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지몽(崔知夢, 907~987)은
고려 초 서남해인 영암군(靈巖郡) 출신의 유학적 지식인 관료로서,
태조 왕건에 의해 발탁되어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왕조의 기틀을 안정시키는 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그는 해몽(解夢)으로 출세한 인물이다.
꿈을 해석하는 해몽은 점성술의 일종이다.
점성술은 해와 달, 별 등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해
인간의 운명과 미래를 예측한다.
천문 점성술로 불리기도 한다.
고려 때 이러한 업무를 관장한 사천대(司天臺)라는 관청이 있었다.
최지몽은
이 관청 관원으로 출발해
최고위직 재상의 자리에 오른 고려 역사상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태조 왕건을 비롯해
6명의 국왕을 보좌하면서
때로는 위기에 빠진 왕을 빼어난 천문 점성술로 구해내기도 했다.
지금의 경기도 광주(廣州)에 근거지를 둔
호족 왕규(王規, ?~945)는
두 딸을 태조 왕건의 제 15비와 16비로 출가시킨다.
태조 왕건에 이어 즉위한 혜종에게도 딸을 출가시킨다.
제 1비에서 6비를 배출한
개경, 서경, 충주 출신의 호족 세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사위인 혜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규는 살아있는 권력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권세가가 되었다.
혜종(惠宗, 912~945, 재위 943~945)은 즉위하자마자 병을 앓는다.
왕규는 이 틈을 타서 태조의 16비가 낳은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민다.
945년(혜종 2) 혜종의 배다른 형제인
왕요(王堯, 고려 3대 국왕 정종, 923~949, 재위 945~949)와
왕소(王昭, 고려 4대 국왕 광종, 925~975, 재위 949~975)가
외손의 왕위 등극에 장애물이 될 거라고 생각한 왕규는
혜종에게 이들을 헐뜯는다.
그러자 사천공봉(司天供奉)이라는 천문 관측 관직을 맡고 있던
최지몽이 혜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성(流星)이 자미원(紫微垣, 천제의 궁궐 담장)을 침범했습니다.
나라에 반드시 역적이 있을 것입니다.”
최지몽은 별자리를 관측해 왕규가 반역할 것을 헤아려
혜종에게 알린 것이다.
혜종은 딸을 왕소와 혼인시켜
형제들과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왕규의 화를 미리 막았다.
그러자 왕규는 혜종을 제거하고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려 했다.
최지몽이 혜종에게,
“장차 변란이 있을 것이니,
침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했다.
왕규가 어두운 밤에
일당과 함께 벽을 뚫고 왕의 침실에 침입했으나,
혜종이 거처를 이미 옮긴 뒤였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980년,
최지몽은 경종(景宗, 고려 5대 국왕, 955~981, 재위 975~981)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객성(客星, 유성)이 제좌(帝座, 자미원)를 범했습니다.
숙위군을 강화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십시오.”
이 조언 덕분에 경종은 왕승(王承)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광종에게 무례를 범해 11년 유배생활을 한 최지몽에게
경종(광종의 아들)은 은인이었다.
경종이 즉위하자 유배 중인 그를 불러들인 것이다.
최지몽은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반란을 예견해 왕권 안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경종은 최지몽에게 최고 관직인
내의령(內議令, 중서문하성 전신인 내의성 장관, 종1품) 벼슬을 내린다.
천문 점성술이라는 재능으로
고려 초기 왕권과 왕실을 안정시킨 최지몽은
987년(성종 6)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천수를 누렸다.
최지몽의 재능은 이미 태조 왕건 때 빛을 드러냈다.
‘지몽(知夢)’이라는 이름은 태조 왕건이 지어준 것이다.
최지몽이 해몽에 능하다는 소문을 들은 왕건이
그를 불러 자신이 꾼 꿈의 해몽을 맡겼는데,
‘앞으로 반드시 삼한을 통합해 통치할[必將統御三韓]’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매우 만족한 왕건은
그의 이름 총진(聰進)을 지몽(知夢)으로 바꿔주었다.
이름 그대로 ‘꿈을 잘 풀이한다’는 뜻이다.
또 비단옷과 함께 천문 관측을 담당하는
사천공봉(司天供奉)이라는 관직을 내린다.
최지몽이 18세 때인 924년(태조 7)의 일이다.
