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⑵ 왜 평화인가.
○ 내 생명이 살고 싶은 삶, 내 생명이 누리고 싶은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평화이다. 내 생명이 안전하게, 건강하게,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하고, 그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뭇 생명들의 원초적 바람이다.
만일 지금 여기 내 생명이 평화롭게 살 수 없다면 국가 ․ 종교 ․ 정치 따위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고, 자유 ․ 정의 ․ 평화도 논할 필요가 없다. 국민소득 2만 불이 아니라 10만 불, 백 평이 아니라 천 평의 아파트가 주어진들 지금 여기 내 생명의 삶이 고통스럽고 불행하다면 그 모든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실상을 확인하면 확인할수록 생명 평화의 가치는 그 무엇, 그 어떤 것보다도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직접적이고 우선적이고 절실한 가치임이 틀림없다.
3) 생명 평화 세계관
⑴ 생명 평화경 이야기
우리는 왜 자꾸 모순과 혼란에 빠지게 되는가. 살상과 파괴의 악순환이 반복 확대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많은 성찰과 모색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문제의 근저에 직면한 존재의 실상에 근거하지 아니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그릇된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보편적 진리인 직면한 존재의 실상에 근거하지 아니한 이원론, 실체론의 세계관이 문제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현대인 대다수가 첫단추를 잘못 꿴 상태에서 다음 단추를 계속 꿰듯이 어느 한 측면과 부분을 절대화 시키거나 왜곡시킨 그릇된 세계관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당연히 문제의 근본 원인인 그릇된 세계관을 바로 잡아야 할 터이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진실, 너나 없이 수긍하게 되는 구체적 사실 즉 존재의 실상에 근거한 보편적 세계관을 확립하는 일이 문제를 해결하는 큰길임을 깨달았다. 동양과 서양, 국가와 국가, 종교와 종교, 과학과 종교, 무종교와 종교, 자본가와 노동자, 진보와 보수, 너와 나, 남자와 여자의 벽을 넘어 모두 함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의 세계관이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동학, 원불교, 동양철학 등 존재의 실상에 입각한 공통적인 세계관, 현대 과학이 제시하는 공통적인 세계관, 역사 경험으로 터득한 공통적인 세계관의 정신들을 종합적으로 반영했다. 예를 들어본다면 “동체대비론”으로는 화엄의 세계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관점으로는 기독교의 세계관, 생명 그물론으로는 과학의 세계관, 인내천의 관점으로는 동학의 세계관을 담았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존재의 실상에 일치되는 보편적인 모든 세계관을 용해시켜서 만든 것이 생명평화경이다. 그 중에 제일 많이 참고한 것이 화엄경이다. 아니 화엄의 눈 즉 인드라망의 사상과 정신의 사유로 만들어진 것이 생명평화경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따라서 생명평화경은 누구의 창작이 아니다. 기독교, 불교, 동양철학, 현대과학, 동학, 역사적 경험 등 인류 문명사에서 존재의 실상에 근거하여 가꾸어진 기존의 보편성을 담고 있는 모든 세계관들을 나름대로 종합하여 만들었다. 특히 개인의 창작이 아니고 인류 모두의 지혜로 이루어진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로 시작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는 한 겨울 한밤중에 경전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눈 내리는 한밤중”이라는 표현을 했다. 다음은 그렇게 만들어진 “생명평화경”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
눈 내리는 한 밤중에 진리의 스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생명평화의 벗들이여 (생명평화의 세계관)
지금부터 생명평화의 길인 우주의 진리를 설파하리니
그대들은 귀 기울여 경청하고, 깊이 사유 음미할지니라.
이것이 있음을 조건으로 저것이 있게 되고,
저것이 있음을 조건으로 이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없음을 조건으로 저것이 없게 되고,
저것이 없음을 조건으로 이것이 없게 되나니라.
조건 따라 생성하고 소멸하는 우주의 진리인 이 사실은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니라.
생명평화의 벗들이여! (생명평화의 사회상)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존재하는 생명의 진리는 우리 모두의 영원한 길이니,
지금 진리의 길에 눈뜨고 진리의 소리에 귀 기울일지니라.
자연은 뭇 생명의 의지처이고,
뭇 생명은 자연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생명공동체이니라.
이웃 나라는 우리나라의 의지처이고,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국가공동체이니라.
이웃 마을은 우리 마을의 의지처이고,
우리 마을은 이웃 마을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고향공동체이니라.
이웃 가족은 우리 가족의 의지처이고,
우리 가족은 이웃 가족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가족공동체이니라.
그대는 내 생명의 어버이시고
나는 그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공동체의 생명이니라.
진리의 존재인 뭇 생명은 진리의 길에 있을 때 평화로워지고,
우리 모두는 진리의 길을 걸을 때 행복해지나니,
그대들은 깊이 사유 음미하여 실행할지니라.
