가, 여러 가지 예(例)와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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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太宗 28卷, 14年(1414 甲午 / 명 영락(永樂) 12年) 11月 17日(丙辰) : 부녀자는 입모(笠帽)를 드리우도록 명하고 부채를 가지는 것은 금하다
《丙辰/命婦女垂笠帽,禁持扇子.先是,婦女笠帽,卷其前簷,持扇子以障面,至是命垂之,擁蔽其面. : 병진/부녀자(婦女子)는 입모(笠帽)를 드리우고 부채(扇子)를 가지는 것을 금(禁)하라고 명하였다. 이 앞서, 부녀자의 입모(笠帽)는, 그 전첨(前簷)을 말아 올리고, 부채를 가지고 얼굴을 가렸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이를 드리워서, 그 얼굴을 감싸서, 가리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주D-001] 전첨(前簷) : 앞에 드리워서 얼굴을 가리던 것
● 위의 구절(句節)을 쉽게 풀면 : <당시(當時)의 부녀자(婦女子)들이, 립모(笠帽)의 앞쪽에 늘어진 부분(전첨:前簷)을 말아 올려, 얼굴을 들어 내놓고는, 부채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폐단(弊端)에 대해, 왕명(王命)으로, 금(禁)하기를 : <부녀자(婦女子)가 쓰는 입모(笠帽)의 앞 쪽 늘어진 부분(前簷)을 말아 올리지 말고, 늘어뜨려서 얼굴을 가리고, 부채는 사용(使用)치 말라.>는 것이다.
● 이때가 서력(西曆) 1,414년이다. <그 이전(以前)에는 립모(笠帽)를 쓰고, 전첨(前簷)을 늘어뜨려 얼굴을 가렸으나, 어느 땐가부터, 전첨(前簷)을 말아 올리고,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왕명(王命)으로 전첨(前簷)을 말아 올리지 말고, 예전대로 늘어뜨려 얼굴을 가려라하는 것이다.
얼굴을 가리는 것을 몽수(蒙首)라고 하는데, ‘너울’이라고도 하고, ‘쓰개’라고도 한다. 아래의 여러 설명(說明)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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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몽수(蒙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려시대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쓰던 쓰개. 몽수는 오호(五胡)의 서역(西域) 부녀자들의 두식(頭飾)으로, 중국 수나라·당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왔다고 한다. 당나라에서는 이를 멱리(羃䍦)·유모(帷帽)·개두(蓋頭)라고 하였고, 고려에서는 몽두(蒙頭) 또는 개두(蓋頭)라 하여 부인들이 나들이할 때 검은 나(羅)로 만들어서 썼다. 그런데 고려는 일찍이 해상무역이 번성하여 서역의 사라센과도 교역이 있었고, 사라센인들은 고려에 와서 벼슬도 하고 장사도 하면서 서역의 많은 문화를 들여와 고려의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니, 이 사라센 여인들이 내외를 하기 위하여 머리를 덮고 눈만 내놓던 풍습을 직접 받아들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몽수는 세 폭에 길이가 여덟 자나 되는 것으로 이마에서부터 머리를 내려덮고 면목(面目)만을 나타내었으며, 그 나머지는 땅에 끌게 하였고, 그 값은 금 한 근과 맞먹었다고 한다. 몽수는 너울의 기원이 되는 것으로, 조선시대에 들어와 짧게 되었고, 원립(圓笠)이 들어와 이것이 다시 나화립(羅火笠)·넓은 립(廣笠)·너울로 된 것이라고 본다.<인용/끝>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說明)을 보면 :
1) 오호(五胡)의 서역(西域) 부녀자들이 썼던 두식(頭飾)으로, 수(隋)나라와 당(唐)나를 거쳐 고려(高麗)로 유입(流入)됐을 것이라는 추정(推定)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그 근거(根據)가 충분(充分)치 않은, 빈약(貧弱)한 논리(論理)다.
왜냐하면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과 신강성(新疆省)일부지방에 회교(回敎)가 전파(傳播)된 것은, 13세기(世紀)∼17세기(世紀)로 알려져 있다. 또 회교(回敎)가 창시(創始)된 것은 서력(西曆) 610년경이란 것이 정설(正說)이다. 이때는 현재(現在)의 사우디아라비아지방의 일부에서만이 회교(回敎)가 있었을 뿐이다.
2) 고려(高麗)는 일찍부터 해상(海上)무역(貿易) 번성(繁盛)하여 서역의 ‘사라센’과도 교역(交易)이 있었고, ‘사라센’인들은 고려(高麗)에 와서 관리(官吏)도 하였으며, 상업(商業)에 종사(從事)하면서, 서역(西域)의 여러 풍속들이 전해져, 고려(高麗)문화(文化)에 많은 영향(影響)을 미쳤으니, 두식(頭飾) 역시 영향(影響)을 받은 것이 아닐까 추정(推定)한다.
