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호는 과거 현란한 발차기로 홍콩 골든하베스트영화사의 스탭들을 놀라게 했던 한국 출신 액션 스타다. 황풍 감독의 눈에 띄어 홍콩으로 날아갔던 그가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본다.
왕호(본명 김용호)는 과거 홍콩으로 건너가 <사대문파>(Shaolin Plot, 1976), <중원호객>(원제: 삼덕화상과 용미육, 1977), <천하제일권>(원제: 찬선생과 조전화, 1978) 등의 작품에서 기존 홍콩 스타들을 압도하는 현란하고 시원한 발차기를 선보였던 배우다. 서극의 <황비홍> 시리즈나 원화평의 <철마류>에서 이연걸과 견자단이 선보인 이른바 무영각도 아마 이보다 못할 듯싶다. 1952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그는 해병대 태권도 대표 선수로 활동했다. 1976년에 김선경 감독의 <흑룡강>과 <밀명객>에 황정리와 함께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데뷔했다. 그를 눈여겨보고 홍콩으로 데려간 것은 그의 홍콩 데뷔작 <사대문파>를 연출한 골든하베스트의 황풍 감독이었다. 황풍 감독은 작년 <킬빌> 인터뷰 당시 쿠엔틴 타란티노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감독이다. 주로 골든하베스트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그는 홍금보와 <중원호객> <천하제일권> 등에서 함께 작업했고, 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1978)에서는 이소룡 대역을 했던 역시 한국 출신 배우 김태정(예명 당룡)과 격투 신을 벌이기도 했다.
왕년의 액션 스타를 만났다. 현재 왕호는 신답역 근처에서 개인 사무실을 꾸리고 있다. 한 쇼핑몰의 지하에 '영화제작실'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문을 들어서자 백발을 질끈 동여맨 왕호의 긴 머리가 얼핏 도인을 연상시켰다. 당장 <킬빌 2>의 우마 서먼의 노스승 페이 메이로 출연해도 될 만한 풍모다. 그런데 그는 인사와 함께 홍보를 부탁한다며 한 숙취 해소 음료 캔을 건넸다. 영화제작실의 한켠에는 '컨트롤'이라는 이름의 숙취 해소 음료가 잔뜩 쌓여 있었다. 계속 영화를 틈틈이 준비하는 가운데 그는 또 다른 사업을 하고 있는 중이라 말했다. 한때 현란한 액션으로 홍콩과 한국을 넘나들었던 왕년의 그와 숙취 해소 음료 세일즈를 하는 현재의 모습이 자연스레 매치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사무실의 벽과 테이블을 과거의 스틸과 기억들로 채워놓고 변하지 않는 꿈을 꾸고 있었다. 다시 한번 영화 현장에서 후배들과 멋진 액션을 선보이길 기대하면서.
태권도 선수로 활동하다 어떻게 홍콩에 가게 됐나?
영화배우를 하기 전에 해병대 현역이고 태권도 대표 선수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고 중학교 2학년 때 파란 띠로 전국 체전 나가서 은메달도 받았다. 국기원 주최 1회 세계태권도대회 한국 대표단 시범단으로 개막식 축하 공연도 했다. 젊었을 때 체육관에서 운동만 했다.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은 없었고, 당시 미국으로 이민도 많이 가고 할 때니까 오직 태권도인으로서 미국에 가서 도장도 차리고 출세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당시 이소룡 붐이 일어나면서 홍콩은 계속 무협 스타를 찾았고, 한홍 합작 붐을 타고 우리 해병대가 운동하는 체육관에 홍콩 골든하베스트사 사람들이 찾아왔다. 황풍 감독이 나를 눈여겨봤고 나는 제대하자마자 홍콩으로 갔다. 좋은 기회였고 운도 좋았다. 홍콩 가기 전에 한국에서 황정리와 함께 <밀명객>과 <흑룡강>을 촬영했다. 이미 홍콩하고는 얘기가 다 됐을 때라 가기 전에 부랴부랴 만든 거다. 홍콩 무술 배우들은 발기술이 약해서 다행히 나는 기술도 인정받았고 주연으로도 많이 활동했다. 당시 액션영화 수요가 크니까 한국이나 미국에서 활동하던 태권도 사범들도 홍콩에 가서 테스트를 많이 받았다. 따지고 보면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소룡도 그런 식으로 홍콩에 간 거다. 그런데 다들 테스트 한번 받고 짐 싸서 돌아가는 게 대부분이었다.
당신의 발차기는 지금 봐도 놀랍다. 그래도 홍콩에서 무척 힘들었을 텐데 언어 문제나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는 어땠나?