진리의 스승이시여!(생명평화의 성찰과 참회)
진리의 길을 어기고 뭇 생명의 뿌리인 자연의 위대함을 함부로 취급해온
인간 중심의 이기적 삶을 참회합니다.
우리나라의 의지처인 이웃 나라의 중요성을 간과해온
내 나라 중심의 이기적 삶을 참회합니다.
우리 가족의 의지처인 이웃 가족의 고마움을 외면해온
내 가족 중심의 이기적 삶을 참회합니다.
내 생명의 어버이신 그대의 존귀함을 가볍게 취급해온
자기중심의 이기적 삶을 참회합니다.
인간 중심의 이기심, 내 나라 중심의 이기심, 내 가족 중심의 이기심,
자기중심의 이기심으로 살아온 왜곡된 자기 사랑의 삶을 뼈아프게 참회합니다.
소유의 논리, 독점의 논리, 힘의 논리, 공격의 논리, 승리의 논리로 살아온
왜곡된 자기 사랑의 삶을 뼈아프게 참회합니다.
진리의 스승이시여 (생명평화의 인간상)
생명의 실상을 달관하는 안목을 가꾸고 소박한 삶에 스스로 만족하는
진리의 삶을 살겠습니다.
생명의 고향인 자연을 병들게 하는 인간 중심의 이기적 삶을 버리고
자연을 내 생명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진리의 삶을 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의지처인 이웃 나라를 불안하게 하는 내 나라 중심의 이기적 삶을 버리고
이웃 나라를 내 나라의 한울님으로 모시는 진리의 삶을 살겠습니다.
우리 가족의 의지처인 이웃 가족을 불안하게 하는 가족 중심의 이기적 삶을 버리고
이웃 가족을 내 가족의 마리아로 모시는 진리의 삶을 살겠습니다.
내 삶의 의지처인 상대를 고통스럽게 하는 자기중심의 이기적 삶을 버리고
상대를 내 삶의 부처님으로 모시는 진리의 삶을 살겠습니다.
뭇 생명의 뿌리인 자연과 우리나라의 의지처인 이웃 나라와 우리 가족의 의지처인
이웃 가족과 내 생명의 어버이신 그대의 개성과 가치의 존귀함과 고마움과 위대함에 대하여 지극히 겸허한 마음으로 존중하고 감사하고 찬탄하는 진리의 삶을 살겠습니다.
생명평화의 벗들이여! (생명평화의 관점과 태도)
참으로 훌륭하고 현명하도다.
진리란 지금 현재의 존재에 깃든 실상을 뜻할 뿐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니라.
언제 어디에서나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고 이루어지고 증명되는 것이 진리의 길이니라.
진리의 길은 현재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할 때 그 모습이 드러나고 생명평화의 삶이
실현되나니 항상 깨어 있도록 할지니라.
거룩하십니다. 진리의 스승이시여!(생명평화의 聞․思․修 수행)
진리의 가르침을 귀 기울여 잘 듣겠나이다.
진리의 가르침을 깊이 사유 음미하겠나이다.
진리의 가르침을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실행하겠나이다.
-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 -
⑵ 생명 평화 무늬 이야기
생명평화경은 중중무진 연기의 법칙 즉 인드라망 사유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 경의 사유 방식으로 하나밖에 없는 내 생명, 목숨 걸고 지키려고 하는 내 생명,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유일한 존재인 내 생명의 진면목을 시각화한 것이 생명 평화 무늬이다. 불교적으로 보면 인격적 개념으로는 유아독존, 비로자나불, 본래부처, 본래면목, 논리적 개념으로는 존재의 실상, 법의 실상, 생명의 실상, 세계의 실상, 인드라망 존재의 실상을 단순화시켜 형상화했다고 할 법하다.
아래는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에 있는 생명 평화 무늬이다.
무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내 생명의 실상, 내 생명의 진면목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무늬를 통해 관념적이지 않고 사실적으로,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으로 그 실상을 짚어보는 것이다.
이 세상에 생명을 존재하게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위대하고 거룩한 일은 없다. 생명을 낳고 길러내는 일이야말로 신비요 기적이요 불가사의다.
아득히 저 멀리 태양이 없으면 과연 지금 여기 내 생명이 존재할 수 있을까. 태양과의 관계를 맺지 않는 한 그 어떤 생명도 존재할 수 없다. 태양에 의지해서만 지금 여기 내 생명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태양이 내 생명을 낳고 길러내고 있다. 태양은 내 생명의 의지처요 뿌리요, 모체요 어버이요, 부처요 하느님이다. 내 발 밑에 있는 미생물 하나하나들이 내 생명을 존재하게 하고 있다. 돌멩이도 풀 한 포기도, 밥 한 그릇도 굼벵이 한 마리도 모두가 내 생명을 존재하게 하는 거룩하고 신비한 존재이다. 마찬가지로 우주 삼라만상 낱낱 존재들도 영원에서 영원 끝까지 서로가 서로를 존재하게 하고 빛나게 하고 있다.