그는 후삼국이 통합되는 936년(태조 19)까지
12년간 태조를 수행했고,
이후 재위기간이 끝날 때까지 각종 현안문제를 조언하는 역할을 했다.
최지몽과 같이 꿈을 잘 풀이한 유명한 인물로
구약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을 들 수 있다.
수천 년 전 인물인 요셉은
시기심 많은 형들에 의해 상인에게 팔려
노예 신분으로 애급(埃及, 이집트)에 끌려왔다.
여러 차례 기막힌 해몽을 한 요셉은
마침내 왕의 꿈을 풀이해
애급을 위기에서 구하고 총리대신에 오른다.
최지몽 역시
해몽으로 고위직에 올랐다는 점에서 한국판 요셉이라 할 수 있다.
요셉은 신의 뜻과 섭리를 잘 따르면
반드시 신의 선택과 축복을 받는다는 기독교 신앙원리에
가장 충실한 인물로 설정되어 그의 이야기가 성경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야사(野史)에나 나올 법한 최지몽 이야기가
《고려사》라는 정사(正史)에 당당하게 실린 까닭은 무엇일까?
고려시대 사상과 이념의 풍토가 어떠했길래 그랬을까?
최지몽이 출생하기 전 태조 왕건이 꾼 꿈 이야기 하나가 전해진다.
906년 궁예의 부하로 있던 서른 살 왕건은
바다 위에 세워진 금으로 만든 9층탑에 직접 올라간 꿈을 꾸었다
(《고려사》 권1 태조 총서).
9층탑 꿈 이야기는 《고려사》의 ‘이의민 열전’에도 보인다.
고려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였던 이의민(李義旼)이 어렸을 적에
그의 아버지 이선(李善)은
꿈속에서 아들이 푸른 옷을 입고 황룡사 9층탑을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아들이 귀한 사람이 될 것이라 예견했다고 한다
(《고려사》 권128 이의민 열전).
9층탑은 귀한 신분 외에 천하 통일이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황룡사 9층탑이 만들어진 계기를 설명하는 《삼국유사》의 한 대목을 보자. 자장(慈藏, 590~658)은
당나라에서 만난 보살에게서 신라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9한(韓)이 조공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신라로 돌아온 자장은
선덕여왕에게 9층탑 건축을 청했고,
645년(선덕여왕 14) 황룡사 9층탑이 세워진다(《삼국유사》 권3).
이후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다.
9층탑 꿈 이야기가 태조 왕건의 건국설화로 미화되고,
해몽에 능한 최지몽이 발탁된 사실은
고대 시기 제왕학의 지위에 있던 점성술이
고려 건국 무렵에도 성행했음을 알려준다.
태조 왕건의 미래를 예언한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바로 도선(道詵, 827~898)이다.
왕건이 출생하기 한해 전인 876년
도선은 왕건의 아버지 용건(龍建)과 함께
송악산에 올라가 산수를 둘러본 후 이렇게 말했다.
“내년에 성스러운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지으시오.”
도선은 용건에게 겉봉에,
‘백 번 절하며 미래 삼한을 통합할 군주[未來統合三韓之主]이신
대원군자(大原君子)께 삼가 글월을 바칩니다’라고 적은 봉투를 주었다.
그는 왕건이 후삼국 통합 군주가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고려사》 권1 태조 총서).
약 17년이 지난 893년,
왕건이 17세 되던 해
도선은 그에게 군사 출동과 군진(軍陣) 배치 방법,
그리고 천시(天時)와 지리(地理)의 법을 알려준다.
10여 년이 지난 906년
궁예의 장수였던 왕건은
9층 금탑에 오르는 꿈을 꾸고 난 후 대망을 품었다.
그리고 924년(태조 7)
후삼국 통합을 예언한 최지몽과의 만남으로
왕건은 날개를 달게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도선과 최지몽이 영암 출신의 동향이라는 점이다.
원래 후백제 견훤의 영역인 영암은
나주와 함께
중국, 일본으로 연결되는 서남해 일대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외래 문물과 접촉이 빈번한 곳이었다.
최지몽의 아버지 원보(元甫, 향직 4품) 최상흔(崔相昕)은
성품이 청렴하고 인자했으며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했다.
최지몽의 스승 대광(大匡, 향직 2품) 현일(玄一)은
천문(天文)과 복서(卜筮)에 정통했다고 하니,
천문 점성술은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았을 것이다.