스트레스가 많았다. 무엇보다 실력이 없으면 안 됐다. 그들은 무술영화에 대한 훈련이 잘됐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고는 진입할 수 없었다. 나 같은 경우는 특별한 기술이 있어서 나를 흉내 낼 수 없으니까 그나마 활동하게 됐던 것 같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특수 발차기는 다 내가 개발했다. 가위차기, 세 번 연달아 차기, 공중에 떠서 다섯 번까지 찼다. <찬선생과 조전화>를 보면 라스트에 테이블을 길게 넘어 돌려차는 동작이 있는데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작품마다 새로운 것들을 개발하려고 했고 계속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영화마다 맞고 떨어지는 단역 무사들이 있다. 그들끼리 하는 얘기로 "이번 영화 누가 주인공이야?" 그러면 "카사파(왕호)라는데" 하면서 같이 작품을 안 하려고 했다. 내 발차기 파워가 세서인지 액션을 하다가 실수로 진짜 맞을 수도 있으니까 무서워했다. <찬선생과 조전화>의 라스트 결투에 나오는 가다키(스턴트 대역 혹은 단역)가 있는데, 홍금보 감독이랑 무지 친했다. 그런데 그 영화 끝나고 서로 한동안 안 만났다고 하더라. 내가 실제로 차게 놔뒀다면서.(웃음) 뭐 언어 문제는 촬영현장에서만큼은 없었다. 기본적으로 영화 하는 사람들끼리는 다 통한다.
촬영하다가 감독과의 구체적인 트러블은 없었나?
아무래도 액션 연출하다가 트러블이 많았다. 내가 한국 사람이니까 아무래도 홍콩 사람에게 좋은 액션을 주려고 한다. 내 존재를 위해서는 밥그릇을 찾아야 했다. 상대 배우 위주로 카메라를 설계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살기 위해서는 역시 실력으로 압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죽자사자 계속 기술을 개발했다. '역시 카사파'라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화면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엄청났다. 그렇게 촬영하다가 의견이 안 맞아서 펑크 내고 가버린 적도 있다. 라스트 장면을 찍는데 분명 아니다 싶은데도 상대방 홍콩 배우 위주로 기술을 잡더라.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다고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그냥 나왔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 영화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함께 주연했던 애가 대만 배우인데, 성룡 스턴트팀과 잘 어울리는 배우였다.
계속 자기를 '카사파'라고 얘기하는데, DVD로 검색하거나 해외 무비데이터베이스에는 외국 이름이 '카사노바 왕'이라는 이름으로 뜬다. 어째서 그런 건가?
황풍 감독이 '카사노바'라고 외국 이름을 지어줬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튀는 이름을 찾았지 싶다.(웃음) 이후 카사노바에서 '노'자를 빼고 카사파(Casafa)라고 했다. 그런데 한국에는 또 왕호라고 알려졌다. 홍콩 측 파트너였던 토머스 탕과 조셉 라이가 내 한국영화들을 수입하면서, 이제는 또 '카사노바 왕'이라고 합쳐서 불러 그렇게 됐다. 한국영화인데 내 영화를 홍콩에서 풀 때, 홍콩에서 알려진 카사파라고 하면 완전히 홍콩영화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 카사노바 왕이라고 해서 한국에서 수입한 것을 밝힌 것 같다.
좋아했던 액션 스타는 있었나?
이소룡을 무지 좋아했다. 준비된 배우고 진짜 영화에 미친 사람이고 엄청난 수련과 운동을 한 사람이다. 그의 울분은 바로 영화로 표출됐고 늘 가슴에 와 닿았다. 이소룡은 홍콩에서 자라 미국에 갔다. 미국에서 온갖 스트레스를 겪으면서 몸부림치다가 될 만해서 영화계에 나갔는데, 실력차가 월등한 데도 스턴트맨이나 시켰으니 정말 답답했을 거다. 그래서 홍콩에 왔는데 쇼 브라더스에서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퇴짜 맞고 헤매고 있을 때 결국 그는 쇼 브라더스에서 나온 사람들이 차린 골든하베스트로 갔다. 이소룡이 부러운 것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던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 역시 많은 트러블이 있었겠지만 자기 스타일대로 다 해냈다.
이소룡 유작인 <사망유희>에도 잠깐 출연한 것으로 안다.
<사망유희>는 홍금보의 요청으로 출연했다. 온실 격투 신에서 당룡(김태정)하고 싸운다. 그것도 골든하베스트 영화니까 출연하게 된 거다. 전체적으로 액션이 약했다. 1차 시사를 끝내고 카사파를 출연시켜 좀 더 액션을 보강하자고 해서 된 것 같다.
