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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행3:1-10)-2018.11.25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라는 이름이요(마1:21),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관직명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요, 그리스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메시아입니다. 이른바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상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십니다(요3:16).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행4:12).
예수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된 자만 예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은 세상을 구원하는 이름이요, 죄인을 구원하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으로 안 될 것이 없고,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 이름이면 충분합니다. 누구든지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다만 그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만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 이름의 가치를 믿는 것이요, 인격을 믿는 것이며,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이요, 그 이름 때문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름을 자기 심령 성전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이름을 가지고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성전을 찾는 사람들의 목적이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올라갑니다. 어떤 이는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고, 어떤 이는 자기 유익을 얻기 위해서 올라갑니다. 어떤 이는 육신의 영달을 도모하기 위해서 오르기도 합니다. 본문의 앉은뱅이는 육신의 양식을 구걸하기 위하여 성전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영적 양식을 얻으려고 오른 것입니다.
사실 앉은뱅이의 소망은 무엇일까요? 일어나 걷는 것입니다. 물론 그에게도 처음에는 그런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소망은 사라지고 이제는 한 끼의 식량을 구걸해야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육신의 양식보다 일어서는 것이 소망이어야 했습니다. 일어서는 것이 당장 한 끼의 양식보다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어서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주님만 만나면 육신의 모든 문제가 한방에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주님을 만나는 것은 관심이 없고 오직 성전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앉은뱅이 된 것보다 더 불쌍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를 만나지 못한 영혼들이 불쌍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는 주님의 몸 된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그 이름을 믿지 않는 자는 결코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앉은뱅이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 이름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때문에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성전입구 미문에 앉아서 구걸했던 것입니다. 그는 날마다 성전을 찾았지만 입구에만 머무는 사람입니다. 날마다 찾으면 무엇 합니까?
성도는 본질을 잘 알아야 하고 본질에 충실해야 합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믿음의 본질과 소망의 본질과 사랑의 본질을 분명히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내안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요, 소망의 본질은 내안에 계신 예수님을 풍성히 누리는 것이며, 사랑의 본질은 그 예수를 필요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전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본질입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성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의 본질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성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처소입니다. 구약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신12:5 왕상8:17). 그렇다면 진짜 성전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셨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전으로만 사셨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사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 되신 주님이 나를 성전 삼으시고 내 안에 오신 것입니다. 때문에 나는 주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고전3:16. 6:19).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계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구하고 주님이 주시는 마음 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마음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전 된 삶입니다. 때문에 본문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보이는 성전을 찾는 이유도 성전의 주인 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현대식으로 적용하면 우리가 교회를 출입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성전을 찾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영의 양식을 위해서입니까? 성전을 찾아가는 목적은 하나입니다. 영의 양식을 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은 제 구시 기도 시간에 영의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나 앉은뱅이는 육신의 양식을 구걸하기 위해 찾아 간 것이지요. 성전을 찾는 목적이 전혀 달랐습니다. 목적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최종의 목적지가 달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목적지는 성전 안이요, 앉은뱅이의 목적지는 성전입구입니다. 성전 안과 성전 입구는 전혀 다릅니다.
혹시 여러분의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성전 안입니까? 성전입구입니까?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 안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주님 곁에서 뱅글뱅글 돌지 마시고 주님 안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 육신의 양식을 얻기 위해 성전을 찾지 말고, 영의 양식을 얻기 위해 성전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이른바 주님의 주변 것을 믿지 말고,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주변 것들로 만족하지 마시고, 복음으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전을 찾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목적이 잘못되면 과정이나 결과도 잘못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에게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광야를 나간 목적이 분명해야 하듯이 누구든지 성전을 찾는 목적도 분명해야 합니다.
성전을 찾는 목적이 다르면 목적지 역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목적지가 성전 안이었는데 비하여, 앉은뱅이의 최종 목적지는 성전입구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차이가 아닙니다. 성전입구에 머무는 것과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요,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무엇보다 영적인 시각으로 접근해보면 율법과 복음의 차이입니다. 다시 말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우리들에게 율법의 한계상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누구든지 율법이라는 한계상황을 통해 자신이 무너지고 깨어지고 부서져야 복음에 문이 열립니다. 아무도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자신의 무능을 깨닫지 못하면 복음을 만날 수 없습니다. 율법으로 철저히 자신이 붕괴되어져야만 복음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복음에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복음을 만난다는 말입니다. 율법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율법을 주신 목적과 율법의 가치와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율법을 스스로 지켜보려는 몸부림을 치는 인간들의 믿음이 문제인 것이지요.
