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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믿음을 통한 승리의 경험
가정과 자녀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마다, 먼저 하나님께서 시험과 유혹 속에서 어떻게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는가에 대한 문제를 설명해야 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이 구원의 문제가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으면, 우리는 가정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줄 수 없으며, 자녀들은 두가지 양면을 가지고 살아가는 부모의 위전적인 모습을 보면서 부모의 신앙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부모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문제는 자녀교육 문제에 있어서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 전체에서 시종일관 강조되는 한가지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계획이다. 타락한 인간을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방법에 대한 주제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이해해야 할 주제이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계획은 실제 생활 속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만일 그것이 실제적으로 가능하다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내가 해야할 몫은 무엇인가?
최근에 있었던 한 부흥집회에서, 나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변화의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있는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경건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성장하였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진리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성품처럼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다는 진리에 대해서는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그는 자신이 처하는 거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영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기 보다는 자신의 육체가 원하는대로 굴복하여 끌려다니는 생애를 살고 있었다. 모든 사람은 시험과 유혹을 당할 때마다 양심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조용한 음성에 순종하든지, 아니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육체의 요구에 따라서 굴복하기로 결정하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우리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서 우리에게 다가온 시험과 유혹이 죄가 될 수도 있고, 우리에게 승리의 경험을 가져다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와 대화를 나누었던 그 사람은 승리의 생애를 갈망하였지만, 그에게 있어서 성경이 말하는 변화와 승리의 경험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문제로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는 일상 생활에서 변화와 승리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듭남과 변화의 경험을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 요건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경험들이 실제적으로 자신의 생애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자 매우 깊은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 .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한복음 3:3~7. 무엇이 문제인가? 왜 십자가를 바라보고 변화되었던 사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의 경험이 그에게는 실현되지 않는 것일까?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고 있지만, 이 엄숙한 질문에 대하여 분명한 답을 찾은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두려운 사실은, 만일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결국에는“성품이 변화되지 않아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거짓 복음을 찾아서 참된 복음을 떠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참 복음을 개인적으로 발견하고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거짓 복음을 붙잡고 안전감에 도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실하게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장차 지옥의 유황불로부터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해주신다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가? 그런데 왜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유혹과 시험의 순간마다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지 못하고 죄의 종이 되어 끌려다니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님의 약속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
진짜 믿음을 통한 승리의 경험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그의 믿음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가 가진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니었다. 그의 믿음은 자신의 영혼을 순결하게 하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자신이 해야할 의무와 몫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은 믿고 받아들였지만,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자신이 해야할 선택과 결정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자신의 생애 속으로 이끌어 들일 수 있는가를 모르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인 구원을 받아들일 때, 자신의 죄를 아무런 댓가나 요구없이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주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와 사랑과 충성으로 응답하는 진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갖게 되는 그분께 대한 감사와 사랑과 충성이야말로 구원의 방정식을 푸는데 있어서 우리가 해야할 몫이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그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역사해 오셨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굴복시키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할 수 있을까? 그렇다. 쉬운 예를 들어서 이 문제를 설명해 보자. 하나님께서 이른 아침에 우리를 깨워주시면서“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여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라고 속삭이실 때,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와 사랑과 충성의 믿음을 가지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구세주의 말씀을 읽고 그분과 대화함으로써, 그 날 하루 동안의 시련과 유혹을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는 힘과 도움을 간구하는가? 아니면,“난 잠을 자야 해! 말씀은 읽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잠을 더 많이 자지 않으면 살 수 없어!” 라고 외쳐대는 육체의 요구에 굴복하여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덮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매일 아침마다 당신의 아버지를 만남으로써 그날 하루를 살아갈 힘과 능력을 받으셨다. “새벽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마가복음 1:35. 진짜 믿음은 하루 동안 자신을 죄와 유혹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능력 즉,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을 간절히 필요로 느끼는 믿음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러한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연약함을 절실히 느끼며, 자신의 육체가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함으로써, 하나님께 육체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간구하는 믿음 말이다.