함께 홍콩에서 활동하던 다른 한국 출신 액션 배우들과는 어땠나?
거룡, 당룡, 황정리(<사형도수><취권>), 권영문(<사대문파>), 황인식(<용소야><사제출마>) 다 친했다. 아무래도 같은 영화에 출연하게 되면 이바구도 통하고 외로움도 덜했다. 묘한 경쟁 심리는 있었지만 늘 위안이 됐다. 황정리와 권영문은 같은 집에 살았고 나는 홍콩에 가서 처음에는 호텔에서 지내다가 첫 영화가 끝나고 집을 샀다. 그 외 다른 많은 한국 배우들도 대만에 합작으로 많이 갔다. 그런데 대만에서 히트한 건 다 홍콩영화다. 홍콩영화가 월드 영화였고 다른 친구들 모두 다 비슷한 경로로 홍콩에 갔다. 그런데 보통 가다키를 많이 했다. 홍콩 배우들 중에는 홍금보와 친했다. 부인이 한국 사람이었는데 부인과도 친했다. 홍금보는 파워도 있고 연출력도 좋고 영화적으로 아주 탁월한 사람이었다. 오직 영화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밥 먹을 때나 길거리를 걸을 때나 지금 준비하고 있는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 생각밖에 없었다. 평상시 아무렇게나 반복되는 손놀림이나 동작들을 보면 곧바로 영화에 활용이 됐다. 정말 정열적이었다.
홍금보 말고 또 기억나는 홍콩 배우는 있나?
다양하게 많이 했다. 황가달(<소림사 18동인>), 임세관(<소권괴초><황비홍>), 진성, 고비, 유충량하고도 많이 했고 정소동 감독의 <생사결>에는 우정 출연을 해준 적도 있다. 유충량하고는 스페인에서도 영화를 찍었고, 여소룡과는 인도영화에 같이 초빙돼 가서 출연한 적도 있다.
홍콩에 있을 때도 한국에 와서 촬영하면 기분이 남달랐겠다.
<사대문파> <찬선생과 조전화> 다 한국에서 촬영했다. 그때 한국 인건비가 쌌다. 굳이 둘을 비교하자면 홍콩영화는 늘 고난이도를 원했고 한국영화는 대충 해도 무조건 OK였다. 홍콩에 있을 때도 가끔 시간 나면 한국영화에 출연해 줬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태창영화사를 찾아갔는데 거기 사장이 나한테 며칠 있다 가는지 묻더니, 이혁수 감독에게 '왕호 왔으니까 어서 주연시켜서 영화 찍어' 그랬다. <파천신권>이라는 영화였는데 뭐 그런 식이었다.
타란티노의 <킬빌> 시리즈를 보면 그 시기에 함께 활동했던 유가휘가 나이 들어 출연한다. 계속 홍콩에 남아서 활동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은 없나?
그게 참 운명적인 건데 한국으로 건너와 제작을 빨리하는 바람에 국내에 발목이 잡혀버렸다. 1976년에 홍콩 간 뒤로 1982년에 돌아왔으니 정말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연출부 한 경력도 없이 덜컥 감독이 됐다. 한국에 와서 처음 만든 영화가 <화야>(1983)였다. 그런데 <화야>도 진혜민이라는 홍콩 배우를 데려다 썼고 홍콩이나 대만에 로케이션을 간 영화다. 일본이나 대만에서도 흥행에 성공했는데 미리 판권을 팔고 돈을 당겨 받아서 제작했다. 뒤에 골든하베스트에서도 다시 오라는 유혹이 있었지만 제작까지 손대고 보니 갈 수가 없었다. <북소림 남태권> <냉혈자> <마검야도> <붉은 마피아> 같은 영화들이다.
뒤돌아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들은 뭔가?
개인적으로 <사대문파> <찬선생과 조전화>가 기억에 남는다. 첫 감독작인 <화야>나 <북소림 남태권>도 잊을 수 없다. <마검야도>는 제주도에서 1년간 찍으면서 사계절을 다 담아서 애착이 간다.
<매트릭스>의 원화평 무술감독이나 변함없는 성룡 등 요즘 홍콩의 액션 영화인들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당시 홍콩 액션 영화계의 상황은 어땠나? 당신과 같은 한국 영화인들이 성룡의 성가반, 홍금보의 홍가반, 유가량의 유가반 같은 팀을 만들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이다.
