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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들의 재미있는 일화와 역사★
단종(1441 - 1457) < 위로 > 어린 세자 : 1441년 (세종 23년) 비극의 주인공으로 결말을 맺게될 홍위(단종)가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도 아들을 낳자마자 눈을 감았다. 그의 할아버지 세종은 그를 유난히도 귀여워 하였고 1448년 세종이 목숨이 얼마남지 판단되었을때 그를 왕세손 으로 책봉하였다.
중종 (1488 - 1544) 선조 (1552 - 1608) < 위로 > 세자된 하성군 :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순화세자가 죽은지 몇 년이 지났지만 후사가 없었다. 나날이 수척해가는 명종을 보며 조정의 대신을 비롯하여 인순왕후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명종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세자책봉을 서둘러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세자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중종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중종과 장경왕후 사이의 인종, 중종과 문정왕후 윤씨 사이의 명종, 그러면 하성군 (선조)는 누구인가? 중종은 2명의 왕후와 5명의 후궁을 두었다. 5명의 후궁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은 대윤과 소윤의 다툼에 화를 면하지 못하고 모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중종과 창빈안씨 사이의 덕흥군만이 화를 면하였다. 덕흥군은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3째아들 하성군은 총명함과 덕을 쌓아서 명종이 그를 총애하고 마침내 세자로 책봉한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하성군은 세자에 오르게된다. 영조 (1694 - 1776) 헌종 (1827 - 1849) < 위로 > 철종 (1831 - 1863) < 위로 > 고종 (1852 - 1919) < 위로 > 순종 (1874 - 1926) < 위로 >
태조 (1335 - 1408) 출 생 : 1355년 이자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대담하였으며, 특히 활을 잘 쏘아 20세가 되기 전에 명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성격은 과묵하고 책임감이 누구보다도 강하였고 부하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정종(1357 - 1419) < 위로 >
4불가론 :
1)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치는것은 불가능함,
2)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함,
3) 요동으로 군사를 일으키면 왜구가 침공해 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
4) 장마철이라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며 군사들이 전염병에 시달릴 염려가 있어 불가함.)
*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도와 가장 많은 공을 세운 방원이 왕세자 책봉에 불만이 많았고 정도전의 세력이 커가는 것을 지켜볼수만은 없었다. 그리하여 난을 일으켜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함.(1차 왕자의 난)
* 박포라는 사람과 함께 이방원의 형 방간이 왕위에 욕심을 내어 군사를 일으켜 방원의 세력을 축출하고 왕위를 얻으려 하다가 싸움에서 패하자 유배를 떠나고 박포라는 사람은 사형을 당함.(2차 왕자의 난)
* 왕자의 난을 계기로 태조 이성계는 옥새도 내주지 않고 강원도 오대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종 이방원이 그를 설득하여 옥새를 얻고 궁궐에서 지내도록 많은 차사를 보냈지만 그곳으로 갔던 차사마다 소식이 끊김.(심부름을 가도 사람이 오지 않을 때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
* 결국에는 이방원을 임금으로 인정하고 무학대사와 함께 불교에 정진하며 1408년에 세상을 떠난다.
1) 최영 : 태조 이성계와는 다르게 명문 가문 출신으로 반원세력에 앞장서는 뛰어난 명장이었다. 최영은 이성계와는 다르게 군사의 성격도 보병위주였으며, 이성계가 개혁파임에도 불구하고 훈구파의 성격이 강했다.(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이성계와의 관계가 갈등의 최고조에 이르렀고 이성계를 먼저 제거하려고 하지만 결국 먼저 죽음에 이른다.
2) 정몽주 :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을 세운 역성혁명론자라면 정몽주는 고려왕조를 유지하면서 혼란함을 벗어나고자 개혁을 주장하는 고려개혁론자였다. 하지만 이성계의 세력에 의하여 선죽교에서 죽음을 당한다.
3) 정도전 : 보잘것없는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총명하고 영리하였다. 끊임없는 공부를 통하여 실력을 쌓은 후 이성계의 명성을 듣고 이성계와의 관계가 시작된다. 위화도 회군에 이성계가 성공하자 이성계를 반대하는 일파를 몰아내기 위하여 힘을 기울였고, 조선이 건국되자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하여 법전을 편찬하였고 서울을 옮기도록 건의하였으며, 유교 사상을 확립시켰으며 그밖에 이성계를 위하여 많은일을 하다가 1차 왕자의 난을 통하여 이방원에게 죽는다.