두식(頭飾) 설명(說明)으로 올바르다고 볼 수 있는 것은 2)의 것이다. 고려(高麗)와 사라센과의 교역(交易)은 많은 것들이 부수적(附隨的)으로 교환(交換)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問題)는 고려(高麗)가 반도(半島)고려(高麗)냐? 대륙(大陸)고려(高麗)냐? 하는 것인데, <반도(半島)고려(高麗)란 지형지세(地形地勢)적으로 볼 때, 일장춘몽(一場春夢)의 희망(希望)사항(事項)일 뿐이다.>
➠ 왜냐하면 <고려(高麗)는, 동서(東西) 일만(一萬)리를 아우르는 거대(巨大)한 제국(帝國)이었으며, 천하통일(天下統一)을 이룬 제국(帝國)>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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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쓰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몽수의 착용에 관하여 ‘고려도경’ 귀부조에서는 “조라로 된 몽수(蒙首)를 쓰는데 3폭으로 만들고 길이는 8척이다. 머리 정수리로부터 늘어뜨려 쓰며 얼굴과 눈만 내놓고 땅에 끌리게 한다.”고 하였다. 또한 부인 비첩 조(婢妾 條)에서는 “일을 하고, 시중을 들어야하기 때문에, 몽수를 아래로 늘어뜨리지 않고, 머리 정수리에 접어 올려놓고 다녔다.”고 한다. 이로써 고려시대는 일반적으로 몽수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太宗)대부터 숙종(肅宗)대까지의 문헌에, 얼굴과 몸을 가리는 쓰개로 입모(笠帽)와 개두가 기록되어 있고, 광해군 이후는 개두와 너울이 기록되어 있다.
‘가례도감의궤’에는 숙종(肅宗)대까지는 <나화(汝火)>, 영조(英祖)대 이후(以後)는 <너울>이 기록되어 있어, 조선(朝鮮) 후기에는 <너울과 개두>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전과 빈궁은 자적라(紫的羅), 그 밖의 여자들은 조라 또는 흑주로 만들었다. 내외용 ‘쓰개’로는 장옷·쓰개치마·삿갓·전포 등이 있었으며, 주로 중인급 이상에서 착용하였다. 장옷은 지방에 따라 혼례복이나 저승으로 돌아갈 때의 수의로도 사용되었다. 내외용 쓰개는 개화기 때에 없어졌다.<인용/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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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멱리(羃䍦)
중국 당 시대의 수복(首服)으로 페르시아로부터 유래하였다. <바람을 막기 위해 포(布)로 얼굴에서 몸까지 덮어쓰는 것으로 당(唐)초기의 여자들이 나들이할 때 썼으며, 낯선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였다.>
성호사설(星湖僿說) : 당나라 때 궁인(宮人)들이 말을 탈 때 사용한 쓰개의 일종. 고려의 몽수와 유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사라(紗羅)로 만들어 전신을 덮게 되어 있는데 점차 목에 닿을 정도로 짧아져 이를 유모(帷帽)라 하였다. “옛날에 여자가 문을 나설 때 반드시 얼굴을 가렸는데 후세에는 궁인들이 말을 탈 때 멱리(羃䍦)라는 것을 많이 쓰고 얼굴을 온통 가렸다. 또 머리에는 둥그런 모자(圓帽)를 쓰는데 그것을 석모(席帽)라고 하였다 여기에 사망(絲網)을 늘어뜨려 주취(珠翠)로 장식하였다.”고 하였다. 여자의 쓰개류는 원나라 간섭 이전의 <몽수(蒙首), 멱리(冪), 가사(袈莎), 화관(花冠)>과 원나라 간섭기의 <두면(頭面)>이 있다.