낱낱 존재들이 내 생명을 낳고 길러주는 거룩한 존재인만큼 당연히 어버이로, 부처님으로, 하느님으로, 이웃으로, 동반자로, 친구로 지극히 모시고 섬겨야 옳다. 섬김과 모심이 바로 생명을 존재하게 하는 사랑의 법칙 즉 법의 길을 실천하는 것이다. 생명의 법칙, 사랑의 법칙에 따라 생명의 모체들을 잘 모시고 섬기면 저절로 내 생명도, 그대의 생명도, 우리 모두의 생명도 빛나게 된다. 저절로 생명 평화의 삶, 생명 평화의 세상이 이루어진다. 얼마나 대단한가. 얼마나 눈부신가. 참으로 신비요, 기적이요, 불가사의라고밖에 달리 형언할 길이 없다.
생명 평화 무늬는 내가 누구인지, 그대가 누구인지를 눈뜨게 한다. 내 생명의 하느님, 내 생명의 부처님인 자연의 가치, 이웃의 가치, 그대의 가치를 알게 하고, 만나게 하고 함께 하게 한다. 동시에 모든 갈등과 대립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분리와 불평등의 벽을 넘어서는 탕탕무애의 길을 열어준다.
무늬의 실상을 자세히 살피고 따져 보면 그 안에 인생의 염원을 실현하게 하는 법의 길인 멋진 비결이 있다. 붓다와 성자들이 내놓은 인생 화두에 대한 해답, 그대가 찾고 있는 참된 길이 무늬 안에 잘 펼쳐져 있다. 무늬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인생 화두에 대한 영원한 현재의 길이며 영원한 현재의 안목이다.
4) 생명 평화의 삶과 공동체 마을
⑴ 생명 평화의 삶
① 단순 소박한 삶과 생명 평화 백대 서원
인드라망 세계관, 본래부처의 정신으로 볼 때 바람직한 삶을 한 마디로 개념화하면 단순 소박한 삶이다. 무늬의 세계관으로 보면 단순 소박한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잘 어울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과 잘 어울리는 삶, 이웃과 잘 어울리는 삶, 상대와 잘 어울리는 삶이 단순 소박한 삶이요 아름답고 향기롭고 평화로운 삶인 것이다. 자연과 잘 어울리려면 당연히 주거 공간을 단순 소박하게 하는 것이 맞다.
이웃과 상대와 잘 어울림도 마찬가지다. 어울림의 눈으로 오늘 우리들의 삶과 서울이란 도시를 생각해보자. 과연 자신의 삶이 잘 어울리는 삶인가? 서울이 자연과 어울리는 도시인가? 서울엔 아예 자연이 없다. 서울에 이웃집과 잘 어울리는 집이 있는가? 건물들과 건물들을 보라. 서울엔 잘 어울리는 이웃집이 없다. 대한민국의 모든 두뇌와 자본과 기술과 기계들을 다 동원해서 만든 것이 오늘의 서울인데 어울림을 철저하게 짓밟고 파괴하고 있다.
생각해보자. 자연, 이웃, 상대와 잘 어울리는 삶을 사는데도 과연 자연 생태적 문제, 사회양극화문제, 인간소외 문제가 발생하겠는가? 존재의 법칙, 사랑의 법칙에 따라 자연과 어울리고 이웃과 어울리고 상대와 어울리는 삶을 살면 생명 평화의 삶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것이 만고의 진리이다.
내용을 전체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더 구하고 이루고 얻고 소유하려는 구하는 마음 없이 주체적으로 존재의 법칙과 질서에 따르는 삶을 살면 그 생명이 안전하다. 주체적으로 존재의 질서와 조화로운 삶을 살면 그 삶이 평화롭다. 주체적으로 존재의 진리에 맞게 살면 그 삶이 자유롭다. 주체적으로 진리에 따라 알맞게 갖고 쓰며 사는 단순 소박한 삶을 살면 그 삶이 편안하고 아름답다. 자연과 어울리고 이웃과 어울리고 상대와 어울리는 단순 소박한 삶이야말로 인간이 살아야 할 가장 바람직한 삶인 것이다.
그 삶을 생활화, 대중화, 현대화하기 위해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헌신하고 또 헌신한다면 그대로 본래부처의 삶이요 도인의 삶이 아니고 무엇인가. 따라서 법의 길, 다르마의 길을 따르는 삶, 자리이타의 길을 걸어가는 삶인 단순 소박한 삶을 생활화, 대중화, 현대화하기 위해 생명 평화 백대 서원 절명상을 만들었다.
※ 백대서원 내용은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에 있다.