4) 무학대사 : 일개 장군인 이성계에게 '당신도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준 사람으로 출신성분이 보잘것 없다는 이유로 불도에서 따돌림을 당하자 방랑생활을 하다가 이성계를 만나서 이성계의 서까래 꿈을 해몽하여 이성계가 후에 왕이 될 것을 장담하였다고 함.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이성계가 서울을 옮길때 한양(지금서울)으로 옮길것을 주장함.
태종(1367 - 1422) < 위로 >
세종(1397 - 1450) < 위로 >
민본정치 - 백성의 살림살이 파악을 위하여 '경차관'을 임명하여 파견 (개혁) 억울한 일 해결을 위하여 궁성 문 앞에 신문고 설치
왕군강화 - 국가의 중요한 기관인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라고 명하고 문하부까지 합함 (입법과 행정이 한곳으로 합쳐지니 임금의 권한이 강해짐) 조정 대신들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노비변정도감' 이란 노비들의 호적을 관리하는 기관을 설치 정종때 옮겨졌던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시 천도함. 대외정책 - 왜인들의 범죄가 잦아지자 '왜인범죄논결법'이라는 책을 만들어 다스림.
문화정책 - 책과 학문의 소중함을 알고 학자들을 귀하게 여겼으며 기술 교육을 위하여 10학을 설치 하였으며 나라의 일을 맡을 관리들을 능력과 실력 위주로 등용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절에 매여있던 노비를 공노비로 바꾸고 처녀로 중이 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고려시대에 나쁜점이 많았던 연등제와 초파일을 없앰과 동시에 일반 백성들 사이에 유행하던 참위설(음양오행설 등) 등 개인적인 신앙을 국가 신앙으로 이끌어 유교를 숭상하게 만듦.
문종(1414 - 1512) < 위로 >
정치 - 끊임없이 노략질하는 왜구때문에 백성들의 피해가 적지 않아 이종무를 시켜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고 유동성있는 외교 정책을 펴나갔다. 김종서에게 명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정벌을 위하여 4군, 6진 개척을 하였다.
경제 - 조선초 공신들을 위주로한 토지의 집중현상이 보이자 '전제상정소'라는 중요한 기관을 두고 전제와 조세의 방법을 의논하였고 합리적으로 토지를 조절하고 백성의 조세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나라의 재정이 확보되었다. 농민들이 농사를 과학적으로 짓도록 하기 위해 깊은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농사에 관한 책을 편찬하도록 명하였고 그결과 '농사직설'이라는 책이 편찬됨.
사회 - '속육전', '경제육전등록' 등 법전편찬으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으며 삼강행실도를 통하여 유교의 으뜸이 되는 사상을 백성들에게 실천하도록 권장하였다.
문화 - 집현전의 학자들과 함께 피땀흘려가며 한글을 창제하여 우리말을 쓰도록 하였다. 측우기, 자격루, 혼천의 등 과학의 발달에 노력하였다. 이는 농업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일이었다. 박연을 시켜 궁중의 아악을 정리하도록 하였으며 조선왕조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황 희 - 18년 동안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노비나 첩의 소생들의 천역 면제 등 뛰어난 업적을 쌓아 칭송이 자자하였다.
맹사성 - 성격이 부드럽고 섬세하여 악공을 가르치거나 과거 응시자들의 학문적, 문화적 소양을 점검하였다. 세종의 신임을 받아 좌의정이 되었으며 평소 소타기를 좋아했다.
이종무 - 세종이 즉위한후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세종의 명을받아 대마도를 정벌 하였으며
김종서 - 용감하게 북쪽을 개척하여 종성, 회령, 경원, 경흥 등 4진을 설치하고 다시 두만강 근처에 온성진과 부령진을 두었다. 이것이 6진이다. 이로 인하여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으며 정치적으로 그의 입지가 커졌다.
장영실 - 천민의 신분으로 태어난 그는 손재주가 매우 뛰어나 세종의 부름을 받고 궁중 기술자가 되었다. 중국에서 새로운 문물을 배우며 천문기기에 매력을 느낀 장영실은 돌아와서 천문기구 등을 많들었으며 그는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이자 기술자였다.
