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믿음이 크도다
(마 15:21-28)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사람이 살아갈 때 자기 존엄, 품위를 지키고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 있습니다. 자존감이라고도 하고, 자부심이라고도 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도 인간다움은 잃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존감은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존감을 잘못 이해하면 특권의식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특권의식은 다른 사람에 대해 배타적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특권의식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의대 증원을 놓고 의정갈등을 겪고 있는데, 의사들의 특권의식을 온 국민이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검사들의 특권의식도 대단합니다. 자신들이 우리나라의 정의를 지킨다고 생각하며 자신들만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특권의식은 ‘나는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배타적인 생각, 또는 차별적인 생각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자존감을 높이는 것도 아닙니다. 특권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특권은 자기를 위한 권리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권리입니다. 특권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특권의식입니다.
자존감은 자신의 인간다움과 존엄, 품위를 지키는 것인 동시에 다른 사람의 인간다움과 존엄을 지킬 줄 아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를 품위 있게 만드는 특권이나 자존감이 때로는 자기에게 방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고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보물을 얻기 위해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그 보물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것을 포기하는 것은 재산, 명예, 권력과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게 있는 특권이나 자존감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 의지까지도 포기하는 것입니다. 포기하는 것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고 하십니다. 내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 것을 버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과정입니다. 한 번에 버리고 새사람이 되면 좋겠지만, 한 번에 버리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과정에는 인내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맨 나중에 포기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 자존감이나 특권의식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방에서 북쪽에 있는 두로와 시돈이라는 지역으로 들어가십니다. 이방인 지역입니다. 그때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청을 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귀신 들렸나이다.’ 가나안 여인이라는 말은 그가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유대와 가나안은 적대적 관계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신앙의 혈통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 취급을 받는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믿었고, 구원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가 청하는 것은 ‘자기 딸이 귀신 들렸다’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모든 질병을 가리켜 귀신 들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귀신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존재로서 사람들을 괴롭혀 하나님을 거역하도록 만듭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귀신, 마귀는 하나님을 거역하도록 인간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답게 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구약 욥기에서 사탄이 욥에게 질병으로 괴롭게 만듭니다. 욥은 모든 불행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데, 이를 지켜보던 아내가 한마디 합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욥의 아내의 말이 사탄이 노리는 것입니다.
아마 여인의 딸도 귀신들려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인은 딸과 같이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짖는 이에게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없는데, 여기서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부르짖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나서서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여인이 계속 소리치는데 그의 청을 들어주는 게 어떠냐’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말에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오셨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마태 공동체가 주로 유대인 개종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민족이라는 특권의식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인의 믿음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여인은 더욱 간절하게 청하며 말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냉정합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이방인들을 ‘개’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인에게 처음 대답한 말씀이 가혹합니다. 물론 예수님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선순위에서 이방 지역은 나중이라는 것입니다. 여인은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고, 실망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인간의 존엄을 무시한다고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럴 때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포기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섭섭하고, 원망의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인정합니다. ‘주님, 옳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자기 믿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여인은 주님께서 나눠주고 남은 부스러기만이라도 충분하다고 대답합니다. 주님에 대한 무한 신뢰, 절대신뢰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여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칭찬합니다. 아마 이 말씀은 유대인의 믿음을 책망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방 여인이 주님의 말씀을 절대신뢰하고 의지하는데, 유대인이라는 특권만 내세우며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믿음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하인의 병을 치유하고자 청하는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합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백부장도 로마인으로서 이방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하인의 병이 나을 줄 믿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혈통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절대신뢰라는 것을 마태 공동체는 믿게 됩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혹한 말씀을 하십니다. 대꾸도 안 하시고, 사람을 개에 비유하는 잔인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마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다면 섭섭해하거나 낙심하거나,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속마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여인의 믿음을 시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청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고 또 다른 시련을 겪습니다. 딸이 아픈 고통에 더해서 무시당하고, 차별 받는 시련을 겪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과 두 번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자기를 버리고 믿음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만남은 위험한 고비를 지나게 됩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을 거두고, 실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인은 이 시련을 믿음으로 이겨냅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와 신앙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기적이 아니라, 주님 말씀만으로도 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주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도 주님을 믿고 주님을 찾습니다. 내 청을 들어주실 것을 믿고 간절히 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만남에서 응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것을 포기해야 할 때 고비를 맞게 됩니다. 그 시련과 고비를 넘기고,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을 믿고 고백하고 따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만남에서 그들은 충성스러운 제자가 되었을까요? 그들에게 시련이 다가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고비에서 제자들은 믿음을 포기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했고, 새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주님과의 두 번째 만남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속 사람이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만 믿고, 의지하는 삶입니다. 두 번째 만남은 포기하지 않는 인내의 신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내가 청할 때 주님은 무응답 하시기도 하고, 내가 원하는 응답을 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믿고 간구할 때, 주님은 우리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인내하는 신앙으로 주님과의 두 번째 만남을 통해 우리 삶의 기쁨과 만족을 얻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