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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나무는 천년이 지나도 그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을 추위속에서 살아도 그 향기를 잃지 않으며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바탕이 남아 있고
버들은 백 번 겪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항장곡)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우신지)
위의 시는 조선조의 대학자 퇴계 이황 선생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가슴으로 읊었다.
그럼 이 시를 쓴 사람은 누굴까?
퇴계 선생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을만큼
이 시를 쓴 사람은 분명 뛰어난 위인임에 틀림없다.
위의 시를 지은 사람은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혼란과 격동의 시기의
한 복판에서 살았던 조선 최고의 문인 상촌 신흠 선생이다.
상촌 신흠 선생이 누구냐고? 그런 분을 위해 일단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다음 시를 더 소개한다.
산촌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묻헸에라.
시비(柴扉)를 여지마라 날 찾을 이 뉘 이시리
밤중만 일편명월(一片明月)이 긔 벗인가 하노라.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시이다.
물론 이 시도 상촌 신흠 선생이 쓴 시이다.
상촌 신흠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뛰어난 문장력으로 17세기 초반에
명나라에 보내는 문서를 제작한 인물이며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 제작에 참여했다.
정주학자로 이름이 높아 이정구, 장유, 이식 과 함께
한문학의 태두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조 개국공신인 신숭겸의 후손으로
조선 중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그의 아들이 선조 임금의 딸과 결혼하여
왕과 사돈지간이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왕실과 맺은 혼인 때문에
늘 근심하며 조심하였던 인물이다.
왕의 딸(공주)을 며느리로 맞이할 때
집이 좁고 누추하여 주위에서
관례에 따라 수선할 것을 청하였음에도
집이 훌륭하지는 못하지만
예(禮)를 행하기에는 충분하다며
끝내 기둥 하나도 바꾸지 않은
청렴한 정치인이다.
조선시대 4대 문장가 申欽(1566-1628)
겪어보니 病에도 때가 있다. 得病有時요, 治病有時다. 한 편의 詩도 마찬가지다.
得詩有時요, 解詩有時다. 나는 기업체 회장 사무실이나 유서 깊은 집안을 방문하였을 때
벽에 걸려 있는 한문 액자나 병풍 글씨의 내용을 유심히 보는 습관이 있다.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취향이 여기에 나타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내용이 어려워 해석을 못하거나 出典을 알지 못해서 당황했던 적도 많다. 교보문고를 세운
故 신용호 회장을 생전인 7년 전쯤에 처음 만났을 때였다. 이 양반이 식사 도중에
詩 한 구절을 이야기했다.
'동천년노항장곡(桐 千 年 老 恒 藏 曲 )이요,
매일생한불매향(梅 一 生 寒 不 賣 香 )이라'는 구절이 있다.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있고,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는 뜻이다.
이 구절을 애송하는 신회장을 보고 필자는 속으로 '이 양반이 대단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는 사실을 짐작하였다. 사업하는 사람은 간과 쓸개를 버리고 다녀야 할 텐데 어찌 이렇게
자존심 강한 詩를 좋아할까 하는 의문도 아울러 들었다.
그러다가 몇 달 후에 어느 한정식 집에 갔을 때 그 집의 병풍에 이 두 구절이
똑같이 쓰여 있는 사실을 확인했를 뿐 그 작자가 누구인지,
나머지 구절이 어떻게 되는지는 몰랐다. 득시(得詩)는 했지만 해시(解詩)를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에 그 작자와 나머지 구절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자는 조선조의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 ~ 1628)이었다.
조선 시대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일 만큼 심금을 울리는 문장을 썼던 것이다.
'월도천휴여본질( 月 到 千 虧 餘 本 質 ),
유경백별우신지( 柳 經 百 別 又 新 枝 )'가
나머지 두 구절이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 있고,
버드나무는 백 번을 껶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는 의미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 4개월 전에 쓴 휘호가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백범도 좋아했던 내용이 바로 상촌이 지은 나머지 두 구절이다
.....조용헌 살롱에서
조선의 선비들은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를 벽에 붙여 놓고 봄을 기다렸다고 한다.
동지(冬至 양력12월22일) 부터 세기 시작하여 81일간이 구구(九九)에 해당한다.
흰 매화꽃 봉오리 81개를 그려놓고, 매일 한봉오리씩 붉은 색을 칠해서 81일째가 되면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의 81개의 백매(白梅)는 모두 홍매(紅梅)로 변하게 된다.
이때가 3월12일 무렵이 된다고 합니다 .
한문학의 태두 상촌 신흠(象村 申欽)
=한춘섭 광주권문화협의회 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조선 시대 한문학의 태두, 신흠(申欽, 1566~1628) 선생.
본관 평산(平山). 자 경숙(敬叔). 호 현헌(玄軒)·경당(敬堂)·백졸(百拙)·남고(南皐)·
현옹(玄翁)·상촌(象村)·방옹(放翁)이라 하였다.