⑵ 생명 평화와 공동체 마을
① 왜 공동체인가
마을 공동체라고 하지 않고 굳이 공동체마을이라고 한 이유부터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무늬가 말해주고 있듯이 온 우주가 그물의 그물코처럼 유기적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다. 존재 하나 하나도 공동체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우주는 본래부터 공동체이다. 지금 여기 나도 본래부터 공동체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굳이 공동체 마을이라고 했다. 우주 자체, 존재 자체가 본래부터 이미 공동체라는 사실을 사실대로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주가 공동체이고 존재 자체가 공동체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확신하면 인간 중심, 자기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살지 않게 된다. 자연과 내가 본래 공동체인데 어떻게 인간 중심의 이기적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겠는가. 너와 내가 본래 공동체인데 어떻게 자기 중심의 이기적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겠는가. 우리가 인간 중심, 자기 중심의 이기적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우주와 존재가 본래부터 공동체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본래 공동체 세계요 존재이므로 중요한 것은 새롭게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사고하고 생활하는 것이다. 그럼 본래 공동체인데 다시 공동체 운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래공동체란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본래 공동체에 대한 인식과 신념으로 공동체 삶을 살고 싶은 뜻이 있는 사람들끼리라도 모여서 공동체 삶을 살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공동체 마음을 낸 사람들이 공동체적으로 잘 살면 또다른 많은 사람들도 공동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② 왜 마을인가
마을이야말로 생명평화의 삶을 구체적으로 바람직하게 실현할 수 있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법칙과 질서 즉 인드라망 세계관과 그 정신에 맞는 공동체적 삶을 실현할 수 있는 곳, 주민 스스로가 삶을 주체적이고 자립적이고 창조적으로 가꾸어갈 수 있는 곳, 어느 집도 고립되지 않고 이웃집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 누구도 적이 되지 않고 동반자로 살아야 하는 곳,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서로 도우며 함께 사는 곳이 마을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법칙과 존재의 질서인 인드라망 세계관이 사회로 형상화된 인류 문명의 원형이 마을이다. 21세기 도시 문명의 뿌리이기도 하고 우리 생명의 고향이기도 하다.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 마을의 적정한 규모는 작은 초등학교와 작은 중학교가 유지될 수 있는 정도이다. 아이들이 부모와 이웃, 자연과 함께 살면서 공부도 하고 사회의 삶도 배워갈 수 있는 규모를 생각해보면 현재 작은 면 단위 정도의 규모가 바람직할 것이다. 굳이 불교적으로 정리하면 사찰을 중심으로 한 사부대중 지역공동체 마을이라고 할 법하다.
우리가 마을 이야기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인생이라는 것이 내 인생을 내가 주체적이고 자립적이고 창조적으로 살아가야 그 삶이 의미도 있고 매력도 있다. 오늘날 도시에서는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주체적으로, 자립적으로,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과연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내가 살고싶은 집을 내 의지대로, 내 꿈대로 짓고 살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하다. 농촌 마을에서는 내가 주체적이고 자립적이고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많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집도 내 뜻대로 지을 수 있고, 먹는 것도 입는 것도, 기타의 여러 가지 삶들도 대부분 주체적으로, 자립적으로, 창조적으로 내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 도시 공간에서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농촌 마을에서는 주체적이고 자립적으로 개성있는 삶을 창조적으로 가꾸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농촌 마을이 매력적인 이유는 무수히 많다.
※참고 : 생명 평화의 꿈을 실현하는 공동체마을 산내를 꿈꾸며
그동안 귀농자 중심으로 활동을 해왔는데 개인과 단체가 성공하는 것도 필요하고 의미가 있다. 하지만 지역 사회를 만들어가는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웃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처럼 결국 지역사회의 불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산내라는 한 지역을 대안적 공동체 마을이 되도록 하려면 지역 주민들이 주체적이고 자립적일 때만 가능하다.
주민들이 산내라는 우리집을 만드는데에는 그 주체가 정부도, 국회의원도, 지자체도, 시의원도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인식과 자각이 있어야 한다. 주민이 주체적이고 자립적이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돈을 갖다 부어도 돈이 독이 될 위험성이 높다.
바깥에서 아무리 좋은 정책을 갖다주어도 별로 효과를 보기 어렵다. 첫째도 둘째도 중요한 것은 주민들 스스로가 주인 의식으로 주인답게 내가 또는 이웃과 함께 노력해서 만들겠다는 자립적 의지를 갖게 하는 일이 기본이 되지 않는 한 어떤 것을 갖고와도 실효를 거둘 수 없다. 이제까지의 농업 정책의 결과가 오늘의 농촌임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의 꿈인 생명 평화 공동체 마을을 실현하려면 아래와 같은 최소한의 기본 조건들이 필요하다.
