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값은 크기로 정해져서는 안 된다 / 김광우
그림값을 말할 때 호당 얼마라고 하는데 이는 어처구니 없는 짓이다. 언젠가 작가의 작업실에 갔을 때 그 작가가 100호 크기의 캔버스 두 개를 바닥에 놓고 밑칠을 마친 걸 보았다. 그것들이 뭐냐고 물으니 주문받아 그리는 것이라고 했다. 구매자가 100호짜리 그림을 두 점 주문했고 작가는 100호에 얼마씩 계산해서 두 점 값을 받기로 한 것이다. 이런 경우 뭘 그리게 될지는 몰라도 70호나 50호는 100호보다 싸고 150호는 100호보다 비싸다.
그림은 크게 그려야 하는 주제가 있고 작게 그려야 하는 주제가 각각 있다. 작게 그려야 하는 것을 크게 그렸다고 값이 더하면 곤란하다. 그림값은 크기로 정해져서는 안 된다. 파울 클레의 그림들은 거의 아주 작은 크기인데 "우주의 동화책"으로 불리운다. 작지만 그 속에 우주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커다란 건물 속에 장식된 그림들 중에서 주제는 작은 그림에 적당한데 아주 큰 캔버스에 그려진 것을 많이 본다. 아마 많은 돈을 받고 팔려고 작가가 크게 그렸을 거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300호 혹은 500호 크기의 그림은 아주 비싸게 팔 수 있으니 말이다. 어처구니 없는 짓이다.
현재 요셉 보이즈 이후 독일의 가장 유명한 몇 화가들 중에 게오르그 바셀리츠Georg Baselitz(b. 1938)가 있다. 1980년대 말인지 1990년대 초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가 미국에서 유명하게 된 데는 구겐하임 뮤지엄의 역할이 컸다. 그곳에서 바셀리츠의 회고전을 개최하면서 시내버스 몸체에 사람의 얼굴을 거꾸로 그린 그의 그림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난 그 광고를 보면서 바셀리츠의 그림이 에밀 놀데의 그림을 많이 닮아 그가 놀데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장담했다. 놀데의 초상화를 거꾸로 세우면 바셀리츠의 그림과 무척 닮았음을 알 것이다. 독일의 위대한 화가 놀데를 바셀리츠가 모를 리 없다. 놀데의 감성적인 봇놀림을 그가 몰랐다고 말한다면 난 믿지 않을 것이다.
한 예술가를 유명하게 하는 데 뮤지엄 혹은 제도의 역할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그때의 구겐하임 뮤지엄이 바셀리츠를 대대적으로 광고하여 효과를 본 데서 알 수 있다. 비엔날레나 그 밖의 미술제라는 제도가 예술가를 유명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비엔날레와 그 밖의 미술제가 열릴 때마다 좋지 않은 잡음들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데서 소개된 예술가들이 가장 유명하고 훌륭하다고 단순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셀리츠가 훌륭한 화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와 임멘도르프 그리고 키퍼는 독일이 자랑할 만한 훌륭한 화가들이다. 그 세 사람이 세상의 주목을 끈 것은 독일이 통일 되기 전 민족 분단의 아픔을 그림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동일한 민족이 이데올로기로 등을 맞대고 있었을 때 그 아픔을 캔버스에 솔직히 표현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이런 고통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데 우리나라 작가들은 이런 고통을 표현하는 데 등한시하는 것 같다. 물론 몇몇 예술가들이 민족의 아픔을 표현하고 있지만 숫자적으로 내용적으로 빈약하다는 것이다.
여하튼 오늘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그림값에 있으므로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계속 쓰려고 한다. 약 7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소호SoHo에 있는 페이스Pace 화랑에서 바셀리츠의 회고전이 열렸다. 화랑에 들어서니 300호에 해당하는 캔버스가 10점 걸려 있었다. 그림값을 물어보니 골라잡아 30만 달러라고 했다.
며칠 후 뉴욕 타임즈를 보니 맨하탄 다운타운의 고급화랑에서도 바셀리츠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는 기사가 있어 찾아 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바로 화랑으로 연결되는 주로 부자 콜렉터들이 찾는 화랑이었다. 그곳에도 10점이 걸려 있었는데 모두 동일한 크기 100호가량 되었다. 그림값이 얼마냐고 물으니 어느 그림을 말하냐고 되물어 왔다. 그림값이 각각 어떻게 다르냐고 물으니 29만 달러에서 99만 달러까지 각각 다르다고 대답했다.
페이스 화랑에서는 300호짜리가 골라잡아 30만 달러였는데 그곳에서는 100호짜리를 29만 달러에서 99만 달러까지 차별화하여 팔고 있었다. 30만 달러 균일의 300호짜리 그림들은 바셀리츠의 근래 그림들이었다. 그가 1968년경 미국 화가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보고 영향을 받아 그런 식으로 그린 그림들이었다. 커다란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기분내키는 대로 붓질을 가한 그림들이었다. 사람의 이미지는 거꾸로 그리면서 물감을 뚝뚝 떨어뜨리기도 하고 마른 붓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거친 붓자국을 남긴 그림들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담배재도 발견할 수 있고 발자국도 발견할 수 있으며 녹슨 못도 발견할 것 같은 그런 그림들이었다.
즉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팔기 위해 여러 점을 한꺼번에 제작한 그런 류의 무성의한 그림들이었다. 그런 그림이지만 그 사람의 명성이 있어 싸도 30만 달러는 훗가했던 것이다. 29만 달러에서 99만 달러 사이의 100호짜리 그림들은 어떤 그림들이었나. 그것들은 모두 1963년경에 그려진 것들로 기교가 매우 서툴어보이는 것들이었다. 주제는 한결같이 분단의 고통을 표현한 것들이었다. "교보다는 졸"이란 말이 있듯이 기교면에서는 졸렬해 보였지만 한 점 한 점 성의를 갖고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나타낸 것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잭슨 폴록의 영향을 받기 전이라서 바셀리츠 자신의 솔직하고 소박한 정신이 배어나온 그림들이었다.
달리 말하면 남의 것을 모방하지 않고 창작한 그림들이었다. 앞서 언급한 30만 달러짜리 그림들은 모방으로 일관된 유치한 그림들로 아마 그가 양식있는 화가라면 그렇게 그린 것을 후회할 만한 그런 것들이었다. 같은 100호짜리이고 같은 시기에 그린 것들인데 왜 어느 것은 세 배 이상 비싼지 그것은 알 수 없었는데 그림을 살 것도 아니면서 일일이 값을 묻기가 꺼끄러워서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그날의 일에 관해 쓸 줄 알았다면 물어두었을 것을 ...
손목시계가 괘종벽시계보다 비싼 것이 당연하듯이 작은 그림이 큰 그림보다 비쌀 수 있다는 것이 당연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림값은 크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림의 질로 정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림의 질로 값이 정해지는 좀더 진전된 시기가 앞당겨질려면 평론이 발달해야 한다. 그림의 질을 구별하는 평론이 발달하지 않으면 그림값을 호당 얼마로 계산하는 풍습은 한동안 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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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와달에스키스 원문보기 글쓴이: 소와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