시호 문정(文貞).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좌참찬 송기수(宋麒壽)의 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목숨을 살리고 대신 순절한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다.
어머니 송씨(宋氏)가 가슴에 큰 별이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튿날 공을 낳았는데,
이마가 넓고 귀가 컸으며, 눈은 샛별처럼 빛나고, 오른쪽 뺨에 탄환만한 붉은 사마귀가 있었다.
1585년 진사·생원시에 합격하고 다음해에 별시문과에 급제했으나,
대사간이던 외삼촌 송응개(宋應漑)가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공박하려는 것을 말렸더니,
그때 정권을 쥔 동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 경원의 훈도를 거쳐 광주향교의 훈도를
지내는 등 높은 관직을 받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재도 찰방(良才道察訪)으로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했고, 이어서 도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이 되었다.
정철은 공에게 삼남(三南)의 기무(機務)를 모두 맡기니, 영리한 아전과 법규에 익숙한 자
수십 명을 불러서 장부와 문서를 나누어 주어 일제히 읽게 하였다. 또한 군사와 백성들에게
불편한 일을 글로 올리게 하였는데 문서가 번잡하였고 하소연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공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묻고 손으로 판결하니 명쾌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599년에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됨과 함께
동부승지에 오르고, 형조, 이조, 예조, 병조 참의와 대사간을 역임했다. 1601년 가선대부
예문관 제학에 이어 예조·병조참판,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도승지, 예문관 제학,
병조참판, 도승지를 차례로 지냈다. 1604년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판윤이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는 선조의 적자(嫡子)이며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반역을 도모했다는 구실로 소북파의
우두머리이자 당시의 영의정인 유영경을 사사(賜死)하는 등 소북파를 모조리 몰아냈다.
이어서 선조의 계비(繼妃)이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와 그의 친정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몰아낼 궁리를 하던 중, 때마침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인 이른바 ‘박응서(朴應犀)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 사건에 연루된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등은 출세를 할 수 없는 서얼출신으로서 사회적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중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대북파는 이들이 김제남과 반역을 도모했다고 허위 자백케 하여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 교동도에 위리안치 하고, 강화부사 정항(鄭沆)을 시켜 소사(燒死)하게
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이 1613년 계축년에 일어났으므로
계축화옥(癸丑禍獄=계축옥사)이라 한다.
이 때 신흠은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파직되어 김포 선영 밑에서 살았는데, 한 칸 초가에서 편안히 거처하며 집 이름을
‘하루암(何陋菴)’이라 써 붙이고 유유자적한 삶의 자세로 일관하였다.
3년 후에 춘천으로 유배를 당하여 그곳에서도 신흠은 초가집을 짓고 ‘방암(放菴)’이라 하였다.
이러한 삶 속에서도 소박한 선비의 모습을 작품 속에 담아 낸 것이 있으니,
“서까래 기나 짧으나 기둥이 기우나 틀어지나 / 두어칸 모옥(茅屋)이 적음을 비웃지 말라
/ 어즈버 만산나월(萬山裸月)이 다 내 것인가 하노라.”하였다.
그로부터 5년 뒤, 인조반정(1623)으로,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신흠의 운명은 바뀌어 인조 조정의 첫 이조판서가 되고, 홍문관,
예문관의 으뜸 자리에 오르니, 이른바 양관대제학을 겸한 막강한 자리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연달아 맡았다. 정묘호란(1627) 때에는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여
전주로 피란하였으며, 9월 62세 나이로 영의정에 오른 후 질병을 무릅쓰고 오랑캐 사신을
접견하고 귀가하다가 쓰러져 수레에 실려 집에 돌아와서 별세하니 모든 사람들이 탄식하기를
“어찌할거나 어찌할거나 어진 정승이 죽었으니 나라 일도 끝장이다.”하였고, 세자가 직접
상가에 와서 조문하였다.
‘연려실기술’에 “집이 가난하여 간간이 꾸어 먹어도 끼니를 잇지 못하였으며, 거처하는
집과 자는 방이 기울고 허물어져서 집안사람들이 수리하기를 청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라 일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집은 수리하여 무엇하느냐.’ 하였고, 죽을 때에도 의복이
한 벌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1651년(효종2)에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고, 문집으로 ‘상촌집’이 있다.
‘영창대군 신도비문과 묘지명’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묘소는 부인 전의 이씨와 함께
광주 퇴촌면 영동리 산 12-1번지에 있으며, 경기도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묘비는 1628년(인조 6)에 건립되었는데 뒷면에 새겨진 비문은 그가 직접 지은 것이다.
1699년(숙종 25)에 건립된 신도비는 총 높이 335㎝의 대형이면서도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비례 감각과 세부적으로 생동감 있는 조각 표현 등이 뛰어난 작품이다.