부친과 스승 모두 고위 향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암 최씨 일족은 이 지역의 유력층이었다.
이들은 서남해 해상 교통로라는 이점을 이용해 해상무역에 종사했고,
부를 축적하여 유력 가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외래 문물과 접촉이 잦은 영암의 지역 특성상
당나라로 유학해 선진 학문을 수학한 인물들도 있다.
도선도 당나라에 가서 풍수지리설을 익혔다.
성주산의 무염(無染)과
굴산사의 범일(梵日) 문하에서
선을 닦은 동진대사(洞眞大師) 경보(慶甫, 869~948) 역시
892년 당나라에 가서 선법을 닦은 후 921년 귀국했다.
후백제 견훤은
그를 전주 남복선원(南福禪院)에 머물게 하고 스승으로 삼았다.
936년 후삼국을 통합한 태조는 경보를 왕사로 삼았다.
또한 그는 태조 왕건 사후에도
혜종과 정종의 왕사가 되었다.
견훤과 왕건의 추앙을 받은 경보는
도선, 최지몽과 같이 고려 초기 국왕과 왕실에 영향을 끼친
또 한 명의 영암 출신 인물이었다.
태조와 연결된 경보를 통해
최지몽이 추천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영암이 후백제 견훤의 영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출신 인물들이 왕건과 연결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왕건이 궁예의 장수로서
나주와 영암 지역을 정벌한 것이 연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903년
왕건은 이 지역 정벌에 나서,
금성군(錦城郡, 정벌 후 나주로 개명)과 주변 군현 10여 개를 빼앗는다.
견훤이 다시 나주를 점령하자,
왕건은 909년부터 912년까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이 지역을 확보한다.
다음은 910년에 벌어진 유명한 나주해전의 장면이다.
(왕건의 군사가) 나주 포구에 이르자
견훤이 직접 군사를 인솔하고 전함을 벌려 놓았다.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기까지
육지와 바다의 앞뒤 좌우로 배치된 군대의 위세가 대단했다.
여러 장수가 두려워하자 왕건은 “근심할 것 없다.
싸움에 이기는 것은 마음을 합하는 데 있지
숫자가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군사를 내어 급히 공격하자 적의 군함이 뒤로 물러났다.
이때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지르자[乘風縱火]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500여 명의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자
견훤은 조그마한 배를 타고 도망쳤다.
-《고려사》 태조 총서(總序)
해전이 이루어진 곳은 지금의 목포와 영암 앞바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덕진포는 영암군의 포구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람을 이용해 (견훤의 배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이다.
오래전 방영된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작가는 《삼국지연의》의 제갈량이
적벽대전에서 마침 불어온 동남풍을 이용해
조조의 군사를 대파한 사실에 착목해
왕건의 책사 태평(泰評)이란 자가
동남풍을 이용해 승리를 이끌었다고 극화했다.
동남풍을 이용한 왕건의 전략도 중요하지만,
승리의 배경에는 근본적으로
이 지역의 정세와 지세에 밝은 토착 세력의 협조가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동남풍을 예측하고 이용하는 데 잘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앞서 왕규가 외손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제거하려 한 혜종과
그를 지켜낸 최지몽이
각각 나주 오씨의 외손과 영암 최씨 출신인 점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나주해전에 이어 고려의 왕위를 보전하는 과정에서도
두 집안의 결합이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나주해전의 승리는 ‘동남풍’의 힘이 아니라
오히려 ‘동남풍’을 이용해 해상에서
자본과 힘을 축적한 이곳 출신 해상 세력의 협조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태조 왕건의 후비 가운데 서열이 가장 높은
제 1비와 2비가 각각 정주(貞州, 개풍군)와 나주의 해상 세력의 딸인 점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최지몽의 부친 최상흔도
나주해전을 전후해서 왕건과 연결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이 해전의 승리에 일정하게 기여한 것이 분명하다.
최지몽 부친과 스승 현일이 고위 향직을 가진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최지몽은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후광 속에서
왕건의 측근 참모로 진출할 수 있었다.
- 박종기, 고려인물열전
박종기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고려시대 부곡인과 부곡 집단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교수,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및 한국중세사학회 회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고려사의 재발견》, 《동사강목의 탄생》,
《새로 쓴 5백년 고려사》, 《안정복, 고려사를 공부하다》,
《왕은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는가》(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고려사 지리지 역주》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