첫째, 주민이 주체적이고 자립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내면민의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논의의 장이 있어야 한다. 그 곳에서 충분하게 논의하고 합의하여 자발적으로 실천되도록 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둘째, 주민 개개인의 안목과 자질과 역량을 길러내야 한다. 제일 먼저 삶의 주체인 자기 자신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올바른 판단과 선택, 책임과 권리의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 향상의 공부가 필요하다. 다음은 우리 지역, 우리 동네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한다. 산내 지역의 자연 생태, 역사 문화, 현재적 조건의 가치에 대해 잘 파악하고 알아야 우리 지역만의 개성을 살려내는 멋진 산내를 만들 수 있다.
셋째, 산내 면민의 민의를 자유롭게 발산시키기도 하고, 우리 지역 산내에 대한 활발한 정보 교환도 펼쳐질 수 있는 대화광장이 운영되어야 한다. 산내 지역의 모든 문제를 용해시켜 새로운 창조를 이끌어내기 위한 용광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인 대화 광장이 운영되어야 한다. 이런 기본을 전제로 공동체 마을 산내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생각을 간단하게 정리한다.
□ 공동체 마을 산내는 내가 살아가야 할 우리집임.
□ 산내에 살고 있는 주민은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 식구임.
□ 우리 집을 잘 만들고 우리 식구들이 잘 살아가려면 이웃사촌과 품앗이의 삶을 살아야함.
□ 우리집․우리 식구의 삶을 주민인 우리들이 주체적으로 자립적이며 창조적으로 함께 만들고 가꾸어야 함.
□ 주민의 삶과 공동체마을 산내가 안정적이고 희망적으로 가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건들을 만들어야 함.① 주민․지자체․귀농자․출향인사․전문가의 지혜와 마음을 온전히 반영하고 합의하는 논의의 장이 마련되어야 함.
② 우리집․우리식구의 삶의 문제를 투명하고 공평하고 활발하게 다루어갈 대화광장이 펼쳐져야 함.
③ 주민 개개인의 안목과 자질과 역량을 가꾸기 위한 마음밭 가는 일과 산내 지역에 대해 공부하는 마을사랑방대학이 운영되어야 함.
④ 주민 전체의 이익을 창출하는 마을기업을 운영해야 함.
⑤ 주민의 삶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마을재단을 설립해야 함.※개인․가족 단위에서 농심으로 농사짓고 사는 것과 동시에 우리 식구 산내 주민들이 더불어 함께 산내마을 우리 집을 잘 만들고 가꿔가는 일을 균형 있게 할 때 생명평화의 삶․생명평화의 마을이 실현될 수 있음.
2. 대승불교의 수행
1) 대승불교의 기본 사유 방식
붓다 그는 고통으로부터 해탈한 사람, 탐진치가 소멸되어 열반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는 어떻게 해탈했는가? 연기법(緣起法) 즉 서로 의지하고 서로 존재하게 하고 서로를 빛나게 하는 사랑의 법칙인 우주의 보편적 진리의 길을 발견하고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감으로써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고 궁극의 열반에 도달했다. 우리는 그의 가르침을 불교라고 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팔만 사천 법문이라고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다. 왜 그렇게 많은 것일까? 붓다의 가르침은 논리적 정합성을 갖는 단일한 체계의 이론서가 아니고 병에 따른 처방전이기 때문에 병의 수만큼이나 처방도 많다. 또는 그 때 그 때 사람의 수준이나 문제에 따른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이기 때문에 사람 수만큼 많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팔만 사천 법문을 종합하여 그 사유방식의 본질적 핵심을 간단하게 함축하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작자수(自作自受) ”이다. 풀어보면 “자신이 행위 하는 대로 그 삶이 이루어진다. 자신이 만든 것은 자신이 받는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체적이고 자립적이고 창조적으로 살아야 한다.”이다. 부처, 부모 그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죽으나 사나, 좋으나 궂으나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살아야 한다. 아무리 길이 잘 닦여져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주체적으로 가야만 그 길이 자신의 길이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여실지견(如實知見. 연기법 즉 사랑의 법칙을 아는 것 - 지혜의 길) 여실지견행(如實知見行. 사랑의 법칙대로 실천하는 것 - 자비의 길)”이다. 풀어보면 “현실적으로 직면한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 그리고 그 내용(사랑의 법칙)에 따라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라.
그러면 삶이 편안하고 자유롭다”이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직면한 존재의 실상을 떠나서는 어디에서도 길을 찾을 수 없다. 왜 그런가? 다른 데에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바로 지금 여기 직면한 존재의 실상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왜 그런가? 그 곳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를 좀 더 간추려 정리하면 하나는 주체적인 삶만이 그 삶이 참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 사실과 진실, 즉 직면한 실상에 근거하여 삶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를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면 언제나 그대가 직접(自歸依) 법의 길(法歸依)을 가면 그 길을 가는 만큼 해탈 열반이 바로 그대의 삶이 된다는 뜻이다.