세조(1427 - 1468) < 위로 >
예종(1450 - 1469) < 위로 >
한명회 - 칠삭동이로 태어나 인물이 형편없어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자랐으며 과거에도 번번히 낙방하여 30세가 넘도록 할 일이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였으나 한명회의 친구 권남의 천거로 수양대군에게 소개되었고 그후 수양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오랫동안 세도를 누리면서 1487년 생을 마감한다.
권 남 - 한명회와 친구사이였던 권남은 과거에 세번 응시하여 세번모두 장원 급제하여 '삼장장원'으로 이름을 날렸던 뛰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출세의 길이 열리지 않아서 세상을 원망하였으나 수양대군의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그 능력이 인정되어 한명회와 함께 부를 채우며 5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신숙주 - 세조와 동갑내기로서 이해력이 뛰어난 학자이다. 1452년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갈때 동행하였는데 여기서 수양대군의 끈질긴 노력으로 친분을 맺게되어 비록 역사적으로 변하기 쉬운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기는 하였지만 '국조보감'을 편찬 하였으며 고전과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였고 특히 외교와 국방에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서 세조의 오른팔이라고 불리울 정도였다.
성종(1457 - 1494) < 위로 >
연산군 (1476 - 1506) < 위로 >
인종 (1515 - 1545) < 위로 >
명종 (1534 - 1567) < 위로 > 명종의 즉위 :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문정왕후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토록 바래왔던 모든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12세에 왕이된 명종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자연히 대왕대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문정왕후가 권력을 손에 쥐자 윤원로, 윤원형 형제는 제세상을 만난것처럼 활개를 치고 다녔다.
광해군 (1575 - 1641) < 위로 >
인조 (1595 - 1649) < 위로 >
효종 (1619 - 1659) < 위로 >
현종 (1641 - 1674) < 위로 >
숙종 (1661 - 1720) < 위로 >
경종 (1688 - 1724) < 위로 >
정조 (1752 - 1800) < 위로 >
01. 태종
1. 직업정신 투철한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거수 일투족을 다 기록해서
태종이 걷다 헛발질한 것도 적었다.
태종이 그건 제발 지워달라, 창피하다 애원까지 했는데도 사관은 끝까지 "왕이 길을 걷다 헛발질하다.
헛발질한 것을 적지 말라고 말한 것은적지 말라 명하셨다"라고적었다.
2. 하도 사관이 쫓아다녀서 못 쫓아오게 멀리까지 사냥을 나갔는데
사관이 거기까지 말 타고 쫓아와 사냥기록을 적었다고 한다.
3. 태종은 아들 양녕대군이 너무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자
속이 상해 밤새 울어 목이 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점은 양녕대군의 아들인 이혜는
아버지인 양녕대군보다 더 많은 사고를 쳐 양녕대군의 속을 썩혔고
결국 왕자의 아들의 직위인 '군'의 작위가 깎여 서산군에서 서산윤으로 강등당했다.
결국 이혜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자살시도를 하였고 이틀 뒤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혜는 사람을 때려 죽이라고 시키기도 하였고 직접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으며 남의 첩을 빼앗기도 하고 시전에서 종친들과 패싸움을 하였고
과격한 놀이판을 벌이다 놀이 중 사람이 죽어나가게 하기도 하였다.
실록에서는 이혜가 망가진 원인을 사랑했던 첩을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난 후에 울화병이 생겨 이리 되었다고 한다.)
02. 세종
1. 세종대왕은 좋아하던 후궁에게 신하들 몰래 따로 불러서 말없이
귤 하나를 쑥~ 내밀어준 얘기도 있다.
(그 당시 귤이 귀한 것이었다.)
2. 친경한다고, 소 끌고 밭 갈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 배고픔을 못 견뎌
밭 갈던 소를 때려잡아서 국 끓여 먹은 적도...
3. 명재상 황희는 청백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었다.
임금이 사람을 붙여 철저하게 감시하고 너무도 기분 나쁘게 점검하는 바람에 "내참 더러워서 뇌물 먹지 않으리라" 결심한 케이스다.
4. 훈민정음 반포식을 축하하는 잔치 행사에는 집현전 학사 절반이 참석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살인적인 과중한 업무와 임금의 요구사항에 시달리다 못 견뎌 병석에 누운 탓이었다.
성군의 캐치프레이즈는 신하가 고달파야 백성이 편안하다'였다.
5. 세종은 부하들을 휘몰아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아침 조회격인 새벽 4시 상참에서부터 과업 달성이 부진한 부하들을 닦달하였다.