멱리(羃䍦)란 제도는 오랑캐로부터 생겨 나왔는데, 온 몸을 가려 덮어서 길가는 사람들이 엿보지 못하도록 하려고 한 것이다. 영휘(永徽) 이후에는 모두 유모(帷帽)를 사용했는데, 이는 늘어진 폭 끝이, 목에 닿도록 만들어서 치마허리 밑은 몸 맵씨가 보이게 하였다. 당(唐)나라 여복지(輿服志)에 이르기를, “정관(貞觀) 시대에는 말 타는 궁인(宮人)들이 제(齊) 나라와 수(隋) 나라의 옛 제도에 따라 멱리(羃䍦)를 많이들 사용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송(宋) 나라 때는 부녀들이 종루(鍾樓) 거리에 걸어 다닐 때에 자주색 비단으로 모가 나게 만들어서 몸을 반쯤 가리고 다녔다 한다. 이는 이름이 모첨안조(帽簷眼罩)라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속칭 나올(羅兀)이라 한다. 중세(中世) 이전에는 비록 귀척(貴戚) 집안 부녀일지라도 금으로 꾸민 수레는 좀처럼 쓰지 않았었고, 출입할 때면 이 멱리(羃䍦)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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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임하필기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머리를 감싸는 제도[蒙首之制]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이르기를, “남자의 건책(巾幘 한 폭의 헝겊으로 만든 두건)은 비록 당나라 제도를 조금 모방한 것이지만, 부인(婦人)의 타계(鬌髻)를 아래로 늘어뜨린 것은 오히려 완연한 좌수 변발(髽首辮髮)의 형태이다. 출입할 적에도 하인과 말을 주는데, 대체로 역시 공경(公卿) 귀인(貴人)의 아내이다. 조라(皂羅)를 머리에 쓰고 왕비 부인은 붉은색으로 장식을 하되 역시 가마[車轝]는 없다. 당나라 무덕(武德 고조(高祖)의 연호) 연간에 궁인(宮人)이 말을 탈 경우에는, 대부분 검은 멱리(羃䍦 여자의 얼굴을 가리는 수건)를 하고 온몸을 가렸다는데, 지금 고려(高麗) 풍속의 몽수(蒙首 부녀자가 얼굴을 감추기 위해 덮어쓰는 것) 제도가 아마 멱리(羃䍦)의 유풍일 것이다.
[주D-001] 좌수 변발(髽首辮髮) : 좌수는 삼베로 머리를 묶는 것이고, 변발은 머리를 땋는 것으로서, 모두 오랑캐의 풍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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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너울(羅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조선시대 여성의 내외용 쓰개류의 일종.
(7) 개두(蓋頭) : 고려의 부인들이 나들이할 때 검은 라(羅)로 만든 몽수(夢首)라는 것을 머리에 썼는데, 일명 개두라고도 한다. 검은 비단 세 폭에, 길이 8자로, 이마에서부터 머리를 내려 덮어 면목(面目)만 내보였다. 길이는 땅에 끌게 하였는데, 값이 금(金) 1근(斤)과 맞먹었다. 조선 시대 여자(女子) 머리 덮개의 하나로, 주로 국휼(國恤)시 상복(喪服)으로 착용하던 것을 일컫는다. 푸른 대로 둥글게 테를 만드는데,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넓게 하며, 흰 명주로 안을 바르고, 테 위에 베를 씌웠다. 꼭대기에는 베로 만든 꽃 세 개를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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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개두(蓋頭)·여입모(女笠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시대 국상 때 머리에 쓰는 쓰개. 형태는 너울과 같으나 다른 점은 베로 만든 점과 모정(帽頂)에 베로 만든 꽃이 달려 있는 점이다. 개두(蓋頭)의 형태는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의 중 흉례복제(凶禮服制)에, 개두는 본국의 여자의 입모(笠帽)로 대신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개두와 입모, 즉 너울이 같았음을 알 수 있으며,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 행렬도 중의 개두와 가례도감의궤 행렬도 중의 너울의 형태가 같았다.
조선 태종실록(太宗實錄) 8년 5월 예조에서 상정한 태조 승하시 상복(喪服)을 보면, 정비전(靜妃殿), 대비, 숙빈, 궁주, 옹주, 각전시녀 상복에 ‘개두’가 처음 보인 후 계속해서 국상 때 ‘개두’가 사용되었으며, 신정왕후(神貞王后 : 1808∼1890, 조대비) 상제(祥祭) 의대발기(衣襨發記)에도 조라(皂羅) 개두가 보였다.
중국의 개두는 송인(宋人) 주휘(周煇)의 청파잡지(淸波雜志)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사각형 천(紫羅)으로 몸을 가리는 것을 속칭 개두라 하며 당(唐)의 유모제(帷帽制)라고 하였다.
고려의 여인들도 개두를 사용했음을 계림유사(고려 숙종(1096∼1105)에서 “고려……여자 개두……”라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고려여인들은 송(宋)에서 들어온 개두(蓋頭)를 몽수(蒙首)와 함께 장식용으로 사용했다고 보며, 송(宋)에서 고려(高麗)에 전해진 개두(蓋頭)가 조선시대에는 베로 만들어 국상 때에 사용하게 된 것이다.
개두의 형태에 관한 도설이 국조속오례의 서례(序例)에 있는데, 창덕궁에 소장되어 있는 개두 유물과 같다. 즉 푸른 대로 둥글게 테를 만들되,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넓게 하여 흰 명주로 안을 바르고 테 위에 베를 씌운 것으로 모정에는 베로 만든 꽃 세 개를 포개어 붙인다. 속칭 여입모(女笠帽)이다.
