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한 편 - <강이 흐르는 시간> / 김 승 혜
<감상문>/ 서태수 첫 문단만 읽어봐도 작가의 역량을 안다. 이 작가가 독자 유혹을 위한 미학적 장치를 엮어서 글을 쓰는지 여부는 첫 문단에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밋밋하면 독자 시선도 흐지부지해진다. 시는 짧은 형태라 좀 덜하겠지만 수필이나 소설 같은 긴 산문류는 첫 문장, 첫 문단이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자는 당나귀처럼 당근이 눈앞에 보여야 읽을 의욕을 지닌다. 매력 없는 남의 글을 시간 쪼개어 읽어 줄 인내심 많은 독자는 없다.
나는 김승혜 작가를 전혀 모른다. 수필집 프로필을 보니 춤꾼인 그녀는 소극적 수필 활동으로 그리 알려진 작가가 아니었나 보다. 수필 <강이 흐르는 시간>을 읽고 난 후 이 작품을 내 수필 강의와 우리 카페 활용에 좋은 자료가 되겠기에 그에게 메일을 보내 원고 파일을 구했다.
<강이 흐르는 시간>은 김승혜의 역작力作 같다. 수필작법을 아는, 그리고 그 기법을 살리려 애쓴 글솜씨다.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는 생동감 있는 묘사를 통해 강과 어우러진 서정을 차분하게 그려내고 있다. 새벽강을 바라보며 느끼는 서정이 아름답다. 여기에 작은 화소話素의 서사도 곁들였다. 서사가 곁들여지면 수필은 구체성을 얻어 재미가 있게 된다. 변함없이 흐르는 강물을 통해 그려지는 흑백사진 한 장. 불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속울음, 그리고 나의 삶.
이 서사는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굵은 가지만 짧게 스케치했다. 그러나 옅은 안개처럼 덧칠해 놓은 그 풍랑은 실상 엄청난 회오리였음을 독자는 읽어낼 수 있으리라. 그 장치가 앞 단락에 삽입된 화소 태풍 이야기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 무섬증은 여전하지만 작가는 반어적反語的 분량으로 처리했다.
그러는 사이 풍경은 어슴프레한 새벽강에서 생동감 넘치는 아침으로 바뀌고, 작가는 유유한 모습의 변함없는 강물에서 자신의 모습이 어우러진 결 고운 세월을 읽어낸다.
이 작품이 재제를 비유적으로 치환하여 창작적 요소는 가미하지 않았지만, 각 화소마다 구사한 서정적 묘사도 맛깔 있고, 작품을 이끌고 가는 전체 구성도 매우 긴밀하게 짜서 엮은 좋은 수필이다. (2015.2.) =========
<강이 흐르는 시간> 김 승 혜
언제나 그렇듯 겨울 아침은 느리게 온다. 이제 나는 이 굼뜬 걸음의 겨울 아침이, 이 겨울의 어슴새벽이 좋다. 언제부터인가 내게도 아침시간이 많아졌다. 흘러와도 너무 멀리 흘러와 버렸다. 굳이 나이를 들먹이지는 않겠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아침잠 없어진 나이에 와 버리고 말았으니.
어느 아낙이나 그러하듯이 기상을 하면 제일 먼저 부엌으로 간다. 넌지시 주방의 작은 창으로 눈길을 건네면 창속의 풍경은 한 점의 작은 액자처럼 눈에 들어온다. 아직도 까만 새벽이지만 드리워진 강물 위에는 불기둥이 즐비하게 흔들리고 있다. 건너편 아파트에서 내뿜는 불빛, 달리는 자동차의 불빛들이 그렇다. 눈길은 연신 강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부엌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해내는 사십 년 가까운 커리어, 매순간 강과의 눈 맞춤이 내 하루분의 위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벽은 슬며시 푸르스름한 아침으로 와 있다. 살짝 창을 열어 본다. 산을 타고 강을 스치는 새벽바람, 신새벽의 청신한 바람이 강 위로 잦아드는가 싶더니 강바람의 결을 따라 내게로 온다. 이렇듯 이른 새벽의 바람결은 늘 새롭기만 하다. 아직도 살짝 어두운 강물의 자잘한 너울거림은 불빛을 받아 스팽글처럼 반짝인다. 까만 새벽을 고요하게 흔드는 불기둥, 이른 아침의 알싸한 바람, 서서히 붉은 햇살로 채워지는 강의 풍경은 마음 둘 곳 없는 사람들의 아늑하고 포근한 품이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어머니의 강, 아버지의 강이라고 노래하지 않던가. 이토록 변함없이, 그윽하게 흐르는 강변의 아침이 언제부턴가 나의 소중한 시간이 되어 버렸다.