밤낮으로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의 경우 임금 곁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살 것 같아, 스스로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고 손을 들고 나섰다.
정인지는 임금이 너무 독촉하고 소위 '갈궈대는' 바람에
모친 3년상을 핑계로 상소를 올리고 낙향하려 했으나,
임금은 법령까지 바꿔서 그를 다시 붙잡아다 오히려 일을 더 시켰다.
6. 양녕대군이 평안도를 유람하게 되어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제발 여색을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몰래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만일 ?양녕대군이 기생을 가까이 하거든 즉시 그 기생을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내라"라고 하였다.
양녕은 세종과의 약속도 있고 하여 가는 곳 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고 근신하였으나, 가 평안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그만 양녕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세의 미인이 나타났다.
양녕은 그날로 동침하고 귀신도 모르리라 자신했다.
그래서 시를 지어 하룻밤 풋사랑을 읊기를 "아무리 달이 밝다하나 우리 두 사람의 베게를 들여다 보진 못할 것이다.
그런데 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라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정주 수령은 이 기생을 역마에 태워서 서울로 보냈다.
세종이 기생에게 명하기를 "너는 양녕대군이 읊은 시를 노래로 불러 익혀두라" 하였다.
양녕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유유히 서울로 돌아와 세종을 알현하였다.
세종 : 잘 다녀오셨습니까.
제가 신신당부한 말씀을 잘 지켜주셨는지요?
양녕 : 물론입니다. 어찌 어명을 어기겠습니까?
한 번도 여색을 가까이 한 일 없습니다.
세종 :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제가 형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고자 가무를 준비하였습니다.
양녕은 기생이 나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가사를 들어보니 자신이 지은 시구가 아닌가.
깜짝 놀란 양녕은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세종은 웃으며 뜰에 내려와 형님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그날 밤 그 기생을 양녕댁에 보냈다.
7. 나라에 큰 일이 있어,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이었다.
태종은 특별히 세종에게는 삼시 세끼 고기를 챙겨먹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충녕(세종)이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03. 문종
1.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관운장과 같은 풍모를 냈었고, 얼굴 또한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궁을 정리하는데 타다 남은 왕의 어진이 한 장 나왔다.
수염이 길고, 풍채도 당당하여 신하들은 인종의 어진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사람만은 수염이 길다는 말만 듣고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어진을 조사하다가 보니 어진 구석에 문종대왕의 어진이라는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2. 학식, 외모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단 하나... 건강
04. 세조
1. 술 먹고 신하 팔 꼬집고 신하한테 "너도 나 꼬집어라"라고 시키자
신하는 세조를 꼬집었다.
그 뒤 자기 혼자 열 받아서 혼내주려다 그냥 넘어갔다.
세조의 팔을 꼬집은 것은 신숙주다.
정확히 말하면 꼬집은 게 아니라 팔씨름 하다가 세조의 팔을 두 손으로 넘겼다. 그래서 세조가 신숙주를 죽이려고 했다가, 술 취한 것을 감안하여 넘어갔다.
2. 세조는 후궁이 단 한 명뿐이고 평생 중전인 정희왕후와 금슬이 좋았는데, 국사를 논할 때도, 국가의 모든 행사에도 꼭 정희왕후를 대동했으며
사냥을 할 때도 둘이 나란히 말을 타고 사냥에 나갔다.
05. 성종
1. 성종은 후추 중개무역으로 돈을 벌기 위해 후추 씨앗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결국 후추는 구하지 못 하고 주변국에 성종이 후추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 계속해서 조공으로 후추가 들어오는 바람에 창고에 후추가 가득히 쌓여, 예쁜 비단 주머니에 담아 조정 관리들에게 다 하사하였다.
06. 연산군
1. 성종과 연산군이 오랜만에 밖에 바람 쐬러 나와서 성종이
"융아, 좋지 않으냐?"하니 연산군이 소떼를 보며 "아바마마 저 송아지도 어미 소가 있는데 저는 왜 어미가 없습니까"라고 말했다.
2. 또 다른 야사에서는 연산이 동궁이었을 때 어느 날 성종에게 거리에서 나가 놀고 싶다고 하여 성종이 허락하였다.
저녁에 동궁이 궁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오늘은 밖에서 무엇을 보았느냐?"하고 묻자 연산은 "구경할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데 그 어미 소가 울면 송아지도 따라 우니 그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여
성종이 가여워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짐.