신흠은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문명을 떨쳤고,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선조의 신망이 두터웠다. 정주(程朱)학자로 이름이 높아, 월사 이정구(李廷龜), 계곡 장유(張維), 택당 이식(李植)과 함께 한문학의 태두로 손꼽히고, 조선 4대 문장가로도 칭송된다. 또한 임진왜란 전후로 폭증한 대명 외교문서의 작성, 시문 정리, 각종 의례 문서 작성에 참여하는 등 문운(文運)의 진흥에 크게 이바지 했다. 이정구는 공의 신도비문에서 “붓을 잡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생각하지 않고 휘둘러대는 듯하면서도 전중(典重)한 글이 노련하게 작성되면서 한 점 하자도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문장이 시(詩)보다 훌륭하다고 사람들이 말하였다. 그런데 시를 보면 더욱 맑고 깨끗하여 아취가 있었으며, 남의 흉내를 일체 내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하였으니, 이런 측면에서는 역시 시가 문장보다 우월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도비문)” 신흠은, 그의 청빈한 마음을 담아 이런 시조를 남기기도 했다.
산촌(山村)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무쳐셰라
/ 산골마을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묻혔구나
시비(柴扉)를 여지 마라, 날 찾즈리 뉘 이시리
/ 사립문 열지마라. 이렇게 묻혀 사는 나를 찾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밤즁만 일편명월(一片明月)이 긔 벗인가 하노라
/ 다만 방중에 나타난 한 조각 밝은 달 그것만이 내 벗인가 하노라
‘청구영언’에 실린 시조 한 편이다. 산촌에 은거하면서 청정한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는 은사(隱士)의 심경을 간결하게 묘사하고 있다.
공은 1627년(인조5) 9월 4일, 영의정에 오른다. 하지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 오른
신흠의 어린 시절은 불우하였다. 일곱 살 때 어머니와 아버지를 연달아 여의고,
외가에서 외할아버지 송기수의 보살핌과 가르침을 받으며 쓸쓸하게 성장하였다.
송기수가 여러 손자들을 가르치면서 ‘춘(春)’자를 내주면서 글을 짓게 하니 공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지만물 가운데 봄이 맏이다.”고 하자 송기수가 감탄하며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공은 비록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친가는 물론 외가와 처가 모두 명문세가였고,
훗날 아들 익성이 선조 임금의 사위가 되기까지 하였으며, 마침내는 최고의 관직에 까지
올랐으니 막강한 부와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사로운 욕
심을 내지 아니하여 양식을 빌려 먹어야 했고, 그나마도 자주 끼니를 거를 만큼
곤궁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흠잡을 데 없는 그의 가문을 당대 제일로 칭송하였다.
신흠의 신도비는 좌의정인 월사 이정구가 짓고, 영의정 심열(沈悅)이 글씨를 썼으며,
이조판서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썼는데 이런 내용이 전한다
“(생략)지성으로 우애하며 친족과 화목하게 지냈다. 홀몸이 된 누님과 30년 동안 같이
살면서 어미처럼 섬겼는데, 집안에 시끄러운 말이 전혀 없었다. 스스로 왕실과 혼인을
맺은 일 때문에 늘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큰 며느리를 맞을 때 집이 좁고 누추하여
측근에서 관례에 따라 수선할 것을 청했는데, 공이 말하기를 ‘집이 훌륭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예를 행하기는 충분하다’며 끝내 기둥하나도 바꾸지 않았다.
(중략) 빈곤한 생활을 태연히 견디면서 즐기고 좋아하는 욕심이 전혀 없었으며,
일찍이 집안 일에 마음을 쓴 일이 없었다. 산나물에 껍질만 벗긴 조밥을 먹어도
괴로워하지 않았고,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를 싫어하였기에, 문을 닫고 앉아있으면
쓸쓸하기가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환란을 만나면 지조와 행실을 더욱 굳게 지켰고,
귀하고 높은 자리에서는 가득찬 데 따르는 화를 더욱 경계하였다.”
신흠은 아들 둘과 딸 다섯을 두었다. 장남 익성은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져 부총관에 올랐고,
차남 익전(翊全)은 도승지에 이르렀다. 손자로는 대사간 면(冕), 함경도 도사 최(最),
이조판서 정(晸)이 있어, 후세가 매우 번창하였다.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항장곡)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달은 천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은 남아 있고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열우신지) 버드나무는 백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
=상촌 신흠 선생의 야언(野言)
첫댓글 ㅋㅋ 고방쌤 밑에 올린시 梅일생 이 오타로 每일생이 됐군요 ㅎㅎㅎ 그런데 너무 길어서 읽기 힘들어요 .
질정 고맙습니다! 길다는 지적은 ㅎㅎ 앞으로 유념하겠습니다.
공부 잘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상촌 신흠(象村 申欽) 선생의 한시 자료를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학산샘 고맙습니다!
걈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