본문의 앉은뱅이는 율법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아마도 그는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몸부림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의 한계점을 느끼고 이제는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한 끼의 양식이라도 구걸해야만 근근이 먹고 사는 처지로 전락해 버렸을 것입니다. 그는 삶의 목적도 의미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았다면 한 끼 식량보다 일어나 걷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요, 걷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다급한 일은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을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모든 일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영적인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성전입구에서 육신의 양식을 구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이것이 바로 율법이 주는 역할이요, 한계입니다. 때문에 율법으로 사는 사람들은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성전 입구에서만 서성거리고 마는 셈입니다.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보다는 보이는 성전에만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본질과 비 본질을 구분하지 못한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오늘날에는 이런 사람들이 없을까요? 수두룩합니다. 이른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보다, 눈에 보이는 성전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다 이런 사람들입니다.
(2) 성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율법에 매인 사람들은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과 상관없이 성전 입구에 머무는 것을 최고의 신앙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마치 그것이 좋은 믿음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성전 입구에 머무는 신앙은 성전 되신 주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믿음입니다. 성전 문만 열고 닫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성전 되신 주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성전 입구에 머무는 신앙은 성전 되신 주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믿음은 성전 되시는 주님 안으로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성전입구에만 머무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이름이 없는 사람입니다.
당시 앉은뱅이의 영적상태는 육신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에 매어있는 이스라엘 말입니다.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성전의 위용과 화려함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모습과 같았다는 말입니다. 성전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때문에 성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컨대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으면 상영관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극장입구에서 포스터만 보고 와서 영화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성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성전 되신 주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율법과 복음은 둘 다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그릇이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아서 먹고 살아가는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율법은 내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율법은 내가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것이라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족하시도록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쉽고, 편한지 분별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느 것이 가볍고, 완전한지 분별하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율법은 우리를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상태로 시작케 하십니다. 아무 낙도 없고 희망도 없는 절망의 상태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도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성전 미문까지 오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메어다 주어야 했습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던 셈이지요.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누구든지 율법으로 철저하게 자신이 무너짐을 경험해야 복음에 눈을 뜹니다. 그런 자가 복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모습을 통해 율법의 한계상황을 깨닫고, 비록 아무 것도 가진 것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복음을 누리며 살아가는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통해 복음의 능력을 깨닫기 원합니다. 율법과 복음의 궁극적인 차이가 무엇일까요?
기독교 신앙에는 두 종류의 신앙인이 있습니다. 율법의 사람이 있고, 복음의 사람이 있습니다. 분명히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하지만 대부분 구분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냥 두루 뭉실하게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를 믿는다고 치부해버립니다. 그러나 결코 적당히 얼버무릴 성질이 아닙니다. 분명히 구별되어져야 합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해 볼까요? 율법의 사람은 교인이요, 복음의 사람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구원은 율법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받는 것이라면 율법의 사람과 복음의 사람의 차이를 이해하시겠습니까?
누구든지 율법으로 절망하여 복음을 만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반드시 율법을 통과하여 복음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율법을 통과하여 복음을 만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율법으로 시작하여 율법으로 마치는 사람도 있고, 또한 율법으로 시작하여 복음으로 살다가 다시 율법으로 마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본문의 앉은뱅이 된 사람은 율법으로 시작하여 복음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지요.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율법의 사람과 복음의 사람의 궁극적인 차이점을 아십니까?
(3) 성전안과 성전입구는 전혀 다릅니다
율법의 사람과 복음의 사람은 관심사가 다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관심사가 있고, 사람마다 다른 관심사를 갖고 있습니다. 율법의 사람과 복음의 사람은 관심사가 전혀 다릅니다. 앉은뱅이의 관심은 육신의 양식이요, 베드로와 요한은 영의 양식입니다. 앉은뱅이의 관심은 오직 어떤 사람을 만나서 얼마의 소득을 얻을 것인가에만 집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의 관심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었을 테지요. 이처럼 율법으로 사는 자들과 복음 안에서 사는 자들은 관심사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의 관심은 오직 자기 자신이지만, 복음의 관심은 오직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for)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through)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관심사를 통해서 그가 율법의 사람인지, 혹은 복음의 사람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사람은 육신의 것만 추구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모합니다. 당신이 육신의 사람인지, 영적인 사람인지에 따라 당신의 신앙도 율법과 복음으로 구별된다는 말입니다. 미안하지만 율법의 사람은 성전 안에 관심이 없고 성전밖에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사람은 다릅니다. 복음의 사람은 성전밖에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성전 안에만 집중합니다.