계속적인 굴복과 계속적인 승리
아침에 일어나서 우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드림으로써 주님과 연결되면, 그 다음에는 우리의 발과 손과 입으로 주님과의 연결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루를 지내는 동안 계속해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그분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에 굴복시킬 것을 요구하신다. 우리 모두가 온 마음을 다하여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고, 육체의 요구를 거절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인 경험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느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라디아서 3:3.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고 육체의 요구에 굴복함으로써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잃어버리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에 한번만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하루 종일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해야 할 말과 생각과 행동을 가르쳐 주시면서, 그분의 인도하심대로 따라올 것을 호소하신다. 우리가 그때마다 그분의 호소에 사랑과 감사하는 믿음으로 응답하면서 따라간다면, 우리는 하루를 승리로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앞에 원수가 나타나서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고, 마귀가 던져 놓은 돈과 세속의 덫을 보면서 유혹받으며,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으로부터 무시와 조롱을 받았을지라도,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의 영혼 속에 들려주시는“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라는 약속을 지키시고 계신다(마태복음 28:20).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날마다 그리고 매순간마다 인도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우리의 역할을 대신해주시겠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우리의 믿음 속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끝까지 따라가고 싶다는 소원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음성과 육체의 음성 중에서 어느 한가지를 택해야 하는 선택이 놓여져 있는데, 이것이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유일한 몫이다. 물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 은혜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선택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겨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사를 무시한채 강제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은혜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선택하는 자는 결국 구원을 받을 것이고, 거절하기로 선택하는 자는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울 것인가 아니면 육체를 대항하여 싸울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오직 감사와 사랑과 충성으로 꼴지워진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의로운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 역시 우리와 같은 육체를 지닌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거기서 그는 중요한 선택을 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거절하고 육체의 요구에 굴복할 수도 있었다. 그때 그가 가졌던 그러한 선택의 기회는, 우리 모두가 매일의 생활에서 가지게 되는 선택의 기회와 동일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어떤 반응을 나타냈는가? “주여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나이까?”사도행전 9:6, 킹제임스 성경역. 참으로 아름다운 반응이 아닐 수 없다. 이 장면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좋은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음성에 굴복하였을 때, 그의 성품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되어졌다. 그는 더 이상 육체에 속한 사람인 사울이 아니라, 영에 속한 바울이 되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바울의 간증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의 굴복이 다메섹 사건 이후에도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두려워 해야 할 것
이러한 변화의 역사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를 그분께 바치라고 부르실 때, 그리고 계속적으로 자아에 대해서 죽으라고 요구하실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육에 속한 삶에서 영에 속한 삶으로 변화되는 과정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 모두를 격려하시고 계신다. “여호와를 쫓는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사무엘상 12:20. 우리가 은혜스러운 이러한 격려를 받아들이기로 선택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성품을 변화시키는 일을 계속하실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빌립보서 2:12~13절의 의미이다. “항상 복종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흔들리거나 부족할 것에 대해서 염려하고 두려워하라는 말씀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두려워 하라는 말씀인가?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 하며, 우리의 타고난 성벽이 우리의 생애를 지배할 것을 두려워 하라는 말씀이다. 우리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자아가 발동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 속에 들려주시는 음성을 거절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자신의 힘을 의존하기 쉬우므로 그것을 두려워하라. 그리스도를 잡은 손을 놓고서 자기 혼자 인생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교만을 두려워하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와 동정과 사랑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왜냐하면 그러한 생각은 육체와의 무서운 싸움을 싸우는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멋대로 솟구쳐 오르는 육체의 요구를 경계하라.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 조심하고 경계한다고 해서 육체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뼈져리게 느끼는 자만이 구세주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자신을 이기심과 자존심과 미움과 원망과 불만의 정신에서 구원해 줄 구세주를 간절히 찾는 자들을 하늘은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들은 악한 생각과 죄을 더럽고 추한 것으로 여기게 될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변화의 기쁨을 맛보며 승리의 경험을 누리게 될 것이다. 잘못된 기질과 느낌은 변화될 것이며, 새로운 원칙이 자신의 삶에 적용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된다. 날마다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는 “예”라고 답하고, 육체의 요구에 대해서는“안돼”라고 거절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구속의 과학이다.“양심 속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함으로써 그분의 뜻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지는 것.” 바로 이것이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원칙이다. 이것은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전적으로 신뢰하는데서 나오는 진짜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행사하는 그리스도인만이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향기를 발할 수 있다. 우리의 자녀들은 양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면서 높은 존경심을 갖게 될 것이다. 육체가 화를 내고 짜증을 내라고 요구할 때, 성령의 음성에 따라서 온유하게 인내하기로 선택하는 부모의 모습은 자녀들에게 가장 강력한 모본으로 인상지워질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