상장(喪裝)과 상복기간에 따라 옷감이 조금씩 달랐으나 거의 초세생포(稍細生布)를 사용하며 상복기간의 경과에 따라 백색에서 흑색을 사용하였다.
가례도감의궤 / 너울
…<가례도감의궤>에 너울을 쓴 상궁. 너울은 조선시대 궁중이나 상류층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착용하던 쓰개이다.
형태는 갓(笠子) 위에 사각형의 천을 씌운 것으로, 위보다 아래가 약간 넓은 자루형이며, 길이는 어깨까지 오며, 눈 위치에 밖을 내다 볼 수 있도록 비치는 옷감을 대었다.
조선(朝鮮) 초기에는 <입모(笠帽)·면사(面紗)라고도 하였으나 인조 때에 너울(羅兀)과 너불(汝火)이 혼용되었고, 영조(英祖) 이후에 너울로 집약(集約)>되었다.
그러나 당시 송에서 사용되었던 개두(蓋頭)를 주휘(周輝)의 청파잡지(淸波雜志)에서 보면, 사각형 자색라로 몸의 반(半身)을 가리는 것으로 당(唐)의 유모제(帷帽制)라고 하였다.
궁인(宮人)의 능행(陵行)시의 너울은 정조(正祖) 능행도에서 보면, 가례시와 동일한 형태의 황색 너울을 착용하였고, 한양가에서 보낸 대궐 내에서 착용하는 너울도 황색으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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➌ 유용한 지식 칼럼. 키스 키스세븐 / 히잡, 차도르, 부르카, 아바야, 니캅 - 이슬람 여자들의 의복 차이
지금에 와서는 전 세계가 이슬람의 히잡, 차도르, 니잡 등이 여성을 억압하는 도구라고 비난을 합니다. 그러나 이 의복들은 계속 권장과 금지를 격어 왔던 시대의 의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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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영향은 받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슬람교의 이슬람력(曆)은 〈마흐메트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移住)한 히즈라의 해인 서력 622년을 원년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전(經典)의 말씀에 따라 이슬람교를 믿는 여성(女性)들은 몸을 가리기 위해 착용한 것이다. 여기서
이슬람의 영향(影響)을 받았다고 한다면, 〈고려(高麗)는 대륙(大陸)을 일통(一統)했던 왕조(王朝)로,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에서 페르시아 인(人)들과 교류(交流)했다는 것을 증거(證據)한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說得力)이 있다. 2017년 01월 29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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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반도조선사에서 :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것들 중에서, 지방의 풍속이나 제도등에서 특이한 것이 보이면, 해상교류로 인한 영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원전에서는 해상을 통해 교류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해상으로 교류했다는 말은 무역선이나 전함을 만들어 오늘날의 페르시아 또는 구라파등지로 항해하여, 또는 그곳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왔다>는 것인데, 그 증거나 문헌으로 고증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전혀 아니다. <그저 그렇다고 이야기만 하고 있을 뿐이다.> 기자(箕子)로부터 삼한과 삼국에서 고려(高麗)까지 말이다. 배를 타고 왔다, 또는 갔다는 이야기는 바다(海) 말고도, 강(江)이 있다.
해상(海上)이 아니면, 오직 육로(陸路)만이 가능할 뿐이다.
<구라파나 페르시아에서 중앙아세아를 거쳐, 신강성을 지나 하서회랑을 거쳐, 중원대륙을 지나치고, 동북삼성 땅을 거쳐, 반도까지 왔다>는 말은, 그 여정이 2만리를 훌쩍 넘기는 인간의 일생을 거는 대모험이다. 그 옛날에 말이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보면, <불가능함으로, 해상교류라는 단어를 꺼내 든 것이다.> 그러나 기원 후으로부터 10세기 이전 또는 12-13세기 이전의 행성안에서, 전함이나 무역선을 만들어 곳곳을 항해하고 다녔다는 과학적인 이야기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페르시아 무역선이 반도까지 왔다든지, 인도반도에서 경상도까지.....뭐 이런 이야기들이다.
기마병은 <말 한필+말사료+병사1인+군량+무기>의 조합이다.
이런 기마병 수십만(20만 이상 40만 이하)을 전함 또는 수송선에 태워 바다를 건너 적지(敵地)에 상륙시키려면 과연 몇 척이나 필요할까?
수십명의 선원과 많은 교역품을 싣고, 먼 바닷길을 항해한다고 한다면, 그 무역선의 크기, 장비등은 무엇이 필요했으며, 그 정도의 무역선을 만들 수 있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해상교류란 말을 사용할 때는 최소한 위의 두가지 문제만을 짚어보고 이야기해야 할 거다.
이 행성안에서 '반도조선사'만이 '해괴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 역사'라고 이야기하고, 서술된다.
심각하게 고민해야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