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일대는 기온이 온화하고 유난히 따뜻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해안선의 굴곡이 육지와 잘 어울리고 바다가 아름답기로 이름나 있어서 일찍부터 통영을 일컬어 "동양의 나폴리"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통영 사람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유난히도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를 보고 자랐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유치환시인뿐만 아니라 통영출신 시인으로는 김상옥, 김춘수 시인 들이 이곳에서 나서 자랐고, 극작가 유치진씨는 유치환의 형이며 "토지" "김약국의 딸들"을 지은 소설가 박경리도 통영이 고향이다. 그리고 독일로 귀화한 작곡가 윤이상씨도 통영의 아름다운 바다를 보고 자랐다.
이런한 지역적인 환경을 바탕으로 이지역 출신 시인들의 따스하고 베품이 있는 사례를 소개 할까합니다.
1. 토지의 작가 박경리(1926~2008)
어머니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사별 후 삼십여 년후 고향 옛집을 찿아 가
꿈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고향 옛집을 찾아가기도하고
서울 살았을 때의 동네를 찾아가기도 하고
피난 가서 하룻밤을 묵었던
관악산 절간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할 곳을
애타게 찾아 헤매기도 했다.
언제나 그 꿈길은
황량하고 삭막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그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꿈에서 깨면
아 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했다.
불효막심했던 나의 회환
불효막심의 형벌로써
이렇게 나를 사로잡아 놓아주지도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박경리 씨는 많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기회를 제공했다. 1999년 강원도 원주에 문을 연 토지문화관은 수많은 젊은 작가의 창작 산실이었다. 박씨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이곳에서 작품을 쓴 작가들이 지금 한국 문단을 이끌고 있고
드라마 '토지'는 신인급에 머물던 여배우 3명을 스타로 등극시키기도 했다. 박씨는 갔지만 '토지'는 다양한 측면에서 우리 문화계를 살 찌운 계기가 됐다.
토지문화관이 무료 개방된 이후 많은 작가들이 그곳에서 기숙을 하며 작품을 썼다.
토지문화관은 매년 3월께 신청을 받아 공간이 허용하는 한 작가들을 받아들인다. 비용이 무료인 데다 박씨에게 문학혼을 배울 수 있어서인지 많은 유명문인들이 이곳에 머물며 창작활동을 했다.
2 청마 유치환(柳致環 1908~1967)
그리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야
임은 뭍 같이 까닭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야
날 어쩌란 말이냐
남보다 피가 뜨거운 서른 여덟살의 청마는 스물 아홉의 청상과부 정운 이영도시인(이호우시조시인의 동생)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았다. 통영 앞바다에서 바위를 때리고 있는청마의 시 "그리움" 은 뭍(육지) 같이 까딱 않은 이영도 에게 바친 사랑의 절규였다.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 지라도/사랑햐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죽 주는 사랑을 20여 년간 사랑한 청마는 통영여자 중학교 교사로 함께 근무하면서 알게된 이영도(21세의 젋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당시 딸 하나을 기르고 있었다) 에게 청마는 1947년 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
그러기를 3년 마침내 이영도의 마음을 움직여 이들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시작됐고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 로 사망 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년 동안 편지를 계속 보냈고 이영도 는 그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청마가 사망 했을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 넘었다 한다. 정말 그는 주는 사랑 베푸는 사랑을 하였다.
3 . 김상옥(金相玉 1920~2004)
봉선화
비 오자 장독 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가 웃으실가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 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 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보듯 힘줄만이 서노나
어린 시절 천진 난만했던 추억을 되살려 주는 봉선화로 통해 누님과 어린시절에 대한 소박한그리움을 현상화한 시조로 누구나 쉽게 다가 갈 수 있는 시입니다.
김상옥은 호는 초정(艸汀)으로 충무에서 태어났고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 한후 독학으로 문학공부를 하였고 시조집 초적(草笛)이 있으며 백자부(白瓷賦) 사향(思鄕) 등 시가 있으며 통영시 중앙동 항남동 1번가를 초정 김상옥 거리로 명명 되여있다
시와 가난밖에 모르고 한국적가락으로 한을 노래한 시인이고 슬픔의 연금술사로 불린 시인 박재삼(朴在森)은 돈이 없어 중학교 갈 형편이 못되는데 여학교 사환을 하며 삼천포 야간 중학교을 다녔다.그시절 야간 중학교에서 거기서 국어선생님 김상옥을 만났다. 이 큰 시인이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다는 걸 알고 용기 백배했다. 선생님 시조집을 빌려 공책에 베껴가며 문학에 빠졌다. 김상옥은 그의 시를 고쳐주며 시인으로 길렀다. "말을 아끼고 리듬이 우러나야 한다"는 가르침은 박재삼 평생 시작(詩作)의 지표가 됐었고 김상옥 시인의 소개로 현대 문학사에 취직시켜 그의 서울에서 문단 생할이 본격화 하도록 도와 주었고 청마 유치한 충무 출신 작곡가 윤이상등과도 아주 가깝게 지냈으며 한국에서 백자를 보고 시를 짓고 이렇게 살다가 가는 것이 너무나 고맙고 행복함이라고 말 했고 시인을 대중이 몰라 주는 것에도 조금도 서운해 하지 않고 시인보다 좋은 이름이 없다고 강조 했던 아주 정갈한 선비였고 따쓰한 시인이었던 분이었다.
4 . 김춘수(金春洙 1922~2004)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존재의 본질 구현에 대한 소망을 잘 표현한 이시를 좋아하지요.
인간의 고독함이 존재의 허무를 부르고 연대의식을 만들어요.
우리는 이시에 대한 철학적 이해보다도 아름다운 시어에
그대로 빠지고 싶을 것입니다
꽃이라는 것은 누군가에 이름을 붙여주고 불러주고 다가와 바라봐 주고 말 해 줄때 꽃이 비로서 꽃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인간도 마찬 가지입니다. 님이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에게 어떤 의미로 남고 싶은지 또 그가 자신에게 어떤의미로 남아 있길 바라는지가 중요 할 뿐만아니라 이 시에서 꽃은 우리가 예쁘게 바라보는 그냥 단순한 꽃의 의미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 모든것을 의미 할 것입니다. 김춘수시인이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고 싶다는 의미도 궁극적으로 상대에게 환하고 향기있고 따뜻한 배려가 있는 베푸는 마음에서 마음에서의 발로 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댓글 꿈에서 깨면 아 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나비가 되어주고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때 난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수심정기님, 제가 좋아하는 문인들이십니다. 그분들의 글을 다시 한 번 음미하니 여고시절의 감성으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박경리님의 '어머니'는 처음 접하는 시임에도 불구하고 어젯밤에 써내려간 제 일기처럼 와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