주말 아침, 전기밥솥에다 쌀을 씻어 안치고 한 줌의 잡곡과 콩을 얹어 취사를 누른다. 밥을 시작하겠노라며 상냥하고 친절한 기계음이 배웅까지 보탠다. 전기의 힘에다 아침밥을 부탁해 놓고 서둘러 강변을 찾아 나선다. 이른 새벽의 강을 만나기에는 주말 아침이 가장 맞춤하다. 어느새 몸에 익어버린 나의 강변 찾기,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는 기분 좋은 아침. 나도 몰래 이끌리듯 강가에 서면 밤을 지새운 강에도, 늘 허기져 있는 내 가슴에도 작은 너울이 찰박대며 일렁인다.
내게 강은 그런 것이다. 조금은 볼품없었던 나의 마음을 맑게 평정해주는, 탁해진 마음을 정결하게 씻어내 주는 한 모금의 지장수地漿水같은... 그 무엇으로도 채우지 못해 늘 목말랐던 시간 또한 길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쓸쓸함에 괜히, 무연히 애태우며 늘 종종대기만 했었다. 그러기에 누군가는 그랬나보다. 서두르지 않는 삶은 지루하다고... 적당한 때를 지키는 세상살이, 얽매이지 않는 참삶의 이치를 유유히 흐르는 강물의 템포가 내 신세타령을 수굿이 들어 주는 듯하다. 그러기에 강가를 걷는 시간은 내 마음 한없이 고요해지고 강이 흐르는 시간 속으로 더 깊숙이 침잠해 버리고 만다.
해마다 여름이 끝날 즈음이면 한 차례씩 태풍이 찾아온다. 몇 해 전의 태풍 때였다. 거친 바람과 검은 구름의 이동이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비는 거세게 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아, 나는 왜 이런지 모르겠다. 이 나이까지도 무섬증이 심한 나는, 태풍 뉴스가 뜨면 그때부터 두 손을 가슴에다 모우고 부동不動으로 정지된다. 나잇값 못한다는 핀잔도 많이 들었지만 아주 어린 날부터 내 생각은 그렇다. 천둥이 하늘의 울음소리라면 쉼없이 번쩍대는 번개불은 하늘이 내려치는 회초리 같기만 하다. ‘오늘도, 오늘도 하늘이 단단히 화가 나셨구나! 아주 단단히...’
그 날도 나의 강 바라기는 멈추지 않았다. 하염없이 창을 때리는 비바람과 바다의 거친 파도는 용트림을 해대고 있건만 강은, 강물은 그렇지 않았다. 가끔씩 일렁이는 물너울만 고요하게 보여줄 뿐 크게 흔들리지 않는 초연함 그대로였다. 순간 아득해진 어린 날들이 스친다. 작은 일, 큰일 채 가리기도 전에 언제나 불같은 호령으로 콩닥 가슴 쓸어안게 했던 우리 아버지. 숨죽이며 흐느끼던 어머니의 어깨 떨림과 강물의 아주 작은 흔들림은 그렇게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참기 힘들어도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았다. 삭이고 삭이던 어머니의 속울음, 모녀의 일생은 내림한다 했던가. 그날의 비바람도, 나의 눈물도 쉬 멈추려 하지 않았고 내 안의 질문들이 가슴을 마구 두들긴다. 그러면 너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고. 옛말은 그르지 않아서 엄마처럼 살지 않으리라 마음 다잡았지만 나 역시......
이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또 하나의 슬픔으로 멍울 진 안타까운 그리움들. 가까스로 달려가 눈 맞춤 하면 강물은 변함없이 잔물결로 일렁이고 있다. 자꾸만, 자꾸만 나직하고 잔잔하게 토닥이듯 흐르고 있다. 굳이 신세타령 하지 않아도 다 알겠단다. 또 한 번의 위로를 받아 읽는다. 이른 아침의 강변을 걸어 본 사람이면 알게 되리라. 이토록 곁에서 조용히 흐르기만 할 뿐인데 얼마나 큰 힘과 위안이 되는지 긍정의 고개 끄덕이게 될 것이다.
강에는 지금, 물고기들이 연신 기분 좋은 점프를 해대고 계절 따라 이름 모를 새들이 스치고 사라졌다가 어느새 느린 날갯짓으로 몸 낮추며 비행을 즐긴다. 모터보트를 즐기는 젊은이들, 무시로 비상飛上을 해대는 물고기들의 번쩍임, 입수하며 만들어내는 강물의 동그라미와 물무늬들... 슬몃 가슴 설레는 강변의 풍경과 아침을 걷는 사람들은 드디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버린다.
세월을 머금은 강, 크게 일렁이지 않는 결은 언제나 한결같다. 성급히 서두르지 말아야 되는 삶의 이유를, 하루하루 사위어가는 삶이 초연해야하는 이유를 강은 내게 일러준다. 흐르는 강물은 세월의 주름만큼 깊어져만 가고 지극히 고요한 템포로 흘러가고 있다. 그 속도에 맞춰 내 남아 있는 시간도 함께 흐른다. 오늘따라 강의 결이 그지없이 더 곱기만 하다. (수필집 [나비의 딸], 2014)
<김승혜>
[수필과 비평]으로 둥단, 부산문협, 부경수필, 부산수필문협, 영호남수필 회원, 부산민속보존협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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