3. 공부하는 걸 엄청 싫어하여, 왕자를 훈육하는 학자들이 엄청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매일 꾸중 듣고 야단맞아,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모두 죽여버렸다.
4. 춤을 잘 췄다고 한다.
5. 모후인 폐비 윤씨와 고려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얼굴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관공서에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수집하게 한 일도 있었다.
6. 엄청난 꽃미남이었다고 한다.
07. 중종
1. 자식 사랑이 남달라서
공주, 옹주랑 왕자들이 오랜만에 문안 오면 눈물을 흘렸다.
오면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2. 또 중종은 동궁 전에서 불이 나자 맨발로 달려나와 훗날의 인종을 애타게 부르며 울었다.
3. 또한 효정옹주의 남편(부마)이 바람을 피우고 다니자 철거지악이었던 질투를 하지 않는다고 딸을 꾸짖은 적도 있었다.
결국 효정옹주가 남편의 구박을 견디지 못 하고 죽자 직접 부마를 잡아와 친국을 하기도 했다.
08. 인종
1. 인종은 모후인 장경왕후가 자신을 낳고 7일만에 죽자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손에 자란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어린 인종을 끈임 없이 못살게 굴었다.
하루는 밤에 쥐의 꼬리에 불을 붙이고 인종이 잠을 자고 있는 궁 안에 들여 보냈다.
인종이 창문을 보니 문정왕후가 웃으며 빨리 불이 타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빈궁만 내보내고 자신은 문정왕후에게 효를 행하기 위해 불 속에서 죽으려 했다.
빈궁과 인종이 어쩔 수 없이 불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그때,
밖에서 중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종은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게는 효가 되지만 중종에게는 불효가 되므로 곧바로 나왔다.
그 후 인종은 불을 지른 장본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중종에게 고하지 않았다.
09. 명종
1.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가 있거라 하고 노래 잘 부르는 내관이랑 둘이서
내관은 노래 부르게 하고 명종은 그에 맞게 춤추며 2인조 가수 못지 않게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2. 꾀병 부려서 총애하는 내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3. 위의 내관은 동일인물로 남자이다.
4. 내시와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던 명종은 몸이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경연을 취소하고 내관들과 놀러 다니기 일쑤였다.
10. 선조
1. 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을 하는데, 의주에서 어느 백성에게 생선이 올려진 상을 접대 받았다.
그 생선이 너무 맛있어서 인조가 생선의 이름을 묻자, 백성은 '묵'이라 대답하였다.
선조는 생선의 이름이 그 맛에 비해 별볼일 없다 생각하여 '은어'라 명했다.
나중에 궁에 돌아와 그 생선을 먹었으나... 맛이 전 같이 않아
'도로 묵'이라 하게 하였는데,
바로 여기서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11. 광해군
1. 선조가 세자를 가리기 위해 여러 왕자를 시험하였는데 "반찬을 만드는 것 중 무엇이 제일이냐?"라는 질문에 광해군이 "소금이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그 이유를 묻자 "여러 가지 맛을 조화시키려면 소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라고 답하여 그 현명함을 인정받았다.
이에 선조가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느냐?"라고 묻자,
광해군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가장 애통하옵니다."라고 답하였다.
12. 효종
1. 나르시즘에 빠져,
항상 거울을 볼 땐 스스로 만족에 차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2. 일부일처제를 지켰다고 한다.
13. 숙종
1. 신하들이 따뜻한 온돌방에서 꾸벅꾸벅 졸자
온돌을 빼버리고 얼음장에서 일하게 하였다.
14. 인조
1. 자신의 몸과 봉림대군의 몸이 아프자,
소현세자의 아내가 저주를 내려서 아프다고 하여
사약을 내리고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
소현세자를 죽일 때 11살과 6살이던 아들들도 다 죽이고
임신했던 세자빈까지 죽였다.
15. 영조
1. 연애소설을 좋아하여
가끔 자신의 글에서도 소설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성품이 근검하여
백성들에게 사치를 금하라는 뜻으로 금주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2. 영조의 어진에 나와있는
쌍꺼풀지고 길쭉한 눈과 오뚝한 코에 조그마한 입술은
조선의 남자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미인상이었다.