2) 대승불교 수행의 기본 관점과 태도
대승불교 수행론의 기본 관점과 태도는 청매선사의 십무익송(十無益頌)을 참고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사료된다. 십무익송의 핵심은 보편적 진리에 입각한 올바른 방향과 길을 모르고 수행을 하면 아무리 용맹정진을 해도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방향을 잘못 잡을 경우 마치 가야 할 목적지가 동쪽인데도 불구하고 서쪽을 향하여 줄기차게 달려가는 것처럼 된다는 뜻이다.
다음은 십무익송이다.
○ 삶(마음)과 직결시켜 살피지 않으면 경전을 보아도 이익이 없다.
○ 바른 법에 대한 이해와 믿음에 근거하지 않으면 고행을 해도 이익이 없다.
○ 원인을 가볍게 여기고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기면 도를 탐구해도 이익이 없다.
○ 마음(삶)이 진실하지 않으면 교묘하게 말을 잘 해도 이익이 없다.
○ 존재의 본질이 실체없음(空)을 달관(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인정하고 받아들임)하지 않으면 좌선을 해도 이익이 없다.
○ 아만심을 극복하지 않으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다.
○ 스승이 될 덕이 없으면 대중을 모아도 이익이 없다.
○ 뱃속에 교만이 꽉 차 있으면 유식해도 이익이 없다.
○ 한평생 괴각으로 사는 사람은 대중과 함께 살아도 이익이 없다.
○ 안으로 참다운 덕이 없으면 밖으로 점잖은 행동을 해도 이익이 없다.
우선 참선 ․ 구도 ․ 고행 등에 관계된 것을 살펴 보는 것이 좋겠다.
“보편적 진리인 정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확신이 없으면 목숨 걸고 고행을 해도 이익이 없다. 존재의 본질이 실체 없음을 달관하지 않으면 밤낮으로 좌선을 해도 이익이 없다. 원인과 과정을 소홀히 하고 목적과 결과 만을 중요하게 여기면 용맹심으로 도를 구해도 이익이 없다.” 등 아주 중요한 내용들이다.
십무익송의 내용으로 보면 그냥 치열하게 참선을 한다고 해서, 고행을 한다고 해서, 도를 구한다고 해서 수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과 길, 즉 본래부처의 길을 따라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방향과 길이 없이 맹목적으로 수행을 하면 당사자의 의도나 바람과는 정반대로 소유심, 소구심, 소득심, 속효심이라는 고질병 또는 기복주의,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농후하다. 명심해야 할 일이다.
3) 대승불교 사유로 본 본래부처와 대승불교 수행론
오늘의 한국불교 현실은 비연기적 사고인 실체론적 불교관과 이분법적 실천론인 비중도적 수행론에 빠져 매우 혼란스럽다. 초기불교다, 대승불교다, 교학불교다, 참선불교다 하고 비연기적 사고로 서로를 분리시켜 선후, 경중, 우열을 따지는 왜곡된 불교관으로 인해 참불교, 정법불교가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이론(앎)과 실천, 수행과 일상의 삶, 수행과 깨달음, 자리행과 이타행,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 자기 완성과 사회 완성 등을 이분법적으로 분리시키는 비중도적인 양극단의 수행론으로 인해 수행자들의 회의와 갈등과 방황이 확대 심화되고 있다. 이에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교학불교와 참선불교, 앎과 실천, 수행과 일상의 삶, 수행과 깨달음, 자리행과 이타행,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 자기 완성과 사회 완성이 연기 중도적으로 통일되는 길을 열어가고자 본래부처와 대승불교 수행론을 모색해보려고 한다.
우선 불교가 어떤 가르침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불교란 고통에 찬 삶을 살아야 하는 나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내 생명은 어떤 존재인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류의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화두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는 가르침이다. 그 해답을 초기에는 유아독존, 화엄에서는 본래부처, 선가에선 본래면목이라고 했다. 잘 알다시피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은 본래부처론이다. 따라서 본래부처에 대해 좀 더 세밀하게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
본래부처에 담긴 뜻을 간추려 보면 ① 천하에 제일 귀한 존재임 ② 천하에 제일 주체적인 존재임 ③ 천하에 제일 원만구족한 존재임 ④ 천하에 제일 창조적인 존재임 ⑤ 천하에 제일 고마운 존재이다. 왜 그럴까?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지 확인해보자.
지금 여기 생명(본래부처)의 존재인 나와 그대는 천하의 그 무엇으로도 비교하거나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 누구, 그 무엇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지금 여기 나와 그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매우 주체적인 존재이다. 주체적으로 중생짓 하면 중생 되고, 부처짓 하면 부처 되는 매우 창조적인 존재이다. 온 우주의 그 무엇도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는데 본래부처인 그대와 나는 자유자재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원만구족한 존재이다.