그렇다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율법의 사람이었는지, 혹은 복음의 사람이었는지 구분이 되십니까? 그는 성전 안에는 관심이 없고, 성전 밖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성전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고, 성전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통해 구걸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성전을 출입하는 사람들의 호주머니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성전입구에서 자기를 도와줄 사람만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들이 성전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는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성전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모두가 다 영적인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비록 성전 안으로 들어갈지라도 충분히 다른 관심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과, 성전 입구에 머무는 사람을 단순평가해서 그들의 관심사에 대하여 논쟁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두가 다 영적인 사람은 아닐 터이니까요. 영적인 의미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의미상으로 영적인 사람이라면 성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다못해 오늘날 예배를 드리러 오는 성도들의 자세를 보아도 구별이 됩니다. 최소한 예배를 드리러 왔다면 오직 예배의 주인이신 주님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의 보좌 앞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무슨 사무가 그리 바쁜지 모릅니다. 교회당 안으로 예배드리러 왔으면서도 그 한 시간의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고 분주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이는 누군가를 만나러 온 사람 같습니다. 어떤 이는 비즈니스를 위해 온 사람 같습니다. 어떤 이는 피곤해서 쉬러 온 사람 같습니다. 불쾌하지만 주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또한 율법의 사람과 복음의 사람은 목적이 다릅니다. 율법의 사람은 대부분 자신의 컨디션을 조절합니다. 자기가 좋으면 주님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기준이 자기에게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자기 컨디션이 좋으면 그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예배도 자기가 좋아하는 본문이나 설교의 내용이라면 그는 혼자 감동합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무척 감격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사람은 자기감정과는 상관없습니다. 모든 영광의 초점을 하나님께 두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신의 마음이 흡족하지 못할지라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예배의 목적을 둡니다.
때문에 비록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말씀이나 설교의 내용일지라도 그런 것으로 인하여 예배의 감동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기준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앉은뱅이의 목적은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의 목적은 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가진 것은 없을지라도 그들은 복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앉은뱅이에게 복음을 주기 원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앉은뱅이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기 원했습니다. 주님이 자기 안에 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주님을 찾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했습니다. 자기 안에 주님이 계심을 확신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 계신 주님을 앉은뱅이에게 흔쾌히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사람입니다. 복음의 사람은 내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언제 어디서나 제한없이 사용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방도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의 어떤 중보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안에는 복음의 능력을 제한없이 사용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복음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소개하고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말입니다. 내 안에 나를 성전 삼고 나의 주요, 왕이시며, 생명과 머리되시고 전부이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권세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복음의 사람입니다.
율법의 사람과 복음의 사람은 결국이 다릅니다. 결국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앉은뱅이는 자신이 원하는 은금은 얻지 못했습니다. 우선 당장 앉은뱅이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앉은뱅이의 운명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에게 구하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앉은뱅이는 예수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믿고 받았습니다. 물론 준비된 영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금방 발과 발목이 힘이 생깁니다(7절). 그는 뛰어 서서 걸으며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걸어보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감동과 감격, 흥분과 충격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흥분하면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기이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모두 다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흥분했습니다. 그들이 흥분하여 나타난 반응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자신들이 가장 우선시 여기는 행동을 먼저 한 것이지요. 아마도 자신들이 최우선시 여기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다들 주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감사하다는 인사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사마리아 문둥병자 한 사람이 주님을 찾아 사례했습니다. 주님은 무척 섭섭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홉은 어디 갔느냐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면서 앉은뱅이 되었다가 평생 처음으로 걸어보는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강렬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8절). 이 사람이 바로 복음의 사람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물리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삶의 질을 변화시키고 영혼을 변화시킵니다. 본질을 변화시킨다는 말입니다. 율법의 사람 앉은뱅이가 복음의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가장 큰 변화는 이제는 더 이상 성전입구에서 머물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당당히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육신의 질병에서 고침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당당하게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말입니다(8절). 모든 사람들이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성전 되신 주님이 나를 성전삼고 내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물론 나도 역시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 안으로 들어가는 은혜를 받은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입니다(갈2:20).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이 내안으로 들어오셔서 나로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계3:20). 바로 이것이 새 언약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 사는 것이요, 천국 되어 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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