왕실에서는 이런 외모를 천하다 하여 기피하였으나,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양반 사대부가 출신이 아닌
무수리 출신에서 정1품 빈까지 신분상승 한 것을 감안할 때,
숙빈 최씨는 굉장한 미인이지 않았을까.
3. 영조가 왕위에 등극하기 전,
연잉군이었던 시절 달성 서씨 집안의 규수(정성왕후)를 아내로 맞이하여
첫날밤을 치를 때의 일이다.
영조가 아내의 손을 잡고 "손이 참으로 곱다."면서 칭찬을 하자,
연잉군 부인이 무심코 "궂은 일을 해본 적이 없어 그렇다"고 했더니
영조가 그날로 부인을 소박하며 그 다음부터는 멀리하였다.
아마,
무수리로 고생했던 어머니의 거친 손과 발을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4.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간택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지 않자,
그 이유를 물으니
"자식이 어찌 아버지의 존함이 쓰인 방석을 깔고 앉겠습니까." 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또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드냐"고 묻자,
강원도에서 온 규수가 대관령고개라 답하고
경상도에서 온 규수가 추풍령고개라 답하였다.
헌데 김규수는 보릿고개라 대답하였다.
보릿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아니한 때
세 끼, 아니 두 끼, 심지어 한 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릿고개인데
김규수가 넘기 힘든 고개가 바로 보릿고개라 하니 얼마나 명답인가!
다음으로 꽃 중에 제일인 꽃을 묻자,
김규수는 목화 꽃이 제일이라 답하였다.
이유를 물으니,
"목화 꽃이 다른 꽃들보다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지만,
핀 연후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였다.
16. 정조
1. 정조가 말하길,
"매양 취침하기 전에 두 발바닥의 가운데를 마주 문질러 비비면
기운이 절로 퍼진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 보았는데,
처음에는 힘이 드는 듯 했으나 오래도록 계속 했더니 신통한 효험이 있다."
2. 연애소설을 비롯한 소설을 무척 싫어하여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서고에 있던 모든 소설을 불태웠다.
또한 숙직을 하던 집현전 학자들이 몰래 연애소설을 읽고 있다 들켜서
정조에게 혼이 났고 벼슬을 삭탈했다.
그들은 정조에게 다시는 소설을 안 보겠다는 반성문을 쓰고
나서야 벼슬길을 다시 열어주었다.
3. 영조는 근검하여 백성이 먹을 쌀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정조는 개인적으로 술을 너무 좋아해서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금주령을 없앴다.
4. 공부 못하는 신하한테 공부하라고 끈임없이 시키며,
숙제를 내고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망신을 주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신하에게 술을 강요하여 기절할 때까지 마시게 하고,
활을 못 쏘는 신하에게 끈임 없이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5. 술을 무진장 좋아하여,
정약용에게 필통에 술 한가득 부어 원샷! 하기를 강요하여
정약용은 술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필통에 술 붓기라면,
요즘 사발에 소주를 들이붓는 거와 맞먹는다고 한다.
6. 정조 임금이 정약용한테 높은 벼슬주려고 시험 열었는데
정약용이 1등을 못하고 맨날 3등만 해서 결국 화나서
"경은 그거밖에 못하오?"하면서 베개를 던졌다.
17. 헌종
1. 헌종이 그렇게 미남이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여색을 즐기는 왕 때문에 궁궐 내 용모가 예쁘다고 하는
궁녀들은 거의 승은을 입었다고 한다.
(덕분에 후궁첩지도 아무나 내리지 못했음.
딸을 낳은 궁인 김씨도 첩지를 받지 못했다.)
왕 자체가 너무 미남이라 젊은 궁인들이 참 많이 유혹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부터 가진 잦은 성관계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죽기 직전에는 피가래까지 토하며 고생하다가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한다.
궁녀들이 유혹을 할 정도였으니 엄청난 미남이 아니었나 한다.
2. 헌종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 아프게 여겨
한 신하에게 늘 물었는데,
"진전에 모신 수용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헌종이 거울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18. 고종
1. 고종황제가 행차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어찌 저런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귀빈들이 하느냐" 고 안타까워 했다.