온 우주의 낱낱 존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지금 여기 그대와 나, 그리고 우리들의 생명을 낳고 길러주는 너무나 고마운 존재이다. 이보다 더 거룩하고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존재는 어디에도 있지 않다. 우리들은 매 순간순간을 신비, 기적, 불가사의속에 살고 있다. 아니, 존재 자체가 신비, 기적, 불가사의이다. 어찌 대단하지 않겠는가. 매 순간순간 천하에 귀하고 고맙고 거룩한 존재들과 함께 하고 있으니 어찌 날마다 뿌듯하지 않겠는가.
매일매일 만나고 있는 존재 하나하나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그대와 나의 생명을 낳고 길러주는 너무나 귀하고 고맙고 대단한 존재들인데 어찌 지극히 모시고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견문각지에 만나는 존재 그 누구나 할 것 없이 본래부처이므로 지극히 잘 모시고 섬겨야 할 일이다. 바로 대자대비의 보살행이다. 당연하고 좋은 일이다. 너무나 본래부처다운 행주좌와라고 하겠다.
스스로 천하에 거룩하기 그지없는 원만구족한 본래부처인데 어찌 무한한 자부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스로 그 무엇 하나 부러울 것도 부족할 것도 없는 원만구족한 본래부처이므로 행주좌와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져야 마땅할 일이다. 바로 대무심행이다. 당연하고 멋진 일이다. 너무나 본래부처다운 행주좌와라고 하겠다.
본래부처론으로 보면 수행해서 다시 부처되려고 하는 이분법적인 어리석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이미 본래부처인데 다시 부처되려는 어리석은 짓을 해야 할 까닭이 없다. 절집에는 자신 또는 존재 자체가 부처임을 모르고 특별히 따로 부처를 찾아 천하를 헤매고 다니는 무지한 중생을 비유해서 “소를 타고 있으면서 다시 소를 찾는 사람과 같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일반 사회에도 정신없는 사람을 비유해서 “업은 아기 삼 년 찾는 사람과 같다”는 말이 전해온다. 본래부처인데 어디에 가서 다시 부처를 찾을 것이며, 본래부처인데 수행한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다시 부처가 이루어지겠는가? 한갓 부질없는 헛수고요 전도몽상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본래부처임을 알고 믿고 지금 당장 부처로 사는 것이다.
그럼 본래부처로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 초기에는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라고 했고 화엄불교에서는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했고, 선가에서는 행역선 좌역선(行亦禪坐亦禪) 또는 대무심(大無心)이라고 했다. 풀어 보면 “뭇 생명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내가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겠다.”, “뭇 생명들을 내 생명처럼 모시고 섬기는 삶에 나의 전 존재를 바치겠다.”, “움직일 때에도 대자비의 본래부처로 움직이고, 앉을 때에도 대자비의 본래부처로 앉는 대무심행의 삶을 사는데 전심전력하겠다.”이다.
본래부처인데 괜히 다시 부처를 구하고 찾고 이루려는 헛고생하지 말고 지금 당장 본래부처로 살 일이다. 자신의 온 존재를 다 바쳐 본래부처로 사는 것이 참 보살행이요 참 정진이다. 그야말로 행역선 좌역선(行亦禪坐亦禪)이다. 본래부처이니 지금 바로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본래부처답게 살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대승불교 수행론의 진면목이 이러함을 분명하게 직시할 일이다.
4) 하나의 길로 만나는 대승불교(본래부처)와 초기불교 수행론(팔정도)
대승불교 수행론의 기본은 본래부처와 동체대비행이다. 대승불교 수행자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과 길의 기본은 바로 본래부처와 보현행이다. 본래부처로 사는 것을 화엄에서는 보현행이라 했고 선가에서는 대무심행이라 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준 초기불교 수행론의 기본은 사성제 팔정도이다. 내용을 단순화시켜보면 직면한 일상의 삶을 법의 정신에 맞게 마음쓰고 말하고 행동하고 살면 그 자체가 해탈이요 열반의 삶이라는 것이다.
서두에 이야기 했던대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교학불교와 참선불교, 수행과 일상의 삶 등이 하나의 불교 수행으로 통일되는 길을 열어가는 차원에서 본래부처와 팔정도를 접목시켜 보려고 한다.
본래부처와 동체대비행에 대해서는 대승불교 수행론에서 이미 설명했으므로 여기에서는 팔정도에 대해서만 설명을 하겠다. 팔정도가 특별하고 여러 가지 어렵게 보이지만 내용을 사실적으로 간추려보면 오히려 매우 평범하고 현실적이다. 그러니까 팔정도라는 것이 다른게 아니고 바로 자신의 삼업활동을 법과 교법에 맞게 하라는 것이다.