그렇다. 당시 홍콩의 액션영화는 크게 3개의 큰 그룹이 있었다. 쇼 브라더스, 골든하베스트, <취권>을 만든 오사원의 회사였다. 쇼 브라더스는 적룡, 강대위, 유가휘, 골든하베스트는 성룡, 홍금보, 황풍, 오사원의 회사는 원화평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홍금보 쪽이었다. 서로 라이벌이면서 다 친했다. 그렇게 그룹으로 나눠져 활동하다가 액션영화의 인기가 하향세로 접어들거나 하면 다들 뭉쳤다. 그래서 한 영화에 여러 명의 감독들이 붙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좋은 영화 만들고 분위기를 띄우고 다 헤어진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안 그렇다. 그래서 나는 사실 1982년에 한국 와서 처음 감독할 때 그런 모델을 한국에서 만들어보려고 했다. 한국에 있는 모든 액션 배우들 다 모아보려고 했다. 내가 준비하는 동안 또 다른 사람이 영화를 만들고 그렇게 다 돌아가면서 하자고 했다. 처음에는 다 하자고 하더니 실제 들어가 보니 그러지 못했다. 그게 한국 사람 근성이다. 그때 다 의기투합했으면 지금 다 같이 살아남았을 거다. 그래서 내가 준비하고 있는 영화가 하나 있는데, 이 영화로 제2차 시도를 하려고 한다. 다들 다른 직업이 있어도 다시 한번 모여 보자고 제의하려고 한다. 과거 우리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고생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모여 유종의 미를 거둬보자는 거다.
그렇게 준비하고 있는 영화는 뭔가?
요즘 한국 영화계에서는 할 만하다는 분위기라 생각한다. 5·16 당시 제주도에 국토 건설단으로 끌려갔던 건달들의 얘기다. 당시 전국 건달들의 최고 오야붕들만 특별히 제주도로 끌려갔다. 거기서 도로건설공사도 하고 위험한 일도 많이 겪었다. 거기에 여러 가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런 영화를 통해서 건달들의 애환과 의리, 휴머니즘을 보려고 한다. 건달과 깡패의 양면성을 가려주고 싶고, 뭔가 사나이 세계의 멋을 알고 젊은이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영화를 하고 있다. 덧붙여서 내가 요즘 '천지무예도'라는 새로운 무술을 만들고 있다. 내가 지금껏 영화를 통해서, 세상을 살면서 경험했던 것들을 모아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무술을 만들어보고자 한다. 여러 가지 무술의 장점만 따고, 영화에 필요한 액션과 무술들을 혼합해서 이걸 배우면 바로 TV나 영화에 바로 배우로 출연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도록 하는 거다. 한국 액션 배우의 인력을 넓히고 다양한 연기자들이 포진돼 있을 때 더욱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으니까. 그런 차원에서 이번 무술을 사단 법인으로 설립하고 DVD 교본도 만들려고 한다. 전국 순회를 통해 보급하고 무술인들이 모여서 사회에 봉사하는 계기를 만들자는 목적도 숨어 있다.
과거 한국 액션영화의 결핍의 문제인데 중국의 소림사나 쿵푸,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에 비교하면 우리는 그런 액션의 근본적인 전통과 뿌리가 없는 것 같다.
맞다. 그나마 있다면 태권도 영화일 거다. 그리고 그것은 홍콩영화의 권법이나 일본영화의 검술에 비하면 발차기의 묘미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아직 진정한 태권도 영화가 없었던 것 같다. 중국 사람들이 소림사 영화를 역사성 있게 만들듯이 우리도 그런게 필요했는데 안타깝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에 비해 소재가 없었고, 또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이소룡이나 성룡 등 중국풍에 맛들여져 있다 보니 포커스를 그렇게 맞춘 거다. 슬픈 일이다. 이제 정말 새로운 액션을 해볼 만한 때가 아닌가 한다. 내가 있는 한 태권도 영화만큼은 언젠가 만들 거다.
지금이라도 충무로에서 불러준다면 활동하고 싶은 용의가 있나?
당연하지. 최근에도 고등학교 2학년생인 아들과 <다물>이라는 무술 영화에 함께 출연한 적이 있다. 거기서 당나라 장수 역할이었다. 죽는 날까지 영화 현장에서 살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금까지 아무런 후회가 없다. 배우라는 것은 필요할 때 가서 하는 거다. 꼭 내가 뭐 기회를 보고 하는 건 어렸을 때, 이를테면 벼가 익지 않은 초창기 시절의 생각이다. 내가 필요한 역할이고 누가 뭘 원하든 내가 할 수 있다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