2. 명성황후가 죽고 나서 끝까지 재혼을 하지 않았지만
아끼던 후궁이 있었는데 명성황후가 부리던 상궁이었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그녀를 곁에 둔 이유가
못생겨서 고종이 쳐다도 안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곁에 두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녀는 명성황후와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조선왕조 역대王들의 사망원인
조선왕조 역대王들의 사망원인 (아들 태종과의 마찰로 인한 홧병도 그 원인 중 하나)
능은 건원릉 동구릉안에 있다. * 제2대 정종 오복(五福;수,부,강녕,유호덕,고종명)을 다 갖추고 63세에승하 (상왕으로 물러난 후 편안하게 살면서 가장 많은 자식을 둔 왕임)
조선역대왕중 유일하게 북한에 있는 후릉(경기도 판문군 영정리) (고기를 매우 즐긴 왕.. 식단에 항상 고기가 있었음,
그래서 종기가 많이 났음) (그리고 여러 부인을 둔 만큼 성병도 있었다고 함)
소형왕후 심씨와 합장함으로써 조선최초 합장릉, 능은 영릉 * 제5대 문종 등창으로 39세에 승하, 아버지 세종을 닮아 몸이 허약했음, 능은 현릉 영월 청령포에서 사사됨 숙종때 단종으로 복위, 능은 장릉 재궁이 불에태워지는 수모를 격는다. * 제10대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로 유배 강화도에서 괴질로 31세졸
아들 넷은 강화도에서 사사됨 묘는, 서울 방학동 * 제11대 중종 거머리로 등창을 치료하다,울화병과 노환으로 57세에 승하 재위 39년, 능은 정릉
* 제12대 인종 이질로 31세승하(문정왕후에 의한 독살설도 있다.) 하늘이 낳은 효자로 알려져 있으며, 후사가없다, 능은 효릉 * 제13대 명종 지나친 방사로 34세에 승하 문정왕후의 아들로 마마보이 로 성장 하였으며, 무수리출신 장씨와지나친 방사로 인한 졸지에 승하 어머니 문정왕후한테 회초리도 맞았다고 함, 능은 강릉 * 제14대 선조 임진왜란 이후 중풍으로 57세에 승하 영조 다음으로 41년간재위, 능은 목릉 * 제15대 광해 가장 불운한 왕,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후 유배 그 뒤 십수년을 더 살다가 제주도에서 67세로 졸 ( 유배 생활 중에 시중 드는 사람이 '영감'
이라고 불러도 꿋꿋하게 견뎠다 함)
이때 담배가 일본에서 들어옴 * 제16대 인조 청나라에게 항복한 후, 홧병 걸림 신하들 손아귀에서 울화병으로 55세에 승하 아들 소현세자 를 독살한(?) 왕으로 보고있으며, 재위중 늘 그것때문에 신하들에게 시달려 왔으며 능은: 장릉 능은 영릉
* 제18대 현종 청 황제에게 벌금형을 받은임금으로 학질과 과로로 34세에 승하'하멜'에의해 조선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능은 숭능
* 제19대 숙종 어릴적천연두후유증, 노인병, 등창 심한 당파 싸음으로인한 스트레스로 60세에 승하(인현왕후, 장희빈과의 문제도 있었을듯)
풍류를 즐겼던 숙종은 봄이면 3000 후궁을 거니리고 큰잔치 별러다한다, 능은 명릉 인정에 끌려 세자를 데려오자 갑자기 경종의 하초잡아당겨
성기능을 잃어 내시와 같았다 한다. 능은 의릉
* 제21대 영조 장수하였으며 치매로 83세에승하 세자를 폐위하여 서인을 강등 한후 뒤주속에 가둬 굶어죽게 한 일과늙어 노망 부린것이 오점으로 남았으며, 일본에서 '조엄'이 고구마를 처음가져왔다. 능은 원릉
* 제22대 정조 개혁적인 군주, 사도세자(장조)의 아들 등창으로 49세에 승하 (독살설도 있지만, 최근 자료로 보아 등창으로 승하한게 맞다고 봄)
안경을 처음쓴임금. 능은 건릉 안동김씨 세도가 시작되었다. 능은 인릉
* 제24대 헌종 23세에 술과여자로 보내다 폐결핵으로 승하. 능은 경릉 * 제25대 철종 세도정치에 의해 졸지에 왕이 된 강화도령 33세 폐결핵으로 승하 강화도를 그리워 하며, 안동김씨 그늘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채 살았다. 능은 예릉 67세에승하. 능은 홍릉 1970년 74세의 나이로 서거 왕비인 이방자 여사는
자선 활동을 하다가 1989년 서거 능은 홍유릉 내의 영원(합장묘) |