즉 지금 당장 자신이 법에 맞게 마음을 쓰고 법에 맞게 말을 하고 법에 맞게 행동을 하고 사는 것이 팔정도요 초기불교의 기본수행이라는 의미이다. 같은 맥락에서 초기불교 시대에 사용해 온 법이라는 논리적 개념을 대승불교 시대에 사용해 온 본래부처라는 인격적 개념으로 바꾸어 본래부처와 팔정도 즉 본래부처와 삼업활동의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첫째가 정견(正見)이다. 지금 직면한 존재의 실상, 법의 실상인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는 견해가 바로 정견이다. 정견이 그대로 부처의 견해이다. 대부분 정견을 거친 다음 더욱 향상 발전해서 부처의 견해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견 자체가 부처의 견해이다. 그 밖에 부처의 견해가 따로 있지 않다. 만일 정견 말고 부처의 견해가 따로 있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전도몽상의 견해일 뿐이다.
수행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지금 여기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매 순간순간마다 직면한 존재의 실상인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는 견해를 바르게 갈고 다듬고 적용시켜 실천하는 것이 정견 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인 것이다.
둘째는 정사유(正思惟)이다. 정견의 경우처럼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거듭 사유 음미하는 것이 바로 정사유요, 그대로 부처의 사유이다.
셋째는 정어(正語)이다. 마찬가지로 본래부처답게 말하는 것, 즉 여어(如語) 실어(實語) 불이어(不異語) 불광어자(不誑語者)로 사는 것이 바로 정어요, 그대로 부처의 정어이다.
넷째는 정업(正業)이다. 본래부처답게 행동하는 것이 바로 정업이요, 그대로 부처의 행위이다.
다섯째는 정명(正命)이다. 본래부처답게 의식주 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정명이요, 그대로 부처의 생활이다.
여섯째는 정정진(正精進)이다. 본래부처답게 살려고 줄기차게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정정진이요, 그대로 부처의 정정진이다.
일곱째는 정념(正念)이다. 본래부처임을 항상 잊지 않고 분명하게 알아차림이 바로 정념이요, 그대로 부처의 정념이다.
여덟째는 정정(正定)이다. 본래부처에 대한 이해와 확신이 언제나 흔들림 없이 확고부동함이 바로 정정이요, 그대로 부처의 정정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래부처의 삶인 팔정도를 더 단순화시키면 한 마디로 칠불통게(七佛通偈)의 내용이 전부라고 해도 괜찮다고 본다. “죽을 힘을 다해 나쁜 짓 하지 않고, 지극정성을 다해 좋은 일을 실천한다. 그리고 나쁜 일 하지 않고 좋은 일을 하는 그 마음을 오염되지 않고 청정하게 하는 것, 그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불교 수행론이 천 가지 만 가지 같지만 실상은 어떤 불교 수행론도 칠불통게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칠불통게 내용대로 일상의 삶을 가꾸어간다면 그 삶이 본래부처의 삶이다. 그 삶이 행주좌와에 온전히 젖어들어 무르익을 경우 그것을 완성된 깨달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거듭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본래부처가 있어야 할 곳과 때는 언제, 어디일까? 바로 지금 여기 현장이다. 본래부처가 행동하고 살아야 할 곳과 대상은 누구일까? 바로 두 발을 딛고 있는 그 자리요, 만나고 있는 그 사람이다. 따라서 현장이 도량이요, 만나는 사람사람이 본래부처이므로 매 순간, 매 상황마다 만나는 그 사람을 본래부처로 잘 모시고 섬기는 것이 참된 수행이요 본래부처다운 행동이다. 팔정도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하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교학불교와 참선불교, 수행과 일상의 삶이 저절로 하나의 길로 통일된다.
서로 분리시키고 서로 다르다고 우열을 다투어야 할 까닭이 어디에도 있지 않다. 중생의 병을 치유하는데 적절한 처방이라면 그 이름이 초기불교면 어떻고 대승불교면 어떤가. 참선불교라고 특별대접하고 교학불교라고 푸대접하는 것이 과연 불교적이겠는가. 수행 따로, 일상의 삶 따로라면 그것이 선방에 있든 법당에 있든, 산중에 있든 도심에 있든 참된 불교 수행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직하게 물어보고 겸손하게 돌아볼 일이다.
3. 맺음글
생명 평화 운동 진영에서 사용하는 언어, 대승불교 수행론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서로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보면 ‘우주의 존재 법칙인 보편적 진리 즉 사랑의 법칙에 따라 살면 고통으로부터 해탈한다. 또는 행복한 삶이 이루어진다. 사랑의 법칙에 따라 가정과 사회를 가꾸고 운영하면 화목한 가정, 평화로운 세상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므로 굳이 결론짓는다면 대승불교 수행론을 현대화, 대중화, 일상화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생명 평화 운동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한국 불교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빛나게 하고자 한다면 하루 빨리 적극적으로 나서서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생명 평화 운동을 펼쳐야 마땅하다고 본다.
도법스님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상임대표
첫댓글 도법스님 오랜만이네요! 어쩜 하나도 안늙으셨네요.
스님들이 잘 안늙으시더라구요. 얼마전 유튜브에서 용타스님 보고 깜놀.
30년전 뵈었을때 그대로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